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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 1,1-8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5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돈주머니 대신 당신께 대한 ‘믿음의 주머니’를 차고,
여행보따리 대신 ‘희망의 보따리’를 매고,
자신의 발에 맞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들’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자신의 평화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이요,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임과 동시에 부활의 첫 번째 선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15)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도 평화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루카 24,36)
또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말고 친교를 나누며,
동시에 이는 “차려주는”대로 먹으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곧 유대 율법에 따라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차려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함을 말해줍니다.
또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함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이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본질이고 우선’이며, ‘무엇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지’를 잘 분별하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인연에 대하여>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한 주일 사이에 저는 두 부류의 제자를 만났습니다.
둘 다 제 제자이지만 한 제자들은 수도원을 떠났고, 다른 제자는 이번에 사제품을 받은 새 사제입니다.
어제는 새 사제가 저의 공동체에 와서 첫 미사와 식사를 같이했는데,
이 형제가 끝까지 사제가 되어준 것이 너무도 흐뭇하고 기뻤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된 것이지만 마치 저를 위해 사제가 되어준 것 같았다는 말입니다.
아마 부모님들의 마음들이 이런 저의 마음과 똑같을 겁니다.
이에 비해 지난주 만난 제자들은 진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전날 회식 때 기쁘게 즐겁고 대화 나누고 다음 날 미사를 드리는데, 그중 몇이 미사를 따라 하지 못할 정도로 그간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그런 것이겠지, 미사에 안 나가도 나름대로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지,
이런 식으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저 자신에게는 위로하려고 해도 여간 아쉽고 씁쓰레한 것이 아니었고 배신감과 허탈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수도원 있을 때 제가 가르친 것이 이것밖에 되지 않았나!
내가 가르치고 물려준 것이 고작 이것이었나!
이런 것이었지요.
수도원을 나가서도 연을 끊지 않고 저를 찾아 준 것은 너무도 고맙지만,
저와의 관계가 인간적인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디모테오와 티토와 바오로 관계처럼 한 믿음의 관계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던 겁니다.
저의 바람은 인연(因緣)이 인연(人緣)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가 인연 차원에서 잘 산다는 것은 나쁜 인연은 끊어버리고 좋은 인연은 끊지 않고 이어가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좋은 인연이라는 것이 그저 인간적인 인연에 그친다면 이렇게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좋은 관계라 하기엔 부족하지요.
부자지간과 모녀지간도 마찬가지지요.
부자지간과 모녀지간의 인연은 계속 유지되는데 자식들이 언제부턴가 부모와 같은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부모들이 신앙의 부모들은 되지 못한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어제 회심한 바오로가 오늘 두 성인에게 같은 믿음의 아비가 된 것은 바오로에게는 여간 큰 행복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여간 큰 모범과 도전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들을 믿음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그가 이들에게 믿음의 아비가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아들 디모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울로가 아들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바오로가 이렇게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서간을 통해서 받은 은사를 상기시키고,
그 은사를 다시 불태우라고 격려하였기에,
오늘 축일로 지내는 두 아들이 같은 믿음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제가 사제가 됨으로써 육신의 아비는 되지 못했지만 저를 아비처럼 생각하는 아들과 딸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이 부디 인간적인 사랑과 인연으로 그치지 말고 저와 같은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고 살아가길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과 대자 대녀들과의 관계도 오늘 바오로 사도와 두 아들과의 관계와 같기를 기도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고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 하시며 홀로서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사는 왜 하는가?
사랑과 존경에서 합니다.
인사를 통해 상대방과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많습니다.
잘 보이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또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근본은 잃은 채 껍데기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인사까지 하지 마라.’는 것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마라.’,‘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았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지, 어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되겠는가 하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지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익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 내용은 '김대건 신부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며 '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더 많은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 ‘끊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오로지 주님 안에 머물라는 사랑의 충고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인사를 하다 보면, 다시 말해 사람에게 매이다 보면 진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는 일깨움을 주십니다.
사람이 정에 매달리다 보면 근본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인기가 오르는 것 같은데 주님의 눈 밖에 납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고,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
(이사 61,10 공동번역)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즐거워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욕망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외쳤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로마 8,5-6)
그는 감옥 안에서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테오 1,8)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는 삶을 갈망하는 오늘을 겸손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고, 복음을 ‘지금 여기서’ 산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단순한 입의 고백이 아니라 가슴을 거쳐 손발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을 전하면 어째서 죄에서도 벗어날까?>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편지를 쓴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많이 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할 때 내용입니다.
