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성 답성 및 연계유적지 탐방4(해설)
(3) 2구간 : 신당역-동대문운동장-광희문-동대문-동묘-동대문역
광희문(光熙門)은 보통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렸다. 水口門은 청계천 장충동 쪽 물이 나가는 길목이고, 屍口門이라고 부른 것은 시체(상여)가 나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일제 초기에 "이제부터는 상여가 모든 문으로 나갈 수 있다."는 공고를 내어 이용케 되었다. 광희문은 속칭 “남소문”이라도 불린다. 이는 버티고개의 남소문이 없어지고 난후 ..그렇게도 불려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경 광희문 문루가 무너지고 청계천 지류인 이 일대는 온통 쓰레기장이 되었다. 지저분하기 그지없었고, 파리는 들끓고, 그래서 “왕십리똥파리”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다가 1975년 광희문(光熙門)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맞은편 코리아 스포츠 앞의 성곽의 적은 부분도 찾았다. 한양공고 옆을 지나 동대문 운동장으로 향하면, 이곳에서 청계천 지류의 “2간수문”을 포함하여 일대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이곳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오간수문(五間水門)이다. 서울 성곽이 청계천을 건너는 모습이다. 물론 지금은 현대식 공법으로 도로가 확장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청계천상의 교량건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오간수교” 윗부분에는 오간수문의 흔적이나마 보존하려고 한 노력의 결과물이 있다. 당시 다섯 칸 수문, “오간수문”의 기둥골격이다. 오간수문 좌우의 축대 흔적은 도로상에 붉은 페인트로 흔적을 표시하여 두었다. “오간수교” 다리의 난간은 성곽모양이고, 머지않은 거리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즉 동대문이 있다. 숭례문이 국보1호인데 반하여 흥인지문은 보물 1호이다. 도성의 좌청룡을 담당하는 문이다. 인왕산· 남산·낙산․북악산의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는 약 18km의 도성(都城)에는 숭례문·돈의문·숙정문·흥인지문의 4개 대문과 소덕문·창의문·홍화문·광희문의 4개소문이 설치하고, 통행금지제도를 실시하였으며, 한양을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 숭례문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11개였다고 한다. 잡상 11개는 경회루와 함께 가장 많은 숫자이다. 동대문의 잡상숫자는 윗층은 9개 아랫층은 8개이다. 경복궁 근정전(왕의 집무실격)이 잡상 7개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도성(都城)의 위상은 궁궐보다도 더 높았던 것 같다. 흥인지문(興仁之門)에만 옹성(甕城)이 쳐져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좌청룡 낙산이 상대적으로 너무 낮아 성문을 더욱 굳건히 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지역이 애초에 습지였기에 지반이 약하여 옹성을 쌓아 보완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종로 5가 배오개부터 동대문 일대가 온통 늪지였는바 고종 6년(1869)에 지금의 동대문을 다시 지을 때도 소나무를 촘촘히 박아 넣고서야 겨우 터를 다졌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이 문은 조금씩 틈새가 생겨 센서를 설치하여 기울기를 측정해가는 최신시스템을 부착해 두고 있다. 성곽의 외곽을 타고 올라가는 창신동 길은 공원으로 아주 잘 정비되어 있다. 첫 번째 암문에서 성안으로 들어가 오르다 보면 왼쪽에 오래된 허름한 옛집들이 많은 낙산마을이다. 이곳 낙산의 성곽과 주변은 아주 잘 정비되어 있어 서울 성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 할 수 있다. 3개의 전망광장을 비롯하여 곳곳의 체육시설이 있다. 낙산 정상에서 혜화동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바깥부분도 성곽에 무질서하게 붙어있는 달동네 같은 많은 집들이 헐리면서 성곽주변을 다듬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대학로 쪽으로는 미개발지대로, 이곳은 5층 이하만 건축허가가 제한되고 있음은 다행스럽다.
1) 약수동, 장충동, 신당동
▲ 고 박정희대통령 관사(故 朴正熙大統領 官舍)-신당동 62-43번지
고 박정희대통령 관사는 1936년의 목조 한옥을 개조한 건물로 연면적 138.55㎡ 지상 1층 지하1층 건물이다. 5·16혁명을 주도한 고 박정희대통령의 관사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현재는 많은 부분이 수리되고 증축된 상태이다. 재단법인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02-3447- 7933)에서 관리하고 있다.
▲ 활인서터(活人署址)-신당동 236 ,304번지
活人署는 질병에 걸린 빈민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서울의 동·서 두 곳에 설치한 의료기관이다. 고려시대 大慈大悲의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開京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 세워진 東西大 悲院의 예를 따라 1392년(태조 1)에 동서대비원을 두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동·서 活人院으로 개칭되었고, 1466년(세조 12)에는 活人署로 개칭되었다. 동활인서는 원래는 동소문 밖 연희방 현재의 성북구 동소문동4가 103번지에 있었으나 정조 때에 중구 신당동 236, 304번지 일대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활인서는 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1662년(광해군 4)에 다시 설치되었다.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 신당5동 왕십리 수풀당-신당동 675번지
왕십리 수풀당은 애기서당으로 알려진 행당동 애기씨당과 양짓말 애기씨당과 동일한 유래담을 가진 신당이다. 유래담은 북쪽의 망한 나라에서 왕십리로 피난 온 다섯 공주들이 찔레꽂으로 연명하다 죽은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현몽하며 마을에 변고가 생기자 진퍼리 살근당, 양짓말 애기씨당, 왕십리 수풀당에 모시고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수풀당은 신당 5동의 교통안전교육청 뒤편의 한진아파트 104동 뒤편에 있는 소원사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약 50m쯤 떨어져 있다. 소원사에는 현 당주인 김은주가 신어머니와 기거한다. 수풀당은 약 20평 규모의 기와집이다. 시어머니가 당주였던 제보자 김윤문에 의하면 당의 규모나 부지는 예전 그대로라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부엌과 그 앞에 서낭나무가 서 있다. 오른쪽이 수풀당의 본 건물인데, 당 내부에는 총 22매의 신령그림이 걸려 있다. 마당에 서낭나무가 서 있고 오색천을 걸어 두었다. 건물은 최근 붕괴의 위험으로 내부에 철빔을 세우고 외형도 새롭게 칠을 하여 큰 보수를 한 상태이다. 수풀당의 무신도들 가운데 용궁부인, 작은 상궁, 큰애기씨, 작은 애기씨, 큰상궁 등 5개의 무신도는 본래부터 수풀당에 있었던 무신도이나 나머지는 모두 남묘에서 가져 온 것이라 한다. 이 무신도들은 서울지역에 남아 있는 다른 당의 무신도들에 비해 색채가 화려하고 묘사가 세밀한 편이다. 남묘에서 가져온 무신도들은 가져오게 된 연유나 시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제보자 김윤문에 의하면 애기씨당이 약 400~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 제보를 뒷받침할만한 정확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서울지역 재수굿 巫歌 不淨거리의 내용에 서울의 유서깊은 당들과 그 당에서 모셨던 신령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 당의 역사가 상당히 오랜 시기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풀당이 등장하는 서울의 재수굿 무가의 부분은 아래와 같다.
초부정
(중략)
제산동방(諸山東方)에 칠기(七氣)는 명창이요
상다리(上壇) 중간 호구 상하단 스인(聖人) 호구
두 데린님(도련님) 스자(庶子) 호구 해우(海宇)남산에 불사(佛師)호구
금성으루 대신호구 각산말(各散)마을 부군호구
성주로 어비호구 물건너 하주당(化主堂) 부인호구
왕십리 수풀당 애기씨 부인 호구
(중략)
한편 수풀당에 모셔진 큰애기씨와 작은 애기씨는 욕심이 많고 까탈스러운 편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의 꿈에 현몽하여 원하는 물건을 요구하기도 한다. 설에도 애기씨의 설빔을 미리 지어드린 후 당주의 식구들이 설빔을 해 입어도 시기가 심해 설빔조차 제대로 못해 입을 정도라 한다. 현재 수풀당의 마을굿은 전승이 중단된 상태이다. 당을 관리하던 김윤문씨는 무당이 아니라서 당주였던 시어머니가 44년 전 죽은 이후 당을 관리만 해 왔다. 최근에 당을 인수한 김은주는 당굿을 배우는 과정이며, 수풀당의 당굿을 복원할 계획이다.
▲ 마조단터-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 광장옆
마조단은 말(馬)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天駟星(천사성) 즉 先牧(선목). 馬社(마사). 馬步(마보)를 제사지내던 檀(단)으로 살곶이 다리 서쪽 언덕 위에 있었으며 순종 2년 (1908)에 폐지 되었다. 마조단의 기원은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고려시대 의식(儀式)이 있는 것을 보 아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답습습으로 볼 수 있으나 조선시대 어느 왕 때 마조단을 쌓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春官通考(춘관통고)』,『文獻備考(문헌비고)』에서도 옜터가 있다고만 기록 되어있다. 영조 25년(1749)에 소의 돌림병 때문에 살곶이 목장 안에 단을 쌓고 선목(先牧)을 제사하였는데 (위판)位版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새로 만들었으며, 또 각 고을에 명하여 고을 중앙에 단을 만들어 선목(先牧)의 神位(신위)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 재앙과 돌림병을 물리치게 한 기록이 있으며, 그 뒤 정조 20년(1796) 정월에 마조제는 이해부터 仲春(중춘)의 中氣(중기)후 剛日(강일)중 길일을 택하여 지내게 하였다.
