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 양반 타도 외친 개혁론자 김옥균(金玉均, 1851년∼1894년)
청나라 군사와 조선인 가담자들과 개화파, 일본군이 교전하는 사이 왕후 민씨는 청나라군 진지를 통해 이미 북관왕묘로 옮겨갔고, 고종도 뒤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에 신정부 주요 인사들은 할 수 없이 일본군과 함께 이를 호위하여 나다가다 도중에 각자의 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과 사관 생도 7명은 고종과 함께 북묘로 가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邊洙), 이규완(李珪完) 등과 나머지 사관 생도는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홍영식 등은 개화파 중에서 비교적 온건한데다가 위안스카이와 친분도 있고 척신 중에도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서 국왕을 따라가면 신변은 안전할 것으로 믿었으나 그들은 북묘에 도착한 직후 그들 모두는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공사관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김옥균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숨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등 9명과 함께 인천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과 10월 20일 오후에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의 호위 아래 제물포에 정박중인 지토세마루(千歲丸, 천세환)에 승선했다.
홍영식, 박영교를 처형한 척신 세력은 일본군함이 정박한 인천으로 사람을 급히 보냈다. 척신 세력인 심순택을 의정부영의정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 구성을 마치고 김옥균 등을 '오적'으로 규정하여 인천에 사람을 보내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김옥균 등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다케조에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일행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다. 척신세력의 추적과 다케조에의 배신으로 자칫 배에서 내몰리는 상황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신의없는 행동에 분노한 지토세마루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辻勝三郞)의 소신으로 일행은 목숨을 구하였다. 10월 21일 아침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쓰지 선장의 지토세마루 호에 일본군사들과 함께 승선했다.
피신과 일본 망명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들을 급히 피신시켰다.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서광범, 변수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변복 후, 인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했다. 인천주재 주조일본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이었다. 10월 12일 묄렌도르프의 추격대가 쫓아오자 일본인으로 꾸미고는 제물포항의 일본 국적선 지토세마루 호(千歲丸)로 숨었다.
이튿날 대한제국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 등을 대동한 묄렌도르프의 추격대가 다케조에 공사에게 역적 일행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배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행은 품고온 독약병으로 자살을 각오했다. 우물쭈물하던 다케조에 공사가 배로 되돌아와서는 일행에게 역시 내릴 수밖에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내 일본인 승객들이 혀를 차며 꾸짖는 한편,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 역시 공사만 믿고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와서 하선시키자 하면 이들을 죽이자는 것 밖에 더 되느냐며 질타했다.
“내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인사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인간의 도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
다케조에가 우물쭈물하자 쓰지 선장이 직접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들은 탄 적이 없고 국제법 상 선박은 해당 국가의 영토로 치외법권이며, 수색을 강행하면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추격대를 물리쳤다. 개화당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일본 망명 생활 중의 김옥균
한편,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태는 천안 감영에 투옥돼 옥사하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경북 영천 근처까지 도망쳤다가 체포돼 대구 감영에서 옥사당했다.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은 음독 자살했고, 아내 유씨는 7세된 딸과 옥천군의 관노가 됐다. 그의 첩 송씨는 옥중에서 살려고 음행(淫行)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10월 24일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항을 떠났는데 그 때까지 4일간 배의 밀실에 숨은 채였다. 10월 27일 제물포항을 나온 지 3일 후에 나가사키를 경유해 도쿄로 가 오랫동안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서 지냈다. 더이상 폐를 끼칠 수 없었던 그들은 셋집을 얻어 합숙하며 피곤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끊임없이 망명지에 있는 그들을 죽이려고 했고 청나라 역시 일본에 그들의 송환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갑신정변 때 일본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는 한성 조약을 체결하면서 김옥균 등의 신병 인도를 거듭 요구했으나, 일본이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않는다며 송환을 거부했다. 개화파의 존재는 동양 3국 사이의 뜨거운 감자였으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이전에 일본 정부에서 부담이 됐다. 이런 이유로 후일 김옥균이 절도에 유배를 가는 등 개화파는 일본 내에서도 찬밥 신세였다.
