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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사함의 선언 2:1~5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치유의 선언 2:6~12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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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가버나움에서 네 사람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달아 내립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향해 죄 용서를 선언하시자, 서기관들이 이를 신성 모독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시고 중풍병자에게 상을 가지고 집에 가라 명하시자, 그가 그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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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사함의 선언 2:1~5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강론하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 문 앞까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지붕을 뚫어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는 돌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들에게는 친구의 치유를 위한 간절함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라고 선언하십니다. ‘받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아피엔타이’는 ‘지금 죄 사함이 즉각 실현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육적 치유보다 영적 치유를 먼저 행하십니다. 은혜 가운데 으뜸은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친구들의 행동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셨나요?
한 영혼을 돕기 위해 내가 적극 시행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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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선언 2:6~12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누구도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기에 예수님 말씀을 신성 모독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다 아시고, 죄 사함의 선언과 치유의 선언 중 어느 것이 더 쉬운지를 물으십니다(8~9절). 표면적으로는 죄 사함의 선포가,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육적 치유보다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영적 치유인 죄 사함이 훨씬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마 1:21). 예수님이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천명하신 후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절)라고 명하시자 말씀대로 됩니다. 복음은 영과 육의 온전한 구원을 약속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누구에게 있나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은 그분이 어떤 분임을 확증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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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버팀목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을 때는 묘목을 제외하고는 일정 기간 삼각 버팀목(부목)을 만들어 나무 밑을 받쳐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나무가 뿌리를 제대로 내려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크기에 따라 버팀목을 제거하는 기간이 다릅니다. 작은 나무는 1년 내지 2년, 큰 나무는 3년 이상 버팀목을 해 줍니다.
우리 인생길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영적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영적 의미의 버팀목은 인생 여정에서 기대어 쉴 수 있고, 신앙적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인격적 대상을 말합니다. 물론 이 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사물도, 사람도 영구한 버팀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시적인 것들을 통해 영원한 근원지에 삶의 뿌리를 내리게 하십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병약한 사람 모두 그들의 여정에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의 삶에서 저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저는 참된 버팀목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참된 버팀목이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생의 마지막을 부활과 영생으로 약속받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 / 임영수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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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2장 11절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들고 가라고 명하신 '상'은 그가 누워 지내던 '침대"'였습니다. 그 '상'은 원래 질병과 고통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네 명의 친구가 어깨에 메자, 친구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 앞에서는 새로운 삶의 시작점이 되는 치유와 회복과 구원의 '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워 있는 고통스러운 '상'이 놀라운 은혜의 증거로 바뀌는 것은 오직 '예수님' 앞 에서만 가능합니다.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소망을 향해 달려가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육체의 힘이 무너지고 환경적으로 부족하니 무가치하다 하지 말라. 주님이 고쳐 주시고 필요를 채워 주신다. - 마이크 플린
오늘의 기도
주님, 상황과 환경을 탓하며 현실 앞에 주저앉았던 제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치유하시는 주님께 오직 간절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일어나 가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주저 없이 순종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선명히 드러내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50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5절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회복하십니다. 이들은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그대로 메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달아내렸습니다. 가르침이 한창일 때 이런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치 나병환자가 사회적인 책망을 각오하고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처럼, 그들도 이웃의 회복을 위해 이런 무리를 감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믿음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죄까지 사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이신 예수님께 나는 어떠한 간절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5-12절 죄를 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죄 없으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기에 앞서 이 일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행위를 신성모독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분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증명하시기 위해 중풍병자를 자리에서 일으키십니다. 육체의 질병을 심각하게 여기는 만큼, 우리 영혼의 질병을 슬퍼하며 주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고 있습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9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사역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지만, 죄로 인한 인류의 고통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죄 사함과 치유,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역도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도 버릴 수 없고, 저것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삶의 필요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영혼의 구원만 외치거나, 구제와 사회복지에 열심을 내면서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모두 균형 잡힌 선교가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부분에 강점을 두고 전도와 선교를 진행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 균형을 잡아가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그리스도가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던 중 그 집의 지붕이 뜯기며 중풍병자의 침상이 내려오는 에피소드를 그린 이야기로, 예수께서 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아울러 주님은 이를 못 마땅히 여기는 서기관들을 향해 죄 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상을 가지고 집에 가라 명하시자, 그가 그대로 행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가버나움 복음 선포, 중풍병자의 등장, 죄 사함의 선언과 치유, 사람들의 반응 등입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 나병환자의 발설로 인해 가버나움을 떠난 뒤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와 한 집에 들어가셨다는 말입니다. 