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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M1e9D3h1wWs?si=wrXxRX8ONV6ZW1wJ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금식 논쟁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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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서기관들이 비난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또 사람들이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을 비난하자,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다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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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2:13~17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마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레위는 예수님 일행과 세리들을 초청해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풉니다(눅 5:29). 이 잔치는 세리직과 결별하는 송별식이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서기관(율법사)들은 예수님이 세리나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하시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절)라며 항의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 자신은 영혼이 병든 죄인을 위해 영적 의사로서 이 땅에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7절). 예수님은 죄인의 구주십니다. 죄는 경계하되 죄인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 자녀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의 잔치에 함께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멀리하는 이를 나는 어떻게 대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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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논쟁 2:18~22
당시 바리새인들은 매주 두 번(월요일, 목요일) 금식했습니다(눅 18:12). 사람들이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자,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로 그들을 교훈하십니다. 첫째, ‘혼인집 손님 비유’입니다(19~20절). 결혼 잔치에서 신랑 손님이 금식하지 않듯, 신랑이신 예수님의 손님인 제자들도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생베 조각과 낡은 옷 비유’입니다(21절). 낡은 옷에 새 조각을 기우면 옷이 더 해어지듯, 율법과 복음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비유’입니다(22절). 타락한 유대교는 생명의 복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아닌 은혜의 복음으로 삽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은혜의 복음 안에서 내가 자유롭게 수용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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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위한 일인가요?
윌리엄 거널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선행에 힘쓰고 고행을 자초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벌거숭이인지를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지키지 않은 계명이 있으면 대 봐라.”라고 말합니다. 사탄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기에 그들은 자기 죄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만 이미 그린 것을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을 고치기 어려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확신과 자기 의로움으로 꽉 차 있어서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금식하는 사람이 금식을 안 하는 사람보다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남들 잘 시간에 깨어서 새벽예배와 철야기도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금식과 신유와 방언, 이 모든 것은 구원을 위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중요한 일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금식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경건을 보여 주는 것보다 그들과 삶을 나누는 것이 복음이 들어가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새 말씀, 새 부대, 새 노래 / 김양재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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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2장 14, 17절
예수님은 죄인의 소망이십니다. 레위(마태)는 도덕적으로는 죄인이었고, 민족적으로는 원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전염병처럼 여겨져, 그와 함께 있으면 비난과 정죄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비참함과 고통 속에 있던 레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에게는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죄인 된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온 우주의 중심이신 주님께 우리가 보일 마땅한 반응은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 밀라드 J. 에릭슨
오늘의 기도
주님, 제 편견과 선입견으로 사람들을 가르고 판단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영혼들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게 하소서. 주님의 복음이 낡은 관습과 편협한 생각에 훼손되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을 지키며 바르게 가르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24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오늘 본문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금식기간에 금식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리새인들이 강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므로 서기관들의 도전을 일축해 버립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레위를 부르심, 서기관들의 문제제기, 예수님의 답변, 금식에 대한 질문과 답변 등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 예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여기 레위는 마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사도명 같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두 종류의 세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람과 관계되는 세금 즉, 수입세와 인두세를 걷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다리나 국도나 운하 등을 통과하는 통관세를 걷는 자들입니다. 후자가 더 재미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세무공무원 임의대로 세금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가 사람들에게 더 미움을 받습니다.
