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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대로"
[민수기 14장 26-30절]
예전에 제가 궁평항이라는 곳에 갔는데
요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배를 자세히 본 적이 없었는데
가만 보니까 요트마다
방향을 조절하는 키가 다양했습니다.
어떤 배는 평범한 나무 색인데,
다른 배는 화려한 은색이었습니다.
배의 키는 다르지만 그 역할은 같죠.
배의 방향 키는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풍파를 만난다면
방향키를 잘 돌려야지만
잘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부품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이 키 하나가 고장나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우리의 삶에도 방향 키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말입니다.
옛 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 ‘천 냥’은
대략 6천만 원 정도 된다고 해요.
적은 돈이 아니죠.
그런데 이걸 말 한 마디로 갚는다고 해요.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거죠.
이와 관련하여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3장 4절 5절 우리 한번 읽어볼까요?
야고보서 3:4-5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이 말은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움직일 수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광풍에 밀려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배를,
방향키 하나만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게
그게 바로 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한 백정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명의 양반이 고기 한 근씩을 사려고
박만득이 하는 정육점에 들렀습니다.
먼저 온 양반이 이렇게 말하죠.
“야 만득아 고기 한 그릇만 다오.”
그러자 만득이는 “네”하고는
딱 한 근을 잘라서 주었습니다.
반면 옆에 있던 다른 양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 서방 고기 한 근만 주시오.”
그러자 만득이는 누가 봐도
한 근이 넘는 양의 고기를
두 번째 양반분에게 드렸죠.
그러니까 앞에 말했던 양반이 화가 나서
말하는 겁니다.
“야 이놈아 너 나한테는 이 정도만 주고,
왜 똑같이 주문한 저 사람에겐
더 많이 주는 거냐?”
그러자 박만득은 이러헥 답했습니다.
“아유 손님,
방금 앞선 고기는 만득이가 자른 거고,
두 번째는 박 서방이 자른 거라 다른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의 핵심이 뭡니까?
우리의 말이 정말 중요하다는 거예요.
말 한마디에 따라서
고기의 양이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가 내뱉는 이 한마디가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예요.
우리 본문으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한 1년 정도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은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이들이 디베랴라는 곳에 갔을 때
먹을 게 없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내려 주십니다.
목이 마르다고 하자,
반석을 쳐서 물을 내주셨어요.
또 덥다 그러니까 구름 기둥 보내셔서
앞길을 인도해 주시고
또 밤에는 춥다고 하자 불기둥 보내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가데스라는 광야였습니다.
이들이 여기에서 잠시 머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정탐을 위해서였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지파별로
1명씩의 리더를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40일 동안의 정탐이 끝나고
정탐꾼들이 무거운 포도송이를
어깨에 이고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흥분의 도가니탕 아니었겠어요?
‘우리가 갈 땅이
저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구나!’
‘이제까지 광야에서 먹어보지 못했던 과일이
기다리고 있구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정탐꾼들의 평가를 들었어요.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겨울 냉기와 같았습니다.
뭐라고 얘기합니까?
“우리가 가나안 땅을 가보니까
진짜 젖과 꿀이 흐르더이다.
이 포도나무에 열매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땅에 사는 들은 네피림 후손인데
아낙 자손이고 거대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더이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메뚜기 콤플렉스’라고도 합니다.
10명이 이구동성으로 악평을 내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하기에 이릅니다.
나중에는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따져 물었어요.
“우리를 애굽에서 죽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죽이냐?”
그게 오늘 본문 14장 앞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가 이해되십니까?
어떻게 이집트에서 구원 받았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저런 식으로 말한 걸까요?
또 광야에서 베푸신 은총도 모두 잊어버리고
한순간에 돌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이유는 말 한마디에 있었어요.
잔잔한 호숫가 돌멩이를 던지면 어떻게 됩니까?
‘퐁당’하고 떨어지면서 파장이 일어나죠.
