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고 싶은 여행 책
오원성
아버지!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빨간 카네이션 꽃을 어머니의 가슴에 달아 드리고, 한 송이는 아
버지께 드리고 싶은데 왜 보이지 않으십니까? 내일은 오실 수 있
죠? 바쁘시면 모레, 아님 글피 오셔도 되고요. 시들지 않도록 꽃병
에 꽂아 놓을 테니 꼭 오셔야 해요. 아버지......
해마다 찾아오는 어버이날이면 기다림에 지친 카네이션 꽃을 바
라보다 안타깝게 떠나보내고 또 일년을 기다린다. 아버지... 아버
지... 불러 보고 싶지만 부를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
나에게 세상의 햇살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신 두 분은 아버지와
어머니이시다. 한 분은 예순 셋의 나이가 되던 해에 나를 이 거친
세상에 남겨두고 홀연히 하늘 나라로 떠나시어 사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돌아 올 줄을 모르고, 또 한 분은 팔순의 나이에 자신의 몸
조차 지탱하기 힘든 할처럼 구부러진 허리를 이끌고 나의 아침밥을
지어 주신다.
언제였던가? 어머니의 가방을 엿 본적이 있다. 헤어진 작은 가
방 속에는 빛바랜 몇 장의 사진이 나란히 있었다. 그것은 낯익은
얼굴들, 미소지은 아버지 큰누나 막내 동생이었다. 잊었던 얼굴들
이 시야에 닿는 순간 보고싶은 마음에 눈물이 핑 돈다. 남편과 두
자식을 쓰라린 가슴에 묻고 모진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마음을
소견 없는 내가 어찌 알 수 있으랴!
그 사진을 꺼내 보며 어머니께서 한 말씀하신다. “큰애야, 나...여
행을 떠나고 싶다.” “어디 가고 싶으세요? 금강산 구경 시켜 드릴
까요?” “금강산은 텔레비전에서 매일 보는데...네 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버지께서 계신 곳으로 여행 준비를 하신다 생각하니 머리가 띵
해진다. 어머니께서는 길을 떠나실 게다. 언젠가는...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마음 편하게 해 드리지 못했으면서도 그날이 아주
먼 훗날이길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아버지께서도 세상을
뜨기 얼마 전에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지 않았던가. 군대를 제대한
이듬해인 다 큰 나이였는데도 왜 그리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는지.
홀로 임종을 지켜보며 울부짖었던 그때를 아직 잊지 않았고 이 세상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실 어머니인줄 알았는데.
불효하고 후회하는 어리석음을 또 범하려 하는 못난 인간이 나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 뛰는 소리가 빨라진다.
바람이 불면 몇 번 팔딱거리다 꺼지는 촛불 같은 가녀린 숨소리,
찬바람 부는 겨울 앙상한 가지에 달려 있는 몇 잎밖에 남지 않은
삶, 그것이 어머니의 삶인 것 같다. 무엇을 해드릴까? 무엇을 해
드려야하나? 의무감 같은 초조한 마음을 추수리며 어머니께서 떠나실 때
갖고 가실 '여행 가방'을 생각한 것은 금년 초였다. 그 가방에 무엇을 넣어
드려야하나 하고 몇 달을 고심했다.
용돈을 챙겨드릴까? 걷다 힘들면 기차를 타고 비행기도 타셔야 할 테고,
산사(山寺)를 찾아가시다 초하루 날엔 부처님께 시주 돈도 필요할 테니 밥맛없을
때는 한끼 씩 때우며 좋아하셨던 샤니빵과 과자도 준비할까?
꽃피는 봄엔 온 가족이 모여 커다란 바가지에다 나물을 넣고 고
추장에 비벼 먹는 것을 좋아 하셨다. 그러면 봄나물이 좋을까?
비가 오면 우산이, 가을 단풍놀이 갈 때는 기념사진 찍을 카메라도
있어야겠고, 눈 내리는 겨울이면 목도리에 털장갑도 필요하실 텐데.
길을 걷다 갈증이 나면 목을 축일 막걸리는 어떨까? 기분 좋은 날
엔 흥겹게 부를 육자배기 가락은 신바람을 불러 주겠지. 어머니
혼자 떠나시는 길에 갖고 갈 짐이 너무나 많다.