더구나 그가 근무하던 가버나움은 데가볼리로부터 갈릴리와 유대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는 요지입니다. 그는 몫 좋은 곳의 세리인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부처럼 쉽게 복귀할 수 없는 직업이고,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처럼 결혼으로 인해 처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헤롯 안디바에 의해 임명된 공무원입니다. 보복을 당할 수 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즉시로 주님을 따릅니다. 주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는 신적인 명령으로 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또 다른 사연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그는 레위지파의 사람입니다. 제사장 신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민족의 배반자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런 수치를 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지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 당시 그 지역에서 유행하던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성 육신’의 목적을 사람들에게 친숙한 단 한 문장에 담아 밝힌 셈입니다. 여기서 건강한 자란 어떤 종교적 도움도 필요 없는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를 비유한 말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새로 담근 포도주가 발효를 하면서 가스가 나오게 되는데, 그 가스를 낡은 부대가 감당하지 못하고 터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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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비유의 말씀으로, 유대주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곧 낡은 유대교의 전통은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반응하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야말로 새로운 교훈으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끝끝내 옛 습관과 전통만을 고수하여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같은 생명의 복음을 들었지만 구태의연한 사고와 구시대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 날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구약시대가 가고 신약시대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그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새 생명을 얻습니다. 하지만 지배층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주님을 거절하고 아예 주님을 못 박아 버립니다. 그 후 50년이 채 안되어 그들은 철저하게 멸망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 그 불행의 원인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도래해 구원의 기회가 왔건만, 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민족전체의 구원을 놓치게 한 것입니다. 이 모두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하듯이, 일할 때 일 해야 하는 것이지요. 나이 먹어선 공부도 못 합니다. 사고력과 응용력은 나을지라도, 기억력과 체력이 뒷받침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꾸준히 공부하는 사람과 젊어서 공부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과 담을 쌓은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유일한 낙이 TV가 될 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은혜 받을 때 은혜 받기를 애써야 합니다. 교회생활 오래하다 보면 껍질 같은 것이 생겨서 어느 날부터 도통 은혜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 은혜를 사모하고 매일 말씀에 감격하는 사람은 계속 성령 충만할 수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가난하면 더 가난해지고, 부하면 더 부하다는 말로, 믿음의 세계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는 심각한 영적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에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때문일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마음에 천국을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를 부를지 모릅니다. 은혜 받을 때 은혜 받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때와 시기를 놓치면 은혜를 구할 수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법입니다. 절실히 사모해야 할 은혜임과 동시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말씀입니다.
1월4일 청라호수공원에서
마가는 2장의 시작부터 예수님께서 ‘중풍병’에 사로잡힌 것에 대해 오히려 ‘죄 사함’의 권세를 말씀하신 것과 ‘세상적 죄인’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정죄에 대해 오히려 ‘구원자‘로 오셨음을 선포하신 것에 이어
이제 광야에서 복음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에세네파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세상적 사두개인들과 비교가 안되는 구별된 신앙을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와 그들이 계속 행하는 ‘금식’에 대해 질문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들에게 금식은 ‘슬픔(삼상 31:13; 삼하 1:12)’과 ‘참회 (삼상 7:6; 스 8:21; 느 9:1; 욜 1:14, 2:12)’의 표현이었고 모세와 같이 하나님 앞에 훈련되는 자로서의 경건한 삶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대속죄일에 반드시 의무 금식을 하도록 하였지만 (레 23:29-30) 그들이 찾아와 말하는 금식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율법적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참 잘하고 있다. 나와 나의 제자들에게도 역시 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누구나 절제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이뤄가야 한다’라는 인정과 감동의 반응을 기대했을 텐데 도리어 ‘결혼식’과 ‘포도주와 가죽 부대’를 언급하십니다.
그들이 구해왔던 피의 제사로 버텨온 구원의 헌 가죽 부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고 이제 자신이 직접 이 땅 가운데 성육신하시고 오직 자신의 피를 담아 은혜로 구원을 얻는 새 가죽 부대가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구원자인 신랑 되어 주심의 기쁨을 누린 혼인 식 이후에 그를 빼앗기고 다시 돌아오실 날까지 견뎌야 할 길고 힘든 영적 부재의 금식이 있음을 암시하십니다.
그릇된 세상과 인생의 기준들에 받은 구원의 은혜와 한없는 사랑을 끼워 맞추지 않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인생을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레위가 세관에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연합이란 뜻을 가진 레위라는 이름은 그가 레위 지파 제사장의 후손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합한 왕 같은 제사장이어야 할 레위가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세상 집권자와 연합하여 그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을 좌시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막2:14)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해야 할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 살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자기를 정당화하던 그 세관이라는 자리에 있는 것을 좌시하실 수 없어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 하나님 앞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예수님 주변에는 온통 세리들과 죄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만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의 쉬운 가십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의인 되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그 부르심에 응답할 자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주의 부르심에 선뜻 대답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영화롭게 하고 계십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고 존귀한 성도라 칭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16:3)
그러므로 우리를 그 세관에서 하나님 앞으로 부르신 주님과 온전히 연합한 참 레위인 되기 원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받으시고 속히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6~7)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4,15절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될 자리, 곧 유대 사회에서 부적격자로 낙인찍힌 이들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을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교회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교제의 자리로 초대해야 할 이들도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죄인들, 부적격자로 취급받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사회의 어떤 자들을 찾아가실 것 같습니까?
