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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감추시는 예수님 3:7~12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열두 제자를 세우심 3:13~19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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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하신 큰일을 듣고 유대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아옵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그분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어 전도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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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감추시는 예수님 3:7~12
예수님의 명성이 유대와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인의 땅 이두매와 두로와 시돈에까지 알려집니다. 이에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질병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로 몰려옵니다. 예수님을 본 더러운 귀신들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외칩니다(11절).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침묵을 명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드러내지 말라고 명하신 까닭은 병 고침이 주된 사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도 전에 종교 지도자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이 생기는 것을 피하시려는 의도로 봅니다. 자신의 명성을 감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작은 승리에도 쉽게 오만해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 아들임을 비밀로 하신 까닭은 무엇인가요?
인기와 명성을 얻을 때 내가 경계할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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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세우심 3:13~19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많은 무리 가운데서 열두 제자를 구별해 세우십니다. 제자의 정체성은 두 동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첫째, ‘부르시니’입니다(13절). 제자들이 자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권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둘째, ‘보내사’입니다(14절). 제자는 복음 사역을 위임받아 세상에 파송되는 존재입니다(요 20:21).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14절).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진리로 양육하실 것입니다. 둘째, 전도와 귀신 축출 사역에 참여시키기 위함입니다(14~15절). 귀신 축출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로, 이를 위해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복음을 위한 영적 군사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구별해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요?
주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에 순종하는 제자로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오늘의 기도
주님, 허물 많은 저를 제자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로 가득 채워져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제 연약함은 감추시고 주님의 전능하심만 드러나게 하셔서 승리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누리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87 예수 앞에 나오면)
1월6일 새벽 청라호수공원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7~12절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살해 음모가 있자, 잠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십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까지 몰려와 주님을 에워싸고 밀치자, 작을 배를 준비토록 하십니다.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질서 있게 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함입니다(4장 1절). 예수님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시고, 일하심에 있어 지혜와 명철로 행하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군중들의 설익은 기대가 초래할 심각한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순전함을 구합시다.
13~19절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십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셔서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십니다. 보잘것없고 약한 자들이지만, 곧 부활의 권세로 일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일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주님을 배우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유대지역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에서 무리가 갈릴리로 몰려들었다는 이야기와 12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어 전도도 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세우십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나아오는 큰 무리, 귀신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명령, 제자를 부르신 목적, 열두 제자를 세우심 등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모르지만 귀신들은 알았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존재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니 주님은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저자는 계속 밝히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귀신들에게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아직 십자가의 때가 이르지 않았고, 구속사의 흐름을 악한 세력들의 훼방으로 그르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 베드로를 위시하여 열 두 제자를 주께서 친히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시몬은 별명이 두 개 즉, ‘베드로’와 ‘게바’이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베드로는 헬라어이고, 게바는 아람어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반석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그가 반석처럼 성품이 굳고, 믿음이 강해서 붙인 이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성격은 불 같이 급하고, 제자들과는 좌충우돌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결정적으로 주께서 잡히시던 날 스승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초대 교회의 기초 돌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이름이라고 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로, 아버지 세베대는 부유한 선주였다고 합니다. 야보고는 제일 먼저 순교한 관계로 업적이 별로 없지만, 요한은 제자 중 오래 살아남아 적지 않은 책을 저술하고, 교회를 세우며, 많은 제자를 양육합니다. 열 두 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곁에서 주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아버지 세배대의 집안이 부유한 관계로 대제사장의 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심문 받으시던 밤 요한이 대제사장 집에 들어가 있었던 것도 그 까닭입니다. 두 형제의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이기에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이 더해 진 것 같습니다.
