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의할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종말론에 있어서 시간관과 두 번째는 사탄에 대해서, 두 가지 강의하겠습니다. 3번이거든요. 뭐냐 하면, [그 나라의 필요성] 새 번역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 나라의 필요성]으로 되어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필요성]
[하나님 나라의 필요성]으로 되어있지요.
오늘 강의가 이걸 다음달까지 기다리기에 너무 어려워서 제가 성급하게 모여서 다시 한번 죄송한 마음을 드립니다. 여러분 계획에 없던 것을 해서 약속도 취소해야 되고, 죄송합니다.
여기 '종말론적 이원론'이라고 되어 있는데. 되어 있지요?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말이 안돼요. 종말론적 이원론 이라 하는 자체가 성립 안돼요. 지금 래드가 시간론 이런 것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이 책을 현재 모든 목사들, 신학생들 공부 다 하고 있거든요.
이 용어가 이게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맞는지 검증이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종말론적 이원론, 상당히 그럴싸해 보여요. 아주 화려해 보이죠. 용어가. 뭔가 깊은 뜻이 품어 있고. 시간은 이원론을 용납을 안 해요. 시간은 이원론이라는 게 없어요. 시간은 면적이 없습니다. 시간은 사건과 이 사건의 추억과 기억밖에 없어요. 추억과 기억밖에 없어요.
여러분 한 가지 기억하는데 두 가지 겹치는 기억 있습니까? 없습니다. 한 가지 기억하는 순간 다른 옆의 기억은 약간 대기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기억이 지나가고 난 뒤에 그 다음 기억에 들어가야 돼요.
그 여자 머리 모양이 뭐더라? 할 때는 그 여자의 발은 약간 유보해야 돼요. 아, 머리모양이 파마였고, 발은 뭘 신었더라? 아, 하이힐 신었다. 머리모양과 하이힐 똑같이 분명히 사람은 그 시간대에 같은 파마하고 있었고, 파마하고 있었던 그 시간대에 하이힐 신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이걸 기억할 때는 시간이 주어질 때는 이게 순서를 가지게 된다니까.
이걸 어거스틴은 이걸 잘 몰라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잘 모르는데 어떻게 표현을 못해서 성화론에 있어서 성화의 ‘서정’을 이야기한 겁니다. 서정을 이야기하면서 붙인 단서가 뭐냐 하면, 시간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고 붙여 놨다고. 후학들이 공부하면서 구원의 서정은 이야기하면서 시간적인 연차적인 것은 아닙니다. 할 때에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머리 속에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난감하게 되었어요. 무지무지하게 난감하게 된 거예요.
믿음 다음에 양자 됨입니까? 믿음 다음에 중생입니까? 뭐, 믿음 다음에 안 그러면 바로 성화 들어갑니까? 칭의 입니까? 할 때 그럼 내가 느낄 때 느끼는 순서란 말입니까? 내가 그렇게 돼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쭉 이야기할 때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성화 대목에 있어서 여기 칭의가 있고, 여기 영화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구원의 서정 전체가 시간하고는 상관없는 거고, 논리적인 순서에 불과합니다. 라고 했을 때 성화는 거기에 해당될까요, 안 될까요? 성화 해당되지요. 성화론 속에는 시간적인 그것이 없어야 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칭의, 양자, 믿음, 이런 것은 다 순간적으로 구원된다 하면서 갑자기 성화부분에 끼어들어서는 갑자기 뭘 따지냐 하면, 반드시 여기 시간적 요소를 집어넣더란 말이죠. 논리적으로는 앞뒤에 맞지 (않지요.) 딴 것은 다 한꺼번에 온다는 걸 인정하면서 성화에 들어와서는 갑자기 시간을 따지고, 처음 믿을 때 보다 하는데.
그 성화 따질 때 주로 하는 게 뭐냐 하면, 생명이라 하는 것은 씨앗으로부터 마지막에 열매 맺을 때까지 무슨 기간이 있다? 성장기간이 있다. 성숙기간이 있다. 이 기간을 성화기간에 집어넣어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집어넣어보자. 생명이라는 것은 자라나게 되어 있고, 그리스도 몸이 장성한 데까지 자라나게 되어 있는데, 자라나는 분량까지는 뭔가 시간이 걸릴 게 아니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럼 시간을 없애버리면, 성화가 한꺼번에 되느냐? 한꺼번에 된다고 한다면, 그럼 내가 신앙생활하면서 느꼈던 경험한 것과 안 맞더란 말이죠. 도대체 경험을 어떻게 했는지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저는, 당신이 경험한 것이 틀렸지, 당신의 경험은 선입관 가지고 나온 경험이지, 성경에서 나오는 거룩하고는 상관없는 겁니다.
본인이 지금까지 외부에서 들었던 그 성화관념이 있으니까 은연중에 자기가 무의식중에서 거기에 발을 맞추다보니까 그것이 나의 독특한 경험이라고 된 거예요. 경험이 사람 잡은 거예요. 자기의 성숙된 경험, 경험이 사람 잡았다 이 말이죠.
이걸 이러한 조직신학적인 면에 대해서 래드는 그걸 그런 것을 전면적으로 비껴갑니다. 비껴간다는 것은 거기 있는 줄 알면서 그 있는 줄 부정하는 게 아니고 돌파하는 것은 치워라 이렇게 되지만, 비껴간다는 것은, 그것도 남겨놓고 다른 길로 간다 이 말이죠. 그게 나온 게 '종말론적 이원론'입니다. 레드가 이야기하는 종말론적 이원론이 무슨 뜻인지 봅시다. 상당히 골치 아픈데 말이 안 되지만 그들이 주장한 대로만 이야기해 봅시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이것입니다. 구약의 유대교에서 두 가지의 역사관이 등장했다. 두 역사관인데 역사관에서 하나의 지성적인 역사관과 하나의 묵시적인 역사관, 이 두 가지 역사관이 어디에 흘러들었느냐 하면, 공관복음에 흘러들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래드는 말을 아끼죠.
무엇을 자신 없어 하느냐 하면, 유대교의 역사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흘러들었느냐? 하는 그 문제에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 책에 보면 공관복음에 흘러들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님께 흘러들은 것 하고, 공관복음에 흘러들은 것 하고 다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어요. 자신 없어 합니다. 공관복음에 흘러들었다 이렇게 봐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공관복음을 지었던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역사관은 예수님의 역사관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신약신학을 아주 깊이 있게 연구 안 한 사람은 같으면 이 뉘앙스가 별로 안 중요하게 들릴 거예요.
그러나 신약신학을 깊이 한 사람들은 마지막 자체 내에서 모순점이 다 등장하는데, 그 모순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알고 있던 세계와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성경을 썼던 사람들, 제자들과의 균열이 일어납니다. 그 균열을 어떻게 보완할 것이냐에 골머리를 앓아요.
여러분 낚시 밥 이야기 아십니까? 뭐냐 하면,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은 맞는데, 대중들이 잘 이해를 못 하기 때문에 낚시 밥을 던져서 낚시 밥의 미끼 물어서 교회 오도록 해서 목사님의 설교, 복음을 듣도록 하면 어떡하겠습니까? 하는 그게 낚시 밥이에요.
그러니까 신학자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것은 잘 모르기 때문에 낚시 밥 던지는 이 역할을 누가 했다 하느냐 하면, 바로 마태, 마가, 누가 및 제자들이 했다는 겁니다. 그 낚시 밥의 배경 따라서 유대인을 낚을 것이냐, 헬라인을 낚을 것이냐, 이방인을 낚을 것이냐, 바리새인을 낚을 것이냐에 따라서 마태, 마가, 누가의 편지하는 대상들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어쨌든 그들이 쓰는 용어는 예수님이 쓰는 용어를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게 중요해요. 못 알아듣기 때문에 그들은 알아듣는 말로 그들을 낚시, 건지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했으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그들이 쓰는 언어를 사용하다보니까 그들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언어가 형성될 수 있는 그들의 세계관, 역사관도 놓치지 않고 같이 포장지로 담아줘야 될 필요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이 복잡한 이 두꺼운 신약신학의 취지가 인식이 바로 그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신약신학은 복음이 무엇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어떻게 납득시키고 설득시킬 것이냐에 연관되어 있다니까. 이 전체 책이. 자기가 그렇게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이 정당화는, 사도들이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럼 사도들이 그렇게 안 했으면, 이 책 전부다 엉터리죠. 그런데 안 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비슷한 말씀 나오지요. 내가 유대인한테는 율법적으로, 이방인한테는 율법 없이 당한다. 바로 그것 봐. 사도들이 그렇게 하잖아.