그 집은 누구 집인지 본문에 나오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의 집일 수도 있고, 시몬 베드로의 집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체포되고 난 뒤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사셨다고 했고, 시몬의 집도 가버나움에 있었고 더욱이 그 집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질병 치료의 의미에서 베드로의 집이라는 추측이 더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집의 지붕이 뚫렸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 서민들이 살던 집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있는 자그마한 형태입니다. 지붕은 나무 들보를 놓은 후 그 사이를 짚과 흙으로 채워 비를 가렸는데, 조금 좋은 집은 들보 위에 기와를 덮습니다. 그러므로 지붕 위에서 중풍병자를 내려 보내기 위해서는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 석회, 판자, 기와 등을 떼어 내어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로 보아서 남의 집 지붕을 뜯는 것은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지와 믿음을 높이 사십니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중풍병자가 일어나 모든 사람 앞에서 상을 가지고 나가자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에 감사드렸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 죄 사함이 낳은 결실입니다. 용서가 선포되자 치유와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별도로 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죄 사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할 유일한 일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은 죄 사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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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함정을 파신 것과 같습니다. 둘 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일어나 걸어가라’가 조금은 나을 것 같습니다. 병 고치는 일은 의사와 선지자들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죄 사함이 조금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죄 사함은 보이지 않지만, 일어나 걷는 것은 당장 눈앞에 보여야 하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는 둘 다 택하십니다. 죄 사함을 이미 선포하신 뒤 그 후에 네 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공개하고 아울러 사람들의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죄 사함을 선포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만 천하에 공포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또한 영적인 사람들이라 마음에 인정만 하면 주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간 큰 사람일지라도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선언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신들이 겁을 먹고 나가는 현장을 똑똑히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1,000년이 두 번이나 지났는데도 지금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머리로만, 관념 속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바뀌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만약 마음만 열었다면 충분히 믿을 수 있을 터인데, 결국 마음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만만치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어제의 우리가 아니어야 합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종이호랑이가 아닙니다. 살아 계셔서 우리를 보다 업그레이드 된 삶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똑같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관념 속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성장하는 것이고,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전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사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 보다는 내일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침상을 들고 나가는 중풍병자의 심정으로 이 한 해를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집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왔고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워 왔는데, 인파로 인해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네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그들이 기대한 것은 중풍병을 고쳐주시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죄 사함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질병, 돈, 관계 등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면서 그 문제들의 해결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모든 문제들 중 죄 문제가 가장 크고 절박한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그로 인해 모든 불행이 왔고, 그 불행의 마지막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있습니다 왜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닌 네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네 친구의 죄가 아닌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셨는가?
먼저 중풍병자가 누구인지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중풍병자는 죄 가운데 나서 불행하게 살다가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즉, 중풍병자처럼 스스로 일어나 주께 나올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해서 의를 찾거나 행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한,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전적으로 죽은,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친구는 누굴까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네 바람"이며, 우리를 고치시고 회복하시려고 보내신
"네 대장장이"(슥1:20~21)입니다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슥6:5)
그래서 예수님은 네 친구를 보시고 죄 사함을 주시고 즉시 일어나 자기 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2:11)
따라서 구원은, 중풍병자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할 능력조차 없는 우리에게
네 친구, 네 바람, 네 대장장이를 보내셔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듣고 따르게 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하늘에 있는 본향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경륜이며 은혜입니다
이들 중 예수님의 임재와 치유보다
율법의 기준에 따라 판단과 정죄의 눈을 가진 율법학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부 호기심으로 왔지만 병자들도 들어오지도 기다리는 곳 안에서
오히려 시간과 공간을 낭비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을 듣고, 그가 그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행동을 하기도 전, 속으로 지금까지 자신들이 율법적인 판단으로 관여해 온 입장으로서 격멸적으로 쓰이는‘저 사람(7절, 후토스) 예수’가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
그들이 생각했다(7절)’라고 하는 ‘디아로기조마이(διαλογίζομαι)’라는
헬라어는 대부분 ‘악한 생각을 하다 혹은 음모를 꾸미다’에 사용되는 단어로서
그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병자의 길을 가로막고 그 죄 사함의 기회마저 빼앗으려 하고 있는 진정한 ‘신성모독’의 행위를 하는 자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생각에 대해 이렇듯 조목조목 그들의 잘못을 오히려 드러내거나 죄 사함의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율법적인 가르침을 주심으로 대응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 정리되었다고 여긴 그 거짓되고 어리석은 생각을 더 뒤죽박죽 되게 하십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한 분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에 대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10절)’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그토록 신봉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피의 제사와 율법적 권위가 여호와의 임재 없는 껍데기만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명령에 따라 사람들이 들락거릴 수도 없는 그곳에서 ‘그 중풍 병자가 일어나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는 놀랍고 처음 보는(12절)’광경이 펼쳐진 것처럼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그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구원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날마다 체험하는 주님의 제자로 걸어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기적을 낳는 믿음
1) 힘을 합치는 믿음
친구들의 협력과 믿음에 합심하는 행동(약5:16).
