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조(太祖) 1권(卷) 총서(叢書) 110번째 기사(記事)
태조(太祖)의 공적(功績)을 치하(致賀)하는 교서(敎書)
<번역문(飜譯文)>
전략(前略)
경(卿)은 대대(代代)로 충의(忠義)를 쌓아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했는데, 덕(德)이 후하매 유광(流光)이 경(卿)의 몸에 나타났으며,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을 다 갖추었으니 왕좌(王佐)의 재주요, 나라만 위하고 집은 잊었으니 사직(社稷)의 신하(臣下)요, 천지(天地)와 조종(祖宗)께서 도타이 낳았으니[篤生] 삼한(三韓)의 안위(安危)에 주의(注意)한 것이고 현릉(玄陵)에게 지우(知遇)되어 홍건적(紅巾賊)을 섬멸(殲滅)하여 양경(兩京)을 수복(收復)하고, 요망(妖妄)스런 중[僧]을 몰아내어 왕씨(王氏)를 편안(便安)하게 하고, 나씨(納氏)를 달아나게 하여 사막(沙漠)에 위엄(威嚴)을 떨쳤고, 왜구(倭寇)를 패퇴(敗退)시켜 서해(西海)를 보전(保全)하고, 인월(引月)에서 공격(攻擊)하여 부상(扶桑)을 겁(怯)내게 했는데, 경(卿)은 현릉(玄陵)의 지우(知遇)에 감격(感激)하고 종묘(宗廟)의 절사(絶祀)를 슬퍼하여 해가 지는 곳[虞淵]에서 해를 붙잡기를 맹세(盟誓)하였으니,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천지(天地)에 통(通)하고, 지극(至極)한 충성(忠誠)은 조종(祖宗)에 통(通)하였소.
지극(至極)히 공평(公平)하고 지극(至極)히 정대(正大)함은 삼한(三韓)의 마음을 감복(感服)시켰고, 지극(至極)히 인애(仁愛)하고 지극(至極)히 은혜(恩惠)로움은 만백성(萬百姓)의 환심(歡心)을 맺게 하였소.
하늘은 대순(大順)을 돕고 사람은 대신(大信)을 돕는 까닭에, 흥복(興復)이 이같이 쉬웠던 것이오.
경(卿)은 이에 현릉(玄陵)의 지우(知遇)를 진실(眞實)로 갚게 되었소.
옛날에 주공(周公)이 국가(國家)에 훈공(勳功)이 있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동방(東方)에 제후(諸侯)로 삼았으니, 내가 경(卿)의 충성(忠誠)을 가상(嘉尙)히 여겨 모토(茅土)를 나누어 대대로 봉후(封侯)하게 하고, 모습을 그리고 공(功)을 새기며, 자손(子孫)에게 무궁(無窮)한 세대(世代)까지 유사(宥赦)하게 하오.
내가 원자(元子)를 거느리고 이 일을 종묘(宗廟)에 고(告)하오.
아아! 경(卿)이 우리의 억조(億兆) 백성(百姓)을 살리고 우리의 종사(宗祀)를 계승(繼承)하여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건국(建國)하게 한 공로(功勞)는, 변변치 못한 포상(褒賞)으로써 어찌 그 만분(萬分)의 일(一)이라도 보답(報答)하겠는가?
후략(後略)
[출처=<朝鮮王朝實錄>,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원문(原文)>
전략(前略)
卿世積忠義, 乃心王室, 德厚流光, 發于卿身。 經文緯武, 王佐之才; 國爾忘家, 社稷之臣。 天地祖宗之所篤生, 三韓安危之所注意。 遇知玄陵, 殲紅賊而收兩京, 驅孼僧而安王氏, 走納氏而威沙漠, 敗倭寇而保西海, 擊引月而懾扶桑, 而卿感玄陵之知遇, 痛宗廟之絶祀, 誓取日於虞淵, 至誠徹乎天地, 至忠通乎祖宗。 至公至正, 有以服三韓之心; 至仁至恩, 有以結萬姓之歡。 天祐大順, 人助大信, 故興復如是其易也。 卿於是信報玄陵之知矣。 昔周公勳勞, 而俾侯于東。 予嘉卿忠, 分茅世封, 圖形銘功, 宥胤無窮。 予率元子, 告于閟宮。 嗚呼! 卿活我兆民, 紹我宗祀。 再造我三韓之功, 以不腆之褒, 何報萬一哉?
후략(後略)
[註 1] 양경(兩京) : 평양(平壤)과 개경(開京)
[註 2] 중[僧] : 신돈(辛旽)
[註 3] 나씨(納氏) : 나하추(納哈出)
[註 4] 부상(扶桑) : 일본(日本)
[註 5] 대순(大順) : 지극(至極)한 순리(順理)란 말
[註 6] 대신(大信) : 지극(至極)한 신의(信義)란 말
[註 7] 현릉(玄陵) : 공민왕(恭愍王)
[출처=<朝鮮王朝實錄>,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위에 인용(引用)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太祖) 1권(卷) 총서(叢書) 110번째 기사(記事)에는 “사막”(沙漠)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사막”(沙漠)은 구체적(具體的)으로 어느 지역(地域)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원문(原文)에서 “沙漠”(사막)이라는 낱말을 검색(檢索)하면 모두 28건(件)이 나옵니다.
여기서 28건(件)의 “沙漠”(사막) 모두가 똑같은 대상(對象)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조선(朝鮮)의 강역(疆域)과 사막(沙漠)은 어떠한 관계(關係)가 있었을까요?
조선(朝鮮)의 북방(北方) 변경(邊境) 바깥은 모두 사막(沙漠)이었다고 보아도 무방(無妨)할까요?
