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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안식일 2:23~28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에 행할 일들 3:1~6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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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새인들이 정죄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을 예로 드시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음을 보이시고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헤롯당과 모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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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안식일 2:23~28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날들 중의 날’이라고 부르며,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39가지 금지 사항을 만들었습니다. 그중 “추수하지 말라.”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던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잘라 먹자, 바리새인들이 ‘추수하지 말라’는 조항을 범했다고 비판합니다(23~24절; 마 12:1~2). 예수님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규례를 깨고 굶주린 다윗 일행에게 진설병을 먹게 한 일을 상기시키십니다(삼상 21:1~6). 그리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제정된 것임을 천명하십니다. 이는 율법의 근본정신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창조주로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요?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우선시하도록 시정할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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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행할 일들 3:1~6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자, 고발하려는 무리가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봅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보시고는 그를 회당 가운데 세우시고, 지켜보는 무리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4절). 예수님은 완악함으로 침묵해 버리는 무리를 향해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이 “네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시니, 손 마른 사람의 내민 손이 즉시 회복됩니다.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정치 세력인 헤롯당과 결탁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안식일은 죄를 짓지 않으려 조심하는 날이 아니라, 복음으로 선과 의를 실천하는 날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은 안식일에 행할 일이 무엇이라고 교훈하셨나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이 되도록 내가 적극 참여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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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회복 사역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다. 그러나 단순히 연민을 느끼는 데에만 그치지 않으시고, 사역하시는 내내 감정을 행동으로 전환하시며 그들을 만지셨다. 언제나 예수님의 연민은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으로까지 이어졌다. 폐부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연민은 사회적·종교적 틀까지 깨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게 만들었다. 바로 이 진리에 소망이 있다. 연민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하신 주님이 없었다면, 당신과 나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리는 모두 ‘죄와 타락’이라는 안타까운 현실에 묶인 채 이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 모두 유혹의 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잘못이든 남의 잘못이든 우리는 악의 결과에 신음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곤경을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행동으로 옮기셨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 주님은 살과 피가 되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우리를 어루만져 주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 대해 느끼거나 생각하기 위해, 혹은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만지기’ 위해 오셨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피조 세계와 피부를 맞대시기 위해, 곤경에 빠진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 역시 그분을 닮아 가야 한다. 주님의 회복 사역에 동참함으로써, 우리의 연민에 행동의 피부를 입혀야 한다.
쉬운 예수는 없다 / 제이슨 미첼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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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2장 27절, 3장 4절
형식과 제도보다 한 영혼이 중요합니다. 교회 안의 형식과 제도는 성도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줍니다. 이것의 목적과 이유는 주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즉 복음으로 한 영혼을 구원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뜻보다 사람 뜻을 앞세우고, 영혼이 구원받는 일보다 형식과 제도를 중요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교회 안에 두신 모든 제도는 '영혼 구원'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자아가 그것을 앞지르지 않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영원한 상급을 향해 진실한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며 삶을 낭비한다. - 짐 엘리프
오늘의 기도
주님, 넘치는 긍휼로 제 인생을 대해 주시니 그 은혜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주님께 받은 긍휼을 이웃에게 흘려 보내는 제자 되게 하소서. 전통과 관습에 매여 습관적인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뜻을 따라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항상 힘쓰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15 내 죄 속해 주신 주께)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가진 안식일 논쟁에 관한 내용입니다. 안식일 날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비벼 먹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진설병을 먹은 다윗의 예를 들어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인지 선언합니다. 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자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그리스도의 답변, 손 마른 사람을 세우시고 질문하는 그리스도, 마른 손의 회복과 진노한 종교지도자들 등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 안식일날 예수님이 밀밭 사이 길을 지나실 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랐다는 말입니다. 신명기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즉, 배고플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허용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동은 결코 죄가 되지 않지만,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점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이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 동작은 타작에 해당되며, 그 다음 곡식알을 먹기 위해 그 껍데기를 입으로 불었다면 그것은 정미하는 행위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그런 행위는 곧 추수하는 노동과 같아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 바리새인들이 그런 다윗의 일을 알고 있다면 어찌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뜻입니다. 이는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갈 때에 ‘놉’이라는 곳을 들려서 그곳의 제사장으로부터 일반인이 먹지 못하는 빵(진설병)을 먹었던 사건에서 연유된 말입니다. 그런 다윗의 행위를 구약에서도 정죄하지 않았는데, 어찌 너희들이 곧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탓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을 지나치리만큼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손 마른 사람’은 피의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손의 근육기능을 상실한 자를 말합니다. 안식일 날 양이 구덩이에 빠질 경우 유대인 공동체마다 그 응급조치가 상이합니다. 우선 쿰란 공동체는 양 스스로가 구덩이에 빠져나올 수 있도록 기껏해야 널빤지를 넣어 줄 정도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보다 더 적극적입니다. 우선 웅덩이에 빠진 양에게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음식을 넣어주고, 그 다음 만약 양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는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합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은 안식일에 양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당신들이 허용하고 있는데,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죄가 된단 말인가? 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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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안식일의 제정 목적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안식일의 정의를 보다 규명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람으로 인하여 안식일이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히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그래서 있는 말씀으로, 안식일을 제정하신 성자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그 주인이기에 그렇습니다.
