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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실천가 서재필(徐載弼, 1864년∼1951년)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1951년 1월 5일)은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대한제국 독립운동가, 의사였다. 미국에서 병리학자, 의사, 시인, 소설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전라도 보성군 출신이다. 자(字)는 윤경(允卿), 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다. 본관은 대구이며 이름 대신 일명 “피제손”과 필명은 오시아(N. H. Osia)를 사용하였다.
지난날 한때 그는 김성근(金聲根),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기도 하며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고종 20년)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났다. 그는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 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參政權)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였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장군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 역을 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송재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동복군(현재의 보성)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徐光孝)와 이기대(李基大)의 5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뒤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동복, 문덕의 대지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
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 곳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이어 근처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던 집으로 이주하여 유아 시절을 비롯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재필은 조선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는 경종 때 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徐相夔)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고, 아들 광교(光敎), 광언(또는 광효), 광업(光業) 형제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 에서 10여년 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친형 서재춘(徐載春),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徐載衡)이 있었고, 어머니 성주이씨에게서 남동생 서재창(徐載昌), 서재우(徐載雨 또는 載愚)와 여동생 서기석 등이 태어났다.
아버지 서광효는 그에게 쌍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가 뒤에 재필로 이름을 바꾸고, 자(字)를 윤경(允卿)이라 지어주었다. 서재필은 후에 쌍경을 자신의 첫 아호로 사용하였다. 본래 서재필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노론 비주류였지만 당파 싸움을 극도로 혐오하던 서재필은 후일 1947년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인 김도태 등과 면담할 때 나는 노론이 뭐고 소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1명의 친 누나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담양군에 사는 영일 정씨 정해은(鄭海殷)에게 시집가 전남 담양군 지실마을로 시집갔다.
그의 가계는 6대조 서유승이 통덕랑을 지낸 이후 변변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서광효는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생부 서광효는 늦게 처가가 있는 보성군수로 부임하였다.
양자 출양
하지만, 서재필은 생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 넘쳤다.
어느 여름날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내려갔다가 어느 원님이 부임하러 행차하던 중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동리 어른들도 감히 원님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소년이던 서재필은 두려움없이 다가가더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비굴한 기색이 없고 당당해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보렴'하니 서재필은 바로 받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은 사유를 원이 묻자 '원님이 갖고 계신 부채를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수령은 부채를 빌려달라는 소년의 엉뚱함에 내심 기특해 하면서 부채를 빌려주었더니, 소년은 그 부채를 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민요를 한바탕 불렀다.
소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수령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소년은 "서재필입니다. 호는 쌍경이라 합니다."라며 당당히 밝혔다.
"제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한 해에 제가 태어나 경사가 두가지 겹쳤다 하여 제 이름을 쌍경이라 하였습니다."
원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고는 임지로 떠났다. 한편,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던 그는 동리 아이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한성부로 상경한 뒤에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잡다한 지식에 해박했으며 평소 자존심이 강하였다.
양부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72년(고종 10년) 한성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을 찾아가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는 양아버지의 권고로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로부터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 《사기》(史記), 《사서 육경》을 배웠는데 대부분 암송하였다 한다. 그 중에는 뜻을 아는 것도 있었으나 일부는 암기를 해 두었다."또한 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그의 집안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또한 서재필은 김옥균을 통해 3년 연상의 박영효와도 만나, 그와도 사귀게 되었다. 김옥균은 그를 각별히 대했다 한다. 이어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수학,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생가와 양가는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는 노론 북학파 계열의 영향을 받고 개화파의 형성에 참여한다.
1878년(고종 15년) 봄 서재필은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1879년(고종 16년) 초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방, 그해 봄 고종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전강(殿講)에서 1등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아,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전강에서 시관이 사서 삼경 중 아무데나 지적하자 이를 막힘 없이 일곱 번을 반복해서 줄줄 외웠다 한다. 1879년 4년 연상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 결혼하였으나 곧 사별하였다. 1881년(고종 18년) 봄 다시 김영석(金永奭)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두번째 부인 광산 김씨는 한성부의 명문 거족으로 사계 김장생과 허주 김반, 신독재 김집, 광남 김익훈의 후손이었다.
18세 되던 1882년 3월 증광 문과에 병과(3등)으로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나 과거 급제 직후, 서재필은 이렇다 할 보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4월 6일 승문원가주서로 임시 보직되었다가 김중식(金中植)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4월 18일 다시 승문원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급제 직후 정식 보직을 받지 못하자 4월 19일 박영교의 상소로 군직에 임명되었다. 4월 21일의 병조의 병비에 의해 부사정이 되고, 경연가주서를 겸하였다. 4월 25일 병으로 승문원가주서에서 체차되어 송세현(宋世鉉)과 교체되었다. 그해 6월 서재필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忠義契)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는 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동인을 처음 만난지 2개월 뒤, 이동인은 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돈주고 사왔다. 역사책도 있고 지리, 물리, 화학 관련 서적도 있었다. 이것이 신기하다 여긴 그는 친구들과 이를 보려고 서너 달 동안 봉은사에 다니다가 동대문 밖 영도사(永導寺)로 자리를 옮겨 남몰래 탐독하였다.