처음에는 동심원이 조그맣습니다.
돌멩이 크기밖에 안 돼요.
근데 이게 점점 가면서 커져 나가죠.
우리의 말 한마디의 영향력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기 시작하면
처음엔 나만 아는 크기의 동심원이 생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자나면서 이게 점점 커집니다.
“이것도 없네. 저것도 없네.
이것도 힘드네. 저것도 힘드네.
다 힘들다.”
이렇게 돼버리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의 입술의 말을 지키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악평하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의 약속도 소용없어.
안 될 일이야.’ 라며 말입니다.
반면에 이 말씀을 기억하면 어떻게 될까요?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고백하는 거예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해요.
“저 땅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고
저 땅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니
우리가 저 땅을 차지할 겁니다!”
“저들은 우리의 밥밖에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불가능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에베소서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읽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우리가 내뱉는 말에 깨끗한 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말 더러운 말도 있습니다.
더러운 말은 우리의 덕을
무너뜨릴 수 있는 말이 된다는 거예요.
한 번은 이제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제 앞으로 오토바이 하나가
끼어들었습니다.
당시 저희 아내가 임신하고 있을 때여서
저도 모르게 경적을 울렸어요.
그 사람이 이렇게 쳐다보고
막 뭐라뭐라하고 가더라고요.
저도 내리려다가 팔에 있는
문신을 보고 참았습니다.
그래도 기분은 나빴습니다.
며칠 뒤에 제가 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습니다.
받으러 내려갔더니
배달원의 실루엣이 익숙했어요.
팔뚝을 봤는데 그날 봤던 문신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만약 창문을 내리고
그분에게 심한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때 알았어요.
‘함부로 화내면 안 되는구나.’
모르는 사람한테
화내지 않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건 가까운 사람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우리도 모르게
내뱉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아내가 만약에 실수로
냄비를 태웠다고 합시다.
거기에 대고
“당신은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었어?”
라고 다그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음날부터 찬밥에 김치만 먹고
출근해야 할지도 몰라요.
만약에 그러지 않고
“여보 많이 놀랐지?
안 그래도 냄비 새로 사려고 했는데 잘 됐다.”
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다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야고보서 1장 19절을 볼까요?
야고보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해야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그런 분들 계시잖아요.
자기 말이 다 맞다는 사람이요.
설령 다 맞는 말이어도
때로는 참아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가 뭡니까?
듣기는 두 배로 하고,
말하기는 절반으로 줄이라는 것
아니겠어요?
김창옥 교수님 혹시 아십니까?
그분의 아버지는 굉장히 무뚝뚝했고
말씀이 없으셨데요.
그런데 술만 먹으면 한 3시간을
쉬지 않고 말하셨답니다.
김창옥 교수님이 강의로 유명해졌을 때
어느 순간 아버지의 옛날 모습이 떠올랐대요.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에
어떻게 6남매를 키우셨을까?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쪽 귀가 잘 안 들리니까
제대로 말할 수도 없으니
얼마나 그게 불편했을까?'
그러니 그 마음속에는 울분이 있었을 거고,
그 울분 때문에 힘드니까
술로 그것을 채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말을 할 때
너무도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부 사이에도 그렇지만
친구 관계도 그렇고요,
우리 교우 관계도 그렇습니다.
상황을 상황으로만 보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상대방을 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너머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입의 말은 달라질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자녀를 키우시는 분들은
이게 너무 어려워요.
어느 분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 딸을 둔 분이었습니다.
이분이 이제 심리 상담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점점 이제 사춘기가 오는지
어릴 때와 좀 다르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예쁘게 얘기했는데
점점 말투가 버릇이 없고
한숨을 퍽퍽 쉰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상담가가 녹음기를 가져다가
딸과의 대화를 들어보라고 처방했어요.
3개월이 지난 다음에
이분이 상담가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딸과 대화를 녹음을 한 뒤에
들어보고 깜짝 놀랐대요.