보통은 제 1 계명서부터 제 4 계명까지 하나님을 위한 계명이라고 합니다. 곧 다른 신 금지, 우상배척, 여호와 경외, 그리고 안식일 준수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본문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다름아닌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4계명은 사람을 위한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지지합니다. 다름아닌 우리 몸을 창조하신 분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에 하루는 꼭 쉬어야 합니다. 즉, 주일날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혼,육이 안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쉬지 않고 달리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명마라고 하더라도 밤낮으로 달리면 반드시 쓰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 인생입니다. 마냥 달릴 수 없습니다. 쉼이 없이 달리는 인생은 언젠가는 넘어지기 마련이라 그렇지요. 쉬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처럼 주일날 빈둥빈둥 T.V. 나 오락을 줄기며 놀아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제 4 계명으로, 이 계명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하는지의 팁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문제는 그 거룩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나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 질 수 있다는 유일한 방법이 있으니, 바로 그분과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의 친밀한 가운데 그 거룩함이 우리에게 와, 비로소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식입니다. 이는 마치 테니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 힘든 운동을 하면서도 만족함을 느끼는 것과 같고, 추운 바닷가 바위틈 속에서 낚시를 하면서 안락함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안식입니다.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날 성도간의 교제와 봉사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운 교제 역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어프라인 예배로 나가길 권합니다. 라켓에 튕기는 경쾌한 테니스공의 느낌이 있듯이, 묵직한 물고기가 무는 손맛이 있듯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보다 깊고 생생하기 때문이지요. 주 오일 근무시대입니다. 주일날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하루를 쉬기를 바랍니다. 우리 몸을 만드신 창조주의 사용설명서라 그렇습니다.
안식일 이해를 통해 그가 죽은 종교인인지 진리를 믿는 사람인지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종교는 안식일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할까요?
첫째, 진리는 안식일이 "생명을 살리는 날"이라고 말하지만,
종교는 "형식을 지키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형식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고발하고 어떻게 죽일까 의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반문하시고, 종교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시고 그 손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둘째, 진리는 안식일이 "쉼과 채움의 날"이라고 말하지만,
종교는 안식일이 "고행과 예법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법을 지키지 않고 배고픔을 참지 않고 밀 이삭을 잘라 먹는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삭이라도 비벼 먹고 주린 배를 채우고 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예로 들어 반박했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막2:25~26)
셋째, 진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날"이라고 말하지만,
종교는 오히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명하신 것은 약자들을 착취로부터 보호하시고 숨을 돌릴 틈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2)
우리는 종교가 아닌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화석화된 교리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고, 종교의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을 따르고,
종교의 위선적 열매가 아닌 진실한 삶의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금지해둔 일을 행하는 제자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지나 하셨던 치유의 사역에 대해서도 직접 감시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을 쉬는 날로 정하셨지만 그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시 121:4)이시고 끊임없이 그분께서 창조하신 생명들을 살리시기 위해 섭리하시는 선하신 분이심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분노(5절)를 통해서라도 알려주십니다.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에(6절) 대해 이미 주님은 알고 계셨고 그 사건을 촉발시킬 이 안식일 치유의 도발을 당당하게 담대하게 행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아무런 이슈도 없고 논란도 없는 편안하지만 결국 멸망 받을 안전과 교만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그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거룩한 군사로 세움 받는 길이 진정한 안식의 길임을 알려주시길 간절히 원하셨으므로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손 오그라든 자를 말씀으로 완전히 치유하십니다. 악과 죽음으로 치닷는 세상과 인생을 돌아보시고 선과 생명으로 끌어가시는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고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주님의 제자로 오늘 하루의 시간을 승리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월5일 동인천 지하상가
<해설>
예수님은 소외된 죄인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십니다. 이를 비난하는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4,15절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될 자리, 곧 유대 사회에서 부적격자로 낙인찍힌 이들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을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교회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교제의 자리로 초대해야 할 이들도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죄인들, 부적격자로 취급받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사회의 어떤 자들을 찾아가실 것 같습니까?
