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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20 15:29:22 |
논어에는 色(색)이라는 글자가 27번에 걸쳐 나온다. 그 色은 대부분 얼굴빛, 외모, 겉모습 등등의 뜻으로 나온다. 그런데 딱 세 경우에 걸쳐 色이 여색(女色)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단편이 자한편 제17장에 나오는 다음 단편이다.
子曰;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9/17
이 단편은 특이하게도 위영공편 제13장에 子曰; 已矣乎!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라는 기록으로 다시 한 번 출현하는데 앞머리에 已矣乎!, 즉 “끝이로다” 내지 “다 되었나보다” 등으로 번역되는 절망적 한탄이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9/17의 기록과 동일하다. 왜 대동소이한 단편이 두 군데에 걸쳐 출현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그것은 이 단편이 그만큼 공자의 중요한 발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단편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나는 여색을 좋아하듯이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이 해석은 거의 예외가 없고 예외 없는 해석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주자의 해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주자의 논어집주를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주자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는 한편으로는 사량좌(謝良佐)의 해석을 인용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마천이 <사기> 공자세가에 기록한 역사적 사실 하나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용된 사량좌의 해석도 사량좌 본인의 주체적 해석이라기보다는 <대학>의 일절에 기댄 모호한 해석이어서 과연 호색(好色)이 여색을 좋아한다는 뜻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결국 여색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몰아간 것은 사마천의 기록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위나라에 머문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영공이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환관인 옹거를 동승시킨 가운데 출타하는데, 공자는 뒷수레를 타고 따라오게 하면서 위세를 떨치며 시내를 지나갔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色을 좋아하듯 德을 좋아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셨다.
(居衛月餘,靈公與夫人同車,宦者雍渠參乘,出,使孔子爲次乘,招搖市過之.孔子曰;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史記> 孔子世家
당시 영공의 부인은 송나라에서 데리고 온 천하의 미색이자 갖가지 추문의 여주인공 남자(南子)였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주자는 공자의 말이 가진 진의에 접근하기보다는 이 말을 둘러싼 온갖 전거와 역사적 권위들을 수용하는 더 안전한 방법을 채택하였다. 마치 그가 공자와 맹자를 거룩하게 추존하고 송대의 숱한 성리학 선배들을 높이 받든 가운데 신유교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과 같은 궤도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록은 믿을 수가 없다. 그것은 공자세가에 나오는 숱한 기록들과 마찬가지로 떠다니는 일화와 논어 단편을 대충 보아도 그 엉성함이 드러날 정도로 적당히 꿰어 맞춘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에 대한 판단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과연 공자가 말한 호색은 여색을 좋아한다는 뜻일까? 14년 전 <논어의 발견>을 출간할 무렵, 나는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그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덕을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비유적이든 비교적이든 어떤 이유로도 끌어들여질 논리적 필연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색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 요소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여색을 좋아하듯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우스꽝스러우며 전혀 공자답지도 않다.
나는 결국 호색(好色)의 색(色)이 다른 일반적인 용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외양, 겉모습, 겉치레의 뜻이 될 때에만 이 말의 진의가 살아난다는 것을 주장했다. 호덕(好德)이라는 말은 <서경> 등 공자 이전의 전적들에서 드물게나마 사례를 보이고 있지만 好色이라는 말은 공자 이전의 어떤 전적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말이다. 결국 이 말은 공자가 호덕이라는 말에 대칭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 사용한 말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색이 겉모습이 될 때에만 이 말은 그 빛나는 의도가 살아나고 호덕과 날카로운 대칭을 이루며 왜 공자가 이 말을 하면서 절망적 한탄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밝혀진다.
겉모습에 대한 추구, 그것은 여색에 대한 추구와 달리 호덕과 필연적 연관성을 갖는다. 이미 공자는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대한 불신을 표현한 바 있고 겉으로는 엄숙〔色厲〕하나 속이 유약한 사람을 벽에 구멍을 뚫는 도둑이라 했으며(17/12) 겉으로는 어진 척〔色取仁〕하면서 행동은 어긋나게 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12/21) 등 여러 발언에서 겉모습에 치중하는 행동들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모습과 겉치레에 치중하는 것의 거짓됨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 이르러 예수에 의해 지적되었던 것보다 날카로운 지적이 다시없을 것이다. 그는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행동들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外飾)을 비난하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할 뿐이며, 결국 그런 행위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짓에 불과함을 성토했다.