그런데 이러한 취향이 샌더스한테 가보면 뭐라고 하냐면, 사도 바울은 사람을 건지고, 쉽게 말해서 복음을 설득하기 위해서 여기는 이런 소리 했고 저기는 저런 소리했는데 왜 그걸 합치려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샌더스 말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은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복음은 성경으로써 완료된 게 아니다. 왜 완료된 게 아니냐? 성경이 있던 시대는 그때 시대는 1세기 때 시대의 낚시 밥이 성경이에요. 2세기, 3세기 때에는 다른 낚시 밥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바로 천주교적 인식이죠.
21세기에는 이 시기에 필요한 토착화신학이 필요한 거예요. 지금 필요한 거예요. 왜? 낚시 밥은 있어야 되니까. 이유가 뭐냐? 예수님 말씀을 못 알아들으니까. 복음을 못 알아들으니까 분위기 조성할 필요는 있다.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역할이다. 그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 바로 역사관 논리가 나온 겁니다. 어쨌든 역사관 논리가 나오는데.
제가, 여기 보이십니까? 이 그림. 제가 신학교 2학년 때 이 책을 보면서 요런 그림을 그렸죠. 이 그림은 여러분들이 많이 본 게 있습니다. 게르할더스 보스의 그림이라든지, 신성종 목사님의 그렇게 자주 그리던 그림 있잖아요. 한번 그려볼까요. 저도 여러 번 그렸는데.
이것 아닙니까? 파루시아. 예수님 초림하시고, 재림하시는데 뭔가 컨테이너 얹어놓은 것. 얹어서 역사가 이렇게 해서 파루시아, 재림 될 때 예수님 나타나시고 예수님 이렇게 재림하실 때 십자가가 여기 있고 마지막에 구름 타고 오시는 재림. 여기에 이것이 하늘나라다. 이 아이디어를 게르할더스 보스가 처음으로 이걸 주장했다.
게르할더스 보스는 성경신학자가 아닙니다. 조직신학자입니다. 그 사람 책은 성경신학적으로 보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조직신학적으로 봐야 아아,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되는데. 이 게르할더스 보스의 책을 죽었던 박윤선? 그분 상당히 애용하고. 게르할더스 보스의 자칭 충실한 제자로 쓴 사람이 박윤선, 맞지요? 주석한 사람, 유명한 사람. 그 사람이 게르할더스 보스의 성경신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해서 된 거예요. 바로 이 역사관입니다. 저도 이렇게 배웠고, 이것이 옳은 역사관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게 철학적으로 봐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이게. 무슨 컨테이너가 여기 얹어져 있습니까? 그럼 A지점, 이 지점은 무슨 지점이에요? C지점 이건 뭐예요? 붕 떴잖아요. 자기도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 위에 붕 떠 있는 걸 가지고 묵시라고 하거든요. 밑에 깔려 있는 걸 뭐라고요? 역사.
묵시지점에 A와 C 지점이 시간적으로 차이가 날까요, 안 날까요? 묵시에서는 차이가 안 나야 돼요. 그런데 그림을 이렇게 보면 요 십자가 당시의 묵시적 사건과 제일 끝날 때쯤의 묵시적 사건이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버려요. 그것은 무엇에 잘못되었느냐 하면, 제가 이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은 기쁘다. 왜냐하면 낚시해서 월척을 했던 그 강물 같으면 기쁘다. 어떤 사람은 슬프다. 왜? 애인과 헤어질 때 마지막 저 강물 건너서 헤어졌으니까. 그런데 강물,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그냥 강물은 물의 집합 아닙니까? 그냥 흘러가지요. 그런데 왜 강을 보면서 강은 그냥 아무 소리 안 하고 졸졸졸 흘러가고 있는데 왜 어떤 사람은 기쁘고, 슬프냐? 그게 뭐냐 하면, 나의 존재에서 나온 나의 의미를 집어넣어서 그래요.
이것이 철학을 잘 안 한 사람은 이걸 잘 모르는데. 열매를 이야기할 때 예수님이 열매입니다. 이러면 끝나요.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나의 열매가 되었을 때는 예수님 존재하고 내 존재를 다 같이 생각해 돼야 됩니다. 왜냐하면, 열매라고 규정할 때 이게 뭐가 붙느냐 하면, 이게 의미가 붙는 거예요.
현재 [의미론]이 현재 20세기 들어와서 모든 철학자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이 의미론에 달려있습니다. 물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하는 것은 과학의 유체역학에 맡기고, 유체역학은 알지요. 나는 저 강을 볼 때 눈물 나. 이건 의미 아닙니까? 의미라 할 때 옛날에는 존재에서 의미가 나오는데 지금은 당신이 뭘 느끼느냐? 그 의미를 가지고 자기 존재를 찾아가다 보니까 거기서 무엇을 획기적으로 발견했느냐 하면,
이 자아라는 것이 없다는 게 아니고, 자아가 군데군데 의미에 따라서 새롭게 재구성되더란 말이죠. 자아가. 자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재구성되는 거예요. 자아가 없을 때는 한 순간도 없어요.
목사님, 자아가 없다는 말입니까? 자아가 있는데, 그게 어제 자아와 오늘 자아가 다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좀 더 철학적으로 나가보니까 자아라는 것은 없고, 뭐가 있느냐? 몸 밖에 없는데 몸이 환경 따라 그때그때 자아를 재구성하더라. 이게 오늘날 철학의 결론입니다. 현재까지 내린 결론이 그거에요.
들뢰즈 같으면 여기다 뭘 하느냐 하면, 몸에서 자아 만드는 여기서 상세히 규정하죠. 그걸 뭐냐 하면, 욕망인데, 이 욕망은 나쁜 의미가 아니고, 배고프다 뭐, 밥 먹자. 내가 오줌 누고 싶다. 이게 다 욕망을 집어넣어서 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이란 존재가 있고, 몸이란 존재는 의미 없어요. 주어진 사회적인 사회가 내 귀에 들어와서 그 들어온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만들 때 이 몸을 가지고 나라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놨을 때 그때 나온 것이 나라는 상표가 붙여서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예를 들어서 '먹는다' 하는 것은 동사잖아요. 그런데 문법 쪽에서는 먹는다 하면 안돼요. I do eat. 내가 먹는다. 이렇게 붙어요. 이게 문법적인 버릇이라는 겁니다. 그냥 먹으면 되지. 인간은 살아있기 때문에 동사만 있으면 돼요.
그런데 명사를 붙여서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 쯤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와 나를 구분할 때 비로소 ‘나’가 있어요. 나라는 것을 평소에 의식할 필요 없는데 상대방이 있을 땐 날 느낀다 말이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라는 것은 항상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뭔가 불쑥 앞의 숲 풀에서 뭔가 곰이 튀어나올 때 어, 나는 죽겠다. 할 때 나가 등장하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면 나는 못 느낀다니까.
사람들은 평소에 나를 느끼는 줄 알지요. 나를 생각할 때만 느껴져요. 밥 먹을 때는 나가 안 느껴져요. 밥 먹을 때 안 느껴지는데 다른 사람이 다 먹고 난 뒤에 내 것 빼어먹었다 하면 그때 비로소 나를 느끼죠. 뭐냐? 내 밥인데 니가 왜 빼어 먹어? 이해 안 되십니까?
