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滉(이황)-春日溪上(춘일계상)(봄날 시냇가에서)
雪消氷泮淥生溪(설소빙반록생계) 눈 녹고 얼음 풀려 맑은 시내 흘러가고
淡淡和風颺柳堤(담담화풍양류제) 살랑살랑 봄바람은 버들 둑에 불어오네
病起來看幽興足(병기래간유흥족) 병 낫고 와서 보니 그윽한 흥취 넉넉한데
更憐芳草欲抽荑(갱련방초욕추제) 새싹 돋는 고운 풀 더욱 어여쁘네
傍柳尋溪坐白沙(방류심계좌백사) 버들 옆 시내 찾아 모래 위에 앉으니
小童新試從婆娑(소동신시종파사) 아이들은 새 옷 입고 따라와 뛰어노네
誰知滿面東風裏(수지만면동풍리) 누가 알랴 얼굴 가득 불어오는 봄바람에
繡出千芳與萬葩(수출천방여만파) 천만 가지 꽃들이 수놓은 듯 피어날 줄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退溪集퇴계집)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양기정님은 “퇴계 선생이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인 예안의 퇴계에 머물던 1561년 봄에 지은 것이다. 퇴계 선생은 조선의 성리학을 체계화하여 집대성한 분이다. 뛰어난 학문과 온후한 인품으로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문하에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고보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오랜 기간에 걸쳐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대해 허심탄회한 토론을 벌인 일은 잘 알려져 있다.
1560년에서 1561년으로 넘어가던 이해 겨울은 다른 해에 비해 날씨가 따뜻해 섣달에도 얼음이 얼지 않았다. 그런데 해가 바뀌어 봄이 되지 갑자기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매서운 눈보라도 몰아쳤다. 소와 말들도 추위에 얼어버리고 개구리는 경칩이 지나도록 깨어날 줄 몰랐다. 봄이 오기만은 학수고대하던 가난한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죽을 지경이었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는 처지였다. 퇴계 선생은 그날의 광경을 ‘봄 추위에 본 광경을 적다春寒記所見’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去歲冬溫地不凝(거세동온지불응) 지난 겨울 따뜻하여 땅이 얼지 않아
凌人臘月憂無氷(능인엽월우무빙) 선닫에는 능인이 얼음 없을까 걱정터니
今歲春寒雪塞空(금세춘한설새공) 올 봄엔 날이 추워 눈발 하늘 가득하고
凶飆頓撼山岳崩(흉표돈감산악붕)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은 산을 뒤흔드네
閭井蕭條牛馬凍(여정소조우마동) 삭막한 촌락에는 소와 말이 얼어붙고
夾鍾之末蟄未動(협종지말칩미동) 이월 끝자락에도 개구리는 꼼짝 않아
携持婦子欲棄溝(휴지부자욕기구) 처자식 이끌고서 죽어야 할 처지인데
仰訴蒼蒼那易羾(앙소창창나이공) 하소연이 하늘까지 어찌 쉬 도달하랴
마침내 추위는 잦아들고, 모진 시련을 견뎌낸 생명들이 봄을 맞이하였다. 얼었던 대지가 녹아 시냇물이 다시 흐르고 따스한 봄바람 속에 생명의 기운이 다시 태동하였다. 봄바람에 눈이 녹자 병도 함께 사라졌으니, 봄을 맞이하는 선생의 흥취는 더욱 새로웠을 것이다.
겨우내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봄의 풍경을 바라보면 어느 것 하나 정겹지 않은 것이 없지만 얼었던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파릇한 새싹은 우주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생명체이다. 매서운 북풍한설이 앙상한 가지에 몰아쳐 마음까지 얼어붙는 때에 온 세상에 울긋불긋한 꽃이 만발하리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마다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날이 다시 돌아온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입춘이 지금 막 지났으니, 봄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리고 꽃이 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벌써 내 마음속엔 꽃이 가득하다. ”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 ~ 1570년(선조 3),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시호 문순(文純),본관 진보(眞寶)]-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단양군수, 풍기군수,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이황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이황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이황은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이황을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이황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이황은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 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저서로 심경후론, 역학계몽전의,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자성록, 송원이학통록이 있다.
*泮(반) : 물가 반/녹을 반, 1.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2.(얼음이)녹다, 3.(얼음이)풀리다
*淥(녹) : 밭을 록(녹), 1.밭다(액체만을 따로 받아 내다), 2.밭치다(액체만을 따로 받아 내다), 3.거르다(액체만 받아 내다)
*和風(화풍) : 화창(和暢)하게 솔솔 부는 바람. 건들바람(초가을에 불어오는 서늘하고 부드러운 바람).
*颺(양) : 날릴 양, 1.(바람에)날리다, 날다, 2.일다, 3.버리다
*抽(추) : 뽑을 추, 1.뽑다, 뽑아내다, 2.빼다, 3.없애다, 제거하다(除去--)
*荑(제) : 벨 이, 띠 싹 제, 1.(벨 이), 2.(풀을)베다, 3.(풀을)깎다
*婆娑(파사) : 1.춤추는 소매가 가볍게 나부끼는 모양(模樣),2.(힘ㆍ세력(勢力)ㆍ형세(形勢) 따위가)쇠(衰)하여 가냘픈 모양(模樣)., 3.(거문고 따위의 소리가)꺽임이 많은 모양(模樣).
*葩(파) : 꽃 파, 1.꽃, 2.화려하다(華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