개화당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교류가 깊었던 전 일본 총리 이노우에 가오루는 후일 회고록에서 치토세마루 호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郞)가 박영효 일행과 나가사키 항에서 헤어질 때 일본식 이름을 각각 지어줬다 회고했다. 곧 그들에게 들이닥칠 자객을 염려해 이같이 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면 조선 이름을 가지고는 살기가 불편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기념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소.”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에겐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 료(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고 지어줬다.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외에도 그는 이와타 미와(岩田三和)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망명 생활 초반
망명 직후 그는 간사이 지방에 머물렀으며 이때 야마토의 히가시히라노초(東平野町)에 살고 있는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관계를 맺어 다음 해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10월 27일 김옥균은 주변의 만류에도 이노우에 가오루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불우한 처지의 망명객으로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이노우에는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배신에 분노한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경위와 일본 측의 관여를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나섰으나 일본측에서는 조선에 송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본은 1885년 4월 청나라와 [톈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주둔중인 군사를 공동으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후 조선 문제에서 당분간 손을 떼었다. 불우한 정치망명객인 김옥균 일행을 일본은 부담스러워했고, 김옥균은 울분과 울화를 겨우 다스리고 거처에 은신하며 자신의 개혁운동을 회고하는 갑신일록(甲申日錄)을 쓰면서 연명하였다.
일본 망명 중에도 그는 조선으로 쳐들어가 민씨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21세기 한국의 언론인인 김충식은 자객 밀파의 원인을 그가 스스로 자초했다고 보았다. "자객 밀파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옥균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 성격이 급한 옥균은 일본에 와서도 명성황후 정권을 전복하려 절치부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후쿠자와의 도쿄 집에서 두어 달 머물다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 야마테초로 집을 얻어 나갔다. 이 지역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공원’으로 이름지어진 데서 알 수 있듯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곳. 개항 이래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도 외국인 묘지가 남아 있다. 현재 한국의 요코하마 총영사관이 야마테초에 한국식 건물로 들어서 있다.
10년간의 망명생활을 통해 김옥균은 일본 고위층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게 된다. 그 중 한명인 도야마 미쓰루는 훗날 명성황후를 암살하는데 참여한 낭인 조직의 하나인 '겐요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야마테초에서 옥균은 겐요샤(玄洋社)라는 우익 집단의 장사들과 접촉했다. 겐요샤는 도야마 미쓰루가 만든 조직이다. 조선에는 그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민씨 정권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하려 했다.
그의 일본망명생활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일본인 게이샤 스기타니 오타마
1886년 7월부터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년 8월∼1890년 4월 홋카이도에 연금을 당한다. 그는 이 무렵 두 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관계였는데, 이들 게이샤들은 김옥균이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금전적, 정신적 후견인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삿포로에 살던 김옥균은 지병인 류머티즘을 치료하기 위해 종종 하코다테의 온천여관에 들렀는데, 거기서 스기타니를 만나 애인관계로 발전한다. 7월부터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섬에 유배된 데 이어 1888년 8월∼1890년 4월 홋카이도에 연금을 당한다. 스기타니 다마의 원래 이름은 ‘오타마(小玉)’. 하코다테 도서관이 소장 중인 사진에는 ‘봉래정예기옥녀(蓬萊町藝妓玉女)’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게이샤였던 오타마는 곧 김옥균의 재정적 후견인의 한사람이 되었고 바로 연인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당시 김옥균의 후원자였던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저서 ‘33년의 꿈’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이 책에 따르면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1894년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이후 도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야자키가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슬피 우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나는 여인의 몸. 선인(先人·김옥균)의 사상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재일 사학자 금병동(琴秉洞)은 그의 저서 ‘김옥균과 일본’(2001년판)에서 “스기타니는 24∼25세 정도의 미인이었으며, 두 사람 관계는 당시 하코다테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면서 “1890년 김옥균이 홋카이도에서 연금에서 풀려나 도쿄로 돌아올 때 함께 상경해 도쿄에서 살림집을 꾸리고 살았다”고 소개했다.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상하이로 건너간 뒤에도 김옥균을 위해 따로 밥상을 차려놓고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불공을 올리다가 부음을 전해들은 것으로 돼 있다. 스기타니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후인 1916년 미야자키 도텐과 재회했을 당시에는 이미 한 실업가의 부인이 돼 있었다고 한다.
이때 김옥균에게는 또다른 일본인 연인이 있었는데 역시 다른 술집에서 만난 게이샤인 마쓰노 나카(松野なか)였다. 나카에게서는 딸 1명이 태어났는데 이름은 사다(さだ)였다. 그 뒤 1884년 도쿄로 돌아오자 그는 청나라로 망명을 기획한다.