참고(參考)로 언급(言及)하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중종(中宗) 22년(1527년) 6월 3일 3번째 기사(記事)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 지방(地方)은 사막(沙漠) 지대(地帶)와 접(接)하였기 때문에 인물(人物)이 쇠잔(衰殘)한데도 오히려 이엄(耳掩)을 만들 털과 몸을 따스하게 하는 모물(毛物)을 수없이 구색(求索)하여 끝없이 징렴(徵斂)하고 있습니다.”
“平安, 永安, 地濱沙漠, 人物凋殘, 猶以掩耳之毛; 溫身之物, 求索如林; 徵斂無極”
[출처=<朝鮮王朝實錄>,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바로 위에 인용(引用)된 문구(文句)만을 검토(檢討)한다면,
조선(朝鮮)의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 곧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은 사막(沙漠)에 인접(隣接)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반도(韓半島)의 이북(以北) 변경(邊境) 바깥은 사막(沙漠)이라고 이름을 붙일 만한 지역(地域)은 없습니다.
여기서 사막(沙漠)은 “몽골고원(蒙古高原) 내부(內部)에 펼쳐진 거대(巨大)한 사막(沙漠)” 곧 “고비(Gobi) 사막(沙漠)”을 가리킬까요?
“사막”(沙漠)이라는 낱말 이외(以外)에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太祖) 1권(卷) 총서(叢書) 110번째 기사(記事)에는 “왜구”(倭寇)와 “부상”(扶桑)이라는 낱말도 나옵니다.
여기서 두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對象)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부상”(扶桑)을 일본(日本)이라고도 하는데, “왜구”(倭寇)와 전혀 다른 것일까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인월(引月) 전투(戰鬪)는 유명(有名)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태조(太祖)가 왜적(倭賊) 곧 왜구(倭寇)를 격퇴(擊退)한 것을 말합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인월(引月)에서 공격(攻擊)하여 부상(扶桑)을 겁(怯)내게 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말하므로, “왜구”(倭寇)와 “부상”(扶桑)은 서로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왜구(倭寇)를 패퇴(敗退)시켜 서해(西海)를 보전(保全)하였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서해”(西海)는 구체적(具體的)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첫댓글 조선의 북쪽에 사막이 있다는 내용은 최두환 박사님의 저서 [대동여지도 와 낙타전쟁] 에서 상세히 다루어진것을 보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왜구 와 이성계의 전장이 장안의 서쪽에 있었다는 부분을 제가 못 본거 같은데 아무래도 이부분은 최두환 칼럼에 정중하게 글 을 올리시는게 효과적 이라고 생각 합니다 다들 관심을 가질겁니다 서경은 지금의 시안이고 동경은 지금의 낙양 인데 왜구 가 시안 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은 아직 그 문헌근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최두환 칼럼에서 이미 다루어진 문제 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정중하게 질문 드려보시기 바랍니다
<최두환 칼럼>에 변화가 있습니다. 최두환 선생님의 글들이 거의 다 삭제되었습니다. 무슨 이유인가요???
왜구(倭寇)는 지명(地名)이 아니고 "해적(海賊) 집단(集團)"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부상(扶桑)은 지명(地名)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太祖) 1권 총서 110번째 기사에 따르면 왜구(倭寇)와 부상(扶桑)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제되는 것입니다.
왜구(倭寇)들이 활동한 지역의 범위와 부상(扶桑)의 지리적 위치를 확정하는 것이 향후의 연구 과제입니다.
최두환칼럼에서 좋은 글은 모두 사라졌군요 무슨일인지'''??? 본인 스스로 가져간 것이겠지요 운영자가 삭제하진 않았을겁니다 너무 허전하군요 한헌석 홍진영 이태수 채윤기 지명선 등의 읽을 만 한 필재들이 사라질때도 간다는 인사 한마디 없었고 운영자의 소명도 없었습니다 해괴한 일입니다
<최두환 칼럼>의 글들이 사라진 것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본 카페가 그냥 지나가다 들르는 장소는 아닌데...
무슨 사연(事緣)이 있었는지는 회원 여러분에게 알려야 하는 것인데...
이제부터는 최두환 선생님의 "다음 카페" <아시아=조선>에서 자료를 찾아야 하나요???
1711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日本)에 갔었던 임수간(任守幹)의 기행록(紀行錄)인 <동사일기(東槎日記>의 해외기문(海外記聞)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일찍이 나는 사신을 받들고 그 나라(=일본)에 갔을 때 비싼 값으로 그들의 역사 서적을 가만히 사 보고 그 흥망의 사적을 대개 알 수 있었다. 수백 년 전에는 국내가 분열되고 전쟁이 잇따라서 서로가 잡아먹으려 했고, 우리나라(=東國) 또는 중국(中國)의 절강(浙江) 등지까지 그들의 침략으로 괴로워하였다."
"曾奉使其國也. 高價而潛購其史. 其興廢之迹. 槩可見也. 數百年前. 域中分裂. 干戈日尋. 互相呑噬. 吾東及中國江浙之地."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1617년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이 일본(日本)에서 부산(釜山)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지은 한시(漢詩) - <동사상일록(東槎上日錄)>
부산(釜山)으로 돌아오는 날 바다에서 붓을 날려 종사(從事)에게 보임. [還渡釜山日洋中走筆示從事]
8천 리라 바닷길 일본 나라를 / 扶桑海路八千里
그대는 무슨 재주로 잘 다녀왔나 / 問子何能好往來
왕령이 멀리 통하고 신명이 도와서 / 王靈遠暢神明祐
소매 속의 맑은 바람 절로 건너왔네 / 兩袖淸風自渡回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