16,17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또 의인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구원은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적인 이들보다, 자기 죄를 슬퍼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훨씬 가까울 것입니다.
*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8-22절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정한 속죄일 외에도 매주 두 번이나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고 있는 제자들은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곧 금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격식을 따르지 않는 전혀 새로운 금식이 될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삶도 유대교의 낡은 틀이 아닌, 새로운 형식으로 구현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금식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부대(형식)에 담아야 하겠습니까?
23-28절 율법을 위해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윗은 굶주렸을 때 율법이 금한 진설병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정신은 단순히 일을 그치는 데 있지 않고, 사람으로 안식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과도한 노동으로 지친 자가 있다면, 노동의 중단이 안식이지만, 먹을 것이 없어 주린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먹는 것이 안식입니다. 안식일 규정으로 사람을 굴레 씌우고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는 것은 안식일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3:2,4~6절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보고도 주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악한 눈으로 주시하고 합당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한 판단력이 마비되었기에 버젓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일 공모를 벌입니다.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라비틀어져 있어 시급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말씀에 비춰 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도 굳어지고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 삶의 초점이 사람의 행복을 향해 있는 삶입니다(23~28절).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했습니다(23절). 이때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라고 따져 물었습니다(24절). 이에 예수님은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던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진설병 규례가 엄격한 것은 맞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던 다윗과 그 일행에게 ‘...아비아달 대 제사장 때에...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25~2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 속에서는 ‘다윗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는 선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27~28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한 사람의 삶을 난도질해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봤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앙 그리고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마치 어떤 가짜 목사가 ‘하나님 꼼짝 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하는 부류와 뭐가 다를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이라고 하는 그 테두리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나 역시도 목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행복’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성도, 행복한 목회’라는 목회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행복해야 성도가 행복하고 성도가 행복해야 행복한 목회를 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 것이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생명을 구하고 선한일을 도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6절).
안식에 관하여 두 번째 충돌이 회당에서 발생합니다. 회당에 들어가시니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하여 죽이고자 하는 적대자들이 노동이 금지되어 있는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지 주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가운데 세우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4절) 물으십니다.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는 그들을 둘러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였습니다(5절). 진리를 보고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의 둔하여진 마음이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손 마른 자를 고치셨고, 이에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합니다(6절).
예수님은 진정한 안식이 없는 회당에 안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온전하게 하시고 참된 안식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결단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아울러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 생명을 구하느냐 죽이느냐 역시 나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생명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나의 일상의 삶에서 선한 일을 도모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어 참된 안식을 누리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환경 속에 살아갑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속에서 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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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바리새인들의 위선(23-24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이삭을 자른 사건을 보면서 그들이 일을 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비난하며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정신의 내부적인 것은 가벼이 하면서 외적인 형식에 집착하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행하면서 단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범하지 않는데만 집착하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안식일정신을 상실한 위선적인 삶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형식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지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젖어 있지 않은가?
2.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25-28절)
이들의 공격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배고픔으로 인하여 당시에 제사장들이 먹도록 규정된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들어서 분명 다윗은 율법을 어겼지만 그것으로 정죄를 받지 않았음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시의 배고픔을 채우는 일이 종교적 의식을 이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였음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하며 안식일은 분명 거룩하게 지켜져야 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형식에 치우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 영혼을 실족케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께 부끄러움이 없이 행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뜻에 맞게 안식일을 지켜 행하고 있는가?
