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택쥐페리>
리옹시에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1917년에 보쉬에 고등학교와 생 루이 고등학교에서 해군 사관학교 입학을 준비하였으나 1920년 징병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1922년 1월에 남불 이스트르에서 육군 비행 조종 학생이 되어 군용기 조종 면허장을 땄다. 그 해 10월, 예비 소위에 임관되었고. 첫 저서인 <비행사(L'aviateur)>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제대하고 소레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여 앙드레 지드, 장 프레보와 사귀었으며 이때 발레리, 지로두, 아인슈타인 등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1926년부터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지배 하에 있었던 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현 세네갈의 다카르간의 정기 우편 비행에 종사하며 이듬해인 1927년에 <남방 우편기(Courrier Sud)>를 집필하여 작가로 데뷔하였고 3년 뒤인 1930년에 이를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하였으며 그 해 6월에는 <야간 비행기(Vol de Nuit)>를 집필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월에 고메즈 까리요라는 신문 기자의 미망인 콘수엘로 슁생과 결혼하였고 12월에 <야간 비행기>로 페미나 문학상을 받았다. 1933년 민간 항공 회사인 라테코에르 사에 입사하여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 생 라파엘 만에서 수상기를 테스트하는 중에 사고를 일으켰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939년 2월에 <인간의 대지>를 출판하여 그 해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하였고, 육군 정찰기 조종사가 되었다. 하지만, 1년 뒤인 1940년 <성채(Citadelle)>의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 때문에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어 다 완성하지 못하고 12월에 미국 망명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1개월 뒤인 1941년 1월 뉴욕에 도착하여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를 집필하였으며 2년 뒤인 1943년 4월에 그 유명한 어린 왕자를 출간하였다. 5월 4일, 연합군에 합류하여 북아프리카 공군으로서 우지다에 집결한 최초의 민간 프랑스인으로 알제리에 도착하여, 7월에 튀니지 부근의 라 마르사 기지에서 미 제7군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1944년 5월 16일, 사르데뉴 섬의 알게로 기지에서 2-33 정찰 비행 대대로 복귀하였고 7월 31일 오전 8시 30분에 리트닝 기지를 출발하였으나, 프랑스 본토로 정찰을 떠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고 실종자가 되었다. 이때는 정부의 비난을 받고, 다난한 결혼 생활로 침울한 상태였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약 반 세기만에 사망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기는데...
항상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어했던 생택쥐페리는 결국 1944년 7월 31일, 지중해 상공에서 P-38 라이트닝을 몰다 실종되었다. 그리고 1998년 4월 마르세이유 남동쪽 해저에서 어부 장 클로드 비앙코가 우연히 그물로 그의 이름이 적혀진 팔찌를 건져올림으로서 그의 행방이 드디어 밝혀졌다. 수중탐사장비로 바다 깊숙히 가라앉은 라이트닝 정찰기를 발견함으로서 그의 최후도 밝혀진 셈. 하지만 이해가 안가는 게 그동안 제기되어 온 독일군에게 격추당했으리라는 짐작과 달리 비행기 겉에는 총탄 자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래서 정비불량이나 아니면 일부러 마지막 비행에서 스스로 추락한게 아닌가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08년 3월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에게 훈장도 받은 공군 에이스 조종사인 호르스트 리페르트가 생택쥐페리를 격추했다고 주장하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더불어 프랑스에서 건져올렸다는 팔찌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시각이 많다. 생텍쥐페리나 아내인 콘수엘로 순신 산도발(1903~1979) 집안 사람들은 비웃었다. 마지막 비행 지점으로부터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었기에 결국 자살한 거 아니냐는 주장으로 조작했다며 일절 믿지 않았다. 하지만 해저 탐사로 잔해를 발견했다는 잠수부 뤽 반렐은 자살설을 믿었으며 무엇보다 당시 드 골에게 나치 협력자로 몰리고 여러 모로 고달펐던 생텍쥐페리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주장을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택쥐페리의 친한 친구인 기욤을 비롯한 이들도 그의 마지막 얼마전까지 굉장히 말이 없었고 우울해있었다는 증언을 했으며 죽기 하루전인 7월 30일 비행전에 친구들과 같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어느 여인(전혀 모르는 여인이었다고)에게 "나와 함께 수영하지 않을래요? 내일이 되면 난 여기에 없을지도 몰라요.”라며 쓴웃음짓는 바람에 친구들이 불길한 농담하지말라고 한 일화까지 있다.
가정적으로도 그는 매우 고민했다. 아내인 콘수엘로는 엘살바도르 출신 여성으로 이미 나이 27살에 남편을 2번이나 여의거나 이혼한 과부였다. 지방귀족 출신으로 좀 보수적인 생택쥐페리 집안은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아서 1931년 결혼하고 13년동안 그녀를 무시해왔기에 그의 고민은 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둘이 서로 사랑하고 사이도 좋았지만 ... 두 사람 다 불같은 열정과 때론 확 식어버린 냉기로 갈등하다가 잠깐 별거하는 듯 하더니 다시 불같이 합쳐지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한다. 어린왕자 때문에 순수하다고 사람들이 오해한다는 편견이나 인식과 달리 그는 매우 정열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고 그의 집안에선 콘수엘로를 내쫓아서 그녀는 어린왕자의 유명세와 달리 잊혀졌다. 원래 돈많은 과부라서 경제적으로 어렵진 않았지만 그녀는 이후 여러 다른 사람들과 사귀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택쥐페리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하여튼 상당히 드라마틱한 인물이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명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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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에서 나오는 10가지 명언
1 " 내 비밀은 이런거야.. 매우 간단한 거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은 법이야 !!
2 "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할 시간이란다
" 내가 나의 장미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이라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3 "그러나 네가 나를 기르고 길들이면 우린 서로 떨어 질 수 없게 돼
넌 나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 사랑이 되고
난 너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될 테니까..
4 " 나를 길들어여줘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그러나 만일 , 네가 무턱데고 아무 때나 찾아모면
난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까..
5. 나는 해지는 풍경이 좋아! 우리 해지는 구경하러가..
그렇지만 , 기다려야 해" "뭘 기다려?"
해가 지길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6 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에건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와야 해."
어두운 눈으로 보면 마음도 어두지기 때문에
인생길에 길을 갈수 없어
오로지 밝은 눈을 보아야 볼수 있어
7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 돈 버는 일? 밥 먹는일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거란다
8 "지금은 슬프겠지만
그 슬픔이 가시고 나면 (슬픔은 가시는 거니까)
나로 인해 잃은 슬픔은 숨은 사람이 찾는 거야
넌 언제까지나 내 동무로 있을 것이고
나와 함께 웃고 싶어 질거야 "
9. "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 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 하지만 , 넌 그것을 잊어서는 안돼..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 까지나 책임을 지어야 하는 거야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 왕자가 되뇌었다.
10 "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