혼자서 도시락 까먹을 때는 나가 안 느껴진다니까. 맛있다만 느껴지잖아요. 아, 배부르다. 하는데 옆에 와서 얼쩡거리며 밥, 여기서 먹을까, 저기서 먹을까? 하면 갑자기 나가 느껴진다니까. 나라는 것은 일종의 버릇이에요. 나가 없는 게 아니고,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나라는 게 느끼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평소에 설교할 때 내가 이 교회 목사라는 것을 못 느낍니다. 그냥 설교의 말씀에 복음 정신에 복음에 입각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냐 거기에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이, 당신이 여기서 설교하는데 당신 교회는 저쪽인데 왜 여기서 설교하느냐? 할 때 갑자기 내가 이 교회 목사 맞느냐?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게 되죠. 그때 나가 생긴다니까. 의미를 주는 거예요.
의미를 줘 버리면 하늘나라라 하는 것은 컨테이너는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이건 없는 거예요. 없고, 이 선도 없지만, 일단 있다고 치고. 그러면 묵시는 어디서 생기는가? 묵시는 사건이 터질 때 여기서 사건이 내뿜지요. 나, 오늘부터 예수 믿게 되었다. 놀라워라. 십자가 은혜를 알았다. 나오지요. 할 때 주위에서 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주위에서 원인을 규명합니다. 결과를 규정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원인 없는 결과가 없어요. 그런데 묵시의 특징은 원인이 없다는 것. 원인이 없어요.
오늘 하여튼 어려운 김에 계속 어렵게 나가봅시다. 길이 이렇게 있고 이렇게 있습니다. 소나무가 하나 서 있습니다. 내가 A라는 지점에 있다가 갈림길, B라는 지점, C라는 지점이 있는데 내가 여기 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이 왜 여기 왔느냐? 라고 물을 때 성경대로 하면 주께서 인도한 겁니다. 성경대로 하면. 맞지요.
이게 어느 나오느냐 하면, 교재 한번 봅시다. 사탄할 때 나오는데. 마귀들 지나고요. 76페이지 그 나라의 필요성 제일 끝에서 두 번째 줄. 이게 지금 페이지 수가 우리 이창섭 목사님은 이 책이기 때문에 76페이지인데 이게 뭐냐 하면, 그 나라의 필요성 제일 끝에서 그 다음 장에 보면, [인간은 그의 머리카락을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고] 나오지요. 나옵니까? 76페이지 중간에 이창섭 목사님, 찾았지요?
76페이지 중간에 말이에요. [인간은 그의 머리카락을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으며 그 키를 한 자나 더 자라게 할 수 없고 또 그 생명을 연장하게 할 수 없다.] 나왔습니까? 마태복음 5장 36절. 그 나라의 필요성, 하나님 나라의 필요성 제일 마지막 장, 그 다음 넘어가면 4장 나와요. 4장 들어가지 말고 마지막 장, 그 앞에 장, 중간에. 찾았지요? 목사님, 마태복음 5장 36절 있지요?
보세요. 지금 책 내용을 전체적으로 해야 되겠네. 지금 사탄을 래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대적하는 자로 보는 거예요. 이 표현은 내가 보기에는 너무너무 잘 된 표현이에요. 마귀가. 이게 참 어려운데. 마귀는 뭐가 있어서 대적하는 자에요. 뭐가 없으면 대적할 이유가 없잖아요. 여호수아에게 옷을 벗기고 흰옷 입히는 사건 없으면 마귀가 거기서 대적할 이유가 없어요. 스가랴에. 그죠?
여호수아에 옷을 벗기고 하얀 옷을 입히니까 사탄이 뭐라 했습니까? 옷을 벗기면 안 되는데 왜 재, 죄를 용서하지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사탄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돼요. 반대체제라 한다고 반체제, 저 체제에 반대 되는 게 있어야 돼요. 그래서 저쪽을 빛내는 겁니다. 마귀가 없으면 하나님 일이 하나도 안돼요. 이단이 없으면 복음이 전파가 안 됩니다.
이 사람의 표현 중에서 사탄의 본 의미는 대적하는 자에요. 시비 거는 자에요. 그런데 뭐가 있어야 시비될 거 아닙니까? 등장해 놓고 하나님께서는 시비 걸 게 하는 겁니다. 시비 거는데 뭐로 거느냐? 역사적으로 거는 거예요. 원인과 결과가 있어서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그런데 묵시적으로는 뭡니까? 묵시적으로 탄생한 사람은 ‘역사적으로’를 초월해서 이 원인은, 아까 읽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생긴 원인이에요.
여기서 래드의 철학의 모순점이 잇습니다. 제가 아까 래드의 모든 신학은 공관복음에 해당되지 예수님께 해당 안 된다 했지요. 그러니까 뭐가 해결 안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주위 사람들이 알았습니까, 못 알았습니까? 원인 규명이 됐습니까, 못 됐습니까? 안 됐어요.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병을 쫓아낼 때 그때 유대 지도자들이 뭐라 했습니까? 원인을 어디서 찾았습니까? 바알세불이라 했지요. 악마의 대장이 작용해서 했다고 되어 있지요. 원인을 그들이 알고 있는데서 그들이 알고 있는 역사 속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성령 받아서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내가 가난 자에게 복음을, 옥에 갇힌 자에게 했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한대로 가버립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를 전하는 제자들의 특징은 말을 할 때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의 성령께서 말한다는 겁니다.
김달원 목사님이 이번 주 설교를 하시면서 상당히 어려운 주제를 끄집어냈어요.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두 인격이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했는데 과연 두 인격이 있는 게 아닌지 마태복음 10장을 보겠습니다.
10장 19절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인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냥 위에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니가 말한다.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뭐가 아니고를 먼저 이야기해야 돼요. 말은 분명히 내가 하는데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하는 말이, 베드로 본인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고, 베드로, 요한 속에 있는 성령이 역사해서 말하는 본인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한 거라 이렇게 돼요.
이걸 원인을 역사에서 원인 규명이 될 수가 없어요. 만약에 원인 규명이 된다면, 그걸 똑같이 되풀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과학적 법칙이에요. 데카르트의 과학적 법칙이 뭐냐 하면, 한번 일어난 일은 똑같이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똑같은 결과가 낳는다. 거기서 처음 생긴 것이 역사관이 처음 생긴 거예요.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아닙니까?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그게 원인 없이 온다 말이죠. 원인 없다. 그래서 원인 없는 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신학자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신학자들은 이렇게 봅니다. 이 원인을 과거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미래에 원인을 두고 미리 당겨서 준거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명한 '선취'라고 미리 취한다 했죠.
이 선취라는 용어는 몰트만이 쓴 용어인데, 몰트만은 어디서 썼느냐? 바로 블로흐의 철학에서 나오죠. 블로흐의 철학은 어디서 나왔느냐? 딜타이의 철학에서 나왔어요. 딜타이 공부할 때 했습니다. 먼저 미래가 먼저 와서 하는 거예요. 딜타이는 그것까지는 모르고, 블로흐는 다만 그걸 미래라고 하지 않고 소망이라고 했고, 소망이 있음으로 인간은 지금 행동한다. 과거의 누적된 걸 가지고 행동하는 게 아니고, 내가 꿈꾸고 있는 소망이 현재 나를 행동하게 한다.
몰트만은 그걸 이용해서 미래에 있는 하늘나라가 앞당겨서 선취, 미리 취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라고 했고, 그걸 더 확실하게 들춰낸 사람은 판넨베르크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현재는 하늘나라는 없고, 다만 하늘나라의 흔적만 있을 뿐이고, 흔적만 질질 끌다가 나중에 미래 되면 모든 것이 공개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미래가 와서 현재 일으킨다는 아주 이걸 규정해 준다는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13장 보면,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볼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지금은 희미하나. 이것은 그 뒤에 대목이 확실하죠.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하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 영원한대 그 영원한 것이 천국 가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이 은사로 선물로 주어졌다는 말은, 이것은 바로 미래 사건으로 우리를 집어당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현재에서 원인을 찾지 못하느냐 하면, 현재는 사람의 기억은 항상 역사는 기억이거든요. 역사가 뭐라고요? 기억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사람마다 다 달라요. 왜? 자기가 충격 받은 기억만 외우고 그걸 연결, 연결하기 때문에 다 달라요.
