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이 고려의 건국이념을 부정하지 않았고 고구려 계승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그의 신라중심적 성향을
부정하는 주장들이 있지만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사기사론에 고려의 건국이념에 거스를만한 평가내용을 쓸 정도로
고려의 건국이념은 그에겐 안중에도 없지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8년
사론 : 그러나 불교의 법을 신봉하여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과
절이 즐비하게 되도록 하고 백성들은 도망하여 승려가 되어, 병사와
농민은 점차 적어져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갔으니
위의 기록에서 김부식은 고려의 지배이념인 불교가 신라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할 정도로 건국이념에 거슬리는 내용을 서술하였지요 지배이념에 부정하는수준의
서술을 하였던 김부식인데 그가 지배이념을 부정하지 않았다는게
말이나 되나요 부정하지 않았다면 이런말을 할리가 없지요
그의 서경천도 반대와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의 부수도 기능이 혁파되는등
고려왕조의 이념인 불교중시 서경중시에 거슬리는 행위를 한것도 김부식입니다
그리고
고구려 사론에 고구려가 고려왕실에 영향끼친 사실을 언급안하고 신라사론에서만 현종의
신라혈통을 강조하여
신라가 고려왕실에 끼친 영향만 강조하는게 무슨 의도인가요
고려가 고구려 신라 어느 한쪽을 계승했냐에 따라
김부식의 정치적 생명을 좌우하는 문제이지요
고구려를 계승한다면 김부식의 설자리가 없어지고
신라를 계승한다면 신라왕실 출신인 김부식이 설자리가 넓어지는 것이지요
그럼으로 신라본기 사론에다가 이런 평가를 한게 아닙니까
김부식의 이런 평가만 봐도 신라중심주의는 확연히 드러나지요
고려왕실은 고구려를 계승한게 아니라 신라를 계승한 것이라는게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목적이지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조 사론
[고려] 조정에 공로가 있고 백성에게 덕이
있음이 매우 컸다. 옛날에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에
바친 것을 소자첨(蘇子瞻)이 그를 충신이라 일컬었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넘는다. 우리 태조의 비(妃)와 빈(嬪)이 많아 그
자손 또한 번성한데, 현종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이은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고구려본기 사론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맡은 군주들이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들로 하여금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되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을 제거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또한 억지로 술을 권하면서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부실행태를 비난한 안정복의 평가
동사강목 채거서목편
동국서적(東國書籍)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 김부식(金富軾)의 찬(撰)이다. 본기(本紀)ㆍ열전(列傳)ㆍ잡지(雜志)ㆍ연표(年表)가 있는데 모두 50권이다.
【안】 삼국 당시에는 각기 사관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으나,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는 수(隋)와 당(唐)의 정벌이 있었고, 신라 말기에는 진훤(甄萱)과 궁예(弓裔)가 번갈아 난을 일으켰으므로, 역대의 문적은 모두 상고할 데가 없었다. 김씨가 《삼국사기》를 찬할 때에, 신라에 있어서는 남아 있는 본사(本史)에 따랐고, 고구려와 백제에 있어서는 더욱 상고할 데가 없으므로 이른바 고기(古記)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것에 의거하였는데, 삼국에 대하여 모두 중국 역사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으므로, 이 책이 소략하고 오류가 많아 사가의 규모를 이루지 못하였다. 김씨는 장상(將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의 하교를 받아 역사를 찬집하였으니, 문적을 널리 가져오고 또 책를 바칠 길을 열어 놓았어야 할 것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책을 만들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긴다.
순암선생문집 제1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