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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은 유명한 김신조의 청와대기습이 있었던 1.21사태의 바로 그날입니다. 1.21사태는 1968년 북괴 124특수군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청와대를 기습한 사건입니다. 굳이 비교하여 예를 들자면 우리가 겪은 1.21사태 는 미국이 겪은 911사태와 그 성격이 같습니다. 1.21사태를 계기로 하여 한국의 국방정책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일종의 비정규전(테러)에 대한 대응체제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비군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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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의 청와대 기습테러인 121사태를 겪고나서 우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그 향토예비군은 그후 일련의 테러전인
울진 삼척지구무장공비 토벌에 일등공신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F4-D팬텀을 살펴보시는 박대통령(1969년)
그리고 향토예비군만 창설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박대통령의 불같은 응징의 의지를 달래고자 한 미국의 약점을 간파하여 우리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팬텀기를 토입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조차도 F-104를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F22랩터를 도입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 였습니다. 1969년에 우리가 팬텀기 1개 대대(18대)를 운영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미국외에는 영국만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전략적 전폭기 역할을 수행하는 팬텀기를 도입하기 위해서 박대통령은 월남파병에 반대급부적 조건으로까지 이용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측 협상 대표인 최규하 외무부장관을 불러 “팬텀기 지원을 보장받지 못하면 회담을 깨고 나오라”고 지시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팬텀기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특기할 만한 것으로, 미국 이외로서는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F-4 운용국가가 된 것 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 최강의 항공전력을 보유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의 항공자위대는 1970년 도입을 결정하여 1973년에 F-4E를 도입 개시하였습니다.
항공자위대의 F-104J 그 외에도 우리는 미국으로 부터 무상군사원조 1억달라를 추가로 받아내었습니다. 이것의 내막은 북괴의 연이은 테러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 미국에 대한 한국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미국의 고육지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무상원조 1억달라의 용처에 대해서 박대통령은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다들 들으시오. 최규하 - 밴스 장관의 회담 내용인데 군사 원조 지원액 1억 달러 중 팬텀기 1개 대대(18대) 구입비와 비행장 개선비(500만 달러)를 포함해 6800만 달러를 공군이 쓰고 나머지 3200만 달러는 육군·해군, 해병대와 경찰이 쓰라는 지시요.” 당시 우리의 경제를 감안하면 1억달라는 천문학적 금액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미국에 대한 엄포로서 1억달라 공짜로 받아냈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 돈인 1억달라중에 무려 6800만 달라가 공군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장 공군을 우선한 정책이기도 합니다. 그 후 미국에 의해 Peace Spectator로 명명된 프로그램의 제1진으로 1969년 8월25일 F-4D Block 24형 4대, 25형 13대, 26형 1대, 총 18대의 F-4D를 인도 받게 되며 이 기체들은 제11전투비행단 제151전투비행대대가 창설되어 배치되었습니다.
1972년에 제2진으로 공군 보유 F-5A 36대와 RF-5A 8대의 베트남 공여에 대한 대여분으로 주한 미 공군 제3전투비행단 (3rd TFW) 소속 F-4D 18기 (Block 26형 7대, 27형 6대, 28형 5대)가 이관되어 공군 제110전투비행대가 재편성되었다. 제2진은 미국으로부터의 대여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몇 대가 일시 사용 후 반려되었을 뿐 대부분은 그대로 공군의 보유기가 되었다. (한때는 막강 공군이었는데 .......... )
당시 김신조일당은 주로 미군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과 일부 미군과 국군의 경계지역 접경만을 골라서 침투하였습니다. 그만큼 당시 미군의 경계 태세가 허술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아군 복장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의심을 회피할 수 있었기도 합니다. 어쨌든 김신조일당의 청와대 습격조는 아주 유유히 휴전선을 넘어서 서울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후 미군경계지역을 벗어나서 검문다운 검문을 한 것이 바로 세검정에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시던 최 규식 총경이었습니다
김신조 일당이 최규식 총장을 총격하고 그곳에서 총격전이 벌어 졌습니다. 물론 그 전에 신고가 접수되어서 우리의 군경이 대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북괴 특수 침투요원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던 상황이었습니다.
68년 1월21일 저녁 7~8시경이었습니다. 당시 기온은 영하 20도를 헤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규식 총경의 검문에 막힌 김신조일당의 총격으로 콩볶는 듯한 소리가 효자동 세검정 그리고 청와대까지 들렸습니다. 우리의 군경과 북괴침투조간의 격렬한 총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상황실에는 청와대 외곽 경비초소로부터 다급하면서도 지원을 요청하는 경비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 외곽 초소경비요원은 거의 울음 썩인 목소리로 긴급지원(실탄등) 을 요청하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계속 다급한 지원요청은 들어오고 총격전의 소리는 더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그중에서도 박대통령의 모습은 지금도 너무나도 생생하다고 하십니다. 무선과 유선으로 날라오는 상황에 대해서 박대통령께서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진두지휘를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 특수부대를 최규식 총경보다 먼저 조우한 사람은 서대문경찰서장 이었습니다. 소속을 묻자
특수수부대훈련 마치고 귀대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바람에 의심을 가지면서도 그냥 통과 시키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무래도 미심쩍으니까 서대문 경찰서장은 뒤따라가면서 무전을 날렸습니다.
