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자, 풍류가 깃든 계곡으로!"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시인 이육사가 1936년 8월 '문장(文章)'에 발표한 시 '청포도'의 일부 구절이다. 여름 무더위가 느껴지는 소회를 푸른 바다와 흰 돛단배, 청포를 입은 손님의 심상으로 풀어낸 시인의 감수성이 낭만적이다.
2023년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7월은 해외여행이나 호캉스 시즌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청량한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더위를 이겨냈다. 국내에는 평생 한 번만이라도 다 가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피서 명당이 넘친다. 그중에서도 푸른 숲과 시원한 물, 멋진 풍광이 드리워진 계곡을 찾아 더위로 지친 시름을 달래보면 어떨까. 한국관광공사가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한 계곡 여행지를 소개한다.
서울 종로 수성동계곡.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가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관광공사 제공
조선의 선비들이 극찬한 그곳, 서울 수성동계곡
‘물 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는 뜻을 지닌 수성동계곡(서울기념물)은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있다. 한양도성 내에 자리해 조선의 왕족과 사대부, 중인이 자주 찾았다.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그림과 시로 소개했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1971년 수성동계곡 주변에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잊힐 뻔했지만, 2012년 복원 사업을 진행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여기에는 조선의 선비들처럼 풍류를 즐길 만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청운공원부터 수성동계곡, 사직근린공원으로 이어지는 2.5㎞ 코스다. 곳곳에 너른 바위가 있어 쉬었다 가기에 좋다. 수성동계곡과 인왕산, 세종마을(서촌)과 경복궁, 청와대 인근 풍경을 한눈에 감상하고 싶다면 인왕산 자락길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보자.
강원도 동해 두타산 협곡마천루에는 잔도가 있어 두타산의 절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숲에 둘러싸인 강원도 동해 무릉반석 / 한국관광공사 제공
시 한 수 읊어볼까, 신선놀음하기 좋은 동해 무릉계곡
강원도 동해시에 자리한 무릉계곡(명승)은 거대한 기암괴석과 장쾌한 폭포가 빚어내는 장관이 환상적인 곳이다. 호랑이가 건너다 빠졌다는 전설을 간직한 호암소에서 용이 승천하는 모양을 지닌 용추폭포까지 4㎞가량 이어지는데, 초입에 있는 무릉반석부터 눈길을 끈다. 옛날 묵객들이 자연에 감탄하며 남긴 암각서가 곳곳에 보인다. 나라에서 수륙재(국가무형문화재)를 설행한 삼화사도 무릉계곡에서 만날 수 있다.
장엄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두타산협곡마천루,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베틀바위의 독특한 자태가 일품이다. 계곡을 따라 난 길은 경사가 완만해 어린이들이 걷기에도 좋다. 녹음이 우거진 계곡에서 물소리를 벗 삼아 즐기는 탁족도 빼놓을 수 없는 경험이다.
충북 괴산 화양구곡 2곡 운영담 / 한국관광공사 제공
굽이마다 아홉 절경 펼쳐지는 곳, 괴산 화양구곡
충북 괴산에는 우뚝 솟은 산과 깊은 계곡이 여럿 있다. 그중 압권은 청천면 화양천 주변 약 3㎞에 흩어져 있는 화양구곡(명승)이다. 나무와 강물이 선사하는 자연의 바람으로 가득한 절경이 아홉 곳이나 있다. 여름에는 허가된 장소에서 물놀이도 가능해 가족 단위 피서객에게 특히 인기다. 지난달부터 일반인들을 출입시킨 화양구곡의 올해 물놀이 기간은 오는 8월 31일까지다.
여행의 출발은 화양동입구사거리 쪽이 좋다. 주차장이 넓고 화양구곡을 안내하는 팸플릿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걸어도 1시간30분정도면 화양구곡 전 구간을 볼 수 있다. 1곡 경천벽을 시작으로 2곡 운영담, 3곡 읍궁암, 4곡 금사담, 5곡 첨성대, 6곡 능운대, 7곡 와룡암, 8곡 학소대, 9곡 파곶 등 풍경이 연이어 나온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말년에 화양구곡에 내려와 지냈다. 하여 만동묘와 암서재, 화양서원 묘정비(충북기념물) 등으로 구성된 송시열 유적(사적)이 이곳에 있다.
경남 함양 화림동계곡의 백미로 꼽히는 거연정 / 한국관광공사 제공
청량함 가득한 풍류 여행지, 함양 화림동계곡
‘영남 선비 문화의 중심지’라 불리는 경남 함양에는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학문과 인생을 논하던 정자와 누각이 곳곳에 있다. 그중 수려한 풍경과 여러 누정을 품은 화림동계곡은 우리나라 정자 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계곡을 따라 기이한 바위와 반석, 산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조망하는 명당마다 정자가 들어서 있어 옛 선비들이 누린 운치를 누구나 만끽할 수 있다.
여행객들을 위해 선비문화탐방로 2개 구간이 조성돼 있다. 화림동계곡의 백미인 거연정(경남유형문화재)과 농월정을 잇는 1구간(약 6㎞)이 인기다. 계곡을 따라 숲길과 마을길을 걷다 보면 각각의 인물과 사연을 간직한 거연정, 군자정(경남문화재자료), 영귀정, 동호정(경남문화재자료), 경모정, 람천정, 농월정 등 7개 정자를 차례로 만난다. 물이 흐르는 방향대로 걷고 싶다면 거연정에서 출발하면 된다.
선조들이 흰 비단으로 묘사한 직소폭포는 전북 부안 변산반도 최고의 비경이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물에 반영된 산을 곁에 두고 걷는 전북 부안 변산반도국립공원 내 봉래구곡 / 한국관광공사 제공
굽이굽이 이어진 신비의 숲, 부안 봉래구곡
전북 부안 변산반도국립공원 내변산에 있는 봉래구곡은 약 20㎞에 이르는 하천 지형 아홉 곳을 일컫는다. 1곡부터 5곡까지 왕복 2시간 남짓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아쉽게도 6~9곡은 1996년 부안댐이 완공되면서 물에 잠겨 볼 수 없다.
봉래구곡 여행은 자생식물관찰원과 통일신라 신문왕 때 창건한 실상사 터(전북기념물)를 지나 5곡 봉래곡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주변 암반에 새겨진 글자들이 감입곡류인 봉래곡의 아름다운 풍경에 힘을 더한다. 4곡 선녀탕과 3곡 분옥담은 지름에 비해 깊은 항아리 모양 포트 홀이다. 물이 맑고 영롱한 에메랄드 빛이다. 높이 약 30m에 이르는 2곡 직소폭포 앞에 서면 폭포가 칼날같이 연못으로 내리꽂히는 절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정의 끝, 소담한 1곡 대소도 놓치기 아쉬운 비경이다. 원시림 느낌의 고즈넉한 숲길은 봉래구곡 여정에서 가장 신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