2) 장애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그 어떤 장애물도 뚫고 나가는 믿음(고전16:13).
3)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묵묵히 주의 말씀만을 순종하며 나아가는 믿음(롬6:16)
☆ ...어느 것이 쉽겠느냐(9절)
표면적으로는 물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기가 더 쉽다.
이는 눈에 안 보이고 반박하기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고 말하기는 더 어렵다.
만일 그 사람이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병을 고칠 수 있는 권세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 깊은 의미에서 죄사함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의 대가로 죄를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에 더 어렵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육체의 병을 치유하시는 능력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치명적인 병, 곧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으신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 믿음의 친구들
우리는 종종 믿음을 개인적 차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오랜 신앙 여정을 잘헤쳐 나가려면 믿음의 친구들이 꼭 필요하다.
적용
Q. 나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는가?
Q.나는 믿음의 친구들이 신앙 삶에 지쳐 몸져 누웠을 때 떠메고 신앙여정을 계속해 나가도록 동반자가 되고 있는가?
Q. 내 주위에 있는 신앙의 친구들은 낙심하여 지친 나를 떠메어 주님께 데리고 갈 수 있는 친구들인가?
✔ 오늘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다가오십니까?
➲ 믿음을 보시고 회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1~5절).
수 일 후에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셔서 한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 소문이 금방 퍼져 집 앞은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도’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왔습니다
네 사람은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1~4절). 당시 지붕은 흙과 짚, 나무 등을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뚫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집 지붕을 뚫는 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데리고 온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꼭 만나 치료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들의 의지와 믿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5절) 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b)...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있지만 누워서 꼼짝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중풍병자보다 더 심각한 영적 질병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병은 그 어떤 의술로도, 뛰어난 의사의 손을 통해서도 고침을 받을 수 없는 병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악으로 인한 고통에서 회복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주변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개의치 않고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품고 행동한 그들의 믿음에 주목하셨습니다. 동일하게 오늘 주님은 나에게 그런 믿음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영적 질병에 묶여 어그러진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나로 하여금 건강하게 믿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주님은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전인격을 의탁하는 삶이되길 소망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되셔서 능히 나의 삶을 회복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신뢰하며 바라봅니다.
➲ 인간을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6~10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공통적으로 메시아가 오면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주체는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가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신성모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분노했습니다.
서기관들의 마음에 생각을 아신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9절)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물으십니다. 중풍병자가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당연히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쉬울 터인데 서기관들은 더 어렵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의 선언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사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셔서 자유케 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죄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미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 가운데는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범하는 죄의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절,새번역) 통곡하며 날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죄악과의 싸움에서 이겨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나의 삶의 자리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 불안한 인생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11~12절).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절) 명령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 앞에 왔던 중풍병자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갑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전에 이런 일을 도무지 본적이 없었다라고 말합니다(12절).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은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병자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 자신은 나약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불안정한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의 기복도 심해 영적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는 내 자신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나의 연약함을 봅니다. 기쁨과 평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을 봅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의 특징이라면 기쁨과 평강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풍병자에게 일어난 것보다도 더 큰 역사를 나는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깨달은 구원의 기쁨과 평강으로 날마다 감사가 넘쳐는 삶이어야 하겠고, 무엇보다 불안정한 나의 일상의 삶을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온전한 기쁨과 평강을 나누는 그래서 온전한 삶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심에 무한 감사하며, 죄에서 자유케 하심에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리며 기쁨의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막 2:1~12절)... 빛이 있으라...
오늘의 말씀요약
예수님이 계신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자 네 사람이 지붕을 뜯어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립니다. 주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하십니다.
죄 사하는 권세가 그분께 있는 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중풍병자는 고침받아 일어나 갑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난관을 극복하는 믿음(2:1~5)
난관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믿음으로 돌파하면 영적 도약이 일어납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사람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갈 수 없자 포기하는 대신 지붕을 뜯습니다.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조금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십니다. 단지 육체의 질병 치료를 원했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죄 용서와 구원을 베풀어 주시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마 11:12). 우리가 주님께 적극적으로 간구하고
치열하게 믿음의 싸움을 해 나갈 때, 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묵상 질문: 중풍병자는 어떻게 해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나요?