16,17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또 의인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구원은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적인 이들보다, 자기 죄를 슬퍼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훨씬 가까울 것입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8-22절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정한 속죄일 외에도 매주 두 번이나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고 있는 제자들은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곧 금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격식을 따르지 않는 전혀 새로운 금식이 될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삶도 유대교의 낡은 틀이 아닌, 새로운 형식으로 구현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금식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부대(형식)에 담아야 하겠습니까?
23-28절 율법을 위해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윗은 굶주렸을 때 율법이 금한 진설병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정신은 단순히 일을 그치는 데 있지 않고, 사람으로 안식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과도한 노동으로 지친 자가 있다면, 노동의 중단이 안식이지만, 먹을 것이 없어 주린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먹는 것이 안식입니다. 안식일 규정으로 사람을 굴레 씌우고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는 것은 안식일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은 무엇입니까?
➲ 삶의 시선이 사회적 약자를 향해 있는 삶입니다(13~17절).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신 후에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말씀하시니, 레위는 일어나서, 따라갔습니다(14절). 당시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사람을 제자로 부른 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지탄받을 행동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셨고, 레위는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이러한 행동 역시 당시 사회적 분위기상 받아드릴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도발적 행동에 대해 당혹감을 느낀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불만을 표출합니다(15~16절).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절)... 이에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건강한 자이고, 의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모든 사람이 병든 자이고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며, 예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통념으로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하고 멸시받던 이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은 내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삶입니다. 내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은 잘 먹고, 잘 살고, 잘 나가는 사람들보단 당시 사회적으로 약자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먼저 그 사람 역시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고, 구원 받아야 할 대상임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르짖음에 듣는 귀를 닫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는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면해 있는 사회적 아픔에 대해서 큰 것은 아닐지라도 작은 것에서부터 필요를 채워가는 성숙된 믿음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임을 고백합니다.
➲ 삶의 방향이 새로운 방식을 향해 있는 삶입니다(18~22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의 정한대로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18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는 표로 금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하나님 앞에서 겸허함을 사라지고 금식을 경건을 표시하는 공적으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금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대표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사실 금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을 자기들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19절,새번역)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아가 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단, 금식할 날이 있을 것인데, 그날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것(20절)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낡은 옷이 찢어지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그 부대가 터지듯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이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나의 모습들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삶의 태도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것들을 완전히 배제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하튼 지나가 버린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에 어울리지 않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의 방식과 원리는 무엇일까요?
자기 공로를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했던 내 자신의 삶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것에 내 자신을 의탁하는 삶입니다. 내 중심적 신앙 철학을 버리고, 삶을 온전케 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의 은혜 속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신앙생활의 기쁨을 새롭게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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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죄인들의 예수님(13-17절)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있던 세리 중 한 사람 레위(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레위의 집에서 당시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칭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행보셨습니다. 에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이 따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 문제삼는 이들에게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음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의 머리로 삼고 있는 이 땅의 교회는 죄인들이 접근성이 좋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위한 일에 에수님처럼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도 주님과 같이 내 주변에 영적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때 참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영적으로 연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2.진정한 금식의 때(18-22절)
당시 엄격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번 금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행하는 그러한 신앙행위에 대하여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의 논쟁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는 그때는 금식할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정말 금식하며 울어야 하는 때가 바로 신랑되신 자신이 사람들에 의하여 버림을 받을 때임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받으실 것인가를 미리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금식을 하는 것만을 중시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금식이 가지는 참된 의미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금식해야 할 때는 모든 영역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금식하며 애통해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지고 사단의 권세가 득세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의를 구하여야 합니다.