특별히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큰 울림을 줍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 근데 일꾼은 적다. 너는 뭐하고 있니? 빨리 일해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시는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죄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묵상해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죄에서 벗어나는 것, 에덴동산에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선악과를 먹지 않게 되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래도 선악과가 탐스러워 보였을까요?
어쩌면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기에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요?
죄는 행복해 보이니 짓게 됩니다.
만약 남편이 뭐 외도를 했다, 그래서 또 여자분이 굉장히 힘들어서 암에 걸리셔서 돌아가시는 분이 계셔요.
그런 분을 볼 때는 남자도 문제가 있지만 암 걸리는 나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그렇게 바람피우는 일이 행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내가 더 고통스러울 수 있거든요.
어떤 분은 남편이 그렇게 하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미워 보였다가 나중에는 성체조배를 1년 동안 하고 났더니, 남편이 불쌍해 보이더래요.
죄짓는 게 더 이상 행복으로 보이지 않게 만드신 거죠.
우리의 선택은 항상 뭐가 더 행복인가에 대한 우리의 시선에 달려있습니다.
뱀이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서 죄를 더 행복하게 보이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유혹하지 마! 나는 죄를 끊을래. 나는 유혹을 안 받을래. 나는 사탄에게서 벗어날래.” 하더라도 더 큰 행복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찾지 못하면 절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 큰 기쁜 맛이 있어야 합니다.
초신자의 시선이라고 하는 유튜브 채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자매가 심한 우울증에 걸렸어요.
엄마랑 둘이 사는데 뭔가 대인관계가 안 되는 거죠.
친구들한테 왕따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점점 더 학교에 안 나가고 싶어지고 집에만 머물고 성적 떨어지고 대학도 들어갈 수 없게 되고 심지어 혼자 계신 어머니가 암에 걸리신 거예요.
그러니까 고통을 더 이상 감내를 할 수 없는 거죠.
개신교에 다니긴 했는데 기도들 했대요.
울기도 하고.
그런데 이 현실로 돌아오면 또 똑같은 거예요.
내가 정말 외로울 때 내 그 불안함과 외로움을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거는 내 나 자신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나 자신에게 정말 고마운 거죠.
고마우면 나 자신의 말을 따라주게 되는데 자아는 뱀이잖아요.
그러니까 뱀이 원하는 게 뭐겠어요.
나의 멸망인 거죠.
자기처럼 땅으로 끌어 내리기를 원하는 거죠.
안에서 자꾸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냐면, “죽어. 살면 뭐 해?”
정말 죽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대요.
그만큼 삶이 힘들었던 거죠.
근데 이게 뭐예요?
유혹인 거잖아요.
뛰어내리는 게 더 맛있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바닥이 뱀이 우글거리는 땅이 쑥 꺼지면서 지옥이 보이는 거죠.
그냥 바닥이었으면 바로 뛰어내렸을 텐데 죽음이 끝이 아닌 영원한 고통의 시작임을 보고서는 이 지상에 다시 천국으로 느껴졌대요.
알고 봤더니 어머니가 딸을 위해 매일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딸은 이제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남을 구하려는 어머니와 같은 삶이 더 큰 행복임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방법은 죄가 덜 행복하게 보이게 만들고 사실은 더 고통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행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얻는 평화와 행복이 훨씬 크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거죠.
내가 그분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못하면 그 행복도 맛볼 수 없고 그러면 그 행복을 잃게 만드는 죄의 고통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죄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죄를 고통 중의 고통으로 느끼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이란 나에게 은혜를 주신 분의 밭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추수꾼이 되는 일입니다.
이소라 씨하고 얼마 전에 신동엽 씨하고 23년 만에 만났습니다.
이소라 씨가 유튜브를 하나 개설을 한 거죠.
전에 한 6~7년 사귀었잖아요.
지금 신동엽 씨는 결혼도 했고 애들도 있는데, 지금 이소라 씨가 어떤 유혹의 뭐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이전 이야기들을 그냥 재미있게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신동엽 씨 나름대로 해야 할 일 안에서 상대가 유혹의 대상이 아닌 일 안에 속한 대상들입니다.
