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암 삼층 석탑 탑지
재미있는 것은 석함의 기록에도 탑을 세운 곳을 동수원당(桐藪願堂. 藪는 나무의 뜻이 아니고 절의 뜻으로 읽어야 한다.) 앞이라고 하였다. 이 자료로 보아서 건립 당시에도 동화사라고 불렀는 것 같다. 심지대사와 민애왕은 신라 후기의 역사를 요약해서 말해준다.
800년을 전후하여 신라 왕실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왕위 다툼이 일어났다. 잠시 되씹어 보면 36대 혜공완 시해 사건의 왕권 다툼의 시발점이었다. 신라는 통일 후에 무열왕의 후손만이 왕위에 올랐다. 혜공왕은 왕으로서 자질이 모자랐다. 혜공왕을 시해하고 역시 무열왕 계인 37대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자 이번에는 무열왕 계가 아니고 내물왕 계인 김경신이 왕위에 올라 38대 원성왕이 되었다(원성왕의 무덤이 괘릉이다. 괘릉의 석조 인물상은 서역인을 닮았다 하여 중,고등 교과서에 실려 있다.) 법통으로 따진다면 무열왕 계열인 김주원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왕위에서 밀려나자 강릉으로 가버렸다.(강릉 김씨 시조이다.) 전설에 의하면 왕이 죽었는데 홍수가 나서 김주원이 알천(지금의 경주 북천으로 보문단지에서 내려와서 형상강에 합류한다.)을 건너지 못하자 왕위는 비워 둘 수 없는 자리라 하여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전설이다. 전설은 권력자를 합리화하는 내용이지만 여러 정황이 정변임을 보여준다.
원성왕의 큰 아들 인겸이 일찍 죽자 장손자인 소성왕이 39대가 되었고, 소성왕의 아들이 40대 애장왕이 되었다. 소성왕은 형제가 여럿이다. 바로 동생이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41대 헌덕왕이다. 심지대사의 아버지이다. 심지대사는 왕실의 피비린내는 왕위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헌덕왕이 죽자 자연히 왕위는 동생인 42대 흥덕왕으로 이어졌다.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아마도 나는 열 번도 더 이곳을 방문하였을 것이다.
이때 강릉으로 간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억울하게 왕위를 뻬앗겼다는 것이 이유이다.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원성왕의 둘째 아들인 예영의 가문이 큰 공을 세우고 세력을 얻어서 왕위 싸움에 끼여 들었다.
(*김헌창의 난은 통일신라기의 최초의 반란이다.)
예영은 맏 아들 헌정과 둘째 아들 균정을 두었다. 헌정의 아들은 흥덕왕의 동생인 충공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흥덕왕이 죽자 균정과 헌정 집안 사이에 왕위 다툼 싸움이 일어났다. 충공의 아들인 민애왕은 처남남매 사이인 헌정의 아들을 도와서 왕위에 앉혔다. 43대 희강왕이다. 1년 뒤에 22세의 민애왕이 희강왕을 자살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위 다툼에 패하여 죽은 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도망을 갔다.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군사 5000을 빌려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달구벌 쪽으로 처들어 왔다. 민애왕은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구벌의 들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싸움에서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23세 때라고 한다. 그 전투가 달구벌의 어디 쯤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싸움에서 이긴 김우징은 왕위에 올라서 45대 신무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왕위 다툼은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왕실의 눈치를 보고 있었으나 경문왕 때는 왕실이 안정되면서 관대한 정책을 폈다. 이에 심지대사는 사촌인 민애왕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한 원탑을 세워 주었다. 그 탑이 비로암 앞 뜰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나는 팔공산을 오르려 비로암 주차장을 차를 세울 때마다 민애왕 원탑을 바라본다. 심지대사와 민애왕의 삶이 너무 극명하게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 인생은 짧으나 굵어야 한다면서 민애왕의 손을 들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이 없다. 비로암 마당에 있는 탑을 보면서 내 삶을 다시 한 번 다잡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부처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복을 구하는 것도 더 큰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른다.
비로암의 3층 탑은 탑지에 863년이라는 건립 년대가 적혀 있다. 신라 탑의 건립 년대를 아는 것은 극 소수임을 생각하면 탑파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구나 탑신 받침돌이 별석인 것은 처음 나타나는 양식이다. 고려탑은 별석이 일반적인 양식이 됨으로 비로암 탑은 하나의 시발점이 되어 있다. 탑에 봉안 된 다라니 경이라든지, 소탑 들은 이 탑이 기복을 비는 밀교적 신앙을 담고 있다. 신라 후기에는 원탑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다. 불국사 석가탑도 다라니 경이 나온 원탑이다. 신라 원탑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씀을 드리겠다.
더 상세한 내용들은 탑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의 몫으로 돌리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 탑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탐심이 빚어낸 비극을 되새기면서 내 삶의 지침으로 삼는 것도 절집을 찾는 하나의 보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