이것 해 봅시다. 당신이 여기서 B가 어떻게 왔습니까? A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A를 통해서 왔습니다. 라고 했을 때에 이런 게 있고. 처음에 A로 해서 왔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엄마가 보내서 왔습니다. 라고 했고, 세 번째는 주께서 가끔 인도했습니다. 했고, 네 번째는 뭔가 불빛이 보여서 불빛이 인도했습니다. 이것은 똑같은 비슷한 점이 있더라도 의미가 다 다르다니까.
그래서 각자의 의미를 가지고 공유한다고. B라는 지점에 있는 사람보고, 저, 손님 어떻게 왔습니까? 내가 버스 타고 왔습니다. 이거는 허무개그 아닙니까?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이런 뜻인데 뭘 찾습니까, 뭘 사고 싶습니까? 이런데. 손님 어떻게 왔지요? 하니까 버스 타고 왔습니다. 아, 이게 무슨 개그에요.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한쪽이 이쪽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3번 가지고 공격하고, 4번 가지고 틀렸다고 공격하고, 5번 가지고 이단이라 하고, 6번 가지고 틀렸다고 하고. 이 모든 것을 완전히 깡그리 다 없앴을 수 있는 원인은 하나 밖에 없어요.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는 바로 베드로에 의하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그 능력이 없으면 너희들은 이 불구덩이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베드로후서 3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이 살지 아니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미래의 하늘나라가 이미 그 사람에게 도착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시간에 매여서, 시간에 매였다는 것은 자기 기억과 자기 충격 받은 의미에 매이니까 자기 의미니까 의미 떼보면 뭐가 남아요? 결국 자기가 남잖아요.
여러분 이상봉 목사님이 썼던 책, [성 밖에서]라는 그 책 다 읽어보셨습니까? 지금 묻는 내가 그르지요. 다 읽어 보셨습니까? 집에 가서 4시간 만에 다 읽었어요. 이광호 목사님은 세 권을 한 시간 반 만에 읽었지만 이상봉 목사님은 4시간 만에 읽었습니다. 줄 쫙 쳐 놨어요. 그리고 전화했습니다. 전화 내용은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전화내용의 일부를 이야기한다면, 나는 책을 어떻게 봤던 봤으면, 책 쓴 사람의 내가 책을 써봤기 때문에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해요. 책을 쓰면서 열 번 이상해야 합니다. 내가 미쳤나. 왜 나는 다른 목사들처럼 펑펑 안 놀고 왜 나는 이 고생해야 되느냐? 고생을 왜 사서 하느냐? 왜? 문자기 때문에. 내 놓고 나한테 문자로 비난 할 게 뻔한데 비난 받을 짓을 내가 미쳤다고 내가 똘아이 가. 내가 이 짓을 누가 책 쓰라고 한 것도 아니고, 왜 이걸 쓰느냐? 이런 회의가 열, 백 번이 찾아와요.
그리고 남이 모르고 있으면 나 혼자 간직하면 되지, 내가 이걸 왜 써야 되느냐? 이걸 써봐야 읽지도 않을 거고. 이것 해봐야 욕만 돌아올 건데 내가 왜 쓰느냐 하는 회의를 느낍니다. 이것은 이상봉 목사님도 마찬가지에요. 나 혼자 잘 믿고 천당 가면 되지, 이걸 왜 쓰느냐 느낄 거예요. 그걸 알기 때문에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그 수고를 알기 때문에 전화를 한 거예요.
책을 읽고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해 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정말 하나의 책을 보는 예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 예의를 갖춘 사람은 주변에 거의 없었습니다. 손성식 목사님이 글로써 좀 남겼지, 그것도 깊이 있게 안 보고 이렇게 봐서 그런데 깊이 있게 보면 글이 많이 길어져요. 대충대충 보면 그런 글이 나오지만 더 깊이 있게 보면 다른 것이 나와요.
쭉 보면서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왜 모든 것이 나의 의미인데 그러면 십자가 빠져버리면, 나하고 앞에 누가 있습니까? 십자가 빠진 상태에서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있지요. 그럼 내가 예수님 믿고 예수님 나에게 은혜 주고 그거잖아요. 그럼 계속 남아 있는 게 뭐가 남아있어요? 예수님 남아 있고 내가 남아 있죠.
나가 남아 있으면 뭐가 남아 있습니까? 기억이 남아 있죠. 내가 의미를 느끼는 야, 이건 의미 있다. 요건 하나님 묵시다. 는 의미 있죠. 그 의미들 사이에서 뭐가 됩니까? 역사 되잖아요. 그 역사 남아 있잖아요. 제가 방금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이 남아 있고 내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반드시 이것만 남아 있는 게 아니고, 조지 엘든 래드가 이야기하는 바로는 역사관이 남아요. 역사관이 남아 있다니까요. 역사관 남아 있으면 안 돼요. 역사관 남아 있으면 성화 나오게 되어 있다고. 이건 필연적인 결과에요.
그러면 성화 때려 부수고 역사관 부수려면 뭐가 부셔져야 돼요? 나만 부수면 안돼요. 하나님 부수고 나 둘 다 부셔야 돼요. 부수면 뭐가 부숩니까? 바로 십자가를 부셔요. 십자가를 부수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발걸음 세시고, 아까 나온 대로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하시고 우리의 선 것과 앉는 것을 다 아시고.
갑자기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 하나님이 뭐로 바뀌느냐?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 다 바꿔요. 구약의 모든 여호와가 십자가에 달리고 승천함으로써 그게 전부다 주로 바뀌죠. 그래서 하나님은 가려져 있고 주를 통해서 영광 돌릴 때 그것이 주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이 바로 골로새서에 나오는 모든 것이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로마서에 나오고 골로새서에 나오는 모든 것이 주를 위해서 만들어진다. 그 이야기거든요.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나'가 부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부정되지 아니하면 요 하나님은 내가 만든 하나님이니까 둘 다 십자가에서 부셔지지 아니하면 여전히 남는 게 뭐냐 하면, 역사관이 그대로 남아요.
이러면 복음만 전해야 될 건데 복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면 그 맞은편에 반드시 말을 안 했지만 숨은 누가 있습니까?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나가 있지요. 예수님과 나가 있어야 생명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그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증거, 생명보다 나를 증거 한다고 반드시 끼어들게 되어 있다고. 반드시 하나의 세트니까 이게.
이상봉 목사님은 그런 공격이 들어올까 싶어 우려해서 앞에 첫 부분에 혹시 들어 올까봐 공격해놨어요. 혹시 그런 반박이 들어 올까봐. 어떻게 공격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섬긴다고 1페이지부터 2페이지까지 막 공격해놨지요.
그래서 내가 유대인이 갖고 있는 우린 없나? 예수님의 생명 받으면 유대인의 품성 사라집니까? 예수 믿으면 우리 옛 아담 성품 사라집니까? 그대로 있잖아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종교고, 우리는 종교가 아니고 생명운동이고. 어디 그런 일방적인 판단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이상봉 목사님 책 보면, 이런 글 나와 있어요.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는 더욱더 밝혀진다.] 기억나십니까? 다 보셨다니까 그 대목 기억납니까? 이것은 바로 흔히 성화주의는 나는 아니다. 라는 뜻을 담은 거예요. 아니다. 책을 전혀 딴 분 안 보셨습니까? 손 목사님 보시고 다른 분들 안 보셨습니까?
바로 제가 지금 누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그런 본성이 지금도 버젓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돼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내가 목회를 몇 년 했니, 내가 성경공부를 몇 년간 돌아다니면서 강의를 했니, 이것 십자가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 십자가는 나를 매일 같이 죽여요. 그리고 죽이면서 남는 게 뭐냐? 지금 니가 발걸음, 부산까지 온 것도 전부다 주께서 인도한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누가 대적한다? 사탄이 어떻게 대적하느냐 하면, 니가 아침에 생각했잖아. 오늘 성경공부 하고 니가 결정했잖아. 원인이 니가 했잖아. 했기 때문에 다음에 또 결정해 봐. 부산 올 수 있지. 자꾸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왜 자꾸 안 찾아내려고 애를 쓰느냐 이 바보야. 하는 식으로 마귀가 사탄이 대적하는 거예요. 복음을.
