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취적인 신앙만이 약속을 얻어낸다 |
여호수아 14장은 요단 서편을 기업을 분배하고 갈렙에 헤브론을 기업을 받는 장면이다. 갈렙은 신앙의 사람으로 45년 전 모세에 의해 전달된 하나님의 약속을 꺼내어 그 성취를 요구한다.(9, 12, 민 14:24, 신 1:36) 갈렙은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대로(8) 또 모세도 증거한 것 같이 온전히 하나님께 복종한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8) “네가 나의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9)는 말씀에 의해 참된 신앙은 온전한 복종에 의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할 것으로 온전한 복종이 동반하지 않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될 수 없다고 본다.
한번으로 끝나는 복종이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계속 반복적으로 복종해야 되는 경우가 성경에서 여러 군데 발견할 수 있다. 신앙생활이 한결 같아야 하는데 이랬다저랬다 하는 생각과 행동을 수반된 사람은 약속을 얻을 수 없다. 신앙의 기복이 적어도 톱니처럼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야 되는데 너무 심하게 차이가 나는 분들이 있다.
약속의 성취는 사람의 생각과 입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점령에 의해 실현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급하게 한 번에 복종하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하나씩 성을 점령하듯이 말씀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주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고 주님과 함께 호흡하며 배운 것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며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나가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마 16:24)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신의 운명 속에 다가오는 업보를 짊어지거나 남편이나 아내의 고난을 아니면 부모나 친척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게 다가오는 엄청난 시련이나 내 주변 사람의 액운을 막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차원이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십자가는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도 있지만 창세전에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약속을 받지 못하여 하나님 안으로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던지는 결과가 바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은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이와 같이 온전히 하나님을 좇아가는 것이 바로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좇지 않으면 정복을 당하고 점령을 당해 죽음보다 더 한 고초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광야로 내몰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목적이다.
애급이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미츠라임(~yIr'c.mi)인데 걱정, 고뇌, 곤란, 근심, 역경, 환난에 에워 쌓여 있는 상태로 육신의 속한 사람이 생각의 옥에 갇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치락거리고 있는 마음의 토대가 바로 애급의 상태를 말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치유사역과정에서 만져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한국교회 거성으로 알려진 모 목사님은 몇 년 전에 주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울증으로 인해 자기 교회 집사에게 안수를 받고 잠을 들곤 했다는 소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앙인들 가운데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상황은 애급에 머물러 있다는 정황을 말한다. 여기에 육적인 수면도 문제지만 영적 수면을 취하지 못하여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급에서 정착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광야마저도 안식을 누리게 하지 않으셨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땅에서 곧바로 살도록 하지 않으셨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과 토착민들이 모조리 죽이거나 그 성들을 점령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결론을 여호수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믿음으로 정복해야 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장애물이 있으며 역경과 시련이 가로 놓여 있다. 믿음으로 정복하는 용기와 각오가 없으면 약속하신 은혜를 쟁취하는 일은 도저히 바랄 것이 못된다. 예수를 믿게 되면 일취월장 뻥 뚫린 고속도로로 착각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된다.
갈렙은 믿음으로써 요구함과 동시에 커다란 곤란과 장애가 있을 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2)고 자신의 신앙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떳떳이 발표했다.
갈렙의 나이가 85세 고령이면서도 장수를 능가하는 그의 용기와 패기를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45년 전 동류들의 불신앙의 말을 배척하여“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는 자는 능히 이기리라.”(민 13:30)고 말한 때와 같은 신앙, 같은 용기를 갖고 있었다는 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나의 힘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다”(11)고 했는데 다만 그의 육체의 정력 뿐 아니라 그의 신앙, 그 영력에 있어서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이다. 기복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신앙과 영력이 여전히 불타 있었기 때문에 육체의 정력이 왕성했던 것이다.
몸의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도 먹어야 하겠지만 올바른 영력을 가져서 정신과 육체가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하겠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무엇에 불타고 있는지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마트한 인생과 열정적인 인생을 추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여호수아서의 글을 계속 쓰는 필자의 가슴과 등은 불덩어리로 되어 있다.
불신앙의 사람은 은혜를 알면서도「그렇지만」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들어 말하면서 물러서는데(민 13:28) 신앙의 사람은 어려움을 알면서도「그렇지만 하나님께서」하고 어려움에도 물러서지 않고 뒷걸음치는 일 없이 당당하게 전진해 나간다.(12) 히 10:28에“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29에“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침륜에 빠지는 자는 롯의 부인처럼 뒤돌아봄으로 인해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창 19:26)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처럼 된다.(눅 9:62)
그래서 사도 바울은“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빌 3:13~14) 이렇게 진취적인 삶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여호수아 14장에서 여러 지파의 불신앙의 암흑 중에 갈렙의 신앙은 해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고도 남음이 철철 넘치게 된다. 그는 거룩한 땅 때문에 커다란 산을 요구하고 그곳에 거하고 있던 거인들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거인 중 가장 큰 아낙사람을 방축했었다.(15)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거인의 죄가 아무리 방대해도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앙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위축되어 의기소침해지고 자신의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만다.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고자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죄만 해결해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연결해주시고자 생명을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에서 신앙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로 기럇 아르바 즉 거인 아르바의 성읍이 헤브론(교통)이 되고 전쟁은 그쳐 안식과 평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믿음과 충성이 있는 곳에 반드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에 따라 과거, 애급의 한 노예였던 갈렙은 헤브론 산성의 군주가 되었다.
아무나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다. 45년 동안 변함없는 믿음과 충성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쫓아간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아니면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푯대가 없다면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진취적인 자세로 순종하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다.
변함없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온전히 주님을 쫓아가는 신앙의 노정은 마치 마라톤과 같다. 한꺼번에 힘을 쏟아내면 기진맥진하여 앞으로 남은 코스를 통과할 수 없게 된다. 멍에를 씌운 두 마리의 소가 서로 체격이 같아야만 쟁기를 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상처가 나고 고통이 따라와 쟁기를 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29)는 말씀은 그동안 고생했던 무거운 짐을 벗게 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체격이 동일해 지도록 주님께서 맞춰주셔서 우리가 지고 있는 멍에를 같이 끌어주신다는 기가 막힌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만이 약속을 얻는 것이 아니다. 진취적인 신앙만이 약속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내게 주신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함께 호흡하며 삶의 자리에서 적용하여 실천하고 묵묵히 복종하면 얻어지는 놀라운 약속을 얻는 자만이 영적 군주가 되는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도 되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 남을 누르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고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본질이며 원형이다. 진정 국민을 위해 섬기는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국민을 이용하여 군림하는 정치인들이 태반이다. 갈렙을 닮은 정치인이 몇 명이라도 나왔으면 한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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