- 적용 질문: 지금 내게 돌파하는 믿음이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죄를 사하는 권세(2:6~12)
죄 사함도, 치유의 기적도 하나님만 행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죄 사함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효력과 보상이 따르는 실제 사건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지옥 형벌이 면제됨과 동시에
의인으로서 신분과 권리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의 치유를 원하는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먼저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죄를 사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에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치유 기적을 통해 자신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신적 존재임을 증명하십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그동안 자기가 누워 있었던 상을 가지고 돌아간 것은 죄 사함이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보여 줍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복음은 새 희망을 안겨 줍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먼저 선언하시고 병을 고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죄를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어떤 삶의 태도가 필요한가요?
오늘의 기도
온유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무것에도 도전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며
사람들 눈치를 보았던 제 연약함을 용서하소서.
영혼 구원이라는 절대 문제 앞에서 난관을 돌파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야성을 회복시키소서
1.지붕에서 내려온 사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에 그곳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기 위해서 지붕을 뚫고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린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만 데리고 가면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음 받게 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막아서서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들의 열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아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믿음이 있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해결자이심을 그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지 ㅇ메수님께 가지고 나갈때 우리는 해결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믿는가?
2.죄를 사해 주신 주님
이들의 병을 고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죄사함을 말할 수 있는자가 없기에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예수님을 더욱 곤란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본체시며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을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죄사함을 받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영적으로 건강하고 죄사함을 받는 것임을 깨닫고 항상 죄에 대하여 민감성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성령님과 함께 하는가?
마가복음2:1~12 지붕을 뚫은 믿음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가버나움으로 다시 돌아 오셨다.(1)
그 동안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좇아내시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님도 고쳐 주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셨던 예수님이
오늘은 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다시 돌아오셨을 때는(1)
이미 많은 질병의 모든 환자를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좇아내시고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하셨기에 유명 스타가 되어 계신 것 같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몸을 겨우 들이밀 정도로
비좁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2)
이 때 한 중풍병자를 4명의 사람들이 메고 예수님께로 온다.(3)
무리가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가 없다.(4)
그러나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환자를 침상에 누인채로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다.(4)
예수님께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5)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 하신다.
중풍병자란? 고혈압이나 동맥경화등의 원인으로 뇌출혈로 인해서
전신이나 반신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가끔씩 환자가 되어보면 얼마나 외로운지 알게 되는데
이 중풍병자는 참으로 행복한 환자였구나.
정말로 부러운 것은 거동을 할 수 없는 형편의 환자신세인데
예수님께로 데려가 줄 수 있는 4명의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 부럽다.
내가 지쳐 몸져 누워있을 때
반대로 누군가 신앙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지쳐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일어나 함께 가자하고 다시 주님께로 데려갈 친구가 있나?
내가 먼저 그런 친구되길 원한다.
아마도 정말 가야 할 사람은 중풍병자였지만
경험상 중풍병자가 나를 예수님게 데려가 달라라고 말하지 않았을것 같다.
건강한 친구들이 먼저 중풍병자를 데리고 나셨을 것 같다.
중풍병자는 자기의 핸디캡을 많은 사람 앞에 나타내기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
숨기고 싶어하고 움츠러들고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친구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고통으로 알고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형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진 친구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고 환자를 달아 내리는 믿음을 보고
이 환자에게도 믿음이 전염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 중풍병자가 믿음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나를 예수님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을까?
어찌되었든지 예수님게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셨다 하셨다.(5)
친구들의 믿음 +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셨을 것이다.
친구들의 믿음 만으로 중풍병자의 죄 사함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중풍병자도 분명히 믿음이 있었으므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
이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오늘 내가 주님 앞에 보여드릴 믿음이 무엇이 있는가?
내가 주님 앞에 작은 것이라도 보여 드리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크고 비밀한 것을 선물로 주시는 전능의 하나님 이시다.
질병의 치료는 물론이요 죄 사함까지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나의 작은 믿음이라도 보여 드리자.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의롭게 여겼던 모든 거짓된 신념과 세상적 잣대를 여호와 앞에 내려놓고
오직 생명과 평강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매일 새롭고 놀라운 구원을 맛보기를 소망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저는 마음의 다리를 회복시키시고
거짓된 영에 포로되어 갇힌 심령을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회복되는 병자와 같은 기쁨과 감격을 매 순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예배의 기쁨을 회복시키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지금까지 허락하신 그 은혜에 합당하게
거룩한 제사장으로 쓰임 받도록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