묵상하기
나는 진정으로 애통할 일에 애통하고 있는가?
오늘의 말씀요약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에게 따르라고 하십니다.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의인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혼인집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으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조건 없는 부르심의 유용성(2:13~17)
부르심은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기초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사람을 부르셔서 그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거룩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은 동족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세리 레위를 아무 조건 없이 제자로 부르십니다. 특별한 요구나
당부도 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따르라.” 레위는 이 한마디 말씀에 순종해 즉각 예수님을 따랐고,
많은 동료를 초청해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 당당히 밝히십니다. 주
님이 부르실 수 없을 만큼 큰 죄인은 없습니다. 그가 응답하지 않을 뿐입니다.
- 묵상 질문: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 적용 질문: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까요?
내용 없는 형식의 무용성(2:18~22)
내용 없는 형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화석화된 신앙은 자기 의와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어떤 사람이 바리새인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집 손님의 예를 드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메시아와 함께 있는 기쁨이 크기에 슬퍼하며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 같은
유대교의 형식적 율법주의로는 새 포도주 같은 복음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생명력 없는 유대교의 가르침에
복음을 억지로 결합시키려 한다면, 큰 부작용과 폐해가 발생할 것입니다.
종교적 형식주의를 버리고 가난한 심령으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은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비유로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나요?
- 적용 질문: 복음의 역동적인 생명력이 내 삶에서 역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기도
말씀 안에서 주님의 시각으로 상황을 분별하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사람들을 판단했던 죄를 용서해 주소서.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되 비본질적인 것들은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허락하소서.
마가복음 2:13~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본부인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시고 계실 때에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침상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릴 때
예수님은 중풍병 뿐만이 아니라 죄 사함도 선언해 주셨고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오늘은 5번째 제자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4)
나를 좇으라(14)하시니 일어나 좇았다. 할렐루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위는 그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던 인물이지 않았을까?
재산은 많았는지 몰라도 존경받는 인물은 아니였고
사회적인 신분은 있었는지 몰라도 부러움을 받는 위치는 더더욱 아니였다.
오히려 매국노로 취급받고 공식적인 죄인으로 취급하던 왕따 마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얼른 예 하고 좇았다는 생각이 든다.
왕따에서 해방시켜 주는 우리의 쨩 예수님이 부르시니 기쁘지 않았을까?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듯이
고기잡던 그물을 버려두고, 부모와 삯군들과 깁던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듯이
마태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예수를 좇았다.
마태는 다른 제자보다 더 기쁨으로 좇았을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잔치를 벌린다.
레위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와 함께 앉아 식사를 했다.(15)
이 장면을 목격한 한 그룹이 있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였다.(16)
예수님께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질문했다.
이 질문을 옆에서 들으신 예수님이 명쾌한 답변을 해 주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7)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하신다.
동일한 한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눈길이 있다.
예수님의 눈길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눈길이다.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레위는 부르면 안되는 인물이였다.
함께 식사를 해서도 안되는 사람이였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신분이나 계급이나 외모로 보지 않으시는 주님 눈에는 크게 보이는 사람이였다.
형식이나 율법이나 규례나 전통에 메이지 않으시는 주님에게는
함께 기쁨으로 식사할 수 있는 인물이였다.
동일한 한 사건에 왜 이런 시각의 차이가 생기는가?
영성의 차이인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영성이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는냐의 차이이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내가 적어도 이런 사람인데 저 사람과는 어울리면 안돼하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이것이 낡은 가죽 부대이다. 이것이 낡은 옷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했다.
사람들이 무어라 할까 별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하셨다.
이것이 새 포도주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22) 하신다.
말씀을 보면서 내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과 같은 모습을 본다.
나는 하나님의 시선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날마다 의식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니까?(18)
이 질문들이 중요했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 이 질문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은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17)고 하셨고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는냐?(19)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2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22) 하신다.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무지와 교만의 색안경을 끼고 주님을 알고 따른다,
여호와를 예배한다고 중언부언하던 삶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거짓된 생각과 회칠한 의로움을 버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고 만물을 소성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안을 구하는 여호와의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지진과 홍수의 재해로부터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높이고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전심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