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鄭夢周)-춘흥(春興)(봄의 흥취)(봄비 소리 들으며)
春雨細不滴(춘우세부적) 봄비 보슬보슬 방울도 지지 않더니
夜中微有聲(야중미유성) 밤 되자 은은히 소리를 내는구나
雪盡南溪漲(설진남계창) 눈 녹아 앞 시냇물 불어날 테고
多少草芽生(다소초아생) 새싹들도 얼마쯤 돋아나겠지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圃隱集포은집)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양기정님은 “봄비 내리는 모습을 통해 만물이 부활하는 봄이 오기를 기대한 시다. 제1구와 제2구에서는 방울조차지지 못하고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밤이 되어 작게나마 소리를 낼 만큼 빗방울이 굵어졌다고 이야기한다. 만물이 잠든 시간, 아직 깨어 있던 시인의 귀에 들리는 은은한 빗소리, 고요한 밤에 깨어 있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일 것이다. 시인은 이를 세부적細不滴이란 시작적 묘사와 미유성微有聲이라는 청각적 묘사의 대비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삼은의 한명으로 잘 알려진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동방 이학의 시조라 불리었으며 정치적으로도 고려 말의 어려운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일이 나더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시조 단심가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회자되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혼란기였던 고려 후기에 생장하고 활동했던 정몽주가 기대했던 봄날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는 국왕 중심의 강력한 집권체제를 세워 권신들의 발호를 막고 국력을 강화하여 왜구의 침탈과 원에 이은 명의 압력에 대응하며 토지 제도의 개혁을 통해 사회개혁을 하고자 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바로 민생의 안정이었을 것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정몽주[鄭夢周, 1337 (충숙왕 복위 6) ~ 1392 (공양왕 4), 본관 연일(延日), 자 : 달가(達可), 호 : 포은(圃隱), 시호 : 문충(文忠), ]-고려시대 정치가, 학자 초명은 몽란(夢蘭)ㆍ몽룡(夢龍),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한 뒤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 예문 검열(藝文檢閱)ㆍ수찬(修撰) 등을 거쳐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抵候)ㆍ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내고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족(女眞族)의 토벌에 참가하고 전농시승(典農寺丞)ㆍ예조 정랑 겸 성균 박사(禮曹正郎兼成均博士)ㆍ성균사예(成均司藝), 1371년 태상소경ㆍ보문각 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ㆍ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13일 동안 사선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귀국했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 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彥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규슈[九州]의 지방 장관 이마가와[今川了俊]에게 가서 왜구(倭冠)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우산기상시ㆍ보문각 제학ㆍ지제교(右散騎常侍寶文閣提學知製敎)를 거쳐 1379년 예의 판서(禮儀判書)ㆍ전법 판서(典法判書)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전하고 이어 밀직제학ㆍ상의회의도감사ㆍ보문각 제학ㆍ상호군(密直提學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봉해지고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입국 거부로 요동(遙東)에서 돌아왔으며, 1383년 동북면 조전 원수(東北面助戰元師)로서 함경도에 쳐들어 온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 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8년 문하찬성사ㆍ지서연사(門下贊成事知書筵事)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ㆍ문하 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했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가서 조준(趙浚)ㆍ남은(南誾)ㆍ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 : 태종(太宗))이 이성계를 그날 밤으로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방원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擊殺)되었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박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 《주자 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 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鄉校)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 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 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 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서화(書畫)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追贈), 익양 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
*漲(창) : 넘칠 창, 1.(물이)넘치다, 2.가득하다(분량이나 수효 따위가 어떤 범위나 한도에 꽉 찬 상태에 있다), 3.물이 붇다
첫댓글 봄 비는 그렇게 채 깨지 못한 봄의 여운을 깨우고
어둠을 헤치며 내리는 봄 비는 내일의 기대감으로 가득하고~~~~
ㅎ, 시정 넘치는 지기님의 댓글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