“모두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충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국민의 권리를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째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란 중이 우리를 인도해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절이 개화파의 온상이라 할 것이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1883년(고종 20년) 1월 14일 승정원 가주서가 되었다가, 병으로 당일 이민영(李敏英)으로 갈리게 되었다. 1883년 2월초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2월 27일 이조의 계로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서재필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활동하였다.
그해 3월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부봉사가 되었다. 이때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몰락한 양반이었던 탓에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이 적었고 이는 평민 출신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는 배경이 된다.
1883년(고종 20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유학생 대표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1884년(고종 21년) 1월에 게이오 의숙 1년과정을 수료하였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한편으로 선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 또한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일본의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서재필은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 조선인 동기생들로부터 무예를 배웠다. 택견의 명수 이규완에게서는 택견의 고난도 품새를, 유도와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서는 조르기, 누리기 등 유술(柔術) 전반에 대해 배웠다.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의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에도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솔선수범하였고, 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6월 수료하였다. 그해 6월 일본에 체류 중 다시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서재필과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병조 예하에 조련국(操鍊局)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고종의 승락을 얻어내 조련국을 창설하였으나 서재필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사망으로 서재필은 관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6월 30일 고종의 특명으로 기복의 명을 받고 서재필은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操鍊局 士官長)이 되었다. 그러나 신설된 조련국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폐지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민씨 일족과 1884년말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당시 양어머니 안동김씨의 상중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기복(起復, 부모의 3년상인데도 사직이 윤허되지 않고 특별 채용되는 것)의 특혜를 받았다. 서재필은 거듭 사양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1884년(고종 21년) 8월 20일 조련국 사관생도 교관으로 배치되어 신식 병사 양성을 맡게 된다. 그러나 고종은 사관들을 데리고 바로 대령하라고 했음에도 당일 입궐하지 않아 동부승지 김문현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이 특별히 무마시켰다. 고종의 여러번 출사 요청이 있자 그는 조련국 사관장으로서 병력의 훈련을 담당한다.
1884년초부터 서재필은 기회를 잡다가 그해 6월 귀국 이후, 10월에 있을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서재필은 조련국 병사들과 신식 군대로 구성된 행동대를 총 지휘하고 병력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였다. 7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12월초 정변 준비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 거사 자금 등을 동원한다.
정변 계획 중에 그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재조선주둔 일본육군 중대장 무라카미(村上)와 개화당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정변진행 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현장 지휘를 맡았고 그의 동생 서재창과 박영교 등은 병력을 이끌고 수구파 대신들의 처단 등을 계획했다.
1884년 11월 승지(承旨)로 특별 승진하였다.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모의하였다. 11월 9일 서재필은 조선주둔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 등을 찾아가 거사 협조를 부탁하였다 11월 16일 묘동에 있는 이인종(李仁鍾)의 집에서 김옥균과 만나 거사 계획을 숙론하였다. 11월 26일 탐골 승방에서 김옥균 등 동지들과 회합하고 빠른 시일 내로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환경 변화에 대비한 다양한 거사 세부 계획을 짰다. 11월 27일 3시에 무라카미와, 밤에 다시 동지들과 계획을 세밀히 세워 나갔다. 11월 30일에 다시 동지들과 모여 거사 준비를 하였다.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에 가서 서광범, 홍영식, 김옥균 등과 만나 12월 4일로 거사 날자를 정하였다. 12월 4일에 거사를 개시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결정하였다.
12월 2일 박영효의 집에 모여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서재필이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미 이인종, 홍영식, 서광범, 김옥균의 동지들과 함께 모이기로 한 여러 장사들, 이규정(李圭貞), 황용택, 이규완, 신중모, 임은명, 김봉균, 이은종(李殷種), 윤경순 등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의논한 결과 12월 4일에 거사키로 하고, 만일 그 날 비가 오면 다음날인 12월 5일로 연기하기로 최종 확정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서재필의 자택에서 여러 동지들과 거사 내용을 다시 점검하고 어두워지자 우정국으로 갔다. 장사패를 이끌고 교동 일대의 경비 책임을 맡았다. 그는 이인종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가다. 밤에 김옥균 일행이 고종을 만나 정변이 일어났음을 알리었다. 고종을 경호하여 경우궁까지 무사히 인도하였다. 고종 내외를 경우궁으로 파천시킨 뒤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조연이 "내 주상께 뵈옵고자 하노니 들어가게 하라"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국왕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에 서재필이 칼을 빼어들고 "내가 이 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문안에 들어가기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하고, 서재필의 부하 장사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만일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세를 보였다. 이에 이조연과 한규직은 경우궁 뒷문으로 나아갔다. 막 문 밖에 나아가자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 등에 의해 타살당했다.