본문의 ‘빌립’은 사도행전의 빌립 집사가 아니고 사도 빌립입니다. 그는 갈릴리 벳새다 출신으로 그의 친구는 안드레와 나다니엘 입니다. 사도 빌립은 교회 전승에 따르면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돌로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도로 학자들은 그가 ‘나다니엘’이라고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친구 빌립이 주님을 만난 후 그를 주께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전승에 의하면 그 역시 이집트, 인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사역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다대오’는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추정되는 사도입니다. 그렇게 불린 것은 아마도 후세사람들이 가룟유다와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가나안인 시몬’은 시몬 베드로와 이름이 같아서 늘 ‘가나안인 시몬’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열심 당원이었다고 합니다. 열심당은 로마에 무력으로 대항하던 유대나라의 애국집단으로, 독립군의 성격을 갖고 있던 조직입니다.
해설과 묵상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 예수님의 놀라운 소식을 듣고 유대는 물론 먼 나라의 사람들까지 갈릴리로 몰려왔다는 말입니다. 즉, 동서남북에서 사람들이 닥쳤는데 남쪽 지방인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 동쪽 지방인 요단 강 건너편, 북 서쪽 지방인 두로와 시돈 즉,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사람들이 떼거리로 온 것입니다. 특별히 이두메 지역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적어도 약 200Km 이상 떨어진 곳입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 걸어서 온다면 건강한 사람이 걸어도 약 1주일 이상 걸릴 거리입니다.
그 먼 거리를 건강한 사람도 왔지만 건강치 않은 사람도 옵니다. 왜냐하면 나병 같은 불치병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손길 한번 가면 낳았다는 소문이 온 팔레스타인에 널리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이적을 원하므로,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겐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살 수 있는 확률이 있는데 안 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라도 만약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어 간다면 가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작은 배를 대기시켜 놓았다는 점입니다. 즉, 바닷가 단상을 설치해 놓은 것이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인산인해! 사람들에게 피해를 받을 수도 있어 그렇게 하셨을 지도 모르지만 실은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치료도 필요하지만, 영적인 치유가 더 필요하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따르면 바닷가에 작은 배를 대고 거기서 말씀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이적과 기적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시급한 까닭입니다. 그들의 육체는 언잰가 죽지만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와도 직결이 되는 문제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어떻게 지낼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질문제, 자녀문제, 그리고 건강문제 등으로 밤새 고민하다가 무거운 눈을 뜨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취업문제, 결혼문제 등을 생각하며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부분이 육신적인 문제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 염려하기보다는 거의 다 이 한 몸 어떻게 살 것인가?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다릅니다. 주님은 사람들과 거리를 둡니다. 기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보기 위함입니다. 육신적인 문제에 매어 있다면 평생 영혼의 문제를 소홀이 할 수 있고, 보이는 물질세계에만 살다 보면 정신적인 세계가 텅 비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영으로 육을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데, 욕심덩어리인 육이 영을 억압하며 살면 그 영혼은 장차 심판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점이 안타까워, 질병도 질병이지만 영혼의 치유를 원하신 것입니다. 실은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도 설치된 것이 바닷가 단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물질적인 세계에 살지만 물질적인 세계에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어도 결국 하나님 앞입니다. 이적과 기적으로 병이 낫는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죽고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궁극적으로 그 말씀으로 산 삶만 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으로 용서 받고, 구원을 얻으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까닭입니다.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대로 살지 않을 까봐 염려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 안을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있는가?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온통지배하며 우리 삶을 인도하고 있는가? 그러나 말씀은 성경에 있고, 여전히 우리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이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빕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 영이 살아 났기에 육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영이 우선입니다. 영혼이 잘 되어 범사에 잘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유대와 예루살렘과 요단 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등등 각처에서 예수님이 하신 큰 일들을 듣고 나온 수많은 무리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렸는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몰려온 것은 많은 사람을 아무 값없이 고쳐 주셨기 때문에 병든 자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몰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원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원하신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침 받은 사람들에게 소문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막3:12)
예수님은 무리를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3:1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요13:18)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신 자들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버지께서 원하신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즉,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따라서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원했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의 부지런함 때문도 아니라,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와 주가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그러므로 한낱 죄인에 불과한 우리를 원하시고 원하셔서 불러주시고 마음을 열어 믿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시고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께 오직 감사하고 또한 감사하기 원합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랐고 또 부르셨지만 그들 중 12명을 산으로 올라가셔서 따로 선택하셨고 자기와 늘 함께 있는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권세를 더하셔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는 2천 년 가까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전하고 깊은 물을 마른 땅으로 건너는 등 그분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통로로 선택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번영과 영광을 값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일부의 선지자들이나 예언자를 제외하고는 그분을 경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산위에 올라가 그분의 택하심을 받아 사도로 세워져 그 이후 2천 년 동안 그들의 이름을 성경과 세상의 역사 곳곳에 남기며 대부분 그들의 생명을 드려 주님을 증거하는 인생을 살아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생명책에 기록되지만 그 이후의 어떤 삶을 선택하고 주어진 시간을 채워갈 것인지는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사명을 맡겨주시고 감당할 능력과 심령을 주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날마다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주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 (7-10절)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소문은 참으로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앞에 나아갔기 때문에 해결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의 해결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때에 우리의 문제는 해결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의 문제를 예수님의 발 앞에 가지고 나가는가?