주인의 밭에서 추수할 곡물에 마음을 빼앗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들이 유혹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추수하여 주인을 기쁘게 할 대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주님의 일꾼이 되면 이 세상 것들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일거리이지 유혹거리로 보이지 않게 되어 죄도 안 짓고 좋은 일을 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려면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될 수 있을 만큼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영혼은 이제 추수해야 할 곡식들로 보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세기 교회의 공동 수장 역할을 하셨던 분이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일종의 업무 분담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주로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반면, 바오로 사도는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곳저곳 유랑선교를 하시던 바오로 사도는 당신이 개척하신 교회 책임자로 제자이자 협조자들을 선택하여 임명하셨는데, 그들이 곧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였습니다.
교회 최고책임자요 일종의 공동 교황이셨던 바오로 사도께서 협조자요 주교였던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은 얼마나 형제적인지 얼마나 절절한지, 접할 때마다 큰 감동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높은 사람이라고 어께에 힘 딱 주고 폼 잡고, 낮은 사람이라고 어떤 사람처럼 95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절대 그런 법이 단1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 사이의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는 오늘 우리가 맺는 관계 맺음 방식에 진지한 성찰을 하도록 초대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 주교와 사제 사이, 원장과 평수도자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지 아주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표현들, 문장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끈끈한 동지애와 형제애, 그리고 깊은 신앙과 겸손의 덕이 오는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오로 사도의 서한에는 제자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따뜻한 가족 정신이 충만합니다.
그들을 향해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냥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 바오로 사도는 제자이자 협조자인 주교들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던 스승이었습니다.
이 시대 우리 목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노력입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성찰에 성찰을 거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받게 된 끝도 없는 박해와 수모, 셀 수도 없이 겪은 죽을 고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중심으로 한 가족애로 똘똘 뭉쳐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 6,31-34)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하고 있다면, 그 걱정 때문에 이미 평화를 잃은 상태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러면 ‘주님의 평화’를 전해 줄 수 없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하는데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는커녕 ‘걱정스러운 소식’을 전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먹여 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7절-8절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라는 말씀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라는 말씀에 연결되고,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일꾼들을 먹이신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여서 음식을 차려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그 사람의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혹시라도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이들이 그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후원하는 이들을 따로 준비해 주십니다.
그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누군가는 그들을 후원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직분의 차이이고, 탈렌트의 차이인데, 두 일 사이에 높고 낮은 차이는 없고, 똑같이 고귀하고 거룩한 일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라고 물으신 일이 있는데,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여기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종말과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 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일꾼’이라는 표현 때문에 성소자를 모집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지만, 사실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다만 맡은 일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꾼을 모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세속 일에 연연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라는 말씀에서 ‘평화’는 복음의 내용을 가리키기도 하고,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의 평화를 전해 주는 일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싸움’이 아니라 오직 ‘평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일부 종파에서는 선교활동을 마치 전투를 하듯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싸움이 일어납니다.
평화는 없고 전쟁만 벌어집니다.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그 종파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먼저 싫어하게 됩니다.
그러니 전투를 하듯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께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라는 말씀은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과 “그 나라는 은총과 사랑의 나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삶의 리듬- 친교의 관상, 선교의 활동>
12년 전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오늘날도 호소력이 있고 공감이 가는 2권의 책을 선물받았고 즉시 대략 다 읽었습니다.
한권은 <피로사회), 한권은 <시간의 향기-머무름의 기술->이란 책으로, 현대사회는 물론 공동체 이해와 건설에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또 어제 받은 카톡 글도 공동체 삶에 좋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인용합니다.
"2500년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섭공이라는 제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나라에 문제가 있었으니, 백성들이 날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떠나인구가 줄어들고 세수가 줄어들어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초조해진 섭공은 공자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날마다 백성들이 도망을 치니 천리장성을 쌓아서 막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공자는,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者來)”, 이 여섯 글자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者來)” 무슨 뜻입니까?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라는 뜻입니다.
기쁘게, 행복하게 사는 형제들의 공동체라면, 향기로운 꽃을 찾는 벌들처럼 저절로 성소자도 피정자도 손님들도 끊임없이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향기나는 매력적인 좋은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Christ is password for a happy life”
(그리스도는 행복한 삶의 암호이다)
엊그제 강론에 인용되어 많은 분들에게 신선한 깨우침이 된 교황님의 말마디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공동체의 비밀은, 열쇠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 가까이 함께 있는 사람들이 기쁘게 살면 멀리있는 사람들도 저절로 찾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제자들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공동체 훈련이 잘 된 그리스도 예수님의 친교 공동체는 제자 72명을 파견하므로 빛나는 선교공동체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정말 좋은 공동체는 친교공동체이자 선교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어제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었고, 오늘은 바오로의 최측근 제자이자 영적 아들이자 협력자인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성 티모테오는 터키의 에페소 교회를, 성 티토는 그리스의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던 목자입니다.