녹음된 내용 속에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딸의 말투와
똑같이 닮은 말투가
하나 더 있더랍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바로 본인이죠.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너 왜 그렇게 말해?”
알고 보니까 그 말이
자기의 말이었던 겁니다.
미국 심리학자 버넷은
‘부모의 언어 습관이 아이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고 했습니다.
동시에 아이의 자존감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죠.
아이에게
“너는 정말 잘될 거야.
하나님께서 널 쓰실 거야.”
이런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고
“야 너 왜 또 그래?
니가 하는 일 늘 그렇지 뭐.”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삶은
당연히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말이 사람을 살려내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가 믿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너무 중요해요.
우리가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 소리를 듣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행할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겠네”하자 어떻게 하셨어요?
“알겠어. 내가 너 여기서 다 죽일 거야.”
그래서 20세 이상의 된 모든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었죠.
아직 사리분별을 못한다고
여겨지는 20세 이하의 아이들과
갈렙과 여호수아 이 사람들만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었던 거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길 원한다면
오늘 우리의 말을 지키길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함께 시편 19편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 보면
우리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말은 생각과 연결된다는 거예요.
어떤 생각을 품었냐에 따라서
그 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 앞에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게 해달라는 이 기도가
오늘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둘째 아들이
엄마와 같이 과자를 먹었습니다.
엄마가 새로운 과자 봉지를 딱 뜯었어요.
그러니까 둘째 아들이 과자를 향해서
손을 뻗었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어요.
“과자 진짜 맛있겠다. 그렇지?”
그러자 아들이 “음! 맛있는데?”
라고 했어요.
아직 과자를 입에 넣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얘기했던 거예요.
제가 너무 웃었습니다.
아이들의 이 엉뚱한 매력 속에서
제가 근데 발견한 게 하나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믿음으로 산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아직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는 거죠.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인생은 풍요로울 거야.
내가 가는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거야.
내가 너와 함께할 거니까
넌 이 광야에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어.”
이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까요?
“음! 그대로 될 거야!
그래서 너무 신나.
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지.
내가 가는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거야.”
믿음이 우리 안에 있으면
고백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고백이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아지길 소망합니다.
한 남자가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보니까
50달러 있는 거예요.
그걸로 헐리우드로 향했습니다.
배우로 성공해서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펴드려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현실은 막막했어요.
햄버거 하나를 사서 세 토막을 냈습니다.
아침 한 토막, 점심 한 토막,
저녁 한 토막 먹었어요.
이런 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힘든 노숙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잘 곳도 마땅치 않으니까
벤치에서 자기 일쑤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시 일어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할리우드가 보이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어요.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나는 좋은 배우다.
정말로 정말로 좋은 배우다.
그리고 나는 최고의 감독들과 함께
다양한 영화에 출연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종이에 뭔가를 적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출연료=1천만 달러”
그가 이렇게 매일 밤마다
자신의 입의 말을 바꿨더니
그는 정말로 몇 년 뒤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 바로 영화 <마스크>의 주인공인
짐 캐리입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세상 사람도 말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꿔가는데,
하물며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삶을 누리고 있는지 질문해보십시오.
우리 마지막으로
시편 141편 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41: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입의 열매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입술을 지킴으로
우리 삶이 더 풍성해지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장로 임직 감사 예배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참 감사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위기가 있었고,
코로나라는 어려움도 만났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붙잡아야 할 말씀이 떠올랐어요.
우리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담임목사님께서 받으신 말씀이죠.
시편 81:10
내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입을 열기만 하면 돼요.
우리 모두 믿음의 입을 크게 엽시다.
다른 입은 열지 말고 믿음의 입만 엽시다.
불평의 입, 불만의 입, 험담의 입,
좌절과 실패와 절망의 입이 아니라
믿음의 입을 크게 열 때
주님께서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이 믿음의 입을 크게 열며
찬양으로 주께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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