조선 자객 침투
1차 김옥균 암살 미수 사건
1885년 6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밀명을 받은 장은규(일명 장갑복)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은규는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의 친정오빠였다. 장은규가 장귀인의 오라비라는 것을 안 유혁로는 그를 경계할 것을 김옥균에게 제안했고, 김옥균은 장은규를 피함으로써 1차 암살 기도는 미수로 돌아갔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 출신의 온건 개화인사인 지운영을 자객으로 파견하였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근무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은 1886년 2월 23일 인천을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한다. 그러나 김옥균은 지운영도 자객임을 간파하였다. 김옥균은 당시 고베를 떠나 도쿄에 은거 중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伊勢勘) 여관에 투숙하며 인근에 살고 있는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면담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과거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도쿄까지 찾아와 한번 만나자고 하는 지운영의 제의에 김옥균이 응할만도 했지만 김옥균은 서신을 보내 지운영의 면담 제의를 거절했다. 장은규 일파를 상대한 유혁로는 지운영도 자객으로 의심하고 이를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전했다.
지운영의 정체에 의혹을 느낀 김옥균은 거절하는 답신을 보낸다.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
김옥균은 유혁로 등에게 지운영이 가져온 거사금 5만 엔을 갈취할 것을 제안한다. 김옥균은 함께 있는 동지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등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그가 공작비로 가져온 5만 엔의 돈을 빼앗자고 제안한다. 세 사람은 지운영을 만나 불평을 늘어놓았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동지들로 일본에 같이 망명해 있던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등을 지운영에게 접근시켜 지운영이 자객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잡도록 했다.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만나 이국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김옥균을 비난하는 등 김옥균에게 큰 불만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지운영은 유혁로 일행과 2,3개월 이상 만나면서 신뢰하게 되었다.
2차 김옥균 암살 미수 사건
그러던 어느날 지운영은 일행에게 김옥균을 처치하면 망명자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신은 국왕의 밀지를 받들어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왔으므로 제군은 자신을 도우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지운영은 그 증거로 고종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명여로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인 바 임시계획을 일임 편의요, 위국사무(爲國事務)도 역위전권(亦爲全權)하니 물핍거행(勿乏擧行)할 사
이 사람은 명을 받은 특차도해포적사이니 임시계획은 편의로 일임하며 나라를 위하는 일 역시 전권을 위임하니, 조선의 신민이라면 핍박하지 않고 거행하도록 하라.”
— 대군주모(大君主募)
발행 일자는 1896년 5월로 되어 있고 국왕의 옥쇄(대군주모)까지 찍힌 이 칙서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바다 건너의 역적을 체포하는 특명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 게다가 김옥균 살해에 성공한 자에게는 5천 엔을 지불한다는 지불보증서도 가지고 있었다. 지운영은 한성에서 품고 온 비수도 보여주었다.
유혁로 등 3인은 지운영을 포박한 뒤 구타, 위협해 가지고 있던 칙서와 비수 등을 빼앗았다.
여성 편력 위장
망명 직후 그는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의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생활하였다. 이때 신타로의 어머니 나미와 관계,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그는 자중하였지만 도야마 미쓰루의 권고로 다시 여자를 찾았다.
조선에서 자객이 파견되자 도야마는 그에게 일부러 술과 여색에 탐닉하라고 권고했다.
김옥균의 여자관계는 난잡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망명 직후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 1465번지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잠시 기식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조선에서 김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자 그의 신변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일본 고사(古事) 중 오이시우치가 교토에서 기라의 첩자를 방심시킨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국적 행위를 버리고 주색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가 매일같이 도쿄 유라쿠초의 여관에서 시바우라의 온천장까지 들락거리며 홍등가를 방황했다.”
— 도야마 미쓰루의 증언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하였다.
박영효와의 결별
김옥균의 주색(酒色) 방종은 홋카이도 유배시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오타루에서 사귄 기생도 옥균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이는 물론 다른 여자의 소생까지 거두어 옥균의 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
미국으로 망명한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
박영효는 온순하고 침착한 데다가 세상사를 멀리하였으나 김옥균은 예민하고 다재다능한 데다가 세상의 교제도 넓었다.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박영효의 문벌이나 신분이 높아 김옥균을 능가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김옥균의 지위가 높아져 자연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김옥균을 남겨둔 채 박영효가 미국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광린은 박영효가 김옥균을 두고 서광범, 서재필만 데리고 미국으로 갔던 이유도 김옥균과 박영효의 기질 차이로 이해하였다.