오늘 독서 둘을 보면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삶에 충실하며 제자들을 사랑했는지 마음에 와닿습니다.
성 티모테오에게 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전례 중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내리시고,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시어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 하시며,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를 이뤄주십니다.
티토에게 준 편지글 중 일부입니다.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새삼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은총과 자비와 평화의 영적 보물창고의 패스워드 즉 암호이자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성 바오로, 성 티모테오, 성 티토 모두가 참 좋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형제들임을 깨닫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모시진 못했어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서 바오로의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의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이니 바로 이점이 우리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서 파견되는 72명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놀랍습니다.
얼마나 영적훈련이 잘 된 공동체의 제자들인지 짐작이 갑니다.
필요가 적을수록 진짜 부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만으로, ‘하느님의 나라’ 비전만으로 참으로 부유하고 행복한 무소유의 제자들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병자들이 있으면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여라.”
군더더기 없는 본질적인 사명의 나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과 그리스도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 되었기에 거품이나 환상이 없는 이런 단순한 본질적 깊이의 무소유의 삶입니다.
문자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지 말고 피하지도 말고,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면서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면서 무소유의 영성을,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늘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정이 날로 깊어갈수록, 우리 모두 소유에 소유되지 않고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무소유 영성의 자유로운 삶을, 지상 순례자로서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다음에는 일흔 두 제자의 귀환이 소개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의 공동체는 ‘관상의 친교’와 ‘활동의 선교’라는 공동체 삶의 리듬이, 균형과 조화가 얼마나 필수적인지 봅니다.
새삼 우리 성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자들이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는 '친교의 장'이자 동시에 '선교의 장'임을 깨닫습니다.
친교와 선교,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의 '삶의 리듬'은 생명의 리듬이요, 어제 읽은 구절도 생각납니다.
“리듬이 없는 시간은 고유한 시간의 질(質)을 상실한 채 양화(量化)된 시간이다.
한마디로 ‘향기가 없는 시간’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친교의 관상가(觀想家)로 산처럼, 또 선교의 활동가(活動家)로 강처럼,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조화롭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성체를 통해 하늘나라의 사도로 파견받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견진을 통해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서약을 통해 수도자나 재속회원이 됩니다.
또 미사 때마다 받아모시는 성체를 통해 하늘나라의 사도로 파견받습니다.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안수'를 받습니다.
세례 때, 견진 때, 서약 때, 서품 때 그리고 피정이나 특별한 축일 때 안수를 통해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받고 갖가지 은사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은사를 받고 삽니다.
그런데 세상사에 짓눌려 살다보면 그 은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는 두려워하고 자신없어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애제자 티모테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답게 화이팅하라네요.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2티모 1,6)
우리도 화이팅합시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는 하느님의 은사를 받았고 또 매일같이 받는 사람이 아닙니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힘들 때마다 내가 받은 안수를 기억합시다.
내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기억합시다.
내 삶이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이에게 그 어떤 선물보다 훌륭한 선물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티모테오에게 기도를 선물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2티모 1,2)
벗님,
벗님의 가족 친지나 친구 지인들 중에 어렵고 힘든 이들이 있어도, 내가 가진 것이 없어 도와주지 못해 안타깝고 답답할 때가 있지요?
그때 오늘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를 위해 기도해 주듯이 기도하세요.
그 어떤 선물보다 큰 선물이 될 겁니다.
그를 위해 하느님과 예수님의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빌어주십시오.
오늘 이 말씀을 받는 벗님을 위해 저도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의 풍성한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기원하며 두 손 모읍니다.
이런 기원 안에서 벗님은 나의 벗이요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저를 위해서도 그렇게 빌어 주실꺼죠?
오늘 우리 회원들 서로를 위해 그리고 벗님이 아는 지인들을 위해 이렇게 화살 기도를 날려주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안수와 기도를 통해 티모테오에게 힘을 불어 넣어준 사도 바오로는 애제자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1티모 2,1)
사목자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이나 부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사실 사목자도 인간인지라 권력으로 백성을 짓누르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을 등쳐먹는 부자들을 위해 간청하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런 인간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시고 욕심덩어리 부자들을 망하게 해 달라고 저주를 내리고 싶지요.