그러니까 지금 래드가 아주 훌륭하게 이야기하면서도 본인은 이걸 예수 그리스도까지 안 가고, 이걸 맨 날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바로 공관복음 저자까지만 멈추는 거예요.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런 글을 썼다는 거예요. 실제로 성경에 보면 제자들의 생각은 확 빠지고 성경 전체가 성령에 의해서 쓴 책이에요. 그걸 래드가 인정 안할 리가 있습니까? 래드가 그 정도는 인정하지요. 말만 인정하면 뭐 합니까? 실컷 성령이 썼다 해 놓고 말만. 인간적으로 다 돌려놓아 버렸는데.
앞에서 공부하면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하면서 조지 엘든 래드가 성령에 대해서 십자가를 품은 성령이냐, 아니냐 어떻게 되느냐 그거는 앞으로 쭉 나오겠지요. 기대됩니다. 성령의 개념을 할 때 십자가 전의 성령과 후가 어떻게 다르냐 이 말이죠.
여기에 오늘 본문 한번 찾아봅시다. 아주 이 사람이, 그 나라의 필요성에서 초반에 이런 말이 있어요. 63페이지. 그러니까 종말론적 이원론에 가면 두 페이지 넘어가면 거기에 이런 말이 있어요. 쿨만이라 하는 것이 있어요. 쿨만 찾았습니까? 찾았어요? 새 번역. 그 나라의 필요성에서 처음 시작해서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세 번째 페이지. 있지요?
그 위에 보면,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렇게 나와 있지요. 그죠?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제가 신학교 2학년 때 이걸 보면서 제가 여기서 크게 배우고 놀랐고 크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게 뭐냐 하면,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마태복음 12장 32절, 이 본문을 해석하는데 페이지 수가 몇 페이지입니까? 수십 페이지 하잖아요.
내가 그때 전도사니까 전도사가 중, 고등학생한테 설교하면서 이 본문 설교하면서 나는 수십 페이지 준비하고 하는지 이 말입니다. 아, 설교는 깊은 체제를 가지고 설명하는 이걸 내가 배웠다니까. 그 한 구절,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이 대목 하나 설명하는데 이런 뒷받침되는 신학적인 공부를 해야 되겠구나. 그걸 또 배운 거예요. 이걸 보면서. 함부로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 말이죠. 대충 흘낏 보고 남 책 베껴서 하는. 본인이 깊이 빠져요.
이걸 설명하면서 래드가 뭘 들고 나오느냐 하면, 부자 청년이 어떻게 영생 얻습니까? 그 대목 인용하고 있다고. 보세요. 벌써 마태복음 12장과 부자청년 15장과 연관시키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그때 전도사 시절 때 과연 설교하면서 이 본문을 사설로, 밑에 있는 감자뿌리처럼 사설로 되어 있는 걸 다 뽑아내면서 과연 내가 준비하면서 전도사로서 설교하고 있느냐? 스스로 반성이 되더라니까.
기존 목사 설교, 일 대지, 이 대지 아이고, 저건 눈 감고도 하겠다. 그건 눈 감고 해요. 그러나 래드 책을 딱 보니까 그렇게 눈감고 하는 사람 입만 가볍게 하는 그런 것 하면 안 되고, 정말 깊이 있는 설교하려면 이런 걸 다 끄집어내야 된다는 걸 알았단 말이죠. 아, 정말 내 공부해야지 남 설교, 저 정도하면 따라하겠다. 그 정도하는 게 아니고 내가 알아야 돼요.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된다.
이 책 보고 본 게 뭐냐?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의 시간]하는 것. 그 책이 안 나와서, 책이 나왔는데 책이 절판되어서 내가 복사 집에 가서 복사 다해서 다 읽었어요. 2학년 때. [그리스도의 시간] 무지무지 어려운 거예요. 세상에 그만큼 어려운 책 처음 봤어요. 2학년 때 읽는데. 눈물이 막 울었다니까. 주여, 이거 공부 더 해야 됩니까? 10페이지 밖에 못 읽었는데 300페이지 언제 다 읽습니까? 꼭 이거해야 됩니까? 이거 안 하면 전도사 못합니까? 울면서 봤다니까 울면서.
속으로는 이것도 모르면서 무슨 진리를 안다 하느냐? 임마, 이 정도는 돼야지. 나중에는 그 정도 더 이상 돼야 되는데. 그 정도, 오스카 쿨만 정도는 돼야지 니가 설교하지 하는데 나중에 그게 목표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가면 그것도 시들해요. 판넨베르크는 더 어려워. 바르트는 더 어려워요.
여기서 오는 세대와 이 세대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러분 깁니까? 안 길면 계속 좀 하려고.
-목사님이 안 피곤하시면
저는 괜찮아요. 이제 발동 걸렸는데. 우리 일하시는 정판옥 목사님이 쉬시지 못하고.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이야기했어요. 그럼 불연속성이라 하는 것을 뭐로 보느냐? 묵시로 보지요. 래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한꺼번에 공관복음에 다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제자들에게. 제자들에게 한꺼번에 그게 다 들어가 있다. 항상 제자들이라 하는 말은 저자 입장에서 봐요. 이렇게 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말을 안 해요. 저자들에게. 마태는 그게 들어있고, 누가 그게 들어있다. 이게 그들 동네의 법칙이에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다 들어 있는데, 문제는 불연속성이 이게 헬라철학이라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묵시란 개념은 유대인이 없다는 거예요. 래드의 입장에. 묵시란 개념이 있는 것은 시간적인 불연속성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이 시간 속에 어떤 획기적인 사건이 와서 지금의 시간적인 의미와 다른 의미의 시간적인 연속성을 가질 때 그걸 불연속성이라 본다 이 말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획기적인 사건, 메시아의 오심이죠.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와서 로마라든지 어떤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하는 획기적인 것이 올 때 역사의 질이 달라. 내용이 다르다 이 말입니다.
김달원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우리 속에 두 인격이 들어있다고 한 게 아니고, 존재론적으로 보면 안 되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미 우린 죽은 자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라는 말은 내가 깨어있다는 말이 아니고, 이제는 우리가 어떤 것을 해도 그것은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김달원 목사님의 설교에서 김달원 목사님이 아, 그것까지 아시는구나. 하는 게 뭐냐 하면,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배제하고 일한다 하는 그 대목. 이걸 이번 설교에서 굉장히 강조했어요. 완전히 배제하는 거예요. 뭐가 잘했니, 뭐가 못 했니 왜 따지느냐? 완전히 배제해 버리는데. 완전히 강조했어요. 아, 이걸 아시는구나. 이거는 별로 이야기 안 하기에 이것까지 아시나 싶었더니 아, 이 정도까지 인간을 완전히 배제한다. 슬프고 기쁘다. 즐겁다. 주님 앞에서 이거는 아예 시답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말이죠.
그런데 김달원 목사가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존재론적이 아니고 한다는 그 말은, 아까 1번, 2번, 3번, 4번 가운데 2번을 이야기할 걸 3번을 가지고 2번을 공격하는 논리적인 부분 틀린 그런 문제는 있어요. 그런 것은 논리적인 문제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아니지만, 지금 똑같은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시간적인 연속이 끊어지는 것은 없다. 다만 시간이 진행을 바꾸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획기적인 사건, 메시야의 오심. 메시야가 오게 되면 시간은 그래도 흘러가는데 다만 그 시간이 신난다, 또는 보람 있다. 야, 드디어 우리가 믿을 만 하구나. 하는 행복한 시간이, 역사가 슬픈 역사에서 기쁜 역사로 감사 역사로 바뀌는 시간의 질이 다를 뿐이지, 불연속 하는 그런 의미에서 불연속이다. 라고 보는 거예요.