청나라 망명
1885년말 김옥균의 처소를 자주 출입하던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이 오사카에 모여서 "조선 토벌을 위해 무장 집단을 파견하자"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이들의 조선 정벌 주장은 일본 사회에 화제가 되었고, 이는 곧 정한론으로 발전한다.
이 일은 일본의 대륙 침략 세력의 선봉대가 기도한 음모로 김옥균은 전혀 알 리가 없었지만, '오사카 사건'은 김옥균을 배척하려는 무리들의 악의에 찬 선전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김옥균이 일본인 장사대(壯士隊)를 이끌고 조선에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이야기가 일본은 물론 청나라 조정에까지 전해져, 청나라의 리훙장은 김옥균 일행을 단단히 구속해두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은근히 김옥균에게 일본에서 떠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그를 자객을 보내 제거하려는데 그를 내치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반대로 일본 추방은 모면하였다.
암살 위협과 청나라 망명
망명객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이름으로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였으며, 청나라를 꺼리는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오가사와라에, 이어서 홋카이도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어 도쿄에 귀환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본으로 자객을 파견하였다. 첫 자객인 장은규는 김옥균의 민첩한 대응으로 암살이 실패하자 "김옥균이 자유당 계열 무사들과 결탁하여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이른바 '오사카 사건'을 일으켰을 뿐, 김옥균의 신변에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으로 국제적인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에게 일본을 떠나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조선은 두 번째 자객인 지운영을 보냈다. 그러나 지운영은 오히려 김옥균은 이를 일본 언론에 알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옥균은 이 사실을 거론하며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건이 일본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에 송환하고, 김옥균에게는 일본과 조선의 우호에 방해가 된다면서 일본을 떠나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김옥균은 이에 항의하며 이노우에를 상대로 한 문서를 공개하고 일본 신문에 고종에게 보내는 장문의 상소와 청나라의 북양대신 리훙장 앞으로 사건의 책임을 따지는 공개 서한을 게재하였다.
청나라에서는 항의하였고 김옥균의 발언이 외교적인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1886년 7월에 그를 오가사와라섬에 강제로 연금했다. 이때 동행한 동지는 이윤과 한 사람뿐으로, 이곳에서 김옥균은 2년 동안 실의의 나날들을 보냈다. 습한 기후와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여 연금 해제나 연금지역을 옮겨줄 것을 호소하여 김옥균은 1888년 홋카이도로 이송되었다가 1890년에 석방되었다. 오가사와라섬에서는 소일 삼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와다 엔지로라는 청년이 그를 추종하여 상하이에서 죽는 순간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연금에서 해방되어 도쿄로 돌아온 김옥균은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청나라로 들어가 실권자 리훙장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리훙장에게 연락이 닿자 마침 일본 주재 공사로 새로 부임한 리훙장의 아들 리징방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편지를 건네주었다. 김옥균으로서는 일본에서의 거듭된 재기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아직도 조선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청의 실권자를 만나서 협조를 얻어 보려 했다. 청나라행을 결심한 김옥균은 스스로 막일을 다니며 비용을 마련하는 한편 백방으로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사카의 한 후원자에게서 경비를 지원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동료들은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비밀리에 행동하고 여러명의 수행원과 함께 가도록 권했으나, 그는 일본인 와다 엔지로와 심부름꾼 한사람만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김옥균의 이동 정보는 곧 조선조정의 간자에 의해 조선조정으로 전달된다.
망명 만류와 암살자의 잠입
1894년 2월 리훙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3월초 그가 오사카역에 도착하자 조선에서 온 자객인 이일직과 홍종우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청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척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평소부터 김옥균의 행적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은 옥균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노라고 말했다.
김옥균은 한눈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김옥균이 눈치챈 것을 알자 이일직은 홍종우가 동행하며 김옥균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그의 의심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박영효까지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이일직은 박영효를 암살하러 갔다가 그가 민첩하게 일본인의 집에 숨어버리는 바람에 그를 찾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의 수사 결과 이들을 지휘한 민영소의 사주가 밝혀지기도 했다.