사목자는 물론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와 공정을 설파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권력자들의 비리와 불의를 고발하면서도 그들을 심판하기보다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단죄하기보다 그들이 양심에 따라 살아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아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권력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기보다 쉽게 심판하고 단죄만 함으로써 그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지 못했음을 사목자들은 고백해야 합니다.
사목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목자가 되어야 하지, 일부 사람들을 위한 목자로 불림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기에 편견과 편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 선택은 당연지사이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의 소명은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열두 사도가 아닌, 익명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 기사를 다룹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는 말씀이 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사람들에게 무례해도 괜찮다거나 무관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관습상 인사는 현대인의 "Hi-Bye" 수준이 아니라 족보와 친족의 근황까지 묻고 답하는 상당히 긴 의례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길 가는 중에 멈추지 말고 파견받은 목적을 향해 지체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또 이제 막 지명을 받아 파견되는 애송이 선교사로서 아직은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즉 사명과 파견에 대해 섣불리 넘겨짚거나 우쭐하지 않도록 마음을 흩뜨리지 말라는 스승의 당부도 담겨있을 겁니다.
예수님은 파견지에서 나눌 첫 인사와 머무름, 식사, 병자 치유와 선포 내용까지 자상하게 일러주시면서, 행여 탁발에 익숙치 않은 제자들이 마음으로 부담을 느낄까 염려하시고,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루카 10,7)고 독려하시기까지 합니다.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이야기하듯이, 주님께 파견받은 이는 자신의 재주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은사로 사명을 채워갑니다.
자기 명예나 재산을 위해 일하지 않기에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2티모 1,8) 합니다.
복음, 기쁜 소식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약한 이들을 통해 선포될 때 하느님의 권능과 은사는 더욱 빛을 발하고, 선포된 복음을 만난 이들에게도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안겨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들,
오늘 우리가 받은 안수와 은사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보잘것 없음에 의기소침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기쁜소식을 전하는 겸손한 제자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3년 11월 24일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을 발표하였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등불’과 같습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첫걸음’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첫걸음의 시작은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고향과 친족을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이 첫걸음은 이웃을 향해서 내딛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웃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첫걸음은 공동체를 향해서 내딛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어머니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형제요, 어머니다.”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이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이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공동체를 향해서 내딛는 첫걸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인간을 넘어 함께 살아가야 할 모든 생명, 어머니인 지구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도 주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공동체를 향해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가 내딛는 첫걸음에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입니다.
공간에 대한 소유가 시간과 전진에 대한 관심을 압도할 때 비극이 시작됩니다.
공간에 대한 소유가 시간과 전진에 대한 관심을 압도할 때 전쟁과 폭력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고에 물건을 가득 쌓아놓고 기뻐하는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종교의 가르침은 공간보다 시간을 우선시 합니다.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고통 중에 있는 중생들에게 집착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욕망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해탈’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공간과 소유가 차지할 자리가 없습니다.
공자도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때’가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시간이 공간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공간에 대한 집착보다 시간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백번 묻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낮다고 합니다.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더 낮다고 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참된 양심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갇혀버리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서 먼저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2023년 10월 초, 미국의 자선가 찰스 프렌시스 척 피니가 92세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에게 아주 엄격했습니다.
10달러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다녔으며, 그의 옷은 기성복으로 헤질 때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호텔은 항상 저렴한 곳을 찾았고, 옷도 호텔방에서 직접 빨아 입었습니다.
비행기는 이코노믹석만 고집했습니다.
가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8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0조 8,000억 원을 여러 곳에 기부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를 익명으로 했습니다.
모든 사업에 성공했지만, 그 성공을 자기의 편안하고 안락함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소비와 사치를 누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지만,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도 한 번에 구두 두 켤레를 신을 수 없어요.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 그들이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것만큼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척 피니는 전 재산을 남김없이 세상에 기부했고, 이로써 그의 재단은 2020년에 해산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나요?
주님의 일은 자기 혼자만 잘 사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모두 잘살게 하는 것,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그가 힘든 삶을 사는 것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상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보여 주십니다.
즉,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닌, 섬기는 삶을 살아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척 피니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세상에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화려하고 넉넉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의 참 평화를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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