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18,9-10.14ㄴㄷ.24-25ㄱㄴ.30―19,3
그 무렵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쳤다.
그때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있었다.
그 노새가 큰 향엽나무의 얽힌 가지들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향엽나무에 휘감기면서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리게 되고,
타고 가던 노새는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10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요압에게 알려 주었다.
“압살롬이 향엽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4 요압은 표창 셋을 손에 집어 들고, 압살롬의 심장에 꽂았다.
24 그때 다윗은 두 성문 사이에 앉아 있었다.
파수꾼이 성벽을 거쳐 성문 위 망대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혼자서 달려오고 있었다.
25 파수꾼이 소리쳐 이를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은 “그가 혼자라면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다.” 하고 말하였다.
달려온 그에게
30 임금이 “물러나 거기 서 있어라.” 하니, 그가 물러나 섰다.
31 그때 에티오피아 사람이 들어와 말하였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맞서 일어난 자들의 손에서 오늘 임금님을 건져 주셨습니다.”
32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그 어린 압살롬은 무사하냐?” 하고 묻자, 에티오피아 사람이 대답하였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의 원수들과 임금님을 해치려고 일어난 자들은 모두 그 젊은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19,1 이 말에 임금은 부르르 떨며 성문 위 누각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는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다.
2 “임금님께서 우시며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신다.”는 말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3 그리하여 모든 군사에게 그날의 승리는 슬픔으로 변하였다.
그날 임금이 아들을 두고 마음 아파 한다는 소식을 군사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오늘 복음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었으니,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고생도 하였을 것이고, 가진 재산도 치료비로 모두 탕진하고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마르 5,27)
사실 율법규정에 따르면, 그녀는 피 흘리는 부정한 여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만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만지게 되면 그 사람마저도 부정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감히 이러한 금기를 깨어버릴 만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곧 ‘군중에 섞여들’만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만큼 믿음이 굳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인의 믿음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신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불결한 것이 닿으면 같이 불결해지게 되는 법인데, 오히려 불결함이 깨끗하게 치유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시리아의 에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열하던 여인의 숨은 상처와 고통을 통하여 당신의 치유능력이 선포되었으니, 숨어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은 영광 받으소서.
눈에 보이는 한 여인을 통하여,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당신 아드님의 신성이 드러났고, 하혈하던 여인의 치유로써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여인은 주님을 선포하였고, 주님과 더불어 여인도 영예로워졌습니다.
여인은 신성의 증인이었고, 주님은 여인이 지닌 믿음의 증인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단지 예수님을 쫓아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옷’에 믿음의 손을 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위와 권능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말씀이신 분’이 ‘말씀이란 옷’을 입고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말씀’에 손을 대어 말씀의 권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만질 때, 우리 안에 그분의 힘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옷을 통하여 흘러나왔듯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곧 ‘말씀’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갈라 3,27 참조)들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말씀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우리의 옷에 손을 대는 이들이게 말씀의 권능을 전달해야 할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 ‘말씀의 전류’가 흘러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사랑의 전등을 밝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하는 이의 아픔>
어제 시므이의 저주를 오지게 받고, 다윗은 자기의 불행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라고 얘기한 바 있지요.
이렇게 선을 기대했는데 전장에서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압살롬의 전사 사실을 보고하며 마침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맞서 일어난 자들의 손에서 오늘 임금님을 건져주셨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다윗에게?
이것이 기대한 선이겠습니까? 다윗에게?
압살롬이 원수요 적이었다면 이것이 기쁜 소식이었겠지요.
그러나 압살롬이 못된 짓을 아무리 했어도 다윗에게 그는 여전히 아들이었기에 그 소식은 너무도 비통한 소식일 뿐입니다.