▲ 성제묘(聖帝廟)터-장충동1가35(방산동 4-96)
성제묘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로 서울에는 남묘·동묘가 나라에서 제를 올리는 것에 비해 민간에서 모시던 중묘·북묘·서묘 등이 있어 관왕묘(關王廟)라고 하였다. 이곳 성제묘(聖帝廟) 주변은 조선 초기부터 방산동 18번지 일대에 훈련원이 있었고, 4번지 일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염초청이 있는 등 주변 군인들이 받들던 관왕묘였으나 일제시대 이후로 민간의 묘당으로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낮은 월대(月臺)위에 세워져 있다. 전면에는 네짝 분합문이 있고 전면 분합문 위 관인방(門引枋)에는 현성전(顯聖殿)이라 쓴 액자가 걸려 있다. 내부에는 뒷벽에 감실 안에 관우부부상이 있고 좌우벽에는 신령그림 10점이 있다. 관운장상은 붉은 얼굴에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붉은 곤룡포를 입고 있다. 관운장 부인상은 가체(加髢)를 올리고 연녹색 당의(唐衣)에 홍색 치마를 입고 있다. 관운장 내외상 뒤에는 풍경화가 있는데, 관운장 뒤에는 흰색 달이 있고 부인상 뒤에는 붉은색 해가 그려져 있으며, 내외상 양쪽옆에는 두 점의 수묵화가 그려져 있다.
좌측벽에는 신령을 그린 그림 3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흰고깔에 흰장삼을 입은 승려를 나타내고, 두 번째는 문신 복장에 한손에는 신칼을 들고 책은 무릎에 올려놓았고, 세 번째는 무관 복장을 한 한두명이 즐어 있는데 한명은 칼을 들고 있다. 우측벽에도 3점의 신령그림이 있는데, 첫 번째는 승려복장에 손에는 칼을 들고 있고, 두 번째는 두 명의 마부(馬夫)가 말을 끌고 장수 한명이 깃발을 들고 있으며, 세 번째는 마부 한 명이 말을 끌고 있는 모습이다. 제일(祭日)은 음력 10월 19일이며, 현재는 동제의 형식을 띠고 있어 대부분 마을 토박이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 훈련원터(訓鍊練院址)-을지로6가 18-79(현국립의료원)
훈련원은 조선시대 군사의 試才, 무예 훈련 및 병서와 전진(戰陣)의 강습 등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현재의 중구 을지로 6가와 방산동 일대에 걸쳐 설치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시에 관제를 반포할 때 훈련관(訓鍊觀)으로 설치되었다가 1394년 중군군후소(中軍軍候所)를 흡수하였고 1405년(태종 5)에 병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되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훈련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원으로는 지사(知事) 1명, 도정(都正) 2명, 정(正) 1명, 부정(副正) 2명, 첨정(僉正) 2명, 판관(判官) 2명, 주부(主簿) 2명, 참군(參軍) 2명, 봉사(奉事) 2명을 두었고 이외에 습독관(習讀官) 30명을 두었다.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에 따라 폐지되었다.
▲ 일감정(一鑑亭)터-을지로5가
▲ 풀무재-충무초교 북쪽. 묵정동, 충무로5가, 장충동2가 고개
동국대가 자리 잡은 충무로에서 을지로로 넘어가는 고개가 풀무재(治峴)이다.
▲ 종이미술박물관-장충동1가 62-35 종이나라 빌딩 3층
종이미술박물관(Paper Art Museum)은 옛날 우수했던 우리나라의 한지문화 유물과 새로 개발하여 발전시킨 현대 종이조형작품을 전시하여 우리나라 종이문화의 우수성과 창조성을 국내·외인에게 알게 하고, 또한 서울특별시 교육청에서 시행하고 있는 '기본이 바로 된 어린이 기르기' 프로그램의 현장체험학습기관으로 지정 운영되고 있어 어린이, 교사, 전문인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1999년 12월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단체인 (사)한국종이접기협회가 설립한 곳이다. 현재 장충동 종이나라빌딩 3층(150평)에 『현대종이조형작품전시장』이 있고, 4층(150평) 한국종이문화원 교실 5개에서는 현장체험학습이 가능하며 소전시실이 있다. 박물관 내의 상설전시는 1달단위로 작품들이 교체가 이루어지며, 5월(전국종이조형작품공모-어린이부 수상작전시), 7월(전국종이조형작품공모-중고등부 수상작전시), 8월(전국종이조형작품공모-일반부 수상작 및 전국종이접기과학창작작품공모 수상작 전시), 10월(나라꽃 무궁화공예대전 수상작전시)에 특별전시가 기획되어, 늘 새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종이미술박물관에서는 앞으로 우리나라 종이문화 발전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한국종이문화역사실』을 추가 개설하고자 지공예 유물들을 다수 수집 보관하고 있다. 유물들은 우리나라 전통 지공예기법인 접지(摺紙)공예의 접선(摺扇), 갈모, 지갑, 딱지, 색실첩 등과, 지승(紙繩)공예의 그릇, 요강, 방석 등, 지호(紙糊) 공예의 종이함, 과반 등, 후지(厚紙)공예의 지함, 지장농 등, 색지(色紙)공예의 반짇고리, 상자 등, 전지(剪紙)공예의 설위설경(設位設經) 등으로 조선시대 한지공예 생활용품과 무속(巫俗)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으로『한국종이문화역사실』이 추가로 개관될 예정이다.
2) 동대문문화공원
▲ 경성운동장
한국 최초의 종합운동장인 경성운동장이 을지로 7가(당시 황금정 7정목)에 준공된 것은 1925년 10월 5일이었다. 좁은 면적 안에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 수영장, 마장(馬場) 등과 부속설비 및 식당 등을 넣어 지나치게 조밀하다는 평도 들었으나 이로부터 대규모 운동경기는 모두 이곳에서 치루어졌다.
▲ 하도감(下都監)터-을지로7가 2-1 동대문야구장 자리
하도감은 1594년(선조 27)에 창설된 훈련도감의 한 분영으로 수도를 방위하고 왕의 시위와 지방군의 훈련 및 치안 등을 담당한 기관이다. 위치는 현재의 중구 을지로7가 2-1번지 일대에 해당되어 이 일대가 하도감동이라고 불렸다. 하도감의 규모는 390칸으로 1881년(고종 18)에 설치된 별기군의 훈련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임오군란 때에는 구식군인들이 별기군이 있는 하도감을 습격하여 일본인 훈련교관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 이간수문(二間水門)-을지로6가 18
서울시는 2009년 10월 27일 옛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개장행사를 갖고 공원의 일부를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동대문은 서울의 대표적인 패션문화지역 중 하나이다. 현대적인 건물들과 대형 쇼핑몰 등 소비중심의 도시문화가 들어찬 이 지역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동대문역문화공원은 과거의 건축물과 유적, 현대의 복합문화시설이 어우러진 시설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연면적 8만5,320㎡)와 공원지역(3만7.298㎡)으로 이뤄졌다. 이날 일반 시민들에 개방된 구간은 공사를 완료한 서울성곽 동측 공원지역(1만9,597㎡)이다. 야구인들의 꿈이 담긴 동대문운동장의 흔적과 조선의 대표적인 수비성곽이었던 서울성곽의 자취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번에 개장하는 공원은 서울성곽(265m, 8,030㎡)과 동대문역사관(1,313㎡), 동대문유구전시장(4,460㎡), 동대문운동장기념관(339㎡), 이벤트홀(2,058㎡), 디자인갤러리(400㎡) 등으로 구성됐다. 성곽이 발굴됐던 142m는 그대로 복원하고, 성곽이 멸실된 123m 구간은 지적도에 잇는 추정 성곽선을 통해 흔적만 표시해 두었다. 특히 복원되는 142m의 성곽은 축성 당시의 기법에 따라 태조, 세종, 숙종 등축조시기별로 달라지는 성곽모양을 그대로 되살렸으며, 도성 밖으로 물을 빼내기 위한 시설인 이간수문(二間水門)과 방어시설인 치성(雉城) 등이 복원돼 눈길을 끈다. 시민들이 직접 걸으며 조선의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또 시민들과 희노애락을 나눴던 동대문운동장의 흔적인 야간경기용 조명탑 2개와 성화대도 볼 수 있다. 유구전시장에선 조선시대 우물터와 건물터, 아궁이 시설, 기와보도, 분청사기 등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구경할 수 있고, 동대문역사관에는 야구, 축구운동장 부지에서 출토된 조선전기~일제강점기 때 유물이 200여점과 함께 발굴조사 전 과정을 담은 영상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3D(입체)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디자인갤러리와 이벤트홀에서는 다채로운 디자인 작품이 전시되고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계획전시하고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연중무휴로 24시간 개방되며, 관람시설인 EHDEOANSDURR사관과 디자인갤러리 등은 오전 10부터 오후 9시까지 문을 연다. 당초 이곳은 단순 공원시설이었으나,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유물이 다수 발견됨에 따라 역사문화공원으로 변경됐다. 공원의 명칭도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고, 총 3,755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2011년 말 전체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 가산(假山)-을지로6가 18