그 해 2월 김옥균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묵고 있던 도쿄 인근의 휴양지 하코네로 찾아갔을 때 후쿠자와는 중국행을 상의하는 김옥균에게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그의 대답은 '호랑이 굴' 운운이었다. 옥균은 도야마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고 오사카 역까지 동행한 도야마가 중국행을 걱정하여 그에게 상하이행의 이유를 묻자 김옥균은 도야마에게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고 호언했다. 도야마는 만류를 단념한 듯, 옥균에게 ‘이홍장에게 선물로 갖다주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최고의 일본도로 치는 교토의 산조(三條)칼 한 자루였다. 이 일본도는 상하이에서 옥균이 살해당하자 임자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보디가드 와다가 소중하게 챙겨 도야마에게 정중히 돌려줬다.
김옥균은 그동안 위험하다며 중국행을 만류하는 일본인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호랑이 굴' 비유로 답하고 있었다. 3월 10일 오사카에 도착한 김옥균은 여인숙에 숙소를 잡아놓고 중국 입국 절차를 밟으면서 도쿄에서 즐겨 치던 당구도 치고 골동품점에 들려 중국에 가지고 갈 선물도 샀다. 3월 10일 오사카 역에서 헤어진 도야마 미쓰루와는 14일과 16일 두 차례 다시 만난다.
암살 과정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한 방법은 간단했다. 프랑스 요리 솜씨도 어찌나 기가 막혔던지 김옥균의 일본 친구들 입맛까지 당길 정도였다. 개화파 성향에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 온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이듬해 상하이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東和洋行)에서 리볼버 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 암살하였다.
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다. 홍종우는 그만큼 암살 의도를 철저히 숨기고 위장 접근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홍종우는 이렇게 해서 김옥균을 상하이로 꼬여냈고 거사를 '깨끗이' 처리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김옥균을 제거했는지 청국 측 경찰서에서 변론하였다.
“나는 조선의 관원이고, 김옥균은 나라의 역적이다. 김옥균의 생존은 동양 삼국의 평화를 깨뜨릴 우려가 있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한 첫 번째 이유로 공무라고 밝혔다. 김옥균 암살은 첫째로, 공무다. 어명을 받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김옥균이 동양 평화에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윤치호
1894년 3월 중순 경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외국인 거주지 안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하였다. 투숙한 다음 날 오후, 김옥균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각자 용무를 보았다.
1894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가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지냈을 때 윤치호는 김옥균과 홍종우 일행을 받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 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단발을 하고 이와타 슈사쿠로 개명한 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 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청국 상하이 호텔)으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낸다. 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 3월 28일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김옥균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우면서, 와다에게 일본에서 타고 온 배의 사무장인 마쓰모토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와다가 나가자 김옥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챈 자객 홍종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김옥균을 향해 리볼버 권총을 발사하였다.그는 곧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4시 경 사망한다 (홍종우를 보낸 곳은 수구당 또는 민씨파라는 의견도 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4세였다.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윤치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부관참시와 복권
김옥균 암살 당시 일본의 어느 신문사에 실린 기사와 삽화
사건이 발생하자 청나라 상하이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사체는 일본인 와다 엔지로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인계하기로 했다. 일본 영사관에 인계된 시신은 일본인 지인과 그의 추종자가 손톱과 발톱을 잘라내 봉지에 담아 유품으로 도쿄로 보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조선 개화파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겨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와 김옥균의 사체를 청나라에게 넘겼고, 청나라 정부는 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제라고 하여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1894년(고종 32년) 4월 27일 유해가 선박으로 옮겨졌고, 4월 28일 조선에 도착한 그의 시신은 서울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머리는 효시된 후 사라졌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1894년 4월 28일자 일본 시사신보에는 양화진에서 옥균의 시신을 참시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효수해 놓았다. 이 끔찍한 형벌은 임금(고종)의 이름을 빌려서 민비와 민영익의 십년을 벼르다 벌인 철저한 복수극이었으리라. 아! 그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시신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어느 기간동안 저자거리에서 구경거리로 내 보인 다음엔 누군가 조각시신을 다 모아서 장례를 치러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시신을 처리할까?”
