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때 호국 성신으로 숭배되는 오악이란 산이 있었다 동쪽으로 (토함산 동악) 서쪽으로 (계룡산 서악) 남쪽으로 (지리산 남악) 북쪽으로 (태백산 북악) 신라의 중심 (팔공산 중악) 오악의 산은 통일 신라를 지켜주는 성신으로 숭배 되며서 그 한가운데 자리한 팔공산은 통일신라 성신의 중심 산이었다 신라 왕실 차원에서도 팔공산(중악)은 신라의 상징적인 산으로 관리가 되었고 발전이 되며서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팔공산 (중악) 전체가 마치 거대한 호국불교의 도량처가 되어 있었다 (삼국유사) 이후 통일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개국이 되고 이때부터 팔공산이라 불렀다는 몇가지 설이 전해 내려온다 1. 8 고을에 걸친 산이다 2. 8 성인이 득도한 산이다 3. 8 간지가 보관 되어 있었던 산이다 4. 8 공신이 전사한 산이다 첫번째 조선초기 이후 팔공산에 걸친 고을로 해안. 신령. 부계. 팔거. 하양 등이었고 두번째 설은 신라 원효대사 제자 8명이 천성산에서 팔공산으로 입산 수도하여 세사람은 삼성암 에서 다섯사람은 오도암에서 수도 끝에 8 성인으로 득도 했다는 설 세번째는 그당시 심지 대사가 속리산에 가서 진표 율사가 미륵 보살로부터 받은 8간지를 가져와 동화사에 보관 했다고 하여 팔공산이다고 불렀다는 설 등을 볼때 이 세가지 설은 시기적으로도 맞지가 않고 객관적 소명이 부족하고 큰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마지막 네번째 설이 팔공산 으로 불린 가장 가까운 정설로 들려진다 후삼국 통일 전쟁때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공산 (지금의 지묘동) 전투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왕건이 포위가 되어 생사 기로에 놓이자 8장수들이 지혜를 모아 신숭겸이 왕건의 옷과 바꾸어 입고 8장수가 함게 적진으로 돌진 하자 변장한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견훤의 군사들이 신숭겸을 쫏자 반대편에서 퇴로가 열리고 그길로 왕건은 도주에 성공 하여 천신만고 끝에 개성에 돌아 간다 이후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고려를 개국하여 왕이 된다 왕건은 고려의 왕으로서 공산 전투장을 다시 찻는다 자신을 살리고 장렬히 전사한 8 장수를 고려개국 8공신으로 추앙하고 신숭겸이 순절한 자리에 무덤을 다시 만들고 지묘사라는 사찰을 세워 이들의 충절을 기리게 하였다(지묘동 신숭겸 유적 참조) 지금도 매년 가을에 지묘동 신숭겸 무덤과 유적지에서 신숭겸 장군을 추모하는 고려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왕건이 공산전투서 살아남아 도주길의 지역명 야사들이 생생히 전해 내려온다 공산전투장에서 8장수들이 지혜를 모아 퇴로를 열었다고 하여 지혜를 모은 그 전투장을 지묘동으로 불렀고 퇴로가 열려 가장 먼저 피신 한곳이 지금의 파군재 삼거리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동상 뒷쪽에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로 처음 피신하여 왕이 살았다고 하여 왕산이다 왕산에서 파군재 삼거리로 내려와 단숨에 한동네에 도착하니 노인들은 다 전쟁터에 동원이 되어 없었고 어린 아이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어 불로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로동을 지나 또 한동네에 접어 들어 이제 겨우 위험을 피해 찌프린 얼굴을 활짝 폈다고 하여 해안동이라 불렀고 다시 평강동 쪽으로 도주하다 큰바위가 있어 그 바위위에 잠시 혼자 쉬워 갔다고하여 바위 이름을 독좌암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다시 평강동을 거쳐 초례봉을 넘어서 한마을로 접어 더는데 날은 어두운데 중천에 떠있는 달이 도주의 길을 비쳤다고 하여 그 고을을 반야월 이라고 불렀고 여기서 다시 밝은 달빛 아래로 도주하여 도착한 고을에서야 이제 겨우 살았다고 안심을 하였다고 하여 안심이라는 지역등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불리며서 야사로 전해져 내려오고 잇다 *** 팔공산의 유래 *** 출처 : http://blog.daum.net/kdjj80/23 (skthem1356님의 글이다) 팔공산의 유래 (blunken10님의 글네이버) |
첫댓글 암석으로 되곳을.귀한곳을 감사하게 보았네 짝 짝 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