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여행] 여수 선소 유적지...........55
[여수 여행] 여수 선소 유적지...........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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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투어는 항상 왼지모를 설렘을 갖는다. 왜일까? 그것은 이 유랑자도 잘 모른다. 그냥, 왼지. 완벽한 여행지.
산과 바다,와 낭만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곳, 그리고 발매 된지 9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봄마다 차트 상위권을
달리는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 밤바다’. 감성적인 노랫말처럼 잔잔하게 넘실대는 여수 바다가 유랑자를 부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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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3월 초순의 여수는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했다. 타지에서 여수로 내려온 여행객들을 제외하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그리고 어딜 가나 여수 시민의 진짜 바쁜 일상이 곳곳에 녹아있는 거리들, 모든 것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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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매화를 부르고 매화는 유랑자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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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리들엔 올 겨울 마지막 굴을 수확하는 어부, 고소동 천사벽화마을에 오션뷰 카페를 건설하는 인부, 갓 잡
은 해산물을 판매하는 어민, 오동도행 동백열차를 끄는 운전자, 여천 국가산업단지 노동자 등등이다. 북적거림
대신 평온한 일상의 아늑함이 여수를 감돌았다. 그 길을 이 유랑자만이 서성이는 것같아 괜시리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오늘 발길을 여수 선소유적지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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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선소유적은 옛부터 '선소마을'로 불리는데,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었던 자리이다. 특히 이
선소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거북선을 만들었던 3곳 중 한곳으로 잘 알려진 곳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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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면서 이곳이 전라좌수영(여수)에 속하게 되었고, 또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거북선 제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뛰어난
조선 기술을 지닌 나대용 장군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북선은 여수지역에 있던 본영
선소, 순천부 선소 및 방답진 선소 세 곳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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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안내소를 찾아가 자세한 설명을 듣고 주차장에서 이동하여 선소로 발길을 옮긴다. 먼저 저만치 배를
두었던 곳으로 보이는 굴강이 보인다. 둥그런 원을 그리며 축대를 깔끔하게 쌓아올린 굴강은 나대용 장군과 함
께 거북선 건조 및 거북선을 대피한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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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철새들의 휴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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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배를 정박시켰던 굴강을 비롯하여 무기 제작 처로 추정되는 대장간(풀뭇간), 세검정, 군기창고 등의
터가 남아 있고, 마을 입구에는 벅수가 세워져 있다. 병사들의 훈련장과 적의 동태를 감시 할 수 있는 천연적인
요새인 망마산이 8각정 뒤편으로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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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망마산 밑에는 소호가 있고 그 소호는 동동 구루무가 아닌 動動(동동)가의 무대”로 고려가요인 동동가의 원
산지이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순천조해소 (선소-당시 여수는 순천부)가 있는 장생포 마을은 통
일신라 말부터 서남해안 방어사령부 조선소가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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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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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소의 사령관으로 와있던 견훤과 김총은 이 지방 호족이며 해양 무역왕 박영규의 도움을 받아 후백제 건국
을 도모하고 선소에서 병선과 무역선을 만들어 거사를 치렀던 역사의 현장 이기도하다. 그 후 선소는 1200여년
의 역사를 가진 남해안 최고의 조선소로 명맥을 이어왔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정걸 장군이 판옥선을 만들었고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던 순천선소가 바로 여수 서호의 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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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소에서 일하던 조선공들이 소호에 진수한 배를 띄우고 즐겨 부르던 가요가 동동가인 것이다. 해동악부
에 전해오는 동동가는 생쟁포가와 같은 것으로 고려의 명장 유탁장군이 지었다고 전해오지만 동동가와 장생포
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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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를 만들고 수리하던 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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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포가는 왜구를 물리친 유탁의 용맹에 감탄하여 부하 병사들과 인근 어부들이 유탁의 공을 치하하는 노래
이고 동동가는 선소의 조선공들이 병선을 만들어 소호에 띄워 뱃사람들과 같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유탁은
초도에서 동동 속요로 즐겨 부르며 왜구를 물리치는 서남방어사령관으로써 소임을 다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동
가를 부르던 초도가 동동도 즉 오동도가 된 것이다. 암튼 동동가의 무대는 장생포 선소인 것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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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며 13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일본 전함을 마지막으로 격파하며 임
진왜란 7년의 전쟁을 끝낸 세계 3대 해전사(海戰史)에 길이 빛나는 이순신(李舜臣)장군(1545~1598) -23전 23승!