2.귀신도 굴복 시키는 능력 (11-19절)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귀신들이 먼저 알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귀신들을 꾸짖으시기도 하시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귀신들 역시 주님의 권위앞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이땅에 있는 사단의 권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어떤 사단의 권세도 예수님의 권세를 이길 수 없기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단에게 넘어지는 것은 우리의 욕심에 이끌려 주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있을때 사단은 절대 우리를 범할 수 없음을 확신하고 당당함을 잃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사단의 권세 앞에 당당함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가?
➲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선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7~12절).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해 한 적한 바다로 물러나셨음에도 불구하고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8절). 유대 지도자들의 끈질긴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방해를 받지 않고 전파되어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듣고 사방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 온갖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누구나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어 혼잡을 피하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도록 하셨습니다(9~10절). 귀신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그 권위에 눌려서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11절)이라고 말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를 세상에 드러내 말아라..’하고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12절,새번역). ‘경고하다, 꾸짖다..’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셨고(눅 4:39),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게 하셨습니다(막 4:39),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며 몰아내셨습니다(막 9:25). 강력하게 침묵 명령을 내리신 것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없습니다. 즉,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바라기는 단순히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병에서 나음을 받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실 구원자이시며 나의 삶의 주인 되심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내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주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13~19절).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13절) 부르셨습니다. 누가복음의 병행구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기 전에 먼저 산에 올라가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 6:1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각각 다른 이름을 주셨고,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및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과 예수를 판 가룟 유다(17~18절)입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명하신 이 길을 걷습니다. 무엇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상 기준에 못 미친 자들을 부르셔서 세상이 놀랄 일들을 감당케 하시므로 교회를 세우셨던 것처럼 나 역시도 제자들의 수준에 한 참이나 못 미치지만 주님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어느 곳, 어느 자리, 어떤 공동체에서든지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참된 안식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한 일을 도모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므로 생명을 구하는 일에 열정을 쏟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막 3:1~19절)... 빛이 있으라...
1월6일 청라호수공원 새벽
오늘의 말씀요약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 이두매, 요단 강 건너편, 두로, 시돈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분께 하나님의 아들이라 외치는 귀신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전도도 하게 열둘을 세우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심(3:7~12)
예수님은 기적보다 말씀에 집중하도록 이끄십니다. 구원의 본질은 병의 치유보다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믿는 데 있습니다. 각처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혹시 예수님을 만지면 병이 나을까 싶어
서로 앞다퉈 그분을 에워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찾아온 무리의 기대를 무조건 충족시켜 주시기보다는
오히려 배를 띄워 무리와 거리를 두시며 그들로 하여금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영혼의 질병인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는 것이 더 시급하고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기적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기적 같은 체험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는 역할을 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 묵상 질문: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따라다닌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질병의 치유나 기적 같은 일을 바라는 마음과 말씀 듣고
주님 섬기기를 바라는 마음 중에서 무엇이 더 간절한가요?