— 시사신보 1894년 4월 28일자
그의 가족 역시 연좌제로 처벌이 건의되었고, 생부 김병태는 처형당하고 모친 등은 음독 자결하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항렬자를 균에서 규로 바꾸기도 한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고 한다. 김옥균의 죽음은 곧바로 동북아 정세의 외교적으로 확대되었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일제는 곧바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언론매체 등을 통해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등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청일전쟁을 향한 일본제국의 국민감정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용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를 본 청년지사 박중양은 분노하였다. 특히 박중양은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실제로는 원세개(위안스카이)의 동양 평화 주장 의견으로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라며 분개하였다. 개화파 인사들을 선각자로 보고 존경했지만 그들 가족들의 비참한 최후와 능지처참, 연좌제 등의 악형을 목격하면서 박중양은 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에 일찍부터 의문을 품게 되었다.
김옥균의 부관참시는 외국인 기자들과 프랑스인, 일본인, 미국인 등에 의해 외국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조선 정부의 조처에 일본 지식인층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 등 조선에 호의적이었던 일본 자유주의자들의 분노는 증폭되었다. 조선인들은 반문명적인 야만인들이며 이와 같은 조선인들의 비인도적인 테러 행위, 생명 경시 현상을 방치해야 되는가 하는 주장이 일본의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바로 조선인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규탄하였다.
김옥균이 처음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부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냉대했었다. 그를 국외로 추방하려 했던 일본인들이 이번에는 김옥균에게 가형한 조선 정부를 비방하고 나섰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김옥균 추도회 또는 김옥균 기념회, 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모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1894년 4월 21일에는 간다니시키 정(神田錦町)의 금휘관(錦輝館)에서 '김옥균 사건 연설회'가 열렸고, 여기서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대대적으로 성토하였다. 4월 23일에는 일본 정계 유력자 1백여 명이 모여서 '대외경파간친회'라는 모임이 이사쿠사 혼간지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성황이었다고 되어 있다.
아오야마의 외인 묘지에 서 있는 김옥균 묘와 비석에는 박영효가 비문을 짓고 이준용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 그 비문은 유길준이 쓴 것이다. 훗날 역사가 겸 작가 신봉승은 이를 두고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때 유길준은 조선에서의 또 다른 쿠데타에 연루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오가사와라섬 모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김옥균이 유폐되었던 바로 그 절해고도에서 김옥균의 비문을 써야 하는 유길준의 심정은 착잡함을 넘어서 아픔이었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김옥균의 부인 유씨는 딸 1명과 함께 관비가 되어 끌려갔다. 한편, 김옥균에게는 정실 부인의 딸 외에도 1894년 3월 사다라는 딸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1895년 11월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사면·복권되었고, 아관파천 후 복권이 취소되었다가 순종 때인 1910년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이다.
그가 일본에 남긴 머리카락과 의복을 김옥균의 호위역이었던 와다 엔지로에게 비밀리로 넘겨 받으며 미야자키 도텐에 의해 아사쿠사 혼간지로 안치한 뒤 제사를 지냈다. 그의 연인인 오타마는 후일 어느 일본인 기업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다른 연인인 마츠노 나카는 딸 사다를 데리고 행상과 노동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1910년(융희 4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는 그가 생존하여 개혁정책을 펼쳤더라면 한일 병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여론이 나타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유길준, 박영효, 윤치호 등은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한일 병합을 막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암장한 묘소는 한일 합방 이후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로 이전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을 개화하려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선각자로 추모되었다. 1920년 초부터 김옥균을 추모하는 여러 추도 모임이 개최되었고, 1935년에는 김옥균을 기리는 단체를 조직하자는 일본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그와 친한 친구들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고균회를 결성하고 기관지로 '고균'을 발행했다. 고균회의 초대 이사장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였다. 그가 일본인 여인에게서 얻은 딸 사다는 이 고균회의 회합과 고균회가 주관하는 각종 모임에 참석, 종종 비와를 읊고 연주하였다. 사다는 도요바시 출신 언론인이자 인쇄업자인 스즈키 이치고로(鈴木市五郎)와 결혼했는데, 일부 김옥균 추종자들과 관람객들이 그녀에게 사례금과 대한 봉투를 준 것이 스즈키 집안에 전해지고 있다.