요거는 지난 것 위에서 새로운 것. 이거는 원인이 지난 것에는 원인이 없고, 이거는 그 원인이 주님에서 원인이 와서 전혀 지난 것과 상반된 다른 질의 역사를 가지고 불연속성. 이게 함께 그래서 뭐냐 하면, 여기 성경에 이 세상과 요건 이 세상이죠. 이 세상과 그 다음에 밑에는 오는 세상. 그러니까 같이 있으니까 아까 게르할더스 보스의 그림에 의하면, 이건 있고 컨테이너 하나 박스 하나 얹어 놓은 것처럼 요런 식으로 딱 얹어서 표현하는 것이 래드에 맞는 거예요. 이 사람도 게르할더스 보스를 추종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 가지고 다 설명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사탄 있잖아요. 사탄은 어디를 가지고 어디를 대적하느냐 하면, 이 연속성 가지고 불연속성을 공격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다. 그런데 사탄의 역사는 사탄과 귀신을 구분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경향은 침례교에서 강하게 구분해요. 구원파라든지, 김기동이라든지 전부다 구분합니다. 사탄은 뭐냐? 갑자기 사탕 생각나는데. 사탄은 이것은 대적하는 자지요.
여기 사탄 한번 봅시다. 영적 세계 사탄. 여기 주에 보면, 15번 주에 나오지요. 사탄은 반대한다, 방해한다. 비방자. 사단은 주로 하는 게 비윤리적이에요. 이걸 이 사람이 강조해요. 이 사람이 사탄이 하는 일이 비윤리적이라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중에 사도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 야고보 이렇게 나올 때 윤리와 대비하기 위한 사전 포석입니다.
귀신이라 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과 관계없이 이거는 뭐냐 하면, 악한 병과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질병 걸린 것은 귀신 들린 것이지, 사탄 들린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탄과 귀신의 관계는 사탄은 귀신의 왕이에요.
이걸 정리해 보면, 사탄은 노는 가락이 똘마니들 노는 것과 좀 달라. 이것은 뭐냐 하면, 더 높은 차원의 것을 건드리고 이쪽은 사람들 깜짝깜짝 놀라게. 어머, 병들었다. 이거는 인간들이 자기 앞가림이 안타까운 그 정도만 다루는 것이 요 정도 레벨이고, 이 레벨은 뭐냐? 아주 정신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라고 보는 거예요.
결국은 이 사람의 주장하는 것은 병이 나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도라 할 수 없고, 성도의 진짜적인 표적은 이게 윤리적이 돼야 성도의 표적이 되고 그것이 공관복음과 바울 서신과 일치된다, 조화가 된다. 이렇게 주장해요. 그런 체제를 갖고 있는 겁니다. 조사하면 다 나와요.
자, 그러면 여기서 이 사람이 제대로 봐요. 거의 이 사람은 90%는 옳게 봐요. 그걸 전제로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여기에 대해서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제 삼척에 오후 1시인가 너울 일었지요. 자, 삼척 항에 평소에도 바닷가에 댐을 쌓아서 이만큼 쌓아놨습니다. 여기 민가가 집들이 이렇게 있어요. 그런데 태풍이 지나가는 괴물의 뒤꼬리가 쳐서 이게 너울이 일어서 파도가 넘쳤습니다. 할 때 파도가 넘치면 앞쪽부터 밀리죠. 밀려서 떠내려가기도 하고.
지금의 이 래드의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님이 올 때 아라한 장풍 하는 것 있잖아요. 예수님이 올 때 옆에 뭐가 오느냐 하면, 바람이 일듯이 뭔가 파도가 치듯 같이 동반하며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뭐가 일어나는 거예요? 와, 메시야다. 도망치고 귀신이 알아서 물러가고, 병든 자가 낫고, 정신병 든 자가 낫고. 와! 하고 넘어지잖아요. 그 광경이 마치 하늘나라라는 큰 파도가 치듯이 밀려와서 하나의 증표, 표징. 이 뒤에 누가 있겠어요? 바리새인.
뭘 설명하느냐 하면, 목사님 물어봅시다. 바리새인은 귀신들렸지 않았습니까? 귀신 들렸지요. 그런데 왜 병든 귀신은 메시야다! 하고 귀신이 막 떠나가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열 두 제자가 가니까 귀신이 떨어져서 고함을 지르고 나오는데, 왜 바리새인은 끄떡도 없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일반 평신도들이 궁금할 것 아니냐 말이죠.
평신도들은 만화적인 것이 있어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면 예수님 앞에서 어디 놈이 나설 자가 없고, 예수님은 완전히 천하무적 태권 브이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평신도가 성경 열어보니까 병든 자, 중풍병자 이거는 팍팍 넘어지는데 아니, 바리새인은 강호동이도 아니고 최홍만이도 아니고 끄떡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성령발이 왜 바리새인들은 안 되어서 왜 십자가에 패배하느냐 이 말이에요. 귀싸대기나 맞고. 왜 하느냐 말이죠. 앞뒤가 안 맞잖아.
일반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반교인 뿐만 아니고 누가 그렇게 생각했느냐 하면,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나라의 신하니까 예수님 나라에 올라갈 때 저, 한 자리 줍니까? 그래. 열 두 고을 다스린다. 야, 신난다. 누가 높은 자라 했습니까?
이거는 지금 뭘 하느냐 하면, 너무 일이 잘 풀리니까. 당해낼 재간이 없어. 백전백승이야.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자가 고난 받고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하니까 베드로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데 누군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 사탄아, 물러가라.
자, 그걸 신학자가 설명을 해 줘야 돼요. 우리가 총신 다니면서 신학하면서 그런 것 의문점, 속에 있었지요. 있었는데 어느 눈치를 봐도 그걸 누가 이야기해준 사람이 있던가요? 서로 전부다 묵계한 것처럼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이제 그거 이 사람이 설명합니다. 수십 년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주님의 능력이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아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 만난 사람은 귀신이 넘어졌지만 그게 예수님 만난 지점이 A라고 합시다. 거기서 35.7km 떨어진 어떤 사람 넘어집니까? 귀신 나갑니까? 안 나가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로만 설명되느냐 하면, 바로 태풍의 너울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지요.
이거는 결국 뭐냐 하면, 공간적인 제한, 지리적인 제한 이외에 다른 걸로 설명 안 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면 예수님 반경 몇 km 내에는 그게 능력이 되지만 그 전에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오병이어 할 때 그 지점에서 수십 km 떨어진 사람 배불렀습니까? 배 안 불렀어요. 그 자리만 항상 있어요.
마태복음 12장에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수님 제자가 왔을 때 예수님, 모친 왔는데요. 동생들 왔는데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면 내 동생들이냐?" 여기 있는 사람들. 그러면 예수님 거기 있지 말고 예수님 저, 예루살렘, 멀리 있는 사람들, 예수님 동생들입니까?
어떤 신학자인가, 철학자인가 이야기하는데 이런 게 있어요. 아, 철학자가 이야기했구나. 니체 책 그게 나오나? 의미를 줄 때는 반드시 시간적과 공간적인 제한이 있다는 말 했어요. 깊은 뜻이 담겨 있어요.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때는 공간적인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는 말은 만약에 그 의미가 공간과 시간을 떠나버리면 그대로 유지한다, 유지하지 않는다? 유지하지 않는다. 대단히 중요한 것 아닙니까? 참, 중요한 겁니다. 그걸 흔히 말하는 문맥상 의미를 찾아야지 문맥 떠나면 그런 비슷한 뜻인데.