열두 제자를 택하심(3:13~19)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은 세상의 인재 채용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 제자로 부름받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과 자격이 아닌, 주님의 은혜와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갈릴리 어부들을
중심으로 열두 제자를 선택해 함께 교제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악한 영을 내쫓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약점과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혈질인 베드로는 실수가 많았고,
야고보와 요한은 과격했습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았고, 빌립은 계산적이었으며, 마태는 세리라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처럼 부족한 제자들을 선택해 장차 세계를 복음화하는 위대한 사도로 만드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누구나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 묵상 질문: 왜 예수님은 약점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세우셨을까요?
- 적용 질문: 나를 제자 삼으신 주님의 목적(14~15절)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볼 때,
좀 더 힘써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영혼 구원보다도 육적 필요에 더 관심을 두는, 부족하고 연약한 저를 제자로 부르신 주님!
제 가능성을 보시고 저를 양육하기로 작정해 주신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마가복음 3:7~19 사람을 세우는 예수님
안식일의 참 의미 뿐만이아니라 금식이나 중풍병자를 고치는 능력이나
여러면으로 보았을 때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능력이 탁월함을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이 되자 기득권을 잘 누리고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당시의 정치권력을 누리고 있던 헤롯당과 함께 결탁을 하고
예수를 죽일꼬 의논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로 조용히 물러 나셨다.(7)
그러나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 편과
심지어는 북쪽 두로와 시돈에서 까지 사람들이 몰려 왔다.(8)
예수님의 인기는 가버나움 동네뿐만이 아니라 사방 수백리에 소문이 난 모양이다.
역시 권세있는 말씀과 치유와 회복이 있고 귀신이 떠나는 곳에
사람이 몰리게 되는가 보다.
예수님 시대에나 오늘에나 별로 다르지 않는 부분인 것 같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병자가 몰려왔고(9)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셨고(10)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도 회복이 되었다.(11)
그렇다 예수님을 만나면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가고
자연계에도 치유가 일어나고 영적인 세계에도 회복이 일어난다.
나도 오늘 이런 주님을 예배하고 만나고 찬양한다.
그러나 사람이 몰리고 인기가 올라갈 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박수치고 환호하면 나이스하게 할렐루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셔 버렸다.
인기에 머물러 있지 않으신다.
묵묵히 자기의 하셔야 할 일을 계속하신다.
이번에는 산으로 올라가셨다.(13)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13)
부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배자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안식하라고 부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부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르실 때에 핑계되지 말게 하시고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부르실 때 이유달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멘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12제자를 부르셨다.
왜 부르셔서 세우셨을까?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14) 부르셨다.
아마도 제자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일 것이다.
말씀도 가르치고 식사도 함께하고 잠도 같이 잤을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삶을 누누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꿈과 비젼도 함께 공유하며 훈련 받았을 것이다.
2. 보내사 전도도 하며(14)
복음 사역에 동참 시키기 위하여 부르셨을 것이다.
전도 시범도 많이 보여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꿈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것이 였을 것이다.
3. 귀신을 내어 좇는 권세도 주시기 위함이다.(15)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신 주님이 이 정도 권세야 안주시랴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믿음이 있는 자에게
이런 권세도 주신다. 아멘.
보배롭고 존귀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수석 제자는 역시 베드로 였나보다. 시몬, 게바라는 이름도 있었던 분이다.(16)
야고보와 요한 있는데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주셨다.(17)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18)
그리고 가룟사람 유다(19)가 있다.
모두 12명의 제자들이다.
제자들에게 사역만 시키지 않으시고 권세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꿈을 이루어 가자 아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아멘.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미리 아신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 영화롭게 하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제자 되길 날마다 구하는 인생 되길 소망합니다.
전능하시며 모두의 구원자 되신 그분을 바로 바라보며
주님으로 고백하며 주신 사랑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며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성령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기름 부어 주시고
그 모든 발걸음마다 선하게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눈물로 신음하는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을 덮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을 더 알고 알리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