1926년 10월 10일에는 경성박문서관에서 민태원에 의해 《오호 고균거사 - 김옥균실기》 (경성 박문서관, 1926)가 출간되었다. 그러나 곧 판매금지조치 되었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이 서적은 해방 이후에 공식 판매되었고, 1947년에는 민태원에 의해 《갑신정변과 김옥균》 (국제문화협회, 1947)이 출간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야 그가 역적이라는 시각이 사라지고 혁명가라는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말 야담운동가 김진구는 “김옥균 전집 간행회”를 조직하고, 잡지에 김옥균 관련 글을 발표하였다. 갑신정변을 한국근대사의 ‘劃時期的一大革命’(획시기적일대혁명)으로 묘사하고, ‘민중본위’라 하면서 민의 열렬한 희망, ‘排淸獨立’(배청독립), ‘開化進取’(개화진취)를 갑신정변의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학생》지에 김옥균의 최후를 장렬하게 극화한 희곡 ‘대무대의 붕괴’를 연재한 후 조선시대극연구회를 만들어 순회 공연하였다. 시대극을 민인 계몽의 수단으로, 위인을 대중역사 교육의 소재로 삼아 김옥균 등 갑신정변에 참여한 인물들을 영웅화해, 김옥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대신 혁명가로 부각시켰다. 1989년 2월 22일 공주군청의 주도로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현 공주시 정안면) 소재 생가 터를 정비하고, 복원된 생가 앞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박규수, 오경석 등으로부터 신문물을 접하고 서방에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開化)를 해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자들의 폐쇄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반대, 비판하였지만 족벌체제로 변질되는 민씨 정권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조선이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 스스로 개항을 하여 외국의 선진문물과 장점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처음에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추진했으나, 민씨 일족의 부패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의 벽, 청나라의 영향력 등에 부딪히자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쿠데타를 기도, 준비하게 된다.
개화사상에 철저히 심취하여 스승 유홍기가 중인 신분임에도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전해진다. 이후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명되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2007년 이후 뉴라이트 등 일부 단체에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뉴라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기존에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제도와 문벌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평가,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보기도 한다.
그는 민씨 일파의 외교 정책에 대한 폐쇄적인 위정척사 주장도 반대하면서도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배척했다고 한다. 실제로 처음에 그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 운동을 추진했으나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세도정권의 벽에 부딪히자 부득이 쿠테타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변혁을 시도했으나, 민심의 지지를 받지못한 채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다는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생가 터에는 추모비가 설치되었으며, 1976년 충청남도 기념물 13호로 지정되어 공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머리털과 옷을 묻은 무덤이 있다.
그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나 명나라 혹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외세의 개입을 비판하면서도 갑신정변 당시에는 일본에 의지하게 되었는데 외세에 의존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사전 준비가 치밀하지 않았던 점과 정변의 주체 세력이 너무나 허약했던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그때까지 조선에서 수구파(守舊派)의 후견세력인 청나라 등의 영향력이 조선사회 내에 막강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홍종우의 김옥균의 암살 사건은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김옥균 암살 계획을 미리 감지한 쪽은 일본 정부였다. 그러나 암살을 애써 저지하지 않았다. 한때 김옥균을 근대화의 선구자 운운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한 일본이었지만, 김옥균이 청국의 간섭에 막히며 정변에 실패하고 조선 자객에게 쫓기는 몸으로 전락하자 찬밥 대하듯 했다. 그런데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한테 암살당하자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일제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암살당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애도하고, 의연금을 모으고, 시체 수습 문제를 협의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였다.
한편 조선은 김옥균 암살이 국가의 경사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홍종우는 단번에 실력파 황실 관료로 부상한다. 그로서는 프랑스에서 외롭게 공부하며 조선을 근대국가로 발돋움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에 옮길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청에 불행이었다. 일본은 김옥균이 일본인이나 다름없고, 일본 여관에서 사건이 일어난 만큼 사건 관할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 암살을 방치한 청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청은 홍종우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조선 정부의 요구대로 홍종우와 김옥균 시신을 조선에 넘겼다.
조선과 청은 일본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만국공법과 같은 허울 좋은 세계 공존론을 맹신한 나머지 제국주의가 침투하리라는 예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조선 침략, 나아가 대륙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에게 김옥균 암살 사건은 대단한 호재였다. 김옥균 암살 사건은 장기적으로는 조선 합병, 당장에는 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기막힌 명분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청과 일본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의해 정면으로 부딪힌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김옥균이 역적이 되자 문중에서는 '균' 자 항렬의 이름을 '규' 자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