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 보청기
유안상
오늘은 친정 어머니 생신이다. 우암동 사는 둘째 언니와 시외
터미널에서 7시 30분에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
나 식사를 해 놓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급해서 그런지 아차 실수로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되돌아오니 약속 시간이 20분이나 지났다. 언니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지금까지 차가 몇 대나 지나갔는지 알아?"
“다음부터는 너랑 같이 안 다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언니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애교를 부렸다.
“5분마다 차 있으니까 언니가 좀 봐줘 응?”
그러는 사이에 좌석 버스가 우리 앞으로 왔다. 언니와 나는 차
에 올라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신경질 부려서 미안하다 서운했지”
“언니가 화나는 건 당연해, 일찍 가야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과 조
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꺼 아냐"
우리가 탄 차는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향해 달려갔다. 달리는
차창 밖을 보니 어느새 내수를 지나 언니네 시골집이 보인다.
자식 교육 때문에 청주로 나온 언니는 두고 온 논밭이 아까워 시
골이 좋다고 노래를 하지만 형부는 농사일이 고생스럽다며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 언니와 나는 보천에서 내려 싱싱한 큰 수
박을 한 통 샀다. 너무 무거워 힘들었지만 집에 가서 모두 모여
앉아 떠들며 먹을 생각에 마냥 즐겁기만 하다. 택시를 타고 4킬로
미터나 더 가야 친정 집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들과 산, 정든 길이 조금씩은 변해 있
었다. 나무숲이 우거졌던 큰골은 대낮에도 무서워 혼자 다니기 힘
들었는데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되어 달리는 버스가 시원하다.
항상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성황당 고개, 오늘도 변함없
이 우뚝 서서 마을을 지키는 거목의 느티나무가 고향 찾아오는 우
리를 보고 손짓을 한다. 느티나무를 보니 나도 모르게 옛 추억이
떠오른다. 꿈 많던 소녀적, 단오가 되면 느티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달아 신나게 발을 구르던 그 시절이 아련하기만 하다.
즐거웠던 추억을 곰곰히 되새기며 언니와 나는 친정집 대문에 들
어섰다. 조카가 청주 고모들 온다고 소리치며 모두에게 우리의 방
문을 알린다. 어머니는 반가워하시며 왜 이제야 오느냐고 하신다.
그립던 형제들도 활짝 웃으며 뛰어나왔다. 8남매와 오랜만에 만나
면 할말이 그리도 많다. 어릴 적에는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세월
이 흐를수록 혈육의 정이 짙어만 간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큰언
니가 딸들만 모아 놓고 어머니께 보청기를 해 드리자는 제안을 했
다. 하루를 살다 가셔도 귀가 잘 들려야지 딸들이 하는 말도 알아
듣지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시는 모습에 우리 형제들은 목
이 메인다.
자상하시면서도 무섭던 어머니도 이제는 세월 앞에 어쩔 수 없구
나, 우리들 중 가끔 내 목소리만 들리신다고 하신다. 우리는 가급
적 빠른 시일 내에 해 드리기로 서로 약속을 하고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가기 위해 일어섰다. 뜰에는 7월의 따가운 햇살 속에 해바
라기 꽃이 노란 향기를 풍기며 자태를 뽐낸다. 마을에서 조금 떨
어진 야산 묘지 자리는 보라색 무궁화 꽃이 탐스럽게 피여 아버지
에 대한 향수를 돋보이게 했다. 묘지는 내가 보아도 명당자리이다.
남향이고 앞이 탁 트였으며 멀리 저수지 물과 조화를 이루었다.
딸 오형제가 나란히 절을 하고 아버지께 술 한 잔씩을 올렸다.
자상하시고 따뜻하셨던 아버지, 딸이 많아도 큰 내색 없이 계집
애 소리 한 번 안하시던 아버지, 우린 자주 아버지를 찾아 뵙기로
다짐하고 산소를 뒤로 한 채 산을 내려오다가 잠시 쉬기 위해 앉았
다. 그런데 나무숲이 우거진 옆에 작은 살구나무에는 탐스럽게 익
은 살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나는 반가운 생각에
"언니 저 살구 좀 봐"
하면서 손으로 가리켰다. 도시에서 사는 언니 동생들은 “웬 살구
야?”
“아버지가 우리 먹고 가라고 눈에 띄게 했나 봐.”
하며 기뻐했다. 좋은 둘째 언니는 살구나무를 마구 흔들었다.
살구가 우르르 떨어진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살구를 주
우며 마냥 좋아했다.
누가 더 많이 주웠나 자랑도 하면서 자기가 주운 살구를 한 입
베어 물다가 무공해, 토종이라면서 모여 앉아 맛있게 먹는 형제들.
다른 살구보다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열심히 살구를 먹고 있는데 큰언니는 어머니가 기다린다고 빨리
가자고 재촉한다. 우린 친정 집에 와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세
시경 꿀과 떡을 싸들고 보청기 문제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 이튿날부터 나는 바빴다. 어머니를 모시고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한 후 보청기를 맞추었다. 5일 후 보청기는 완 성이 되었고
어머니는 자식들의 목소리며 자연의 소리를 들으실 수 가 있게 되었다.
왜 좀 더 일찍 해 드리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었
그랬으면 어머니와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
어머니는 고맙다며 눈물을 흘리신다. 내가 요즘 빠져 있는 작품
을 읽어 드렸더니 내심 기뻐하시면서
“그래, 그랬지. 너 낳고 많이 아픈 날도 있었지.”
하신다.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작은 효도라도 해 드린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형제들도 이젠 어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냐면서 당신이 하고
싶으신 것, 모두 해 드리라고 돈도 넉넉히 보내 주었다.
불혹의 연세에 두신 막내딸인 동생이 어머니한테 효도를 많이 한다.
보청기를 하시고 어머니는 우암동 둘째 언니네 집으로 가셨다. 유난히
나를 좋아하시는 어머니. 이틀 못 갔더니 언니가 전화를 했다. 어
머니가 너 보고 싶다고 하시며 기다리신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다시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서 이것저것 사다가 맛있게 해 드렸다.
어머니는 주무시기 전에 “네가 많이 보고 싶었다.” 하신다. 밤이
면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잠이 드신다. 구십을 바라보는 어머
니, 주무시는 모습을 보니 못내 가슴만 아프다.
여러 남매 키우시느라 그 곱던 얼굴이 앙상한 뼈만 남으셨다.
오신지 보름만에 가시면서 딸과 언제 또 볼지 모르셨는지 눈물을
보이신다. 나도 어머니가 가신 한 참 후까지 왠지 눈물이 흐른다.
자주 찾아 뵙고 전화도 자주 드려야지 다짐한다.
마음속으로 외쳐 본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그리고, 영원히 사랑해요."
1999. 5집
첫댓글 오신지 보름만에 가시면서 딸과 언제 또 볼지 모르셨는지 눈물을 보이신다. 나도 어머니가 가신 한 참 후까지 왠지 눈물이 흐른다.
자주 찾아 뵙고 전화도 자주 드려야지 다짐한다. 마음속으로 외쳐 본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그리고, 영원히 사랑해요."
여러 남매 키우시느라 그 곱던 얼굴이 앙상한 뼈만 남으셨다.
오신지 보름만에 가시면서 딸과 언제 또 볼지 모르셨는지 눈물을
보이신다. 나도 어머니가 가신 한 참 후까지 왠지 눈물이 흐른다.
자주 찾아 뵙고 전화도 자주 드려야지 다짐한다.
마음속으로 외쳐 본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그리고, 영원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