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건 작사 이세건 작곡
이선희 노래 J에게
명곡의 탄생, 이선희의 J에게
강변가요제가 탄생시킨
최고 스타 가수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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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 'J에게' [가요톱10, 1984] | Lee Sun Hee - 'To J' - YouTube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면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댈 그리워하네
J 지난밤 꿈속에 J 만났던 모습을
내 가슴속 깊이 여울져 남아있네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J 난 너를 못 잊어 J 난 너를 사랑해
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 길을
난 이 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J 난 너를 못 잊어 J 난 너를 사랑해
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 길을
난 이 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쓸쓸히 걷고 있네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이선희는
1964년생 올해 59세이다.
듣기만 해도 시리는 음역대와
맑고 청아한 목소리 덕분에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손꼽히고 있는 이선희.
하지만 정작 본인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선희의 아버지는 스님이다.
1964년
충남의 보령에서 태어났던
이선희 아버지가
가정을 꾸린 스님
즉 대청승이라
아버지와 세명의 동생과 함께
절에서 생활하며
학교를 갈 때만 도심으로 나오고
나머지 시간은 산속에서
뛰어놀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갑자기
학교에 아버지가 스님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왕따를 당하게 되었던 그녀는
고생하고 있던 중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아
뮤지컬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타고난 재능으로
뮤지컬을 하드캐리하며
순식간에 인싸로 거듭났기 때문에
이때부터 자신을 구원해준 노래에
엄청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이선희의 부모님은
그녀의 꿈을 반대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부모님에게 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던 이선희.
하지만 이때 부모님이
태몽에서 큰 고추를 땄는데
막상 집에 와서 보니까
고춧잎이 되어 있더라
잘 키우면 고추가 되고
잘못 키우면 고춧잎이 된다는
뜻이다라며
노래대신 공부나 하라는
말을 남겼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부모님과 자주 싸웠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았다고 한다.
강변가요제를 기억하시나요?
한때는 대학가요제와 함께
스타들의 등용문이었던
강변가요제는
슈퍼스타 K 등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의 등장으로
시들어가며 폐지되었지만
한때 여름마다
춘천과 청평, 남이섬 일대에서 열려
가요를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인기 최고의 가요 경연이었다.
대학가요제가
4년제 대학교 재학생으로만
출전 자격을 한정시켜
학벌지상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자
주최 측인 MBC는
2년제 전문대생들도
출전이 가능한
강변가요제를 만들었고
이후 학력제한 규정을
철폐하였다.
그 혜택을 본 최고의 스타가
가수 이선희였다.
인천전문대 환경관리과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과 선배인 임형균과 함께
그 당시에는 무명 작곡가던
이세건의 J에게라는 곡으로
1984년
강변가요제에 출전하여
대상을 수상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래를 하는 딸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파마를 하고
'1막 4장'이라는
듀엣으로 출전하였지만
대중들은 성량의 크기,
가창력의 차이로
이선희에게만 주목을 하였고
방송사들도
이런 그녀의 가능성을 평가하여
신인가수상,
10대 가수상 등
앨범 발매 없이도
최고의 가수에게 주는
영광을 그녀에게 몰아준다.
아버지도 연예생활로
추문에 오르지 않고
건전하게 노래를 하는 조건으로
그녀의 가수 생활을 용인하여 주고
그 후 연예활동을 통하여
외모도 나날이 세련되게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에
대중들도 시샘을 하기보다는
응원을 해주었다.
한바탕 웃음으로,
아 옛날이여,
영, 인연 등
발표하는 노래들의 퀄리티가
너무 좋아
질투보다는 동경이
그녀의 노래를 기다리는
대중들의 본심이었던 것이다.
두성과 가성에 의존하지 않고
진성으로 질러대는
고음부의 열창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대처승의 딸로
절 근처에서 자란
독특한 가족사 때문에
스타로서의 신비함마저 더해졌다.
청아하면서도 한이 서린
독특한 음색을 가진
그녀는 작곡가들이
서로 자기의 곡을 불러달라고
떼쓰는 행복한 가수가 되었다.
이후에도 발표하는 모든 곡을
히트시켰다.
작곡가 겸 매니저였던
윤희중과의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고 득녀 후
행복한 모습을 통해
대중들도 그녀의 노래를
더욱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나날이 계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의 굴곡은
스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의 거리 등
그녀의 노래를 작곡하며
작곡가와 매니저로
잘 나가던 윤희중이
사업을 하며 무리를 하여
빚 독촉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선희도 오랜 무대생활에
염증이 난 듯
서울시 지방의회 의원활동으로
가수가 아닌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그녀의 노래를 계속 듣고 싶어 하던
팬들이 실망하여
등 돌리는 상황에서
이혼까지 하게 되자
슬럼프가 장기화되었다.
정치활동을 접고
다시 가수로 활발하게
콘서트를 하던 중
이혼한 윤희중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실신한다.
콘서트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윤희중이 자신을 위하여 작곡해 준
나의 거리를 부르며
오열을 참을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의 정점에
서게 되는 그녀.
그녀를 성공시켜준
J에게라는 곡의 이니셜이
남편 윤희중의 마지막 글자로
상징될 정도로
깊었던 둘의 사랑은
이렇게 슬프게 마무리된다.
창작연도: 1925년
노래: 이선희
작곡가: 박태준(1900~1986)
작사가: 최순애(1914~1998)
이후 딸 양원이를
훌륭하게 키워내며
가수 생활을 지속하던
그녀는 2006년
재혼을 하게 되지만
재혼남의 경력이 알려지며
또다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삼혼의 경력을 가진 건축가로
재력을 가졌지만
도덕성에 의문이 제기된 것.
재혼 생활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지인과 팬들의 바람도 무색하게
최근 다시 이혼 소식이 들려와
가수로서의 성공에 대비된
가족사의 슬픔이 재발되는 운명에
그녀를 사랑하는 팬들의 가슴은
먹먹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운명에 굴하지 않고
이후에도 이승기 같은
후배 가수를 양성하고
위대한 탄생 등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멘토로 활약하며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선배로서
가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J에게를 부르던
1984년의 그녀가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알고 있었다면
계속 가수를 하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인생은 누구도 알 수 없는
퍼즐 같은 것.
그것을 풀고 맞추어 갈 운명이
각자가 지고 가는
삶의 무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가 굴곡 많은 삶을 견디고
이겨내어 계속 가수로서
활동을 해주었기에
J에게는 명곡의 반열에 올라
대중들에게 영원히 회자되며
그녀의 삶과 노래를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다줄 것이다.
옮겨 온 글 편집
카페 게시글
… 대청마루(펌)
최고 스타 가수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 이선희 노래 J에게
靑山 노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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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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