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동 주 생 가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지식인의 고뇌가 있다.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고뇌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현실의 어둠을 견뎌 내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했다.
이 시를 통해 우리 민족은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배웠다.
우리 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시 중의 하나라고 한다.
최근 중국 정부가 길림성에 있는 윤동주 생가와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을 폐쇄했다는 매스컴 보도가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적지 두 곳이 잇따라 문을 닫은 것이다.
유적지를 폐쇄한 표면적 이유가 시설 보수 공사라지만 아니다.
외교적으로 껄끄러워진 한.중 관계의 영향 때문이다.
십여 년전 백두산(장백산) 관광 여행기억이 떠오른다.
중국의 동부 3성(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을 여행 했었다.
일제 때 이곳은 우리 조상들의 항일 독립운동 근거지였다.
지금도 우리 민족의 뿌리가 있고 전통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길림성 용정시를 가로 질러 흐르는 해란강, 용두레 우물가,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윤동주 시인 생가 ...
옛날에 가 본 윤동주 시인 생가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화룡현 명동촌은 어릴 적 윤동주가 나고 자란 곳이다.
사방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쌓인 고요하고 한적한 동네다.
1900년경 윤 시인의 조부가 지었다는 남향 기와집이다.
기와를 얹은 열 칸 안채와 서쪽에 자리한 동향의 사랑채다.
양지 바른 전통적 한옥 구조 가옥이다.
윤동주가 유년기에 공부하던 방, 방학 때 귀향하여 시를 쓰던 방이 있다.
담 안의 마당 군데군데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가옥 옆 곳간에는 옷장과 가방 가재도구가 보였다.
우리는 국사 시간에 만주 땅인 고구려와 발해가 우리의 영토라고 배웠다.
대한민국이 통일되는 날 동북 3성 만주 땅은 우리와 제일 가까운 땅이다.
연길 시의 도시 간판은 한글과 한문을 병기(倂記)하고 있다.
조선족 자치주로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 있다는 증거다.
여순 감옥과 안중근 의사, 독립운동가 요람인 명동 소학교와 윤동주 시인,
연해주 신한촌의 이상설과 최재형 ...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열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웅대한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 집안시의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 유적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상징한다.
두만강 건너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한 땅은 스잔 하고 애처롭게 보였다.
일송정 푸른 솔과 두만강 푸른 물을 만나고 돌아 서며 느꼈던 애잔하고 서글펐던 감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중국은 스스로가 대국이라 하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중국은 2012년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면서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한 백과사전에는 윤동주 시인의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해 한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불편한 한.중 관계와 윤동주 시인의 국적 논란이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을 말살하려 하고 있다.
첫댓글 중국은 2012년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면서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한 백과사전에는 윤동주 시인의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해 한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불편한 한.중 관계와 윤동주 시인의 국적 논란이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을 말살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