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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2,3-16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곧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신앙생활의 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그분이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고, 깨우쳐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듣고 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파견한 분에 속한 이가 우리의 신원이요, 파견한 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복음전파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입니다.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엘스버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바닥 영성>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바오로의 회심은 바닥으로 엎어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서 있다가 바닥으로 엎어지는 것, 높은 곳에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이것이 회심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고만장한 사람은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으면 좀처럼 회개하지 않습니다.
바닥이란 실패로 치면 한두 번의 실패가 아니라 거듭된 실패요, 내려가다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감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닥까지 내려감은 더 이상 내려갈 것은 없고, 이제 잘만 하면 올라가는 것만 남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모두가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포기한 곧 주저앉아버린 사람은 올라가지 않고, 빛 곧 희망을 본 사람만 올라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두 번째 단계는 빛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빛을 보기 전에 그리고 빛을 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뒤집기입니다.
주저앉은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안 되지만 엎어진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안 됩니다.
엎어진 상태로 계속 있지 않고 뒤집어야 하늘을 보고, 바닥에서 빛을 보게 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도 엎어지며 큰 빛을 봅니다.
아니 실은 큰 빛을 보기 전에 큰 빛에 의해 쓰러지고
그런 다음 큰 빛에 의해 일어서고 올라갈 것입니다.
여기서 큰 빛이란 하느님한테 한 대 크게 얻어맞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지금 바닥에 엎어진 것이 실은 내 실수나 인간의 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한테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임을 크게 깨닫는 겁니다.
갑자기 큰 빛을 보게 되면 일시적으로 눈이 부시고 멀게 되듯
큰 빛은 먼저 우리 눈을 멀게도 하지만 보게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빛은 세상 것을 보게 하지만, 큰 빛은 세상 것을 보는 눈을 멀게 한 다음 하늘을 보게 합니다.
그러니까 순서에 따라 회개의 단계를 정리하면.
- 엎어져 바닥까지 내려가기
- 바닥에서 뒤집기
- 바닥에서 희미하게 하늘을 보기
- 엎어진 것도, 눈이 먼 것도 큰 빛에 의한 것임을 크게 깨닫기(바오로 경우, 눈에서 비늘이 떨어짐)
- 이제 큰 빛과 새로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땅에서 살기
이런 회개의 상태를 오늘 독서는 하나니아의 입을 통해 전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회심은 삶의 방향 전환>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언하는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회심은 방향 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거침이 없습니다.
적극적인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간절히 기도하면 하느님 뜻을 알 수 있나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2』에 빌과 애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마을 촌장이 물을 공급해주는 사람과 계약을 원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딱 2명 하고만.
에드가 먼저 땄고, 신이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며 두 개의 양동이로 호수에서 물을 날랐습니다.
빌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드는 경쟁자가 없어서 더욱 신나게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빌은 양동이 두 개 대신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가 네 명을 모으고, 일을 할 사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달이 지나고 건설 팀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동안 빌의 팀은 아주 두꺼운 강철 송수관을 건설해서 마을과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빌은 일을 하건 안 하건 매일 많은 돈을 얻었습니다.
에드는 평생 일만 했습니다.
이야기 끝.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걸까요?
더 큰 뜻 안에 머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면서 하느님 뜻을 굳건히 따르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는 왜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박해하고 있었을까요?
하느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끈질기게 기도하면 알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성경을 읽으면 하느님 뜻을 알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화가 하느님 뜻을 따르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그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확실히 하느님 뜻을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뜻 안에 머물라고 남겨놓은 흔적들입니다.
해리포터는 학대하는 이모, 삼촌, 사촌 더즐리 가족과 함께 사는 평범한 소년으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법적 유산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열한 번째 생일에 해리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사냥터지기인 루베우스 해그리드로부터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해그리드는 해리에게 능숙하고 존경받는 마법사였던 그의 부모, 릴리와 제임스 포터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들은 해리가 아직 아기였을 때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해리는 이마에 번개 모양의 흉터만 남기고 이 공격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는 그를 마법사 세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호그와트에서 해리는 호그와트에서 수년 동안 부모를 죽인 볼드모트의 도전과 위험에 직면합니다.
이때 그를 돕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모두 해리 포터의 부모를 사랑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특별히 해리를 싫어하는 듯한 세베루스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사실 그는 해리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볼드모트의 하수인이기는 했지만, 그 사랑이 너무 커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또 그녀 대신 그녀의 아들인 해피 포터를 지켜주는 이중 첩자였습니다.
그는 볼드모트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해리 포터를 위하는 따듯함을 보여줍니다.
