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예술가 백남준을 만나다 -
박 원명화
봄이 무르익은 오월이다. 꽃이 피고 진자리마다 연두 잎이 무성하다. 계절은 바다의 너울로, 강가의 안개로, 바람의 속삭임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이런 계절에 좋은 사람들과 어딘가를 간다는 건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이다. 차가 막히면 짜증나고 오랫동안 시달리면 피곤이 겹치겠지만 서울 가까이 있다하니 서둘 것도 급할 것도 없는 길, 출렁이는 녹색물결을 눈에 넣으며 찾아 간곳은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이다.
희대의 예술가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내가 아는 상식이라고는 ‘비디오아티스트’ 라는 것뿐. 그가 펼치는 행위예술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더해졌다. 이상한 설렘 속에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 정면에 TV모니터가 달린 사람 형태의 조형물이 있다. ‘한 세기에 한사람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예술가’의 작품이란 게 왠지 싱겁다.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그려 놓은 것 같다.
안내자를 따라 왼쪽 제1전시실로 들어섰다. 야릇한 상상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다. 샤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어우러진 기묘한 형상들이 순간순간 나타난다. 본래도 장난기가 많다던 그의 악동기질이 발동해 무지한 내게 최면을 건 것일까. 그것들이 눈으로 꽂히는 순간, 멀쩡하던 내 시야가 갑자기 흐릿한가 싶더니 정신까지 몽롱하다.
숲 사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TV를 가리키며 해설자가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을 하는 데도 내 귀에는 웅웅 소리뿐, 먹먹한 느낌이다. 상相에 집착하다보니 어지럽고 고정관념을 맞춰보려니 눈과 귀가 고달픈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서양의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위대한 예술가의 상상력을 내 좁은 식견으로 어찌 감당할 수 있었으랴. 소화력이 따르지 못하니 체할 수밖에.
칭기즈칸의 복원을 보는 순간 바늘로 손끝을 딴 듯 정신이 번쩍 든다. 찌그러진 자전거를 타고 바람과 빛을 맞으며 우주 계곡 능선을 휘돌아 숨차게 달려온 한 사나이가 잠시 숨을 고르듯 거기에 우뚝 멈춰서 있다. 마치 야생의 새 한 마리가 어딘가에 갇혀 있다가 이제 막 보이지 않는 틈새를 통해 날아 든 것처럼, 죽은 기계에 그 자신의 호흡을 붙여 놓았다. 죽었다던 그가 멀쩡하게 거기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예수처럼 거기에 부활한 것이다. 그는 본시 유목민 기질을 타고 난 사나이가 아니던가.
희대의 예술가답게 그의 일생은 상상을 초월한다. 10대에 일본의 도쿄예술학교에서 음악과 미학을 공부한다. 1963년 부터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미술 사상 처음으로 비디오 전시를 감행, 퐁피두 센터 전시회를 비롯해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 세계인의 주목을 박기 시작한다. 이후 파리, 취리히, 바젤 등에서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1993년 마침내 세계3대 비엔날레의 하나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을 받는다. 국내에서는 88년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를 기념하는 대형 비디오 설치 작품 <다다익선多多益善>을 선보인다. 그밖에도 미국 프랫인스티튜트 미술명에박사, 교토상, 금관문화훈장, 독일의 시사경제지 <카피탈>에서 세계 100대 작가 중 5개 작가로 선정 되는 등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白南準’은 예술가로서의 위상은 물론 한국의 이미지를 드높인다.
세상이 말하는 예술가 백남준의 상상력은 어디가 끝인지 도모지 알 수가 없다. 라디오가 모여 로봇이 되고 TV가모여 거북선이 되었다. ‘신은 죽었다’ 는 니체의 언어들이 한자리에 모여 춤을 추고 산속의 부처가 TV앞에 묵상하고 있다. 서양을 동양으로 표현했으며, 서구문명을 불교사상으로 시각화 하여 ‘한국의’이미지를 세계에 심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첨단기술을 전위예술로 승화하여 미래의 과학을 미리 엿볼 수 있게 했다. 소문 그대로 그는 희대의 예술가임이 분명하다.
그는 웃음과 재미를 동시에 주는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이다. 마치 놀이를 즐기는 악동 같다. 작품마다 위트와 유모가 넘쳐난다. 동양인가 하면 서양이고 서양인가 하면 어느덧 동양에 와있다. 그렇지만 그 무질 속에도 인연이나 필연 같은 맥락이 함께 한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그의 예술혼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부활하고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게 있다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그의 예술작품들을 외국인들은 정신없이 사들이고 있다는데, 정작 우리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는 처지라니…. 그의 예술성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백남준 아트센터>에 있는 작품은 소량에 불과하다고.
그는 비디오아트를 통해 한국인의 천지인 사상과 원초적 생명력을 구현하고 있다. 부서진 피아노, 끊어진 테이프, 녹슨 철재들이 뒤엉킨 무질 서속에서도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혼란의 정체성속에서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다’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더 없이 부럽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자유를 갈망한다. ‘때론 나도 미치고 싶다’ 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내 안에 가두어둔 허물을 훌훌 벗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마음뿐, 쇠사슬처럼 꽁꽁 묶인 생활의 고정관념을 깨트릴 용기가 나에겐 없다.
예술가는 역시 다르다. 그의 상상력은 거침이 없다. 모든 것에 날개를 달아주고 훨훨 날게 한다. 그가 전하는 예술세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기한 설치미술의 흐름을 맛보았다는 게 내게는 충격이고 행복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한바탕 탐방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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