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1/5) 애국지사 고 안병구 옹의 위패 안장식이 충주 탄금대 공원에서 있었다.
독립유공자 안병구 옹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안광윤 동문의 선친이시다.
공주에 내려가 있던 필자는 기별을 받고, 6시 첫차로 상경하였고, 7시 반에 교대역 6번 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광윤의 차를 타고 충주로 향했다.
근 열시가 되어 충주 탄금대 공원, 충혼탑 아래에 도착했다. 도중에 충주 시내에 살고 있는 광윤의 모친(계모)을 차로 모셨다.
충혼탑은 6.25 때 희생된 2800 여명 이 지역 출신 군장정들과 경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2004년에 건립한 것이다. 원래는 탑만 있었으나 이 해에 개보수를 하면서, 탑 아래 지하에 호국영령위패실을 새로이 조성하여, 6.25 희생자들 이외에 이 지역 출신 애국지사들의 위패를 아울러 모시고 있다.
신라 진흥왕 시절에 가야에서 귀화해온 가야금의 명수 우륵이 여기 달천 강변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 하여 탄금대란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진흥왕은 귀화해온 우륵을 중원소경이던 여기 국원경에 살게 했다. 그곳이 지금의 충주이다.
탄금대 공원에는 임진왜란 시 도순변사로서, 침략한 왜군의 주력군 소서행장 군을 충주벌판에서 막다가 여기 탄금대까지 후퇴하여 전사한 신입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간단한 고유제를 지내고 충혼탑의 지하에 조성된 호국영령위패실로 위패가 모셔졌다.
의식의 진행은 이지역 광복회 관계자가 했다.
의식 참석자들은, 서울에서 같이 내려간 광윤의 큰매형(고인의 맏사위)과 고인의 부인, 이 지역 국립대학인 충주대학교의 학장을 지낸 광윤의 사촌 형,광윤, 필자 그리고 안병구 옹 이외에 다른 독립유공자 세분의 유족들, 그리고 이지역 광복회 관계자들이었다.
우리는 별 감흥없이 애국지사니 하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단한 분들이다. 남들은 없어진 나라를 깨끗이 잊고, 일제에 아부하거나 아니면 일제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 밥을 얻어 먹고 있었으며, 이광수같은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도 변질하는 마당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모진 고문을 견디며 목숨까지 버리고 온 재산을 던져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사회의 따뜻한 대접과 모든이들의 추앙을 받는 애국지사이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이고 잡히기만 하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최고의 흉악범이었다.
나라가 광복을 되찾는다는 뚜렷한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엔간한 강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나라에서는 이분들을 외면해 왔다. 일제에 채포되어 총살까지 당한 분들이라 해도 증거 불충분이라며 몇 십년씩 외면하기가 일쑤였다.
이제 나라가 조금 밥을 제대로 먹게 된 지금에야, 그 유족들을 찾아, 훈장을 주고 약간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번 안병구 옹 위패 보존식도 이런 시각에서 보아야만 할 것 같다. 나라가 조금 제 꼴을 갖추어가고 있어 다행이다.
점심을 먹고, 다시 탄금대 공원으로 올라가, 탄금대 전망대와 신립 장군이 전투 당시 활을 너무 쏘아 달구어진 활을 달천강물에 식히기 위해 열두번이나 가파른 절벽을 오르내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열두대>를 관람하였다.
신입 장군은 당시(선조) 가장 뛰어난 육전의 명장으로, 두만강 유역에 출몰하던 여진족의 무리를 일망타진하고 용맹하기 짝이 없던 여진군 대장 니탕개의 목을 벤 장수였다. 선조는 그에게 북병사, 평안병사의 벼슬을 내렸고, 한성판윤을 제수하기도 했다.
탄금대 전투에서 중과부족으로 패전할 수밖에 없었던 신입은 부장 김여물과 함께 여기 달천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고 한다.
탄금대 공원에서 내려와 가까이 있는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광윤의 고향 마을로 차를 몰았다.
이당리 마을은 필자가 가장 힘을 들여 쓴 중편소설(255매) <불>의 무대가 된 지역이다.
필자는 대약 120 여편의 중,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는데, 광윤의 조언으로 소설의 빼대를 잡은 중편 소설 <불>과 <장마>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들여 쓴 작품이다. 나의 사후 혹시나 문학사에 내 이름 석자가 남는다면,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아테네 가는 배> 보다 이 두 작품 탓일 것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광윤의 이야기를 듣고 구상하여 썼는데, 막상 현장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광윤이 태어나 국민학교 5학년까지 산 괴산군 가물면 이당리 마을에는 광윤의 큰집이 있다. 이 집은 삼형제 중 중간이었던 안병구 지사의 형님의 집으로, 그분과 맏아들님은 타계하시었고, 맏아들의 부인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광윤의 사촌형수가 되는 셈이다. 작은 아버님의 부인되시는 분이 바로 앞집에 살고 있어서 합석하였다. 동행한 광윤의 계모님과 더부러 세분의 여성분과 합석하였다.
광윤의 생모님은 광윤이 네 살 때 타계하시어 동네 뒷동산 가족묘원에 모셔져 있다. 물론 아버님은 대전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나는 충주시 계모님 댁에서 손수 만드신 청국장 한 보따리를 선물로 받았고, 이담리 큰집에서는 각종 떡과 과일등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남편이 다들 타계하신 시골의 세 할머니들과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이 마을에 조선시대의 서원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계담서원을 방문하였다.
서원의 사당에는 순흥 안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의 내력을 이야기라도 하듯이 안향을 비롯한 이퇴계 이율곡 김구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모셔진 위폐들에게 예를 올렸다.
서원을 한바퀴 돈 우리는 마을을 돌면서 소설 속의 모습과 비교하였다. 내 머리 속의 그것과 실제가 너무나 비슷해서 신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간의 실제의 삶은 없어지고, 그것을 모델로 쓴 소설은 아마도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실제의 삶은 인간의 상상력의 소산인 소설 작품보다 더한 허구성 위에 구축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남지만 인간은 죽으면 완전히 무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서둘러 일정을 진행했으나 4시가 넘어서야 귀경길에 올랐다.
귀경 길에 이담리 뒤산에 조성된 가족 묘를 찾아, 생모의 묘에 예를 차리는 광윤의 등 위로 넘어가는 이곳 중원평야의 햇살이 부어지고 있었다. 귀경길 찻 속에서 나는 조용히 광윤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님 모습이 기억나느냐고. 광윤이 힘 없는 목소리로 네살 때였어. 무슨 기억이 나겠어.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생모를 그리는 늙은 아들의 목소리는 웬지 내 영혼을 깊이 파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