가산은 자연적으로 생긴 산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 조산(造山)이라고도 한다. 가산을 만드는 이유는 자연경관을 일상 생활공간 주변에 가까이 두고 즐기고자 하는 옛 사람들의 바램에서 비롯되었으며, 궁궐이나 도성 안에 큰 연못이나 하천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이 쌓여 인공 산인 가산이 되기도 하였다. 경복궁 교태전 뒷산인 아미산(峨嵋山)이나 경회루 연못 가운데 있는 섬이 그 예이다. 또 풍수학적으로는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지기(地氣)를 북돋우기 위하여 가산을 만들기도 하였다. 1398년에 종묘 앞쪽의 지세가 허하다고 하여서 흙으로 산을 쌓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청계천 주변에는 오간수문 안쪽에 가산이 있었는데,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가산이 있었다. 이 가산은 1760년 영조 때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760년 2월 개천 준설을 할 때 개천바닥과 양 제방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토사가 하천바닥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하천바닥에서 파낸 토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하여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운반수단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양의 토사를 멀리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하천 바닥에서 퍼낸 흙은 부근에 있는 낮은 가로에 쌓거나 질퍽한 큰 도로를 메우기도 하였으며, 빈터나 폐가를 매입하여 쌓기도 하는 등 형편에 따라 적당히 처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준설이 끝날 무렵인 1760년 4월 영조는 당시 원로 대신인 유척기(兪拓基, 1691∼1767)에게 개천 준설공사의 성과를 묻게 되었다. 이 때 유척기는 준설로 생긴 토사를 그냥 개천의 양안(兩岸)에 방치해 두면, 비가 올 때마다 쓸려 내려와 다시 개천을 메우게 되어, 모처럼 실시한 대역사가 헛되이 되어 버리므로 거액을 들여서라도 이 토사를 다른 곳으로 운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유척기의 지적에 따라 영조는 개천에서 준설한 수백만 석의 토사를 오간수문 부근 양안으로 옮겨서 쌓도록 하였다. 그 결과 개천 양안에 커다란 흙더미가 생겼는데, 이것이 가산이다. 마치 조그만 꽃섬이었던 난지도가 1970년대 말부터 서울에서 발생하는 모든 쓰레기들을 받아들이면서 높이 90m, 넓이 53만평의 커다란 산이 되었던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때 만들어진 가산은 물론 난지도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당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서는 상당히 컸다. 1770년 이후 발행된 고지도를 보면 오간수문 안쪽 개천 양편에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산은 청계천변에 살고 있는 거지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거지들은 가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였으며, 그들의 우두머리인 꼭지단( 帥, 개수)을 이곳에서 선출하였다. 한편 거지들에게는 뱀을 잡아 파는 권리가 부여되었는데, 뱀잡이를 땅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들이 가산에서 땅굴을 파고 살았기 때문이다. 가산은 특별히 기초를 다져서 쌓은 것이 아니라 그냥 흙은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에 불과하였으므로 비가 오면 조금씩 깎여 내려가기도 하였고, 반대로 개천을 준설할 때마다 토사가 다시 쌓이기를 반복하여 완만한 언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가산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는데, 1914년에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가산에 심어놓은 꽃향기가 좋아서 이 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가산 역시 인구가 늘어나고, 근대적인 도시시설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북쪽의 가산은 광무(光武) 2년(1898)에 그 자리에 전차 차고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쪽 가산은 1918년경에 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가 들어서고, 1921년에는 그 서편에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들어서면서 모두 헐렸으며, 그 흙은 종로의 도로 정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쪽 가산터는 청계천 6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이고, 북쪽 가산터는 동대문종합상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 오간수문지(五間水門址)-을지로6가 18-214번지, 신당동 217-118번지
오간수문지는 청계6가 사거리의 동편, 동대문에서 남으로 100m지점에 위치한다. 紅霓門 다섯 칸으로 되어 있어 ‘오간수다리’, ‘오간수문’이라 하였다. 御前濬川題名帖 「水門上親臨觀役圖」를 보면 성벽 아래 다섯 칸의 수문이 있고 수문 앞에 긴 돌을 놓아 통행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오간수문은 원래 5척의 철문이었는데 준설이 되지 않아 제 기능을 할 수 없어 2척의 나무문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1760년(영조 36)에 庚辰濬川시에는 이것마저 사용할 수 없었다. 이때 토사를 걷어내고 철문으로 교체함과 아울러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의 유출을 방지하였다.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하천수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수문을 뜯어내었다. 1908년(융희 2)에는 동대문 북측 성벽과 함께 동대문 남쪽 오간수문의 성벽까지 헐어버렸다. 이때 다리를 설치하였는데 이때부터 오간수문을 五間水橋라 불리게 되었다. 1926년에는 순종의 장례행렬이 유릉으로 가기위해 오간수교를 건너감에 따라 두 칸 반이던 다리를 네 칸 반으로 확장하였다. 청계천복원공사에 따라 2003년에 명지대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 의해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이후 중앙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시·발굴조사 되었다. 조사결과 남북 교대, 홍예 기초부, 다섯 칸 수문터 등이 확인되었다. 교대는 장대석을 이용하여 직선으로 만들었는데 남측교대는 길이 870㎝이고 장대석을 이용하였고 수문 바닥에서 2단까지 확인되었다. 북측교대는 길이 960㎝이고 2단까지 확인되었다. 양측 교대 간의 거리는 30.66m이고, 상·하류 쪽에 각기 날개벽이 확인되었다. 양측 교대 사이에는 4개의 홍예 기초석과 5칸의 수문부가 확인되었다. 홍예기초부의 상류 쪽 형태는 남측의 1기만이 선수형(船首形)으로 물가름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서리만 약간 죽인 형태이며 하류 쪽은 직선상으로 결구하였다. 기초부는 장대석으로 외곽을 두르고 내부에 30~50㎝의 할석을 채워 넣었는데, 상부 홍예부 벽석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철편들이 확인되었다. 수문부는 가운데 3칸이 405㎝로 교대 쪽 수문 375㎝보다 넓게 축조되었다. 수문부의 바닥석은 홍예기초부에서 상류 쪽으로 6m까지 넓게 깔려 있고 하류 쪽으로도 5~7m정도 연장되고 있다. 바닥석 아래에는 30㎝ 내외의 할석을 넣어 받치고 있으며 석재 사이에는 직경 10㎝ 내외의 말목을 세워 지반을 다졌다. 유물은 홍예 기초부 주변에서 석수(거북) 2점과 수문부에서 철문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수문주 바닥석 사이 틈에서 상평통보를 포함하여 조선시대 동전 600여 개가 꾸러미로 출토되었다. 상평통보는 만든 관청이나 동전 뒷면에 적힌 글자 등에 따라 모두 4,347종이 있으며, 발굴된 것은 천자문 글자가 적힌 것(1745년 이후 주조), 十干의 하나인 「癸」자가 적힌 것(1753년 주조), 「一」자가 적힌 當一錢(1809년 주조) 등이다. 출토된 동전은 조선시대 화폐인 상평통보로 당이전과 천자문전, 오행전 등이 포함돼 있으며, 대전과 중형전, 소전 등 다양하다. 당이전의 상부에는 동전을 만든 관서가 표기되어 있는데 전라감영, 개성감영, 호조, 공조, 진휼청, 어영청 등에서 주조한 것으로 보이며 당이전이 들어 있고 당백전이나 당오전 등이 포함돼 있지 않은 점으로 미뤄 1809~1866년 사이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오간수문지는 2005년 2월 2일자로 수표교지·광통교와 더불어 ‘청계천 유적’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지정 예고되었다.
3) 광희문(光熙門)-광희동2가 105
광희문은 소의문(昭義門), 혜화문(惠化門),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서울의 4소문의 하나로 그 중 소의문과 혜화문은 일제 때 헐리어 없어졌으나, 최근에 혜화문은 서울시에서 복원하여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광희문(일명 屍口門, 水口門)은 4대문, 4소문 중에서 소의문(서소문)과 더불어 서울시민들이 죽으면 상여(喪輿)에 싣고 운구(運柩)할 수 있는 저승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백년간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屍身)은 반드시 이 두 문 중에서 하나를 거쳐 나갈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 상여는 4대문은 물론 창의문이나 혜화문 등의 소문도 통과할 수 없다는 금령(禁令) 때문에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 방면에 묘지를 잡게 되면, 광희문을 거쳐서 운구하였으므로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으로 칭하였다. 광희문은 조선 초 태조 5년(1396)에 서울성곽을 쌓을 때 남소문(南小門) 역할로 축조되었지만, 속칭 시구문 또는 수구문이라고 하지 남소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조선 초에 도성에서 한강나루(한남동)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하면 거리가 멀어 불편하므로 도성에서 곧 바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새로 설치하자는 건의에 따라 현재 타워호텔 이 세워진 부근인 버티고개에 남소문을 새로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문은 설치된 지 12년 만인 예종 1년(1469)에 지경연사(知經筵事) 임원준(任元濬) 등이 수레 등이 다닐 수 없으므로 실용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음양가(陰陽家)들이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고 주장하자 예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폐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풍수사상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한 예이다.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주장의 근거는 남소문을 건축한 직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났고, 또 하나는 남소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 안의 여자들의 음행(淫行)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이 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명종과 숙종 때에 여러 차례 제기되어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반대에 부딪혀 개통을 보지 못하고 말았으므로 조선말까지 남소문의 역할은 광희문이 담당하게 되었다.