을 끝으로(한산대첩), 세계 해전사에 가장 위대한 승리로 평가된 이 불멸의 역사를 남겼던 거북선은 1592년 3
월27일 여수 시전동 선소에서 진수식을 가졌는데 조선소 총책임자는 나대용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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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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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순신은 1592년 6월 선조왕께 거북선 3척을 건조했다고 장계를 올렸다. 거북선
은 귀갑선이란 진계도(설계도)를 유성룡이 이순신의 형 이요신을 통해 이순신에게 전해 진 것을 선소로 보내
판옥선을 개량하여 철갑선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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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조선 초에 만든 병선인데 지붕이 없고 평평한 배위에서 전투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즉 노젖는 병
사와 전투하는 병사가 같이 있어서 전투시 상승하는 적이나 화력에 직접적으로 당하기 때문에 포와 활촉을 피
하지 못해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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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洗劍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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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간파한 이순신은 판옥선에 지붕을 만들고 지붕에 철갑을 입히는 병선을 만들라고 나대용 장군에게 일
렀다. 그러나 처음 만든 판옥선에 지붕을 앉은 거북선은 배안에서 노를 젓는 것은 좋았으나 적과 검. 궁으로 전
투를 할 수 없었다. 다만 화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2층으로 된 배를 고안하여 만들
도록 하였다. 아래층은 병사들이 노를 젓는 곳이고 이층은 화포와 활을 쏘는 전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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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투선은 역시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이야말로 적이 승선을 했을 때 자유롭게 병기를 쓸 수 있는 전함이
었다. 거북선은 철갑이어서 적의 진중을 종횡무진으로 돌파하여 휘저어 놓는 기세로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위용을 발휘해서 왜병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귀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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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거북선이 헤치고 나가면 판옥선이 뒤따라 전투를 벌였다. 임진왜란 때 3척의 거북선을 만들어 적을 교
란시켰다. 그 뒤 여수 선소에선 80척의 거북선을 만들었다. 영조때 14척, 정조때 40척, 순조때 30척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많은 거북선이 한척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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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거북선은 어디로 갔을까? 속설은 왜정 때 일본이 모두 불 질러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해안의 어딘가
엔 거북선의 본체가 침몰 상태로 바다 속에 건재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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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지도상으로 보면 가막만의 가장 북쪽에 조선소가 있으며 조선소의 바다 입구에는 가덕도와 장도가 조선
소의 방패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먼 바다에서 보면 육지처럼 보이고, 가까이 봐도 바다인지 호수인지 알아보
기 어려워 중요한 해군 군사 방어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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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장생포의 선소는 그 가치를 높이 보존해야 할 명소이다. 지금 현재 여수 소호에서 거북선 대신 현대판
요트를 타고 동동가와 장생포가를 불러봄은 선현의 얼을 되새기는 것이 아닐까? 싶어 유랑자가 선소를 둘러 보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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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곳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 칼과 창을 갈고 닦았던 '세검정', 수군지휘소였던 '선소창', 수
군들이 머물렀던 '병영막사', 거북선을 매어 두었던 '계선주', 칼과 창을 만들던 '풀뭇간', 왜군들의 활동을 살피
던 '망해루', 말과 수군이 훈련하던 '망마기마대', 창을 던지고 활을 쏘는 연습장인 '궁장사', 일반인의 통행금지
를 표시했던 벅수(석인) 등 다양한 관련 유물들이 남아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변씨부인을 모셨던 곳인
'자당기거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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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LKz0/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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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 시전동 708
소개 :사적 제392호, 이순신 장군과 뛰어난 조선기술자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을 만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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