여러분, 방금 제가 이 래드를 설명한 것. 침노한다는 말, 그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와르르, 성을 찾아서 온 거예요. 완전히 반지의 제왕이야. 그러나 이쪽은 아직 함락 안 됐어. 마지막 이쪽 함락되는 것은 언제까지? 요한계시록 이루어질 때 그 때까지 대기하는 거예요. 이것 밖에 안돼. 이건 똘마니들. 귀신 똘마니들. 똘마니지만 숫자가 많지요. 이만만 되니까. 귀신 들린 사람들 많게는 이만만 들어 있잖아요. 일곱 귀신 들어온 사람도 있잖아요. 일곱 귀신 들어온 여자 있잖아요. 그러니까 똘마니들 있지만 마귀는 아직까지 있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가 뭐냐? 예수의 능력이 예수 있는 그 지점에서 어느 정도까지 한계성을 가지고만 활동한다는 말이, 래드의 이야기가 맞습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옳으냐 이 말입니다. 왜 답변을 안 하십니까? 주고받아야 강의가 재미있는데.
이 설명이 맞습니까? 안 맞는다면, 여러분이 이 의문점이 든 평소에 생각하는 여러분 의견은 어떻습니까? 평소에 본인 혼자 생각했던. 어떤 교인이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답변한다는 게 있었을 것인데. 그게 뭐냐? 왜 귀신이 바리새인한테는 못 덤빕니까? 영발이 적은가, 왜 그런 거예요. 같이 귀신 들렸는데 너희는 마귀 새끼라 했는데. 너희는 귀신들렸다고 했는데 왜 안 들리느냐 말이죠. 왜 시시한 것들은 되고.
-틀렸어요.
어떻게 틀렸는데요. 틀린 이유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자체 그것도 예수님이 하신 것이지만은 그 외에도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다스리고 계시잖아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으로서의 시간적 제한이지 그렇지 않더라도
오케이. 그게 정답입니다. 왜 정답이냐 하면, 예수님은 구약을 이루러 오셨어요. 구약 말씀을 이루러왔습니다. 근데 구약에 보면 악한 마귀 들려서 병든 자가 구약에도 나오지요. 엘리야, 엘리사 나오지요. 그런데 구약에 보면 그게 주류가 아니고, 구약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전체 율법을 완성하는 게 구약의 완성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귀신 병 고치는 의미를 전체, 전체 지금 법이 바뀌어야 돼. 이 사람은 지금 산상설교는 윤리적인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병 고침은 따로 존재한다고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어디서 안 맞느냐 하면, 산상설교하고 난 뒤에 문둥병자 있지요. 그 설교가 난감해져요. 산상설교 하고 난 뒤에 문둥병자 고칠 때 마, 니 왜 산상설교 안 지켜. 이랬습니까?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낫게 하면서 그 다음에 뭐 해요? 니가 제사장 제물을 갖다 바쳐라. 이거는 어디에 나오는 거예요? 레위기에 나온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람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메시아 값을 해봐라. 표적을 해봐라. 하니까 맨 날 그 당시 유대인들처럼 병 고치는 데 관심 있지, 본인들이 성경 보면서 공관복음 보면서, 야, 예수님 멋쟁이. 병고치고. 나도 교회 가서 병 고칠란다. 지금 관심사가 의미가 1번, 2번, 3번. 자기 의미가 자기 추억이 아프니까 사람이 병 나을 때 획기적인 거예요. 병 나을 때 확 뜨잖아요. 거기에 관심 있으니까 병 고치는 귀신이 떠난다 이거지, 주의 복음이 들어와서 내가 죄인이라 깨닫는 것은 이거는 큰일, 이거는 중요한 일 아닌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은 예수님께서 전체를 다 했는데.
방금 한 예를 말로 하면 잘 이해 안 되고 쉽게 해봅시다. 여러분 배고파도 참으세요. 내가 이것 좀 잠깐 밀어붙일 테니까.
휴전선이 여기 인민군이 쳐들어오는데 여기는 병든 자가 귀신들린 자기 있어요. 인민군이 이것만 왔습니까? 병든 자만 왔습니까? 아니에요. 전체 다 왔어요. 전체 다 왔는데 사람들의 관심사가 이것만 관심을 두고 있더란 말이지요. 산상설교가 무슨 뜻이며.
산상설교가 전면적인 공격이에요. 우리의. 저희가 지옥 간다는 이야기에요. 누가 마음속으로 간음하는 자는 무슨 죄다? 간음죄다. 그럴 때 병든 자만 주여, 맞습니다. 난 병들어 쌉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게 귀신 떠나는 거예요. 귀신 떠나서 떠난 게 아니고, 주의 말씀을 듣고 난 뒤에 떠나는 거예요.
그 말씀이 뭡니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주여, 저는 마음이 오만해서 난 지옥 가야 마땅하군요. 이런 자기 속에 있는 죄. 또 그런 게 있지요. 분명히 오른 편에 던져서 베드로가 고기를 잡았잖아요. 근데 정작 나온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여,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병든 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 거예요.
모든 인간은 귀신은 우리를 마음대로 가집니다. 이게 이 사람 글에 보면 나와요. 귀신은 우리를 이미 지배하고 있다 했어요. 이 학자가 그 근거를 대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귀한테 시험받는 그 대목과 여러 가지 대목을 대면서.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병든 것을 귀신 들린 것을 빼낼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이미 지배받았다. 그거는 옳은데 다만 그걸 표현할 때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했지.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 글의 내용을 보면.
그래서 마귀한테 속했다는 것은 내가 인정하겠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했다 하는 말하는 것은, 마치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우리는 이 세상 신이 하는 말이 나오고,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세상 신이 보이지 않는 신이 복음을 가리려한다. 그 말이 합쳐서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주님께서 주님과 이 세상을 이렇게 대결로 보지 말고, 저처럼 주님께서는 공생애 때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오신 분이에요. 아직까지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그래서 예수님이 뭘 할 수 있는지 보지 말고, 예수님이 무슨 재주가 있느냐 보지 마시고, 예수님이 뭘 몰고 온 가를 보지 말고, 예수님이 몰고 온 그 법칙이 뭐냐를 봐야 된다. 그래야 공관복음이 해석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몰고 온데서 예수님이 뭘 몰고 오느냐가 아니고. 어이, 이리 와. 강호동이 니하고 귀신 쫓아내자. 예수님이 몰고 와서 큰 행사 치르자. 이것 보지 말고, 예수님을 떠미는 것이 있어요.
이 사람은 자꾸 예수님이 뭘 몰고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의 사탄과 대결하라는데, 사탄은 예수님과 대결할 쨉도 못 됩니다. 그거는. 사탄은 예수님이 몰고 온 그 법칙 안에 있어야 돼요. 예수님과 사탄 모두 다 예수님이 몰고 온 그 법칙에 의해서 지금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지, 그래야 묵시와 역사가 한꺼번에 다 나와요.
그런데 이 사람의 주장대로 하면, 이 세상에 우리가 속했다 하면, 이 세상 벗고 나면 그럼 우리는 뭡니까? 저 세상에 오는 세상에 속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 인간을 성도를 완전히 신으로 만들어버려요. 왜? 물론 성경에도 그런 게 있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런데 큰 의미는 아닌데.
이 사람은 가만 보면, 제자들을 이 사람들을 완전히 스타로 만들어버려요. 제자들이 맨 날 실수하고 끝까지 믿음 없이 그런 것은 그만 은근슬쩍 없애 버리고.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새 사람 되었으니까. 이런 관점이 침례교 관점이고 오늘날 교회 관점 아닙니까?
저한테 어떤 사람이 맨 날 시비 걸고 묻는 게 그거에요. 아니, 예수님이 전한 성령 받았다 하면 같이 좀 인정해주자 이 말이거든요. 난 인정 못해주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님을 나오게 이 땅에 육신이 되게 만드는 그 법칙이 더 중요한 것처럼, 성도란 것은 성도가 비록 성령 받고 예수를 믿어도 성도의 가치를 찾으면 안돼요. 성도를 덮게 하는 주님의 법칙, 그것을 성도를 통해서 이걸 믿고 봐야지, 성도가 뭐, 저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고 이렇게 보면,
자꾸 목사님은 인간의 훌륭한 점을 깎아내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성도란 성도되게 하신 그 법칙이 주님의 언약의 법칙을 그걸 봐야지, 이것 성도가 잘하고 이걸 보면 안 됩니다. 그걸 내가 풀어서 이야기하죠.