남소문은 비록 폐쇄되기는 하였으나, 조선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때에 이르러서는 남소문의 주초(柱礎)마저 없어졌다. 예종 때 남소문이 폐쇄되기 직전 이곳에는 이른바 떼강도가 출현하여 이 문을 수비하던 군사 2명을 살해하고 수문장을 협박한 외에 약탈해 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남소문적도사건(南小門賊徒事件)’이라고 하는데 이 보고를 들은 예종은 크게 놀라 이를 중대시하여 형조에게 명하여 범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윽고 혐의자 20명이 체포되자 예종은 승정원으로 하여금 엄히 국문(鞠問)하게 하니 문초를 받다가 4명이 장살(杖殺)되기도 하였다. 명종 9년(1554)에는 광희문 밖 일대가 도적의 소굴이 되어 밤이면 인마(人馬)가 통행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명종 때에는 남소문이 막혀 있으므로 도적들이 낮에 이 부근에 숨었다가 밤이 되면 성벽을 넘어 도둑질을 하는 것이니, 이 문을 열어 피해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연산군 10년(1504) 7월에는 국왕이 살인과 음행을 저지르므로 인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말이 나돈다는 익명의 추서가 있자, 노발대발한 연산군은 투서한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도성의 모든 문을 닫도록 한 뒤 창의문에서 서대문, 남대문, 광희문을 거쳐 동대문, 동소문까지 이르는 성곽 위에 군사들은 물론 궁중의 내관까지 배치하여 15일 동안 대대적인 수색을 한 일도 있었다. 조선말 광무 3년(1899)에 전차가 개통되고, 도로개설로 서울성곽이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광희문과 동대문까지의 성곽이 모두 헐려 옛 모습을 잃게된 데다가, 일제 때인 1915년 경 광희문 문루가 무너져 홍예(紅霓)민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이로부터 60여년이 지나 서울시에서 1974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광희문의 홍예를 남쪽으로 약 15m 이전하여 복원하는 한편 문루를 올림으로써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4) 흥인지문(興仁之門)-보물 제1호. 종로구 종로6가 69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석축 중앙에는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5백년간 서울성곽 동쪽의 대문으로 파루(罷漏)에 문을 열어 모든 사람들을 통행시키고, 인정(人定)에 문을 닫아 모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켜 수도 서울의 방위와 치안을 담당하였던 동대문의 본명은 흥인지문 또는 흥인문(興仁門)이다. 다른 세대문의 이름은 석 자인데 이 문을 흥인지문이라고 넉 자로 명명한 것은 조선 세조 이후부터라는 설과 고종 때 고쳐 지은 후에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서울의 사대문 명칭을 유학의 5대 덕목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따서 붙인 관계로 동대문은 흥인지문이라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인(仁)은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쪽에 속하므로 ‘흥인’은 동방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지(之)”자를 더한 것은 서울 지세(地勢)가 북서쪽보다 동쪽이 낮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붙였다는 것이다.
동대문은 서울성곽이 완공된 이듬해(1396)에 건축되었는데 이 문은 다른 세 대문과 달리 옹성이 부설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옹성은 일명 치성(雉城), 또는 곡성(曲城)이라고도 하는데 동대문이 세워진 지역은 지형이 낮고 습하므로 지반을 보완하기 위해 돌을 넣고 다지는 한편 말뚝을 박아 문을 세웠다. 그러나 이 문 북쪽의 낙산(駱山)도 낮아 외적을 방어하기에 부적당함으로 태조 6년(1397) 4월에 문 앞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반원(半圓)의 옹성을 쌓은 것이다. 옹성의 위쪽에는 앞뒤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여장(女牆)을 내어 성문을 통해 침입하려는 외적을 방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문이 건립된 지 50여년이 지난 문종 때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수군을 동원하여 개축하고 단종 때에도 일부 수리했지만, 조선 말 흥선대원군 집권기인 고종 5년(1868)에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는 훈련도감을 동원하여 동대문을 해체한 다음 낮은 지반을 8척이나 돋우고 그 위에 동대문을 중건하였다. 조선말에 일제 침략자들은 서울성곽을 철거하겠다고 하여 우리 민족이 이에 항거하자 성벽처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나서 먼저 남대문 양쪽의 성벽을 헐고, 융희 2년(1908) 3월부터는 동대문 양쪽의 성벽을 철거하였다. 남대문이 경직(勁直)하고, 조선 초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반면에 동대문은 정교하면서 섬약(纖弱)한 편이다.
▲ 동대문궤도회사터-동대문역 7번출구 동대문관광호텔앞
1898년 1월 26일 한국 최초의 전기사업체로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는 전차사업에 관심이 많았으나 지식과 경험이 없어 부득이 당시 한국에 와 있던 미국인 콜부란(Henry Collbran)과 보스트위크(H. R. Bostwick)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과 계약을 체결, 시설의 건설과 운영을 위탁했다. 전차사업은 먼저 서대문∼홍능 간부터 시작되었는데, 1898년 10월에 착공된 이 사업은 1898년 봄에 완성되었다. 설비는 서대문∼홍능 단선궤도(單線軌道) 9.7㎞, 전차10대, 보일러 1대, 엔진 1대, 75㎾의 직류발전기 1대 등이었다. 1899년 5월 4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동대문과 흥화문(전 서울고등학교 앞)사이에서 시승 및 개통식을 가졌다. 인천과 노량진간의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4개월 전의 일이다. 그 뒤 노선을 계속 확장하여 서대문과 청량리 간에 이어 종로∼남대문∼용산의 연장공사를 벌였으며, 1907년에는 서대문∼마포간의 궤도부설공사를 준공했다. 그러나 노일전쟁(露日戰爭)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의 요구에 의해 1909년 6월 콜부란과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 사이에 한성전기회사의 후신인 한미전기회사의 매매계약이 조인되었는데, 이 때의 전차설비는 궤도설비 3개 노선에 전차 37대, 화물운반차 13대였다.
일한와사전기(주)는 1915년 9월 11일 경성전기(주)로 개칭될 때까지 운수사업설비 확충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당시 운행노선의 궤도는 단선 19㎞, 복선 13㎞ 였으며 객차가 79대, 화차가 12대였다. 1933년 부영(府營)버스의 운영을 이양 받은 경전(京電)이 버스와 전차를 효율적으로 연계시키고 여건이 호전됨으로써 승객이 크게 증가하였다. 따라서 전성기의 전차보유대수는 한 때 263대나 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 민수물자의 부족으로 적기보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뒤이은 8ㆍ15 광복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파손되는 전차가 급증, 1945년 9월초의 전차운행대수는 59대밖에 되지 않았으며, 1947년에는 겨우 27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1947년 8월 15일 대표 노동조합으로 선정된 우익(右翼) 대한노총경전노동조합(大韓勞總京電勞動組合)과 회사 간에 단체협약이 체결된 후, '전차 급속증가기간'을 설정하여 고장차의 수리 개선과 시설정비 등에 나섰다. 그 결과 조합원들의 건설적인 협력을 얻어 두 달도 되지 않는 10월 15일의 전차운행대수는 115대로 크게 늘어났으며, 1950년 6ㆍ25 동란 직전에는 167대를 운행함으로써 교통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6ㆍ25 동란으로 전차궤도사업의 약 50%가 피해를 당했다. 당시 피해상황은 전차궤도설비 총 긍장 4만6,204m 중 5,128m(11%), 전차차량 227대 보유대수 전량(100%)으로서, 1951년 재수복 후 8월 1일 왕십리선 개통 때 운행가능 대수는 겨우 10여대에 불과했다. 1951년 4월 25일 전력복구단(電力復舊團)이 편성되어 전기복구시설 복구와 함께 피해차량 수리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53년 8월에 135대를 복구함으로써 110대를 운행하게 되었으며, 1953년 5월 15일에는 해방 후 주요과제였던 영로선(永露線) 복선공사를 준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차대수가 워낙 부족한데다 차량이 낡아 사업운영에는 지장이 많았다. 경전(京電)에서는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전차와 부속품 수입을 당국에 신청한 결과 FOA자금 110만 달러를 배정 받게 되었다. 이 돈으로 경전은 54만 여 달러어치의 부속품으로 31대를 수리할 수 있었으며, 남전(南電)도 21만 여 달러어치의 부속품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 후 1955년 6월 ICA원조자금에 의한 미제 전차도입의 승인을 얻어 같은 해 경전이 34대, 남전이 19대의 전차를 들여올 수 있었다.
경성궤도의 노선은 1930년 11월에 경성교외궤도주식회사가 왕십리~뚝섬 간의 4.3km에 대해 면허를 받아 부설한 것이 그 시초이다. 당시 동대문에서 왕십리 간은 서울전차의 노선을 겸용하거나, 왕십리 종착으로 계획을 설정한 듯하나 상세한 부분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이 회사는 경영상의 문제로 해당 노선을 경성궤도주식회사에 이관하였다. 경성궤도주식회사는 1932년 4월에 노선을 인수받아 운영을 개시하였으며, 이후 동 년 10월에 동대문~왕십리간의 별선을 건설하고, 동대문 역(현재 동대문 동남측)을 터미널 역으로 건축하였다. 1934년 12월 25일에는 도중에 있는 상후원(上後原) 역에서 분기하여 광장리(廣壯理)까지 가는 지선 7.2km가 추가 건설되었다. 이 지선은 자갈선을 연장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나 확실한 것은 불명확하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군정령에 의해 적산시설로 몰수되었으나, 이후 강석기라는 한국인 최선임 직원이 임시 선임되어 그 경영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경영의 정상화 가능성은 한국전쟁의 전쟁피해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차량의 손상은 물론이고, 시설의 경우 청계천교량을 비롯하여 80%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닥치자 결국 1953년에 서울시가 이를 인수, 시영체제로 운영하게 되었다. 교량의 복구가 이루어질 때까지 광장리 방향 노선은 1957년까지 운행 중단이 되는 등, 복구 역시 지연되었으며, 또한 수송력의 만성적인 부족과 함께 궤도사업 운임의 동결은 경영을 점점 더 열악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차량과 시설의 노후 역시 과제가 되었다. 결국 1961년에 폐지가 결정되었으며, 1963년 경 완전히 운행이 중지되었다.