"미상의 부대 이동중, 재 검문요망"
이 무전은 바로 당시 중앙 정보부에 잡혔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선 바로 종로 경찰서에 알렸고 그래서 최규식 총경은 부관과 함께
"빽차(당시 경찰차는 새하얀 백색의 찦)" 를 타고 자하문 밖 세검정으로 달려 간 것입니다.
허리에 권총만 찬 총경이 북괴 특수부대를 가로 막고 검문을 하였습니다.
소속을 말하시오"
"방첩부대야! 저리 비켜"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리는 수법)
"난 종로서장이요. 소속을 확인해야 합니다. "
바로 그때 세검정 고개길로 77번 시내버스가 헤드라이트를 키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특수부대원들은 77번 시내버스를
최규식총경을 지원하러오는 지원부대인 줄 착각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총격을 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시내버스라는 것을 알았다면 최규식총경
(부관,운전병)일행을 무혈 진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후 김신조 일당을 잡은 군경은 승진과 포상을 받았지만 제일 처음 김신조일당과 조우하였으나 미처 검거치 못하고 놓친 서대문서는 그 어떤 포상도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서대문서장의 자조섞인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죽은 총경보다 산 순경이 낫지 않은가?"
어째든 그 후 김신조 외에 1명을 더 생포 했습니다만 그 한명은 후송중에 자폭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은 대테러전까지 가미한 국가안보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분명 121사태(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는 국가의 심장부를 노린 테러였고 또 그 테러의 여파는 대한민국을 변화시켰습니다.
대테러전 능력까지 겸비하게 된 대한민국을 보고 당시 김일성은 통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앗 뿔사! 내가 실수 했구만"
바로 김일성이가 박대통령이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상대를 잘 못 골른 결과입니다.
(김신조)
121사태(북괴의 청와대 기습테러) 후 변화된 대한민국의 안보체제
★ 북괴의 청와대기습테러(121사태) 이후 변화된 대한민국의 안보체제 ★
1. 향토예비군 창설
2. 155마일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에 철책설치
3.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 1억달라 긴급 지원
(1967년 한국의 연간 수출액은 3억2천만 달라였으니까 당시 미국이
긴급 지원한 1억달라는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
금액입니다)
4. 미공군의 주력 팬텀기 한국공군에 배치 (아시아에서 최초)
==> 한국공군이 당시 최신예기인 팬텀기를 일본보다 먼저 보유하자
일본이 혼비백산하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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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맥락에서 알카에다의 911테러는 미국의 심장부를 노렸다는 면에서
북괴가 저지른 청와대기습테러인 121사태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이번 런던테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크롤이 길어도 천천히 읽어주세요
대테러전을 위한 부대는 이미 20년 전에 편성된 전투경찰대가 있었습니다. 향토예비군은 잠입공작을 적발하고 체포/사살하는 것을 맡은게 아니라, 사실상 병영국가화를 위한 본격적인 대단위 사회조직의 첫걸음입니다. 군생활을 이미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을 여전히 군대식으로 조직하고, 그러한 사회조직을
첫댓글 웬 개구리?
개구리가 왜나왔죠 ;;;
예비군 휴...
하지만 향토예비군은 대한민국 육군의 대표적 삽질.
수정. 삽질이 아니라 개짓.
대테러전을 위한 부대는 이미 20년 전에 편성된 전투경찰대가 있었습니다. 향토예비군은 잠입공작을 적발하고 체포/사살하는 것을 맡은게 아니라, 사실상 병영국가화를 위한 본격적인 대단위 사회조직의 첫걸음입니다. 군생활을 이미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을 여전히 군대식으로 조직하고, 그러한 사회조직을
유지함으로써 사회통제를 더욱 수월히 하겠다는 의도였거든요. 향토예비군은 그런 의미에서 군사적인 의의 보다는 정치적 의의가 더 큰 조직입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뿌리깊은 보수화에 일등공신이기도 하고 말이죠.)
실제로 대침투 훈련시에 예비군 동대장들은 참석하지만 실제로 와서 하는 일은 현직 간부들과 환담을 나누는데 훈련의 99%를 소비하져ㅡㅡ;; 향토예비군이 주는 이익은 무엇이 있을까여?? 퇴직 간부들의 호구 마련 정도??
요새 예비군 훈련이 전에 비교하면 빡세진건가여?? 도대체 전엔 어땠다는건지^^;; 군에서 동원사단에 있어봤고 예비군 훈련도 받은 입장입니다만 솔직히 예비군 훈련의 필요성 자체에 회의적입니다
1월 21일 내 생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