3.서로 다른 관심(1-2절)
오늘 회당에는 손이 오그라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시는지를 보고 고발하기 위해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법을 어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참된 신앙을 가졌다면 그 불쌍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들의 모습과 같은 실수에 우리가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릇된 곳에 관심을 두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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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관심가져야 하는 일에 바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4.안식일의 참된 의미(3-6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발에 아무런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하는것이 옳은지를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진정으로 해야 하는 것은 선한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안식일이 있는 가장 큰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정해진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둔함이 자칫 원칙을 세울 때에 가진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채 오직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진정으로 행하여야 할 선한일을 방해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방해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주의날에 하는 일을 면밀히 살피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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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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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요약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자 안식일에 일했다고 비난받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을 예로 들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이들이 손 마른 사람을 예수님이 안식일에
고치시는지 주시하자, 예수님은 안식일에 생명 구하는 것이 옳다며 고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말고, 법을 만든 의도와 정신에 충실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영육의 회복을 위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경직된
규정 준수로 안식일의 참의미를 변질시켰습니다. 그들은 밀 이삭을 잘라 먹은(마 12:1 참조)
제자들을 보고 안식일에 금지된 추수 행위를 했다고 몰아붙입니다.
또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을 보고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분개하며
예수님 죽일 방법을 의논합니다.
하지만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아픈 사람을 고치는 일이야말로 안식일을 참되게 지키는 것입니다.
- 묵상 질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분개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신앙 공동체 안에서 못마땅한 사람을 거룩한 명분을 내세워 정죄하고 몰아세우지 않나요?
마가복음 2:23~3:6 누가 진정한 안식을 주나
안식일(Sabbath)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히브리어로 샤밧은 휴식이라는 뜻으로 '쉬다' '중지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하시고
7일째 날에 안식하신 것에서 유래한다. (창2:1~3)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이슬람교에서는 금요일이 안식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주일(일요일)이 안식일이다.
안식후 첫날 예수님이 부할하신 주일을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것을 보장하신 날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완성하신 날로 한 주가 시작되는 첫날을 주일(안식일)로 섬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준 십계명에도 4번째 계명으로 나오듯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셨다.(출20:8)
더 심하게는 안식일을 범 할 경우엔 돌로 쳐서 죽였다.(민15:36)
히브리구전 율법서인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들이 있는데
밭갈이, 파종, 수확, 건물을 짓거나 부수는 일, 방직, 바느질,
사냥, 도살, 망치질, 요리, 빵 굽는 일, 글 쓰는 일, 불을 켜거나 끄는일 등이라 한다.
안식일에 걸어서 이동하는 것도 2,000규빗 약 1Km정도만 허용이 되었다 한다.
요즘도 이스라엘에는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것도 허용이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안식일 날은 모든 엘리베이터 층을 미리 다 눌러 놓는단다.
이런 안식일에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번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으켰는데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랐다.(23)
말하자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추수를 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사건은 예수님이 일으키셨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편 손이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이다.(3:5)
당연히 율법을 예수님 보다 더 존중하던 바리새인들이 테클을 건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4) 시비를 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도 존중하시는 다윗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사울 왕을 피해서 도망치던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너무 고파서 대제사장들 외에는 먹지 못하는 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25~26)라고 설명해 주신다.
다윗이 먹은 전설병은 분명히 율법에 위배되는 일이다.
그러나 율법보다 인간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이 먼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동일하게 예수님도 안식일에 회당에 계시는데(1)
한 손마른 자가 거기 있었다.바리새인들이 고치는가? 안고치는가 엿보고 있다.(2)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4)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4)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했다.(4)
당시에 이미 로마군이 쳐들어 왔을 때 안식일에도 싸움을 했고
아무리 유대 지도자라고 해도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라고 해도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 틀렸습니다 라고
대답 할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형식적인 제사보다 순종하는 믿음을 원하셨고
예수님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27)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8)
그렇습니다 주님
인간을 위하여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하여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사이에 전통과 습관과 교단과 교파가 중요한 것이 되었다면
종교적인 의식 보다 더 중요한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종교적 제도와 의식 보다 먼저 삶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먼저 행하며 우선권을 두게 하옵소서.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편견과 교만, 거짓된 생각들과 불신앙을 내려놓고
그 귀하고 아름답고 따스한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 복되게 하신 모든 날의 시간 동안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소생케하는 데 쓰임 받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저 북녘땅에도 치유와 회복의 손길을 뻗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뤄가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