▲ 김상옥집터-동대문 부근
김상옥(金相玉, 1890년1월 5일 - 1923년1월 22일). 1923년 1월 12일 오후 8시경서울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 서편 유리창으로 폭탄이 날아들어 서내 게시장(揭示場)을 폭파하고 행인 수 명을 부상케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을 이루었던 경찰력의 대표적인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압살하여 한국인들의 원한의 상징이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일경들은 아연실색하여 폭탄투척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으나 의거인의 행방은 물론 인적사항조차 알아낼 수 없었고 그가 열혈의사 김상옥(金相玉)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또 한번의 격전을 치뤄야 했다.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동대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구한국 때의 영문포수(營門砲手) 김귀현(金貴鉉)과 부인 김씨 사이의 4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고 아명은 영진(永振)이었다. 8세때 쳇불공장(체그물수리) 직공과 14세에 말발꿉제조 직공 등으로 생계를 도와야 했던 빈한한 가정의 소년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궁핍한 생활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당시 식민지시대 한국인들의 일방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17세가 될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고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信軍夜學校)에서 주경야독에 힘썼으며 야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자 직접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여 배움에 대한 남다른 정열을 보였다. 23세가 되는 1912년에는 남한 각지를 전전, 약행상을 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어 영덕철물상점을 경영하면서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었고 1913년에는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한훈(韓焄)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다. 28세에는 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가정을 꾸리는 어엿한 가장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듬해 말총모자회사를 설립, 모자와 양말 등을 제조하여 당시 상권(商圈)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상인들에 대항하며 일화배척(日貨排斥)과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사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은 1919년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체험하면서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지는 감동적인 독립만세의 함성은 남다른 의지력을 가진 한 청년에게 민족에 대한 각성과 자신의 삶을 던져 넣을 인생의 목표로서 독립운동을 설정하도록 하는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사는 동년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여사의 집에서 박노영(朴老英)․윤익중(尹益重)․신화수(申華秀)․정설교(鄭卨敎)․전우진(全宇鎭) 등 청년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독립운동의 방안으로 착수한 첫 작업은 항일지하신문의 발행이었다. 이들은 4월 17일 각지 독립운동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혁신공보(革新公報)> 1호의 발행을 시작으로 등사판을 이용, 그해 9월까지 매회 1천부씩의 지하신문을 비롯하여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 국민해혹(國民解惑) 등 항일전단을 제작,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웠다. 의사는 신문제작의 재정지원을 맡는 한편 배포책임자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동지 서대순(徐大順)의 피체에 따른 인쇄시설의 압수로 인해 9월에 접어들면서 신문발행은 중지되고 만다. 또한 자신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는데, 이는 의사가 40여일에 걸친 갖은 악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부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후로 의사는 평화적인 방법의 독립운동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쟁취의 방안을 구상하게 된다. 때마침 1920년 1월 초순 중국 만주 소재 독립군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파견된 김동순(金東淳)을 만나 무력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게 되자,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져 갔다. 이윽고 동년 4월경 김동순․윤익중․서대순 등과 함께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고, 실행행동책, 무기공급책, 재정책, 비밀문서책, 집총대장(執銃隊長) 등의 부서를 갖추었는데 동단은 단명(團名)과 부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접적인 무장 의열투쟁을 지향하고 있었다. 의사는 동단의 실행행동책으로 구체적인 행동에 앞장섰는데 이미 철물상점의 경영 등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던 상태에서 격렬한 의열투쟁의 항일방략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대한광복회에서의 활동경험과 함께 김상옥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맨손으로 무장한 경관을 때려눕히고 군도(軍刀)를 탈취했을 정도로 호협, 대담한 그였다. 이때 의사는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별도의 의열투쟁을 계획, 권총 40정, 탈환 3천발을 휴대하고 입국한 광복단결사대(光復團決死隊)의 한훈과 제휴하여 연계투쟁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議員團)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고관의 주살과 적기관 파괴 등을 실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조선독립을 달성할 것을 꾀하고 계획을 진행시켜 갔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인 8월 23일 한훈․김동순 등이 피체됨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의사는 일경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였다가 동지들의 자금지원에 힘입어,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선배지사들의 격려와 이들의 경륜을 접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혀갔고, 종전 주살단에서의 활동과 그 성격이 유사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에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21년 7월에는 일시 귀국하여 충청․전라도 등지에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을 수합한 후 동지 장규동(張圭童)과 함께 상해로 돌아갔다. 상해에서의 생활은 의미 있는 것이었으나 뜨거운 가슴을 지닌 김상옥의 기질에는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칩거하며 한탄으로 때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때를 만들어갈 것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뜻을 동지들과 상의한 후 드디어 1922년 11월말 동지 안홍한(安弘翰)과 함께 트렁크식 나무 상자에 권총 4정과 탄환 8백발 그리고 항일문서 등을 은닉한 채 일생일대의 계획을 가슴에 품고 상해를 출발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목적은 암살단 이래의 숙원인 종로경찰서 폭파와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의 주살에 있었다. 동지들과 작별할 때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이번 거사에 임하는 그의 비장하고 결연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입경 후 옛동지들인 전우진 및 이혜수(李惠受)의 집에서 정설교․윤익중 등과 회의를 거듭하며 거사준비를 갖추어 갔다. 우선 필요한 것은 활동자금이었다. 이들은 항일문건과 독립운동자금영수증, 인장 등을 제작하는 한편 거사용 폭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드디어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의사는 종로경찰서 서편 동일당(東一堂)이란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이 창문에 적중하여 터지는 굉음은 마치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는 우렁찬 함성과도 같았고 일제에게는 그들의 종말을 예고하는 철퇴처럼 강렬했다. 의사는 폭탄 투척 후 용산 삼판동(현 후암동) 소재 고봉근(高奉根)의 집에 몸을 감추었다. 고봉근이 그의 매부일 뿐 아니라 다음의 목표인 재등총독 주살을 위해서는 서울역에서 가까운 삼판통이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이어 1월 17일 일본 제국의회에 참석차 동경으로 떠나는 재등총독을 서울역에서 저격, 사살하기 위해 서울역을 사전 답사하는 등 계획을 추진해갔다. 그러나 동대문서 한인순사 조용수(趙龍洙)의 밀고에 의해 은신처가 탐지되었고, 1월 17일 새벽 종로경찰서 경부(警部) 금뢰금태랑(今瀨金太郞)․매전신태랑(梅田新太郞) 양인의 지휘아래 무장한 순사 14명이 고봉근의 집을 포위하였다. 열에 아홉 발을 명중시킨다는 정확한 사격술을 갖춘 의사는 일경과의 격전 끝에 종로경찰서 유도사범 전촌장칠(田村長七)을 사살하고, 금뢰와 매전에게 중상을 입힌 후 포위망을 탈출,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린 후 눈덮힌 남산을 맨발로 넘어 왕십리 근방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僧服)으로 변장하고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동지들과 재등실 암살의 기회를 모색하던 중 마침내 은신처를 탐지한 일경은 마야(馬野)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 여 명(천 여 명이라고도 한다)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반경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이곳이 마지막 격전장이 될 것을 예감한 듯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5채의 가옥을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권총과 장총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일경과 신출귀몰한 접전을 벌였다. 조국독립의 염원을 담은 그의 총구는 쉴새없이 불을 뿜었고 일경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실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세로 대한남아의 기백을 떨친 것이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警部) 율전청조(栗田淸造)를 비롯한 수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다하였다. 이제는 항복하던가, 자결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마치 상해를 떠나올 때 동지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 듯 마지막 탄환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하였다. 당시 의사의 나이 34세였다. 오직 조국독립을 필생의 목표로 삼고 또 한시도 그 목표를 잊어본 적이 없던 의사였다. 더욱이 남들이 꺼리는 의열 투쟁의 선봉에서 서서 적화된 서울 한복판 적의 심장부와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수백 명의 무장경찰을 우롱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떨치다 마침내 그 고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산화한 것이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는 열한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니 최후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시신은 1923년 1월 26일 가족들과 그의 뜻을 추모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찾아온 학생들의 호곡 속에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0여 일 동안 일경들을 전율케 했던 열혈의사의 장례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행렬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남긴 항일행적과 민족정신은 당시 한국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줄기 빛과 같이 이어져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수많은 일본 경찰의 포위에도 단신으로 여러 시간 동안 버티며 총격전을 벌인 이 사건을, 당시 학생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직접 목격하여, 1930년 시화집 <허둔기>에 스케치와 추모시를 함께 실었다는 일화가 있다. 종로경찰서 사건에 대해서는 김상옥이 결행했다는 설이 정설이나, 오래 준비해 온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며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조직의 소행이라는 이설도 있다. 사망 이듬해인 1924년에 임시정부 외교부장이며 김상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조소앙이 그의 전기를 집필해 간행했다. 1962년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98년 대학로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었다. 김상옥은 일제 강점기 초기의 무장 독립운동과 의열단의 용감한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선정해 기념사업을 벌이는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1992년 최초로 선정되기도 했다.