사실 다윗은 애초부터 압살롬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전쟁을 벌였을지 모르지만, 다윗은 전쟁한 것이 아니라 걸어온 전쟁을 막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을 것이며,
아들이 죽는 그런 끔찍한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 뜻대로 되기만을 바랐을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행복하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래서 뉘우치고 아들로 되돌아오기만을 바랐을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비의 사랑이고,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들에게 한 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과 같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짓은 어쩌면 압살롬이 다윗에게 한 짓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가 때가 되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감히 하느님을 이겨 먹으려고까지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 공손히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라고요?
얼핏 보면 우리는 청하는 존재고 하느님은 칼자루를 쥐신 분 맞습니다.
그러나 잘 보면 하느님 사랑의 약점을 이용해 먹는 우리입니다.
내 뜻을 안 들어주시면 언제고 탕자처럼 떠나기도 하고,
떠나지 않더라도 원망에다 분노와 떠나겠다는 협박까지, 모든 카드를 써서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하려고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 맘대로 살아 곧 죄를 지어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마음 아픔.
이것은 사랑하는 이의 운명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마음 아픕니다.
사랑하는 그의 아픔 때문에 마음 아프고,
사랑하는 그의 배신 때문에 마음 아프고,
배신 때문에 불행해질까 봐 마음 아프고,
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원하기에 마음 아픕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래도 압살롬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면,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알아드립시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 뚜껑을 따뜻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를 차게 해서 아프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그를 무릎 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회당장이라는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 걱정거리가 없을 것 같지만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고,
그 고통 때문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발 앞에 엎드려,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내로라하는 이가 다른 사람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못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인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로마 5,3-4)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당신 손수건으로 친히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중 최절정기의 역동적인 사목활동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입장에서 정말이지 신명나는 날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구름 군중이 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몰려온 군중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뵈려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밀쳐대니, 이러다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두려울 지경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도들과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주요 임무 중에 하나가 밀려드는 군중에 대처하기 위한 질서 유지였습니다.
아마도 요즘 같았으면 사도들은 눈에 띄는 모자와 완장을 착용하고 호루라기를 목에 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 앞으로 나서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회당장! 당시 상당한 보직이었고, 유명인사였습니다.
그가 무릎 꿇은 이유는?
자신의 딸이 중병에 걸려 촌각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중 한 여인이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와 예수님의 옷 자락에 터치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터치를 하는 순간 12년 동안 앓고 있던 하혈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 안으로 들어가니 곡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딸이 이미 숨을 거둔 것입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늦게 오신 예수님을 향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죽은 딸의 침실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딸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외치십니다.
"탈리타 쿰!"
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아리땁고 화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인해 하느님의 어떤 분이신지 명명백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당신 손수건으로 친히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죽음을 결코 원치 않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영원한 복락을 만끽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분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두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주님이신 예수님 뜻에 맡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생살여탈권 중에서 살리는 권한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심판 때에는 죽이는 권한도 사용하시게 될 텐데, 그 권한은 스스로 살기를 거부하는 죄인들에게만
사용하실 것입니다.
1)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라는 말은 앞의 3장 10절에 있는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과 뒤의 6장 56절에 있는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옷에(옷자락 술에) 사람들이 손을 대려고 한 것은 그들의 병을 모두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밀쳐 댔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쳐 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을 만지려고 자기들끼리 서로 밀쳐댔다는 뜻입니다.
31절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쳐 댄다는 제자들의 말은 제자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뜻일 뿐입니다.
2)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라는 말은 여자의 병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기 전까지, 여자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로 지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신 일은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 일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입니다.
3)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라는 말은 여자가 ‘사람들 모르게’, 또 ‘예수님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자신의 병에 대한 수치심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여자가 예수님도 모르게 옷에 손을 대려고 했다고 해서,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만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지만, 치유의 은총이 옷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물으신 것과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신 것은 ‘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여자가 스스로 나와서 믿음을 고백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여자에게 일어난 기적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기적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신 기적은 없습니다.
모든 기적은 주님께서 원하신(의도하신) 일입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신 기적이라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연’입니다.
5)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 여자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기적은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나는 믿는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기적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라고 전해집니다.