그러면 이 책에 없는 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 힘들어하시니까. 뭐냐 하면, 예수님을 몰고 온 법칙이 뭐냐? 이 책에선 그건 이야기를 못하지요. 관점이 예수님이 몰고 온 것. 그래서 귀신 쫓아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귀신 쫓아낼 때는 똘마니들 쫓아내지 않고 뭘 겨냥한다? 윤리적인 것. 큰 덩치끼리 놀자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버티고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은 어느 정도 되느냐 하면, 바리새인 똘마니도 뭐 할 줄 알아요? 병 고칠 줄 알아요.
우리 병 고치는 것하고 놀지 말고 큰 것 하고 놀자. 할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랑 할 때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 그런 이야기하지 않고 뭐냐 하면, 윤리적인 이야기를 했다 말이죠. 그 대표적으로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거죠.
니가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오는 게 더럽다. 이런 식으로 해서 니가 말씀대로 못 지키네. 그러니까 산상설교대로 니가 못 지키잖아. 그러니까 니는 비윤리적이고 나쁜 놈 아이가. 와, 니 죄를 모르노.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공격해 들어갔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근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사탄도 예수님도 다같이 지배 받는 어떤 원칙이 있고 사탄은 그 원칙에 충실해야 될 하나의 역할을 해야 된다. 예수님은 자기 역할을 하고. 성령이 이끄시는 역할이 그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이루려왔다 했죠. 아버지의 뜻은 이 땅에서 뭘 하느냐 하면, 아들을 보내는 거예요. 아들 만들기에요. 아들 합시다.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결국 아들은 이 땅에 없는 거예요. 여기서 열 두 제자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뽑아야 되는 이유는, 현재 있는 아브라함 자손 있잖아요. 아브라함 자손은 이게 혈육에 속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교회에 질문해서 답변을 이렇게 했는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게 어느 정도 기적이냐 하면, 한번도 외국인과 접촉된 적이 없는 안동 권씨 집안에서 흑인 아이 태어난 것하고 마찬가지다. 외국인과 한번도 접촉한 적이 없는데 안동 권씨 집안에서 흑인 아이 태어나면 이거는 혈육과 상관없이 태어난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 뜻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모델이 되는 아들이 필요해요. 이 아들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고 뿐만 아니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돼요.
이게 돼야 아까 이야기한 인자를 모르는 놈들은 용서를 받되 성령을 모르는 놈들은 지금 시대부터 오는 시대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하는 것은 지금 시대 전부다 성령의 뜻에 의해서 예수님도 통치 받고 그리고 사탄도 마귀도 전부다 그 성령의 뜻에 의해서 지금 지배받고 성령은 아버지 뜻을 이루는 과정에 있습니다. 아직 십자가 전이니까.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는데 아직 예수님은 주인공이 아니에요. 아버지 뜻이 주인공인데 아버지 뜻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서 이 땅에 아들 만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그 아들의 모델로서 아들이 따로 와야 되고, 그 모델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앞으로 나오는 열 두 제자, 열 두 제자가 열 두 이스라엘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예수님처럼 되지 아니하면 그건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 못하겠다. 난 내 백성, 내 아들이라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원래 아들이라는 개념은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바로 이스라엘을 내 장자, 내 아들이라 했어요. 그 아들이라는 개념이 나중에 어떤 개념인지 조직신학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낳았다, 안 낳았느니 영원하니 하는데 아들 개념은 낳았다는 개념이 아니고, 거기 계시는 개념이에요. 주님을 모시는 개념이에요. 주님께서는 자기가 낳은 자기 백성 안에서 머무는 백성, 그걸 아들이라 하는 겁니다. 자기 아들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을 아들이라 하는데 그게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첫 번째 태어나는 장자는 내게 돌리라 합니다. 그건 그냥 넘어갑시다.
하나님께서 아들 만들기에 나서는데 여기에서는 주인공은 예수님조차 독자적인 노선을 하지 못하고 예수님조차 아버지 뜻에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물론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아버지의 뜻을 모든 것을 내게 맡겼지요. 맡기는 뜻까지도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맡겨진다 말이죠. 그러면서도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이루게 해서 끝까지 계속해서 지금 나는 아버지 뜻을 복속되어 있는데 왜 자꾸 나보고 욕하느냐? 아버지 뜻을 봐라!
그러면 그들이 하는 말이, 모세가 아버지 뜻이 아닙니까? 너희가 모세를 아느냐? 모세를 알았으면 내가 하나님이 아닌 줄 알지. 모세를 모르니까 나를 비난하지. 너희가 만약에 내가 너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너희가 그렇게 숭배하는 모세가 너희를 공격하지. 그러니까 이거는 모세, 율법 아닙니까? 아버지의 뜻, 율법의 뜻, 하나님 언약의 법칙을 지금 이루는 과정이에요. 공관복음이. 십자가 이전까지는. 아버지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성취해 나가느냐 그 과정을 봐야 되는 건데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뭡니까? 예수님이 벌써 다 이루었어. 이 사람의 주장은 뭐냐?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다 이루었다고 된다고 본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지. 아기 예수가 다 이룬 게 아니에요. 아기 예수가 되서 아기 예수로 가는 게 아닙니다. 아기 예수가 계셔서 아기 예수님은 성령의 보호를 받고 나중에 커서는 성령의 지도를 받아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할 때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돼요.
아버지 뜻을 이루는데 아버지 뜻은 마귀하고 싸우는 게 아니고, 마귀와 더불어서 같이 있을 때 전체가 아버지 뜻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아버지여, 내 뜻을 마옵시고 내가 이 잔을, 끝까지 보세요. 끝까지 자기 뜻있잖아요. 나는 할 수만 있거든 그냥 넘어가게 해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내가 편하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뜻이 나보다 상위에 있고 위에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왔습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아들 됨의 모델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뭐 내가 이거 했니, 저거 했니, 뭐 했니, 뭐 강의 했니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 뜻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 아버지 뜻이 뭡니까? 일찍 가는 거예요. 성도에게 죽는 것보다 더 신나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그럴 때 기도할 때 그럴 때 이렇게 해야 돼요. 나는 왜 죽어야 될 죄인인가? 앞에 나와서 쓰세요. 나는 왜 죽어야 될 죄인인가? 이것도 써놓아서 손을 댈 때마다 나는 왜 죽어야 될 죄인인가? 나는 왜 죽어야 될 죄인인가? 이것이 늘 이렇게 된다면, 그 사람이 설교를 하던 강의를 하던 절대로 그 사람은 자기 자랑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뭐 했니, 내가 뭐 했니, 교회를 몇 군데 했니, 절대로 그렇게 안할 거라 말이죠.
왜? 내가 왜 죽어야 될 죄인인가? 그거는 이유 없지요. 내가 왜 죽어야 되느냐 하면, 뜻은 정답은 뭡니까? 아버지 뜻이라니까. 뭐 잘못한 게 아니고요. 아버지 뜻이에요. 그게 아들다워요. 왜? 아들은 아버지 뜻만 나타낼 때 아들이라고 예수님께서 이미 모델로 확정지어 놨기 때문에.
아들은 뭐냐? 구원받는 게 아니고,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며 사랑 증거 하다가 그냥 죽어버리면 되고, 지옥 갈 놈은 아버지 대적하다가, 아까 나오지요. 사탄. 사탄은 뭐 해야 됩니까? 늘 복음에 대해서 헐뜯고 비난하다가 지옥 가면 그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목사님,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왜 버립니까? 정답은 아버지 뜻입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그게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알은 거예요.
그런데 저자는 예수님 뜻은 모르고 설득하려고 제자들이 이런저런 해서 그 당시의 사고방식과 역사관 가지고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으라. 왜? 가는 곳마다 백 점 백성이니까. 그럼 왜 사탄은 안 이깁니까? 그건 윤리적이니까 좀 더 남겨두고. 초짜들부터 조지고 점점 점령해서 나중에 윤리까지 다룬다. 이런 식으로 침례교 쪽으로 이렇게 해석하는데. 그런 점까지 우리가 같이 한번 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