예수가 너무나도 정확히 설파했던 저 외식(外飾)이 바로 논어의 세계에서 공자가 우려해 마지않은 저 색(色)의 극단적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한편 제17장에서 공자가 한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보임새 좋아하듯 덕을 좋아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제 모습을 되찾은 이 단편을 통해 우리는 덕을 좋아한다는 이 접근하기 힘든 행위가 적어도 보임새를 좋아하는 우리 모두의 거짓되기 쉬운 행위의 대척점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이 어딘가! 여색의 그늘 속에 해괴한 모습으로 묻혀 있던 이 단편은 한층 선명하게 다가오는 덕의 모습과 더불어 논어의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바가 있다.
색이 여색으로 해석되고 있는 두 번째 사례는 학이편 제7장이다. 이 단편은 공자의 발언이 아닌,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의 발언이다. 논어의 제1편인 학이편에 그의 발언이 수록된 것은 공자 사후 그가 진(晉)나라로 가서 별도의 공자학단을 만들고 많은 후학들을 양성한 데에 따른 예우였지 않나 한다. 그가 남긴 발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1/7
사부모(事父母) 이하의 문장은 그 내용이나 해석상 별다른 문제가 없는 부분으로서 풀이하면 “부모를 섬김에 그 힘을 다할 수 있고 임금을 섬김에 그 몸을 바칠 수 있으며 벗들과 사귐에 말에 믿음성이 있다면 비록 배우지 못하였다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말하겠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문장의 모두에 나오는 현현역색(賢賢易色)이라는 말에 걸쳐 있다. 이 부분에 나오는 色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오랜 논란거리가 되어왔던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현자를 좋아하여 그 마음으로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꾼다.”
겨우 문장은 되었지만 말은 어쩐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어쨌든 이 한 가지와 이어지는 부모 모시기, 임금 섬기기, 교우관계에 걸친 기본 3가지를 합쳐 모두 4가지를 행할 수 있다면 나는 그를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고 배웠다고 일컬을 것이다 하는 것이 이 단편의 뜻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어서도 色을 여색으로 해석한 것이 모든 것을 꼬이게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자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꾼다는 말은 의미상으로도 괴이하고 문법적으로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결국 여기서도 色을 겉모습, 겉으로 드러난 외형으로 해석할 때에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그러면 바르게 해석된 단편은 어떻게 번역되는가?
“현명함을 중히 여기고 겉모습은 가벼이 여길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자하가 제시하는 대원칙을 가리키고 있다. 현명함〔賢〕은 말하자면 실질을 말한다. 그리고 겉모습〔色〕은 뒤이어 나오는 말과 연결해 볼 때 결국 배웠느냐 배우지 않았느냐 하는 외형을 지칭하고 있다. 부모 모시기, 임금 섬기기, 교우 관계에 걸친 기본 3가지는 여기서 제시하는 대원칙의 구체적 예시 3가지가 된다.
그렇게 정리하면 자하의 말이 갖는 취지는 말끔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직 색을 여색으로 간주하지 않고 겉모습이라는 원칙적 해석으로 방향을 돌려 잡은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색을 여색으로 본 두 번째 경우도 잘못된 해석임이 밝혀지는 셈이다.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계씨편 7장에 나오는 단편 중 다음 모두 부분이다.
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이하 생략) 16/7
“군자에게는 세 가지 삼가는 것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아서 삼가는 것이 여색에 있다.” (이하 생략)
이 글에서 색은 여색으로 풀이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 같다. 그러나 계씨편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후대의 위작이 많은 편이다. 군자가 삼가야 할 것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 이 제7장도 세 가지 즐거움(16/5), 세 가지 잘못(16/6), 세 가지 두려움(16/8) 등 숫자가 제시되는 몇몇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공자의 진짜 발언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단편이다. 그러므로 전국시대의 위작으로 간주되는 이 단편에서는 色이 여색을 의미하느냐 않느냐 하는 질문은 그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논어에는 여색의 의미로 사용된 色은 없다.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어처구니없는 오해였고 그 중 특히 자한편 제17장에서와 같이 결코 오해되지 않았어야 했을 너무나도 중요한 단편에 있어서도 그 의미를 그늘 속에 가려온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논어 해석의 이면사는 이토록 황무하다. 그것을 논어 해석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빈곤이 좀 더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논어의 발견>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세상에 이런 발언을 조금씩 던지고 있다. ‘논어에 여색이 없다’는 것은 그 조그만 빙각(氷角)이라 할 수 있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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