병을 고치기를 바라면서 간절하게 기도도 하고 온갖 치료도 하면서 애를 쓰지만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병자에게 가서, “너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는 “너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말은 어리석은 말이고, 위험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남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병에 걸려서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분들도 많습니다.
믿음의 모범이신 성인들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믿음만 있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를 짓는 위험한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믿음 -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 믿음의 전사 -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에는 끝이 없다."
오늘 1월30일 다산 어록의 말씀입니다.
날로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가 진짜 참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무실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설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살고 났는데 노추(老醜)의 욕심만 있고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허망할까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신뢰를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란 말도 생각이 납니다.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믿음으로 ‘성화(聖化)의 여정’이 된다면 얼마나 멋진 노후의 삶일까요.
일출의 찬란함도 좋지만 일몰의 장엄함은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봄의 꽃향기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만 가을 단풍의 풋풋한 내음에 초연한 아름다움은 마음을 마냥 넉넉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유종의 미란 말도 있듯이 젊음보다 인생 마무리의 노년이 참 중요함을 느낍니다.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정확히 4시간 간격의 소변이요 하루 6차례의 소변을 보게 됩니다.
“아, 몸은 살아 있어 평생 쉬지 않고 일하고 있구나! 태만하고 게으르게 사는 것은 몸에 죄짓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이 더욱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에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더불어 생각난 시편 121장 다음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 주시리라.
나거나 들거나 너를 지켜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리라.”
(시편 121,4-8)
믿는 대로 됩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믿음을 위해 한곁같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이요, 믿음의 전사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있는 그날까지 치열하고 가열찬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탈리아 언론인들을 향한 소통을 위한 세 요소에 공감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우리의 믿음을 북돕웁니다.
첫째 말마디는 “가까움(proxmity)”이다.
이민자들,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버려진 이들을 결코 잊지 말고 가까이 하라.
하느님의 세 스타일은 ‘가까움(proxmity)’, ‘부드러움(tenderness)’, ‘연민(compassion)’이다.
그분은 늘 용서하신다.
둘째 말마디는 “마음(heart)”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며 가깝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용기(courage)’도 라틴어 ‘마음(cor)’ 어원에서 기인한다.
‘마음과 함께 시류에 거슬러 가라(go against the flow with the heart)’.
셋째 말마디는 “책임감(responsibility)”이다.
모두가 그 맡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선에 깨어있는 책임감이다.
언론인들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활동의 위대함이 아니라, 이런 활동을 하게 하는 사랑의 위대함이다.”
사막교부의 일화입니다.
한 제자가 포멘 압바를 찾아 한 말씀 주십사 청하자, “교부들은 매 행위마다 참회로 시작했다.”
그 제자가 다른 말씀을 주십사 청하자, “네가 할 수 있는 한 자선을 베풀수 있도록 노동을 하라. 자선과 믿음이 죄로부터 깨끗이 해준다.”
제자가 또 묻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부는 “믿음은 겸허하게 사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대답합니다.
새삼 참 믿음의 본질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산(山)과 강(江)이라는 제 자작시도 한결같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모두가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예화들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주제도 믿음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지 않았더라면 회당장은 주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자신의 믿음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니, 딸의 죽음이 전화위복, 야이로의 믿음을 확인케 하는 계기가 됨을 배웁니다.
야이로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이 감동적이요 이런 사람이 진짜 참사람입니다.
회당장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주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구원의 삼박자인 1.주님의 연민의 사랑, 2.따뜻한 스킨십, 3.권능의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어렵고 힘들 때 마다 아람어 “탈리타 쿰!” 외치면서 즉시 일어나 다시 새롭게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그 여자가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믿음을 확인했으니 역설적으로 하혈병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음을 봅니다.
역시 하혈병을 앓던 부인은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의 결과 치유를 받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자, 부인은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아뢰자 주님의 자비로운 응답 말씀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거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와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를 향한 치유 말씀처럼 들립니다.