해리포터는 이들의 희생으로 결국 볼드모트를 물리칩니다.
만약 아이가 늑대와 살면서 열심히 살면 어떻게 될까요?
훌륭한 늑대가 됩니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속해있느냐입니다.
공동체에 내가 살아갈 올바른 뜻이 녹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겨놓은 당신 뜻을 알게 만드신 유물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순교하라고 해서 순교하면 하느님 뜻입니다.
교회에서 순교하지 말라고 해서 순교하지 않으면 그것도 하느님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함으로써 하느님 뜻에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교회가 곧 그리스도이고 교회 안에 있으면 하느님 뜻 안에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으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느님 뜻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해리포터의 부모가 남겨놓은 유산들, 곧 부모의 친구들과 부모를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그 부모를 따르는 이들 속에 있으며 결국 부모의 뜻을 실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책도 믿을 수 없고 친구도 믿을 수 없고 행복도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만이 그의 길을 밝혀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에게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했던 것을 기억합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산전수전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의 부모는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 친히 밝힌 것처럼 그는 소아시아 지역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튀르키에 중남부에 있으며, 지중해에 인접한 천연적 항구 도시로서 오래전부터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부모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어린 시절부터 유다인으로서의 탄탄한 가정 교육과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부라고 할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뿐만아니라 바오로는 엘리트 교육을 받기 위해 당시 대스승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기록에 따르면 가말리엘은 유다 최고 법정인 산 헤드린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당대 율법교사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로 인해 최초로 ‘라반’ 영예로운 칭호까지 얻었습니다.
이런 조기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차근차근 이수한 바오로였기에, 그는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충실했으며, 온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겼습니다.
이런 바오로에세 한 가지 심기 불편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당시 정통 유다인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요 사이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출몰과 확산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유다인들이 그리로 건너가니, 바오로 입장에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정의감과 종교심으로 충만했던 바오로,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 청년이었던 바오로는 즉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유다 최고 의회에 체포영장까지 발급받아 그리스도인들의 척결을 위한 선봉장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바오로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생긴 낙마 사건입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에 그리스도인들이 집결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오로는 즉시 그리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바오로는 갑자기 엄청난 광채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동시에 그는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강렬한 빛으로 인해 그의 눈은 멀어버렸습니다.
그 특별한 상황 앞에서 바오로가 보여준 태도는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 난감한 상황 속에서 바오로는 주님께 거듭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꼬박꼬박 응답해주십니다.
그 순간 제가 바오로였다면 엄청난 두려움에 까무라쳤을 것입니다.
아니면 잽싸게 줄행랑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도 바오로 사도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오늘 우리에게도 바오로 사도가 온몸으로 체험했던 절절한 회심, 대대적인 삶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끊임없이 주님께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바오로 사도의 회심>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필리 3,5-6)
여기서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는 말은 교만이나 위선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도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6), 바오로 사도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같은 충실한 신앙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성적인 유대교 신자로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예언하신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요한 16,2-3)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이고 충성하는 일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아직 예수님을 모르던 때였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모르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기가 모르고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티모 1,13)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바치신 기도에 연결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죄인 줄 ‘모르고’ 한 일이더라도 죄가 죄 아닌 것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은 커집니다.
반면에,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은 처음부터 회개와 용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큽니다.
어떻든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기도가 결실을 맺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서 곧바로 변화되고 사도가 된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바오로 사도 자신은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갈라 1,15-18)
1)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이 언제 어떻게 실행되는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즉흥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섭리’를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자마자 곧바로 응답하고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을 하는 시간을 가진 뒤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3년 동안의 일은 전혀 기록에 없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회개하고 보속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를 묵상하면서, 사도로서 일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4).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나타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한 뒤에 교회가 큰 박해를 받게 되었을 때, 아마도 분명히,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박해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그 기도가 응답을 얻은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심의 여정 - 안으로는 회심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오늘로서 1.18일부터 시작한 일치주간도 끝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에서 공히 참 좋아하는 성인이 바오로 사도,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제가 프란치스코 세례명을 갖게 된 것도 예전 개종하기 전 개신교에서 유일하게 알았던 성인이 프란치스코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 분들의 특징은 전격적 회심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중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정말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극적입니다.