12월 5일 개화파는 개화 신내각을 발표하였으며,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후영 정령관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갑신일록》에서 그를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기록하였으나 실록을 비롯한 공식문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특히 그는 정변 과정에서 대신들을 참살하는 행동대장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의 내습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1884년 12월 4일 오후 6시 한성부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 총판 홍영식(洪英植)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김옥균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집결, 이동시켰고, 우정국 입구에 매복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다시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을 처단하였고, 문신 조영하(趙寧夏)와 민태호(閔臺鎬), 민영목 등을 대한제국 고종이 지켜보는 데에서 살해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민씨 대신들은 그를 증오하였고,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그러나 민씨 척족 정권은 청나라와 연락하여 청나라 군대의 조선 개입을 요청하였다. 그는 외세의 개입을 규탄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민가로 은신하였다.
12월 9일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해주었다.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변수(邊樹)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에 숨었다가 12월 12일 인천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츠지 가츠사부로(辻勝三郞)의 일본 선박 치토세마루(千歲丸) 호에 승선했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 상선 치토세마루(千歲丸)에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숨어있던 중 묄렌도르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을 대동하고 다케조에에게 국적(國敵, 갑신정변 주동자들을 가리킴) 서재필과 김옥균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배 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품속에 비상약을 쥐고 자살을 각오했다. 한참을 뮐렌도르프들과 우물쭈물대던 다케조에는 배로 올라와 어쩔수 없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러나 배 안의 일본인들이 자국 공사의 비열함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장 츠지 가츠사부로 역시 그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며 말하길, '당신을 믿고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와서 내리라 하면 이들을 죽이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힐난했다. 다음은 그의 발언이다.
“내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인사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인간의 도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
— 치토세마루 호 선장 츠지 가츠사부로
선장 츠지 가츠사부로(辻勝三郞)는 직접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은 없으며,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할 수는 없다, 임의로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그들을 따돌렸다. 츠지 선장의 배려로 서재필과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갑신정변이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일본 정부가 조선의 망명 정객들을 냉대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미국 선교사들이 이들을 도왔다.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은진 감옥에 투옥당했다.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 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린 딸 한 명은 딸이라 하여 연좌되지 않고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딸은 후에 안동김씨 김태균(金泰均)의 아들 김두진(金斗鎭)과 결혼하였는데,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으로 김옥균과는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김두진과 결혼한 딸과는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서재필의 배우자 광산 김씨는 자신의 본가를 찾아갔는데, 부모들은 대역의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승지였던 장인 김영석은 딸에게 서씨 집 귀신이 되라며 되돌려보냈는데 가서 자결하도록 하며 가마에 태울 때 독약 그릇을 하나 넣어 시가로 쫓아보냈다.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장인 김영석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은진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 김씨는 못다 죽어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배우자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아내의 묘소는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서재필 묘소에 합장되었다.
한성부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현 정독도서관 터)가 된다. 담양 남면 지실 정해은과 결혼한 큰누나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하였다.
연좌제와 친인척 처벌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은 1884년 19세에 사직동에 살던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서상우(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그런데 생가의 둘째 형 서재필을 따라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노를 앞세우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처형당했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하여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그의 양가(養家)에도 화가 미쳐 그의 양아버지이자 재종숙인 서광하는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다.
17세 된 남동생 서재우(徐載雨)만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 서재우는 훗날 사면됐다.
1884년 초에 죽은 그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를 제외한 그의 가족은 모두 몰살되거나 화를 입었다. 그의 가족 중 형인 서재춘의 아들들이 살아남아 손자인 서명원 등을 두었고, 서재창의 처 조씨에게서 나온 유복자의 손자가 서희원이었다. 또, 기생으로 끌려간 동생 서재우의 처가 아들 서호석을 두었다. 서재우의 일가 역시 겨우 후사를 잇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의 집안에서는 광(光)자 대신 병(丙)을, 재(載)자 대신 정(廷)자를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광(光)자 항렬과 재(載) 항렬을 쓰기도 하였다.
연좌제는 전라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아들 이용순 등은 살아남았고,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소식이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전해지자 그의 외삼촌들, 외사촌들 등 그의 외가 친척들은 약사발을 든 금부도사나 포졸들이 나타나지 않나 하고 문덕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비통한 소식을 해외에서 접한 서재필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었다. 서재필과 평소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들 역시 투옥, 심한 고문을 당했다. 정변의 실패와 그의 가족, 친지들이 몰살당하자 민중에 대한 증오와 함께 조선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고, 이후 일본에서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국내 문제에는 관심을 서서히 줄여나가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한달 가까이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시로 자객을 보냈고 그는 변장하고 은신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해 주었다.
서재필 자신은 1년간 일본에 피신해 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겼고, 일본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였다. 일본 정부의 박대에 분개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훗날 서재필은 그가 처음 미국 땅에서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의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근면과 창의력은 상점의 번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색인종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시달림을 당했고 열차에 탑승할 때도 짐칸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욕을 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