말 그대로 믿음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주님의 치유의 구원에 반드시 전제되는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세 스타일, 가까움, 부드러움, 연민을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 역시 하느님의 이런 친밀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세 스타일을 지닌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을 통해 다윗의 파란만장한 믿음의 여정을 만나게 됩니다.
대죄는 용서받았지만 믿음의 여정을 통해 보속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 엄혹합니다.
이 모든 비극과 불행을 겸손과 비움의 믿음의 계기로 삼는 다윗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가 참 경이롭습니다.
앞서는 절친인 요나단의 전사에 통곡하던 다윗이, 어제는 자기를 쫓던 아들 압살롬을 피해 올리브 고개길을 울며 오르던 다윗이 오늘은 압살롬의 죽음에 성문 누각에 올라 대성통곡합니다.
간장을 끊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런 비극의 와중에도 다윗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음은 그 백절불굴의 믿음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역경을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았기에 다윗의 믿음의 여정도 날로 깊어졌을 것이며,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고 버텨내고 견뎌낸 다윗의 초인적 믿음의 여정이 영원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큰 스승들이 예수님과 야이로 회당장. 열두 해 하혈병 앓다가 치유된 부인, 그리고 사무엘 하권의 다윗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이고 이 밖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믿음의 스승들을 무수히 만납니다.
특히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다윗의 주님의 믿음의 전사로서 치열하고 가열한 삶은 이분들이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믿음의 여정에 믿음의 전사로서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우리를 도와 줍니다.
자작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며칠 전 뉴욕에서 ‘노량’을 보았습니다.
이로서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에 대한 영화가 막을 내렸습니다.
‘명량, 한산, 노량’입니다.
명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승선한 장군선이 물살에 떠밀려 큰 바위에 부딪쳐 부서질 위험에 처했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장군선에 고리를 달아 물살이 약한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장군이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도 장군을 사랑하는 모습에 뭉클했습니다.
한산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학익진’입니다.
육지에서만 사용하던 진법을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도 사용했습니다.
그물로 물고기를 가두어 잡듯이,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으로 일본의 배를 포위하였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노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북소리였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순신 장군은 직접 북채를 잡고 북을 쳤습니다.
장군선에 울리는 북소리는 명나라의 군인과 조선의 군인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북을 치는 과정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 계속 북을 치게 하였고, 노량해전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승리하였습니다.
그렇게 7년 전쟁을 끝이 났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말하는 모습이 3번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사람은 귀가 열려서 들을 수 있었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마르 7, 37)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24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에파타’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게파’이다."
게파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이 교회를 무너트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000년 시간이 흘렀어도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굳건하게 바위 위에서 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으며 베드로 사도를 초대교황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야이로의 딸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탈리타 쿰!" (일어나라)
죽었던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소녀는 곧바로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마르 5, 42)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2024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탈리타 쿰’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탈리타쿰’하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오스트리아 정신 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말합니다.
“사람은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겠다’라고 느낄 때 사랑을 실감한다.
열등감을 품거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자기에게 반문해 보십시오.
‘나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고 있는가?’
혹시 다른 이에게 불편을 주었을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자기의 교만과 이기심 그리고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웠을 때 불편함을 더 많이 안겨 줍니다.
특히 ‘어쩔 수 없었다’라면서 정의를 내세우며 나의 정당성을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습니까?
이런 모습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묵상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때로는 율법도 어기셔야 했던 예수님, 사람들의 반대에도 죄인들과 함께했던 예수님, 진정한 사랑을 위해 당신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평온함과 자연스러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겸손의 삶입니다.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줄 수 있는 황금률도 겸손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 주신 그 삶을 우리 역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지요.
회당장이 아픈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아픈 딸을 향하여 나가시는 길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을 봤던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지요.
이제 회당장의 집에 다다를 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보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그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탈리타 쿰!’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알프레드의 아들러’의 말처럼, 주님과 함께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