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비로암과 삼층 석탑
동화사는 미륵불을 모시는 법상종 사찰이라고 누누이 말 하였다. 미륵불은 절의 입구에 있는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이 유일하다. 절집에는 오히려 통일신라 시대에 조상하였다고 말하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니 당연히 절집의 이름은 비로암이다. 미륵불에 관한 흔적들은 지워지고 엉뚱하게도 비나자나불은 지금 껏 머물면서 절집 하나까지 차지하고 계신다. 비로암 마당에는 역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한 삼층 석탑이 있다. 이 탑은 신라 후대에 왕실에서 일어났던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비로암은 새로 조성한 주차장 바로 아래 쪽에 있다. 그래도 사람의 발길은 거의 닿지 않는다. 동화사의 출입문을 말할 때마다 나는 옛날이 좋았어 라고 말한다. 옛것이 좋다면 한물 간 사람 취급을 하겠지만 동화사 절문만은 옛것이 좋았음이 분명하다. 지금의 동화사로 들어가는 문은 집단 시설지구에서 산허리를 깎아서 만들었다. 나는 이 문을 볼 때마다 ‘옆구리 터진 **’라고 하는 시속어가 떠오른다.
절집을 찾아 갈 때는 일주문을 지나서 오르막 길을 땀 흘리며 올라가야 제 맛이 난다. 옆구리가 터진 곳에 만든 문으로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면 불교도장을 찾는 것이 아니고 관광이나 하러가는 기분이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대나무 사이로 바로 아래의 절집 지붕이 보인다. 비로암이다. 동화사에서 역사성이 강한 사찰이지만 비로암을 찾아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1960년대에 국보급 탑들이 도굴 당하면서 많은 탑이 도괴되었다. 1966년에 석가탑이 무너지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지만 사실은 실상사 석탑, 통도사 부도, 황룡사 구층탑의 심초석, 해인사의 일주문 앞에 있던 3층 석탑, 동화사에 있는 3기의 신라 탑, 즉 비로암의 삼층 석탑과 금당원의 동, 서 쌍탑도 도굴 당하였다.
비로암 3층 석탑의 사리함을 구입한 사람이 황수영 박사에게 감정을 받으려 들고 갔기 때문에 이 탑이 세상에 알려졌다. 세세한 내용은 접어두고서도 파손된 석함에 민애왕의 생애가 적혀 있었다. 탑을 건립한 년대도 적혀 있었다. 년대를 알려져 있는 탑은 극히 소수이다. 학계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민애왕의 족보와 왕위표를 올리려니 업로드가 안된다고 나오네요ㅣ
다음 기회에 올라겠습니다.
민애왕의 내력부터 알아보자. 민애왕은 신라 44대 왕으로서 원성왕의 증손이고, 대아찬 충공의 아들로 이름은 '명'이다. 벼슬은 오늘의 국무총리 격이 상대등이 되어서 매형 격인 43대 희강왕을 강제로 자살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22세 때 였다. 43대 희강왕이 삼촌인 균정과 왕위 다툼을 할 때 희강왕의 편을 들어 왕위에 앉혔다. 1년 뒤인 839년에 균정의 아들이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 달구벌에서 한 판 붙어서, 패하여 죽었다. 왕위 다툼으로 달구벌에서 전투를 벌였다 패하여 죽었다. 23세 때였다. 이가 45대 신무왕이다. 그가 죽고 난 뒤에 사촌 격인 심지대사가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탑이 비로암 3층 석탑이다. 따진다면 같은 왕족으로서 심지대사와 민애왕은 정 반대의 삶을 살았다. 누가 더 잘 살았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볼 만하다.
(심지 대사는 충공의 형님인 41대 헌강왕의 세자였다. 그러니 심지와 민애와은 사촌간이다.)
(*탑 공부를 해보면 비로암 3층 석탑은 원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