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다양했던 사찰의 역할
사찰의 본래 기능은 기도와 수행이다. 그러나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본래의 기능 이외에 부가적인 다양한 기능이 있었고, 이런 역할로 인해 불교 안팎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다양한 기능으로는 비보사찰, 역참사찰, 능침사찰, 사고사찰 등이 있었다.
○ 비보(裨補) 사찰
비보사찰은 중요한 자리에 사찰과 탑을 건립해서 국가의 기능을 순일하고 안정되게 보충해서(裨補) 왕조와 나라를 오래도록 가게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사찰이다. 사찰이 많이 세워지던 통일 신라와 고려 때에 비보사찰이 평지와 산지에 3,800개나 되었다고 한다. 풍수연구가들은 비보사찰의 건립은 나말여초의 격변기에 도선(道詵)이 수립한 사상체계인 밀교사상(密敎思想)과 도참사상(圖讖思想)이 결합되어 형성된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에 의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 역참(驛站) 사찰
역참사찰은 중요 통행로에서 역참의 기능을 한 사찰이다. 절 이름에 ‘원’가가 들어간 경우이다. 충주 하늘재의 미륵대원, 경북 안동의 제비원, 개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거치던 파주의 혜음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절들은 사찰과 별도로 대규모 숙박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행궁까지 겸비되었다고 한다.
○ 능침(陵寢) 사찰
능침사찰은 죽은 선왕의 사후 명복을 빌고 제를 올릴 목적으로 건립된 사찰이다. 대표적인 것이 광릉의 수양대군(세조)의 능이다. 고려시대에는 운악사였는데, 능참사찰이 되면서 봉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 강남의 봉은사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의 정릉을 위한 사찰이다. 경기 화성의 용주사는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융릉의 능침 사찰이다.
○ 사고(史庫) 사찰
역사 속 전란의 시기에 왕조의 실록과 의궤를 보관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한 사찰이다. 임진왜란으로 실록과 의궤가 불타 없어질 위기를 느낀 조정은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관리는 전등사가 맡았다. 또 실록들이 태백산(각화사), 오대산(월정사), 적상산(안국사)에 있었던 큰 절들에 사고(史庫)가 설치되면서 사찰들에 의해 지켜졌다.
[출처] 역사 속 다양했던 사찰의 역할|작성자 일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