나는 어머니에게 길을 가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
는 '여행 책' 한 권을 구해 드리기로 했다. 그 책을 열면 신기하게
도 전에 드셨던 맛있는 음식이 있고, 나들이에 입던 예쁜 옷도 있
다. 경로당 친구와 다정한 이웃이 있다. 아버지보다는 좀 늦게 여
행을 떠난 맏딸 화자누나와 막내아들 영배도 만날 수 있다. 떠난
자식을 다시 곁에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하실 텐가! 고부간에
갈등이 많았던 옛날에도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고 사랑을 듬뿍 주셨던
시어머니를 보면 얼싸 안으실 게다. 그러나 요술 같은 그런 책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나간 추억들을 돈을 주고 살 수만
있다면 수천 만원이라도 지불하겠지만, 그것은 황금을 주고도 살 수 없었다.
내 스스로 땀을 흘려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어머니께서 여행하는 도중에
필요할 때마다 요술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아버지 친구께 찾아다니면서 소재를 구했다.
그들은 감추었던 진귀한 보석상자를 열면서도 아까워하지 않
고 내게 나누어 주셨기에 고맙다. 아버지께서 조국을 잃고 먼 일
본 탄광에 징용되어 5년 동안이나 쓰라린 광부생활을 하고 계실 때 어머니의
생계를 걱정해 부산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취직 시켜 주셨던 분이 계셨다.
그 또한 언젠가는 내게 필요 할 것이라 생각하시었던지 막내딸에게 기억을 남겨
놓으신 채 이미 고인이 되셨기에 명복을 빈다.
아버지 어머니의 지나온 시절, 기억하기조차 진저리나는 어렵고
힘들었던 사연들을 한 잎 두 잎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을 긁어 모
으듯 글을 쓰고 있지만, 어머니께서 갖고 가실 여행 책으로는 너무
나 부족할 것 같다. 잊혀진 기억들을 가물가물 주마등처럼 떠올리
실 때마다 살며시 녹음기를 튼다. 듣지도 보지도 못 했던 등장 인
물들. 그들은 주연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조연이 되기도 한다. 주
연이면 어떻고 조연이면 어떠하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같은 길
을 걸으셨던 길벗들인데,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들이 계셨
기에 걸어오신 길은 덜 외로웠고, 풀뿌리에 연명하면서도 허기진
배고 품을 참아 내셨으리라.
설거지하는 어머니 뒤에 다가가 살며시 안아본다. 한줌도 안되는 젖무덤을
만지며 “에그, 옛날에 내가 다 빨아먹어서 하나도 없잖아.”하고 응석을 부려 본다.
싫지 않으신 표정이다. 내일이면 뻔한 거짓말이 될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를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음을 갖자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왜냐하면 나도 곧 어머니의
뒤를 따라 떠나야할 하찮은 나그네이기에.
어머니!
여행을 떠나신다 구요? 예, 가셔야지요. 가시다 힘들 때는 제가
드린 이 책을 펼치시고 잠시 쉬어 보세요. 아버지를 만나시거든
어릴 적 사랑방에서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저에게 장화홍련전을 구성지게 들려
주셨던 것처럼, 이 다음 손자들이 자라면 긴- 긴 밤이 지샐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세상사는 지혜를 깨우쳐 주시고 길을 떠나신 아버지와 20세기 마
지막 초겨울 80회 생신을 맞이하실 어머니께 이 책을 선물로 드리
고 싶다.
첫댓글 어머니!
여행을 떠나신다 구요? 예, 가셔야지요. 가시다 힘들 때는 제가
드린 이 책을 펼치시고 잠시 쉬어 보세요. 아버지를 만나시거든
어릴 적 사랑방에서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저에게 장화홍련전을 구성지게 들려
주셨던 것처럼, 이 다음 손자들이 자라면 긴- 긴 밤이 지샐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세상사는 지혜를 깨우쳐 주시고 길을 떠나신 아버지와 20세기 마
지막 초겨울 80회 생신을 맞이하실 어머니께 이 책을 선물로 드리
고 싶다.
여행을 떠나신다 구요? 예, 가셔야지요. 가시다 힘들 때는 제가드린 이 책을 펼치시고 잠시 쉬어 보세요. 아버지를 만나시거든 어릴 적 사랑방에서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저에게 장화홍련전을 구성지게 들려주셨던 것처럼, 이 다음 손자들이 자라면 긴- 긴 밤이 지샐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세상사는 지혜를 깨우쳐 주시고 길을 떠나신 아버지와 20세기 마지막 초겨울 80회 생신을 맞이하실 어머니께 이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