바오로의 극적인 회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주님께서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인내하며 기다렸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당신 사람으로 점찍어 놓은 사람은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성 스테파노의 거룩한 순교 장면을 시종일관 겪었던 사울이었으며 아마 주님은 이후로도 결정적인 계기를 기다렸던 듯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목하셨던 것은 바오로 사도의 한결같은 불같은 열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22장은 바오로 사도의 일장 연설중 자기의 전 회심과정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그가 얼마나 신자들의 박해에 극성스러웠는지 바로 그때에 주님이 개입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바오로의 회심에 앞서 주님과의 극적 만남의 장면이 너무 생생합니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바오로 사도를 비추자 그는 바닥에 엎어졌고 이어지는 주님의 개입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다.”
이 장면은 늘 읽어도 새롭고 신바람이 납니다.
주님은 바오로가 박해하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새삼 주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행위는 그대로 주님께 하는 행위임을 깨닫습니다.
믿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라는 놀라운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후반부 최후심판(마태25,31-46) 이야기 중 다음 대목을 연상케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아마도 바오로 사도를 회심으로 이끈 이 생생한 주님과의 만남을 바오로 사도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아마도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불덩이 같은 선교열정의 원동력이 되었을 체험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주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종들을 다정히 부를 때를 연상케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얼마전의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을 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답하던 사무엘의 모습도 연상됩니다.
당신의 때가 되자 주님은 전광석화, 일사불란하게 바오로를 사로잡으니 바오로는 완전히 주님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주님은 이미 예비한 당신의 사람 하나니아스가 주변을 대변하여 주님의 뜻을 전합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을 만나 회심과 더불어 눈을 뜨니 이젠 예전의 사울이 아닙니다.
주변은 그대로 이나 보는 내적 눈은 완전히 바뀌어졌을 사울입니다.
이제 주님의 증인으로서 새로운 선교사명이 사울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의 불이 되어 곳곳에 마침내 로마에까지 복음의 불을 붙이니 활활 타오르는 복음의 불은 미구에 전 유럽을 타오르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바오로의 눈부신 전교활동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말 그대로 오늘 다음 복음 말씀 처럼 사명을 수행한 바오로 사도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무슨 복음입니까?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모두가 이런 주님과 일치되어 무지와 허무의 노예살이 어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감이 복음 선포의 궁극 목표입니다.
생명이요 빛이요 길이요 희망이요 진리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니, 이런 파스카 예수님 아닌 복음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산불처럼 번지는 복음의 불, 사랑의 불, 말씀의 불,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불이요, 지금도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선교의 불, 복음의 불입니다.
주님께 만약의 가정은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바오로가 없었다면? 부질없는 질문이요, 이미 주님께서 예비한 당신 복음의 일꾼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여기 살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 섭리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저는 다시 산대도 이렇게 뿐이 못살 것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살아갈 복음 선포의 장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과 더불어 깊이 성찰해야 할 우리의 회심의 여정입니다.
바오로의 결정적 회심으로 회심은 끝났을까요?
분명히 확신하건데 아닐 것입니다.
순교의 그날까지 계속되었을 회심의 여정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똑같이 회심의 여정입니다.
우리 요셉수도원의 첫 순교자처럼 생각되는 정훈만 세례자 요한 수사가 떠난지도 11년째요, 그가 만들어 정자에 붙여놓은 “回心亭(회심정)” 명패는 여전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주님과 만남의 여정, 회심의 여정, 친교의 여정, 성화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내 삶을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으며, 어느 정도의 성덕(聖德)에 도달해 있는지 가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회심의 여정과 함께하는 선교의 여정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본질적 사명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존재 이유의 상실입니다.
안으로는 주님과 회심의 “친교”,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선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바, 친교와 선교, 수렴과 확산의 리듬에 따라 날로 복음화되는 세상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열매, 회심의 열매, 친교의 열매를 세상과 나누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끝으로 우리 정주 요셉수도원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수도원 자체가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장이요,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로,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로 사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끊임없이 거행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에서의 환대를 통한 섬김과 나눔의 선교, 저는 바로 이것을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선교라 부릅니다.
이를 요약한 고백시를 나눕니다.
회심의 친교 열매는 환대의 선교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파되도록 섭리하신 하느님의 계획>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파되도록 섭리하신 하느님의 계획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을 보내시는 대상은 "모든 피조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구원의 대상인 것입니다.
새들에게도 주님 찬미를 가르쳤던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오르고, 또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이제라도 돌보고 회복시키려는 우리의 뒤늦은 노력 또한 떠오릅니다.
기쁜 소식, 곧 복음은 하느님 모상이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동의 집인 지구와 온 우주 전체의 피조물을 위한 선물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마르 16,1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표징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 그분께서 하시던 일들입니다.
제자들은 그분 곁에서 이를 보고 듣고 체험했지요.