▲ 북평관(北平館)터-동대문역 10번출구 이대병원 건너 성원의원앞
태종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동대문·이화여대 부속병원 일대에 있었다. 여기에는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예에 따라 관원을 두고 관인(官印)을 항시 비치하였으며, 3품 이하 6품관 이상으로 감호관(監護官) 3인, 녹사(錄事) 2인을 두었는데, 감호관 3인 가운데 1인은의금부(義禁府) 관원으로 겸임 발령하였다. 의금부의 관원에게 겸직하게 한 것은 그만큼 위반사항이 없도록 하기 위한 예방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들어오는 야인(野人:女眞人)의 수는 풍년과 흉년으로 나누어 각 120명, 90명 등으로 제한하였다. 이와 같은 제한규정은 건국 후 모든 제도가 정비되고, 국고가 한정된 데다가 또한 남북으로 큰 변환(邊患)이 없어짐에 따라 취한 조치였다. 더욱이 외교사절이 조선에 도착하면 모든 비용을 우리가 부담하므로, 야인의 상경 왕복로인 함경도와 강원도가 흉년인 때에는 더욱 제한하였다. 여진인이 국경에 설치된 도박처(到泊處)에 도착하면 향통사(鄕通事)가 서울로 인솔하여 왔는데, 이들은 왜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나 중국인과는 차별을 받아, 명의 사신이 오게 되면 이들을 입경시키지 말도록 제약하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여진인이 가진 병기를 모두 거두었다가, 돌아갈 때 내주었다. 이들이 관사인 북평관에 들면, 금침(衾枕)과 의관(衣冠) 등을 주고 사급물(賜給物)로 쌀·콩·술·고기 등을 주어 대접하였는데, 후대하는 뜻에서 5일에 한 번씩 쌀·콩 등을 주도록 조치하였다. 이들은 입경하는 도중에도 노연(路宴)을 받으며, 관사에 들어오면 도착한 날에 예빈시(禮賓寺)에서 영위연(迎慰宴)을 베풀었다. 체류하는 동안에도 최소한 5~15회 정도의 각종 연회를 사절의 계급에 따라 베풀었으니 그에 따르는 비용은 물론, 절차도 번잡하였다. 또, 이들이 떠날 때에는 후한 전연(餞宴)을 받고 떠났다.
▲ 김수영집터-동대문역10번출구 경인의료기앞
서울 관철동에서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제보통학교 6학년 때 뇌막염을 앓아 학교를 그만둔 뒤, 1936년 선린상고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水品春樹]에게 연극을 배웠다. 1943년 겨울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미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1956년부터는 집에서 닭을 기르며 시창작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68년 6월 15일, 집 앞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그 다음날 숨졌다. 서울 도봉동에 있는 누이 김수명의 집 뒷동산에 잠들어 있다. 1969년 5월 1주기를 맞아 문우와 친지들이 그의 마지막 시 <풀>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1947년〈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1949년 김경린·박인환·임호권·양병식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면서 모더니스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꾀하려는 시인의 진지한 태도를 잘 보여준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사령(死靈)> 등의 초기시에서는 '느낀다, 생각난다, 본다.'와 같은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를 많이 썼다. 사물에 대한 인식은 전통적이며 상식적인 태도와 방법을 뛰어넘고자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이 처음부터 왜곡되어 있음을 깨달은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生硬性)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에 겪어야 했던 방황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1959년에 펴낸 첫 개인시집 <달나라의 장난>은 이런 시정신을 잘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시인들 가운데 김춘수와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반시론'(反詩論)에 있다. 그의 반시론은 1960년대 시의 주류인 참여시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시적 경향, 즉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시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에서 과거의 자기를 부정하고,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가, 에서도 일대 변화를 보였다. 그가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초월적 태도와 조화의 논리에서 참여적 태도와 분열의 세계관으로 바꾸고, 또 세련된 간접표현 대신 독설과 요설이 뒤섞인 직설법을 쓰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4·19혁명과 그 정신이 퇴색되어간 현실에 있었다. 시 <사령(死靈)>·<그 방법을 생각하며>·<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에서는 1960년대 현실이 '자유·민주·정의·혁명' 등을 내세웠던 4·19정신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며 절망했다.
▲ 동학당터-동대문역 10번출구 진흥한의원앞
이대부속병원자리로 조선 초에 설치된 5부 학당 가운데 하나인 동부학당이 있던 곳이다. 세종 17년(1435) 8월에 동부학당에 대한 보수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독립학사가 마련되었는데, 세종 20년(1438)에 야인(여진)들의 유숙수인 북평관이 되었고, 그 대신 당시 동부 창선방에 있던 유우소(乳牛所)를 동부학당의 건물로 하였다.
5) 동관왕묘(東關王廟;보물제142호)-숭인동 238-1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밖에 있는 동묘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일본군에 의해서 파괴된 것을,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여 재건하였다.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1601년에는 동묘, 서묘, 북묘가 건축되었으나 현재는 동묘만 건재해 있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관성묘-창신동 537-1
▲ 묘각사-숭인1동 178-3
6) 성동지역
▲ 살곶이다리(箭串橋)-행당동 58
▲ 옥수동약수-옥수동 산5번지
▲ 조대비탄생지-옥수동 295번지 옥정초교 뒤쪽
▲ 두모리약수-옥수동 267
▲ 경동시장-제기,용두동
▲ 남이장군사당-사근동190-2
▲ 수도박물관-뚝도 정수사업소
▲ 옥수동부군당-옥수동 244
▲ 미타사-옥수동 395
(4) 3구간 : 동대문역-창신동-이화동, 연건동, 동숭동-원남동-창경궁
1) 숭인동(崇仁洞)
숭인동은 일제가 창지개명한 땅이름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행정구역(부제실시)을 개편한답시고 옛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을 각각 분해하여 그 첫머리 글자만 떼어서 합성한 것이 오늘의 숭인동(崇仁洞)이다. 숭인동에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에 얽힌 애달픈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숭인동의 동묘(東廟:중국의 관우, 관평, 조루, 주창, 황보를 모신 곳) 남쪽 청계천에는 언제부터인가 영미다리(潁眉橋)가 놓여 있었다. 단종이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멀리 영월로 유배 가는 길에 이 다리위에서 정순왕후와 눈물로 이별하던 곳이다. 그 이별이 단종과 정순왕후와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그래서 주민들 사이에 영이별 다리, 또는 영영 건넌 다리라는 뜻으로 전해 오다가, 성종 때 살곶이 다리와 함께 이 다리를 스님들을 동원해 돌로 크게 놓았다. 그리고 성종이 친히 영도교(永渡橋)라 이름 하였다. 그러나 이 다리의 운명도 조선조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석대로 쓰는 바람에 영원히 사라졌다.
정순왕후는 부군인 단종과의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는 오라는 데도 없고, 딱히 갈곳은 더더욱 없었다. 죄인의 부인이라 도성 안에는 더군다나 들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찾았던 곳이 인창방(숭인동)의 낙산(駱山)기슭이었다.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14살에 단종의 왕후로 책봉됐다. 그러나 겨우 1년 반의 신혼 생활 끝에 단종이 왕위에서 3년 만에 물러나는(1455년 6월) 바람에 그해 7월에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되었다가 그로부터 3년 뒤 단종과 생이별 하였다. 낙산 골짜기에 시녀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戒智)와 함께 찾아 든 정순왕후는 영월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연미정(燕尾亭) 밑에 작은 초가를 짓고 정업원(淨業院)이라 하였다. 왕후는 날이면 날마다 아침 저녘으로 동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다보며, 단종이 서울로 무사귀환하기를 기약 없이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봉우리를 오늘날도 동망봉(東望峯)이라 부르고 있다.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기다리다 지쳤음이 오리까/ 높으셨다 노여움이 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라고 노래한 시인 노천명의 ‘임 오시던 날’처럼 기다림이 절박했음일까… 보다 못한 조정에서는 이 정경을 가엾이 여겨 영빈정(英嬪亭)이라는 집을 지어 주었으나, 그 집에는 한 번도 들지 않고, 오직 이 초가 정업원에서 80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조선조 숙종 24년(1693년)에 노산군을 단종으로 추존, 정순왕후도 늦게나마 역사에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영조 47년(1771년) 9월 6일, 옛 정업원 자리에 비와 각(閣)을 세워, 왕이 친히 ‘황조 정덕 십륙년 신사 유월 초사일 후 이백 오십일년 신묘 구월 초육일입, 전후 개 친서(皇祖正德十六年辛巳六月初四日後 二百五十一年辛卯九月初六日立, 前後皆親書)’라는 작은 글자로 새겼다. 비각 액면(額面)에는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奉後岩 於千萬年)’이란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세월은 가고 역사는 말이 없다. 다만, 정순왕후가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던 그 동망봉은 날이면 날마다 아침 해돋이의 ‘동망봉’이 되고 있을 뿐이다.
