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중생구제를 위해 불철주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종정 큰스님 이하 원장 스님, 부장 스님들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는 대구 대성사 신도 이헌태입니다. 쑥스럽고 망설여지는 마음 가눌 수 없으나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조그만 저의 체험을 기술해볼까 합니다.
제가 처음 대성사를 찾게 된 동기는 고모님과 고종형님의 권유에 의해서였습니다. 대성사 회관이 앞산 승마장 밑에 있을 때인 지난 79년 초파일 전야에 등을 켜기 위해 집사람과 함께 아기를 데리고 절을 찾았습니다. 그때는 무작정 절에 가면 좋다는 말만 듣고 따라 나섰기에 사원예절은 물론 모든 것이 생소해 점등식만 보고 그냥 돌아나왔습니다.
그후 저는 가끔가다 한번씩 시간을 내어 법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차츰 정진법회에도 참석, 스님들의 설법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인사를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습니다. 구인사에 처음 가면 4박 5일간 기도를 해야 했기에 닷새 동안 계속 시간을 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의 생질이 군에서 제대해 인사를 왔습니다. 그때 생질에게 5일간 가게와 집을 봐달라고 맡겨놓고 관광가는 기분으로 구인사로 향했습니다. 때는 1981년 12월 겨울이었습니다. 북부터미널을 출발, 구단양과 영춘으로 이어지는 그 당시 구인사행 길은 매우 멀고 험난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해질 무렵에야 겨우 구인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던 저는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총무원 청사와 5층 대법당의 위용은 너무도 장엄했습니다.
총무원에서 접수를 마치고 3층 처사기도실에 자리잡은 저는 그곳에서 뜻밖에도 고종사촌형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한살 위였는데 그때까지 결혼을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분은 일주일 정도 기도할 준비를 하고 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사촌형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때 구인사는 동안거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많은 신도들이 밤새워 기도하고 아침이면 적멸보궁을 오르는 참배객들의 행렬이 제 눈에는 불가사의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구인사에 무슨 조화가 있길래 이렇게 신도들이 모일까.’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정상에 서서 내려다본 눈 덮인 구인사의 절경은 한폭의 그림처럼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도시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조그만 병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한달 정도만 있으면 저절로 나을 것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3일간의 기도 중에 사촌형이 큰스님을 친견했는데 ‘결혼을 했으면 합니다’라고 하니 큰스님께서 ‘결혼이 속히 되게 해주십사 하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형은 그후 구인사에서 서로 사진 찍어주던 처녀와 서울에서 만나 결혼해 아기 낳고 잘 산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사촌형은 그때 기도로 소원을 성취한 것입니다. 저는 구인사를 처음 다녀온 후 대성사의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의 선교원 선생님이 찾아와 아이들을 선교원에 보내달라고 부탁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이웃집 아이와 같이 교회재단에서 운영하는 선교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때 아이 나이는 6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집사람과 저는 사소한 일에도 의견충돌이 생기고 성질도 난폭해져 심하게 다투기도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와 더불어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잠자던 아이가 새벽 2시쯤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다 놀라 벌떡 일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족이 마비되며 땀을 뻘뻘 흘리곤 했습니다. 집사람과 저는 그때마다 놀라서 물을 먹이고 바늘로 따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한참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곤하게 잠에 들곤 했습니다.
이런 증세가 계속되자 우리 내외는 우리가 다투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런가 어쩐가 별별 생각을 다해봤지만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약이든 양약이든 닥치는 대로 구해서 먹여보기도 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저는 생각다 못해 구인사로 가서 큰스님을 친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혼자 큰스님을 친견하고 그동안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피마자 기름을 한달간 먹이고 기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피마자 기름을 먹이니 설사를 하고 토하기도 해서 먹이다가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여러 모로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혹 교회재단 선교원에 보내서 그런가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불교유치원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문득 대성사에 유치원이 있었으면 우리 아이를 그곳에 보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 큰스님을 친견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큰스님은 앞서 친견할 때처럼 ‘피마자 기름을 한달 먹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먹여보니 설사를 하고 토하기도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처음에는 조금씩 먹이다가 차차 양을 늘리고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큰스님께 불교유치원 건립에 대해 말씀드리고 대구 대성사에 유치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큰스님은 대성사에 건의해보고 유치원 건립을 발원하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피마자 기름을 조금씩 먹여보니 곧잘 받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대성사에 유치원이 건립되게 해달라고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대성사에도 건의를 드렸지만 당시는 법당 건립 때문에 재정이 어려워 지금은 힘들다고 하시며 유치원 건립 계획은 추진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후 몇 달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어느날 대성사 법회 때 가보니 유치원 인가가 떨어져 유아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마음 속으로 ‘큰스님, 감사합니다. 주지 스님, 감사합니다’ 하고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제가 발원했고 기도한 일이 성취되었다는 마음에 제가 유치원을 건립한 것보다 더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듬해에 우리집 아이를 이웃 아이들과 함께 대성사 동해유치원에 입학시키니 기분이 말할 수 없이 흐믓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병세도 그런 일이 있었나 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우리 내외는 너무 신기해 1년 가까운 기간 동안의 괴로웠던 시련과 고통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이 조사스님과 큰스님의 높으신 뜻도 모르고 교회재단 선교원에 아이를 보낸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그후로 집사람과 저는 무슨 일이든 큰스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독해진 신심을 바탕으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 3명은 지금 대성사 동해유치원을 거쳐 국민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어린이법회에 나가 부처님 말씀을 배우는 모습들이 그렇게 대견할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상월원각 대조사님의 원력과 종정 큰스님의 법력으로 어릴 때부터 불심을 심어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종도 여러분, 여러분이 다니는 전국 말사나 회관에 유치원이 있다면 자녀들을 유치원에 보내 어릴 때부터 불심을 심어주도록 합시다. 그렇게 자라난 우리의 어린 불자들은 개인의 완성은 물론 지역사회의 발전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전국의 천태종 유치원 지도스님들과 교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천태종 말사나 회관 어디에나 유치원이 건립되어 우리의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는 불자로 자라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항상 기도하며 공부하는 마음으로 천태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첫댓글 _()()()_
참으로 좋은 글입니다(요새 교회 유치원은 극성 맞게 다른 종교 욕하며 애들 가르칩니다 철 없는 애들을 혹세무민 시키는 셈이지요 세 살 짜리 어린애라도 똑똑하면 그런 데 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