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 ~ 1967)
하바드.케임브릿지.독일 괴팅게 대학에서
수학했다. 막스 보른,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과 함께 20세기 물리학계의 거목이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사회운동가
오펜하이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1939.9.1~1945.9.2. 6년간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계 30여개국 대부분의 국가에서
1억명이 넘는 군인이 전쟁에 참전했다.
참전국은 경제적, 산업적, 과학적 역량을 모두 전쟁 수행에 쏟아 부었다.
최대 8,500만여 명이 사망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극으로 치 닫으면서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함대를 기습하며 선제공격을 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는 미국 쪽으로 기울었는데도 일본은 항복을 거부했다.
전쟁을 종식시켜 더 많은 희생자를 줄이고, 앞서가는 나치의 핵 기술을 따라잡아야했던
미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을 진행한다.
맨해튼 프로젝트다.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 캐나다 등이 참여한 핵무기 개발 계획으로 극비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분열 반응을 이용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계획은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미국 과학자 아카데미의 제안으로 시작하여 당대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들이 대거 참여했다.
오펜하이머는 3년간 4천명의 연구원과 연인원 13만명을 동원하며 당시 22억 달러(42조)가 투입된,
이론.기술 분야의 최고 책임자로 로스앨러모스 핵실험을 지휘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1945년 핵폭발 시험후, 핵무기 실전투입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돼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겼다.
자신이 만든 핵폭발의 위력을 여과 없이 목격한 오펜하이머는 이후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폐허가 된 도시 모습에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전후, 오펜하이머는 좌파와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트루먼의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
결국 매카시즘 광풍의 희생양이 되어,
스파이로 몰려 195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에서 제명되는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67년(향년 61세) 후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2022.12.15. 68만년 만에 오펜하이머는 비로소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벗고 복권되었다.
2. 태평양전쟁(1941.12.7~1945.9.2)
1941년 12월 7일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 오아후섬 미해군의 진주만 기지를 일본이 기습 공격했다.
12척의 미함선과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고 3,6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즉시 전쟁을 선포했다.
이는 훗날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연합군에 의해 일본제국은 강제 해체되었으며 우리나라를 비롯 아시아 여러 나라가 독립 및 광복이 되었다.
전범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의 원자폭탄 투하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핵무기의 실전 투입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이 정말로 필요했는지
여부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서,
수십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원폭투하에 대한 윤리적, 법적, 군사적 논란은
오랜 기간 학계에서 양극화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이 영화를 정리하자면,
세계 역사를 바꿔놓은 오펜하이머는 한국의 역사와도 무관치 않다.
그가 개발한 원자폭탄으로 우리는 조기해방 되었다.
핵무기 개발로 인한 북한의 위협은 우리의 공포스러운 현실로,
한국의 핵 보유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오펜하이머의 삶과 고뇌는 한국에서 현재적 의미를 갖는 이유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광복절에 개봉한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다.
일본의 원폭 투하는 우리의 광복을 앞당겼지만,
당시 히로시마.나가사키에 거주했던 조선인 10만여 명이 피폭되었다.
1. 그에 대한 서사를 한번쯤 귀 기울여 보았다.
2. 오펜하이머 그는 천재였지만 그도 결점을 가진 인간이었다.
3. 배우들의 연기가 특히 좋은 장중하고 우아한 품격있는 영화였다.
영화감독 폴 슈레이더는 '금세기 최고이자 가장 중요한 영화'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