2) 낙산(駱山)
낙산은 종로구 이화동․동숭동․창신동, 동대문구 신설동, 성북구 보문동․삼선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으므로 낙타산(駱駝山), 줄여서 낙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타락산(駝駱山)이라고도 불렸는데, 그것은 조선시대 궁중에 우유를 공급하던 유우소(乳牛所)가 위치한 산이라고 하여, 우유의 다른 말인 타락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낙타는 속칭 약대라 하는데, 이 산 중심부 125m 고지가 약대의 등과 같이 솟아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낙산에는 ‘낙타유방’에 해당한다는 두 곳의 약수터가 있었다. 곧 ‘이화동약수’와 ‘신대약수’로 예전에는 사시사철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낙산은 조선 초 도성을 축조할 당시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주산인 북악의 좌청룡이 되었다. 따라서 성곽이 그 능선을 따라 수축되었는데, 주봉의 북쪽 끝은 홍화문이, 남쪽 끝은 흥인문이 각각 설치되었다. 명종 때의 풍수가 남사고(南師古)가 서울의 동쪽에는 낙산, 서쪽에 안산(鞍山)이 있으므로 붕당(朋黨)이 생길 것인데, “낙산(駱山)이란 것은 각마(各馬)이니 동(東)을 주장하는 당은 각기 나눠질 것이오, 안(鞍)은 혁안(革安)이니 서(西)를 주장하는 당은 혁명한 후에 안정되리라”라고 풀이하였는데, 과연 선조 때 동인(東人)은 여러 갈래로 나눠지고, 서인(西人)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낙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이 그렇게 높지 않고 골짜기가 그렇게 깊지 않지만, 예전에는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맑고, 골짜기마다 소나무․전나무․잣나무 등의 상록수가 빽빽하게 들어서 그 풍치가 아름답고 그윽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관리들 중에 산수풍경을 사랑하는 문인들이 낙산계곡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살면서 계곡 근처에 정원을 꾸미고 여가를 즐겼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낙산은 평평하고 구부러져서 높은 봉우리는 없는데, 낙산 밑의 동숭동․이화동 일대를 ‘동촌(東村)’이라 칭한다고 하였다.
효종 때 왕의 아우 인평대군의 거소(居所)인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은 왕족과 문인․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또한 낙타유방의 약수가 있던 낙산 서쪽 산록의 쌍계동(雙溪洞)은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三淸)․인왕(仁王)․백운(白雲)․청학(靑鶴)과 더불어 도성 내 5대 명승지로 꼽혔다. 따라서 이 근처에는 태종 때 박은(朴訔)이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柏林亭)을 지어 풍류를 즐겼으니, 백동․잣나무골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집 뒤의 석벽이 매우 기묘하고 우물이 맑고 차며 풍치가 아름다우므로,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 하였다. 여기서 신대골․신대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에 있던 신대우물은 낙산 서쪽 동숭동 129번지에 있었는데, 낙타유방의 바위가 기묘하고 아름다우므로, 영조 때 강세황(姜世晃)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강세황은 한성부판윤을 지내면서 여가에는 낙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며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가물어도 수위가 변하지 않던 이 우물도 낙산 기슭에 집이 들어서면서 매립되었고, ‘홍천취벽’이라 새겼던 글자도 확인하기 어렵다. 고종 연간(年間)에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한 헤이그 밀사 부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1∼1917)이 낙산 아래에 살면서 일제침략 세력의 제거 방법을 구상하였으며, 1905년 이등박문(伊藤博文)의 강박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행되자 부재는 가두구호(街頭口號)와 조약파기를 부르짖기도 하였다. 그 후 이곳에서 고종의 명을 받고 일제의 강제적 외교권 박탈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네덜란드로 떠나기도 하였다. 1909년에는 혜화동성당이 낙산의 북서쪽에 자리 잡게 되었고, 1926년에는 경성제국대학이 낙산을 주산으로 동숭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7년 이화동 1번지에 이화장(梨花莊)을 마련하였다.
낙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한 지맥이 뻗어 숭인동 58번지 일대에서 95m 높이의 산봉을 이루고 있다. 즉 성북구 보문동 6가와 종로구 숭인동 사이 청룡사 앞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이를 ‘동망봉(東望峰)’이라 부른다. 이는 조선시대 어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멀리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 있을 때 단종의 왕비 송씨가 청룡사에 살면서 매일 이 산봉우리에 올라가 동쪽의 단종이 있던 영월을 바라보았다 하여 봉우리 이름을 동망봉이라 하였다 한다. 영조 47년(1771) 6월 왕이 이곳에 거둥하여 친필로 쓴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를 세우고, 동망봉 바위에도 ‘東望峰’이란 세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이 글씨는 일제 때 이곳이 채석장이 되면서 깎여져 없어졌다. 지금은 주위가 주택가로 변하여 바위산 봉우리의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도시근린공원인 숭인공원으로 꾸며져 많은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단지 보문동6가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에 동망산신각(東望山神閣)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낙산은 1960년대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아파트와 주택으로 잠식당한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서울시는 1996년부터 시작한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낙산을 근린공원으로 지정하고 공원 조성사업을 벌여 2002년 6월 12일 낙산공원을 개원하였다. 그 동안 노후 시민아파트 30동과 단독주택 176동을 철거하였으며, 5개의 광장을 조성하고 20여만 그루의 각종 나무를 식재(植栽)하였다. 그리고 낙산전시관과 비우당 등을 복원하고, 동대문~혜화문까지 2.1㎞의 성곽을 따라 역사탐방로를 조성하였다.
▲ 영도교터(永渡橋址)
영도교는 황학동에서 숭인동으로 이어지는 청계7가와 8가 사이에 위치하는 다리이다. 용재총화와 한경지략에 영도교는 제빈교(濟盤橋)와 함께 성종 때 승려가 만들었고 성종이 어필로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다. 경성부사에는 영미교(永尾橋)라 부르는데 영미사(永尾寺)의 승려가 돌다리를 가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준천사실에는 영도교의 길이를 18칸이라고 기록하여 약 60~70m로 추정되며, 경진준천 후에는 영도교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을 새겼다고 한다. 고종 초에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를 위해 석재를 가져다 사용하고 대신 나무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1933년에는 철근콘크리트로 개조되었다. 한편 1458년(세조 4)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향갈 때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영영 이별하였다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도 전해진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관련하여 2003년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 의해 지표 조사되었고 동년 중앙문화재연구원에 의한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영도교가 위치한 지역의 복개구조물 아래의 폭은 약 52.50m, 양집수관로를 제외한 하천의 폭은 44.60m이다. 시굴 결과 하상면에서 50㎝ 하부에 장방형의 석재와 직경 5~10㎝의 골재용 자갈이 섞여서 노출되었다. 이는 일제 때 개축된 다리의 기초석으로 추정되나 교란층 위에 위치한다. 최대 150㎝까지 조사하였으나 기초석 등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정업원 앞 냇물에는 귀양가는 단종과 송비가 이별한 다리가 있었는데 영도교라 불렀다. 단종이 죽음을 당하자 인근 주민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 하여 ‘영이별다리’라 불렀고, 후에 영원히 건너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뜻으로 ‘영도교(永渡橋)’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뒤에 다시 영미교로 고쳤다가 고종조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석재로 사용했다 하며, 뒤에 이곳에는 콘크리트 교량이 놓였다. 그런데 죽어서도 서로를 잊지 못해 사무친 그리움이 저승까지 미쳤는지 그로부터 정순왕후가 묻힌 양주 사릉의 나무들은 모두 단종이 묻힌 영월 쪽을 향해 가지를 뻗었다고 하며,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 소나무 또한 정순왕후가 묻힌 서쪽(사릉)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다고 한다.
▲ 숭인공원-숭인동 5-7
동망봉과 동망정이 있다. 동망정은 조선6대왕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서 죽음을 당하자 그의 비 정순왕후송씨가 매일 동쪽을 볼 수 있는 이곳에 소복을 입고 올라와 망왕의 명복을 빌었으며, 통곡을 하면, 곡소리가 산 아래 마을까지 들리고, 온 마을 여인들이 땅 한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하였다고 한다. 영조 47년(1771)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자를 써서 이곳에 있는 바위에 새기게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동망봉이라 부른 유래에 따라 이곳에 정자를 지어 동망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 홍숫골
창신 2동 입구에서 약 300m 정도 들어간 지점으로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만 싸여 있다 해서 홍숫골이라 불리워지고, 암벽에는 홍수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오형제우물터
홍숫골 막바지 낙산 정상 2/3 지점에는 우물이 다섯 개 나란히 있었으므로 오형제 우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자주동샘(紫芝洞泉)
낙산 줄기에 위치.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서 귀양살이 할 때 단종 왕비가 불가에 입문, 청룡사에서 불도를 닦으며 사중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댕기, 저고리깃, 고름끝동에 자주물을 드려서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고 하였으므로 이 바위를 『자주바위』라하고, 바위 밑에 있는 샘물은 『자주우물』이라 하며, 마을이름도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렸다.
▲ 정업원(淨業院)터-숭인동 산3번지 청룡사내
단종은 여러 번에 걸친 복위사건으로 영월로 귀양 가고, 왕비인 정순왕후는 공신비(功臣婢)가 될 운명에 처하였다. 「연려실기술」은 당시 상황을 ‘세조가 나라를 얻자, 신숙주가 공신으로서 노산군의 왕비를 받아서 여종을 삼았다 하였다. 이 말은 한강 정구(鄭逑)가 한 말이었다’(破睡篇). ‘노산의 왕비 송씨가 관비가 되었더니 숙주가 공신비를 삼아서 자기가 받으려 하였으나, 세조가 그의 청을 듣지 아니하고 얼마 후에야 정미수(鄭眉壽)를 궁중에 기르라 명하였다.’(月汀漫筆) 단종이 쫓겨난 후 결국 당시 18세였던 정순왕후 송씨는 왕궁에서 지어준 집을 마다하고 동대문 밖 숭인동에다 3칸짜리 모옥(茅屋)을 지어 이름을 정업원이라 하였다. 왕비는 시녀 세 사람과 함께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이 절의 주지승이 되었는데, 함께 출가한 세 사람의 법명은 희안, 지심, 계지였다. 송비는 궁중에서 대주는 양식도 거부하였는데,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만 했으므로 이들 중 한사람은 왕비를 옆에서 모시고, 두 사람이 탁발하여 땔감과 양식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곳에서 옷감에 자줏빛 물감을 들이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므로 이 마을은 자줏골, 또는 자지동(紫芝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왕비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앞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행복을 빌었으므로 이로부터 봉우리 이름이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리게 되었다. 영조47년(1771) 왕은 친히 이곳을 찾아 송비가 올라갔던 봉우리에 올라 바위에 친필로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씨를 쓰고, 집터에는 비를 세웠는데, 그 비의 전면에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영조의 친필로 ‘전봉후암어천만년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前峰後岩於千萬年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라 쓴 비석이 현존한다.