이제 제자들은, (아직 완전히 준비가 된 것은 아닐지라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 순종해 길을 나설 것입니다.
그들이 그동안 예수님에게서 보고 듣고 깨닫고 체험한 것 모두를 총동원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전달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장면입니다.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22,9)
살기 가득해서 기세등등하게 그리스도인 박해에 앞장섰던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빛과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빛이 사울의 눈을 멀게 하지요.
이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울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받아들여져 세례를 받으면서 눈을 가리웠던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 그는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빛은 함께 있던 이들도 보았지만 이 말씀은 사울에게만 들렸습니다.
만일 그 말씀이 거기 있던 모든 이에게도 들렸다면 앞으로 사울에게 다른 증인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이제 사울은 자신의 온 존재를 통해 자신의 회심과 주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 자신이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 22,15)
주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가 사울에게 신비스런 발현 사건의 의미를 밝힙니다.
이는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사울을 선택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보고 들은 것"
사울은 빛을 보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빛 중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하시는 자기 계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 때문에 사울에게 박해받는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시니, 사울은 자기 죄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파견받은 제자들처럼, 그리고 열렬한 율법의 수호자 사울에서 새로운 길의 증인이 된 바오로처럼
우리 역시 보고 들은 것을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전하라고 선택된 이들입니다.
제자들처럼 직접 예수님과 생활한 것도 아니고 사울처럼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한 것이 아니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깨달아 그분의 자녀가 된 과정과, 이후 우리에게 벌어진 모든 사랑의 기적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나눌 것이 풍부한 주님의 증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저마다 삶 안에 주님과 나눈 사랑의 자취들이 새겨진 우리 모두는 사랑의 증인입니다.
우리가 증언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족과 동료, 지인을 넘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는 복음입니다.
주님의 증인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벗님의 증언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선물이 될 것이니 벗님은 참으로 행복하십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남자를 키워주는 여자의 덕목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감각이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감각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감각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예전에 권투선수 무함마드 알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감각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둘째는 지혜가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평강 공주는 바보 온달을 고구려의 장군이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궁궐에서 배웠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이 잘 된다고 합니다.
솔로몬 왕은 재물과 권력을 원하지 않고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셋째는 용서할 줄 알면 좋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합니다.
비록 상대의 실수로 다툼이 있을지라도 용서할 수 있으면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의 가사를 음미할 줄 알면 좋다고 합니다.
감성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시편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부부가 같은 감성을 나눌 수 있으면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질 것입니다.
다섯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 좋습니다.
배우자가 일을 통해서 성취를 이룰 수 있으면 지친 어깨를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더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여자를 키워주는 남자의 덕목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년 동안 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신문사를 키워주는 직원의 덕목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기본이지만 신앙 때문에 잘못된 것을 감추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 사도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의 눈으로 기사를 검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직언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신문 만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직원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은 덮어주고, 상대방의 장점은 드러내면 좋습니다.
조직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외부의 원인도 있지만 내부의 원인도 크게 작용합니다.
직원들이 서로 도와주고 화목하게 지내면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저는 신문사를 키워주는 직원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회심하여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키우고, 예수님께 사랑받는 신앙인의 덕목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는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셋째는 이제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기꺼이 십자가고 지셨습니다.
회개하고, 회개하였음을 삶으로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교회를 키우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제자는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줄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말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말은 긍정적인 감정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을까요?
7:3의 비율로 부정적인 감정어가 더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부정적인 감정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마음 상태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비판은 두고두고 생각나는데, 어떤 이의 칭찬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또 나를 향한 화가 난 얼굴은 지워지지 않지만, 나를 향한 미소 짓는 얼굴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액수가 똑같아도 이익의 기쁨보다 손실의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우리입니다.
부정적 편향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긍정적 편향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심리 법칙인 ‘4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는 나쁜 일 한 가지의 강한 영향력을 상쇄하려면 좋은 일 4가지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와 다투었다면 다정한 대화를 네 번은 해야 관계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이 법칙을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했으면 몇 번이나 상대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잘해야 할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최하 네 번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할 만큼 했다는 마음을 갖고서 관계 회복을 아예 포기하면서 거리 두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려고 하십니다.
거리 두는 관계로는 그 사람하고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도 안 좋아집니다.
힘든 삶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에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할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정적 편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셔도,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행하셔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사도로 부르십니다.
이런 체험이 바오로를 변화시켰습니다.
부정적 편향에서 벗어나, 이제 긍정적 편향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나요?
주님과는 거리 두는 관계가 아니라, 친근하고 밀접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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