※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
남편인 영양위 정종(鄭倧)이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자 순천관비(順天官婢)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순천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과 출신으로 공주를 관비로 부리려 하였으나, 공주가 부사를 꾸짖어 결국 관비로 사역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공주에게는 전 귀양지인 광주(光州)에서 낳은 아들 하나가 있었다. 이 갓난아이는 문종의 외손자로 문종의 단 하나 남은 혈손이라 하여,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궁중에서 여자의 옷을 입혀 길렀다. 이 아이는 자라나서 후에 단종비 정순왕후의 양자로 간 정미수였다.
▲ 청룡사-숭인동 3번지
동대문구의 청룡사는 낙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국사의 뜻에 따라 922년에 세운 절이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왕건을 청룡사를 세우고 비구니인 혜원에게 절을 맡겼다고 하니 처음 창건했을 때부터 비구니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룡사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역사의 흔적을 안게 되었다. 당시 청룡사는 동대문 밖에 위치해 있어 왕실의 여인들이 주로 머무는 사찰이 된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혜비가 청룡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도 청룡사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어린 두 아들과 사위를 잃었는데, 그때 과부가 된 딸 경순공주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고 청룡사로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단종이 어린 나이에 영월로 유배되어 사사 당했을 때 단종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 역시, 청룡사 옆 정업원이란 곳에 머물며 청룡사에서 불심을 키웠다고 한다. 이때 정순왕후는 천에 염색을 해서 팔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청룡사 위 비우당 뒤에 정순왕후가 염색을 했다는 자주동샘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청룡사에는 지금도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석이 있다. 이는 영조가 친히 글을 썼다는 영조의 친필 비석으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는 정업원 옛터라는 뜻이다. 영조는 단종을 위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켰는데, 이 청룡사에 와서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친히 비문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 자리가 이곳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정업원구기비는 청룡사 화장실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 작은 문을 열고 나가면 볼 수 있다. 비각 안에 있어 비석을 볼 수는 없다. 지하철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로 나가 진행 방향으로 곧장 가면 된다. 동망봉터널 옆 경사길로 올라가면 길 왼쪽에 청룡사가 있다.
▲ 부녀시장(婦女市場)-숭인동 242-1 숭신초교 정문 앞
동대문 동묘(東廟) 남서쪽 영도교 인근에는 여인네들만 모이는 채소난전이 있었다. 부녀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채소난전이 서게 된 것은 단종의 왕비인 송비(宋妃)가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떠난 후 정업원(淨業院)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인네들이 그 근방에 채소난전을 만들어 채소를 송비에게 몰래 바쳐 생계를 도우려는 때문이었다. 「해평가전(海平家傳)」에 의하면, 송비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아들 해평부원군 정미수(鄭眉壽)를 양자로 삼은 후 두 여승과 함께 그이 집으로 옮겨 가서 살다가 이곳에서 1521년(중종16) 82세까지 수절하다가 죽었다고 하며, 여승이 죽자 사릉(정승왕후 능) 옆 가까운 땅에 장사지냈다 한다.
▲ 안양암-창신동 130번지
안양암(安養庵)은 1889년 성월대사(性月大師)가 창건한 정토도량(淨土道場)으로, 조선 말기에 조성된 전각, 불화, 불상, 공예품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사찰이다. 안양암이 서울 도심의 독보적인 사찰로서 원형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본 박물관 권대성 관장이 1977년 개발위기에 몰린 안양암을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 6월 관장 앞으로 ‘안양암' 의 소유권이 이전되기까지, 안양암 소속의 종단과 쟁송을 거듭하고, 사기집단의 발호를 겪는 등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보존과 문화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24년이란 긴 시간을 견뎌 내었기 때문이다.
▲ 비우당(庇雨堂)=유관(柳寬)집터-창신동사거리.창신초교 골목안 우산각골
신설동(新設洞)은 조선조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이었다. '방(坊)'은 동네호수가 60여호이상 150여호에 이를 때 붙여졌던 마을단위이다. 방 밑에 '계(契)'가, 계 밑의 작은 촌락을 '동(洞)'이라 하였다. 마을에 스캔들 같은 화제거리가 떠돌면 "동네방네 소문났네."하는 '동네방네.'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숭신방 안에는 신설계가 있었고, 신설계 속에 탑동(塔洞), 우선동(遇仙洞), 안암동, 새말(新里) 등의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도성밖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숭신방과 인근 인창방(仁昌坊)을 반씩 쪼개 인창방의 가운데 글자 '창'자와 숭신방의 '신'자를 합성, 창신동(昌信)이라는 이름으로, 머리 글자만 합성, 숭인동이라는 엉뚱한 땅이름을 만들었다. 우선동에는 하정(夏亭) 유관(柳寬)을 기리는 '우산각(雨傘閣)'이 있었다.
유관(1346~1433년)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고려말 1371년(공민왕 20년)에 문과에 급제, 전리정랑(典理正郞),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고려말기에는 봉산군수, 성균사예(成均司芮), 사헌중승(司憲中丞)등을 역임하였다. 또,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거침없이 개혁의 선봉에 서서 개국원종공신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왕명에 따라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다. 1397년(태조 6년) 좌산기상시(左散驥常侍), 대사성을 거쳐, 1401년(태종 1년) 대사헌, 1405년 전라도 관찰사,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 외교활동도 했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태조실록'을 편찬을 주관하였으며, 우의정을 지내고 세종 때 청백리에 올랐다. 그가 청백리로 천거된 데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경지락(漢京識駱)'에 따르면, 유관은 도성 밖 숭신방의 조그마한 오두막집에 살았는데 생활이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어느 누구도 정승의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가 오기만 하면 지붕이 새므로 방안에 우산을 받치고 있어야 했다. 어느 해 여름 장마가 계속되어 천정에서 끊임없이 비가 새자 유관은 우산을 쓰고 책을 읽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이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어, 새는 비를 피할 수 있지만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유관은 "임자말이 일리가 있구료." 하면서 쓰고 있던 우산을 벗어 이웃사람에게 주었다. 그 뒤부터 동리 사람들은 유관의 집을 일러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렀고, 이 동네는 우산각이 있다하여 우산각리 또는 우선리로도 불리었다. 우산각리의 발음이 변해 우선동(遇仙洞)이라 쓰기도 했다. 이 우선동에 날이면 날마다 유림(학생)들이 모여들어, 유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학문을 논의하곤 했다. 일제는 이 우산각을 주목, 도시계획을 핑계로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에서 길의 방향을 바꿔, 직선도로를 뚫었다. 지금의 '종로-왕산로-망우로'를 잇는 도로이다. 일제의 도로 개설로 우산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옛 신설계의 이름을 따, '새로운 마을이 설치되었다'는 글뜻처럼, 신설정(新說町)이라 한 것이 오늘의 신설동이다. 여름 장마비에 방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책을 읽던 하정(夏亭ㆍ여름 정자) 유관. 그의 일화에서 선비의 청빈낙도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 상춘원터-성덕도서울교화원앞
철종(哲宗)의 부마 박영효(朴泳孝)는 의암성사가 일본에 망명하고 있을 때부터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그가 재산을 처분할 때 동대문 밖에 있는 그의 별장을 포덕 56년 7월에 의암성사가 매입하여 상춘원(常春園)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상춘원은 대지 10,165평에 2층 양관(洋館)과 여러 채의 한옥 등 모두 백여 칸의 건물이 있으며 매입 후 정원과 건물을 새로 꾸미고 후원에 만화정(萬化亭)을 지었다. 의암성사는 매년 천일기념 등 중요한 기념일마다 낙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상춘원에서 연회를 크게 베풀어 많은 교인들과 직접 대면하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포덕 57년 천일기념에는 경향각지에서 5천 여 명의 교인이 송현동 대교당에 모여 기념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 상춘원으로 초청하여 대원유회(大園遊會)를 열고 교인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날 상춘원에는 명월관(明月館) 등 일류 요릿집에서 출장 나와 교인들을 마음껏 음식을 들었고, 무대에는 장안의 기생 광대 등 백 여 명의 연예인들이 하루 종일 풍악을 울리며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날 교인들뿐만이 아니라 이웃 주민들까지 엄청난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보다 앞서 포덕 55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에는 기념식 후 한강에서 40여척의 유람선을 띄워 지방 교역자 5백 여 명과 더불어 여흥을 즐기기도 하였다.
※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
동학·천도교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응구(應九), 호는 의암(義菴).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출생하였다. 1882년(고종 19) 동학에 입교하여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가 되었고, 최시형이 처형된 후 제3대 교조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 때 통령(統領)으로 북접(北接)의 10만 명의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였으나, 공주(公州)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배하자 함경도·평안도지역으로 은신하였다. 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이 되어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에 힘썼고, 1904년에 진보회를 조직하여 모든 회원들에게 단발령을 내리는 등 개혁운동을 일으켰으며, 또한 동학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동학경전인 동경대전의 '도즉천도(道則天道)'에서 따온 개칭은 당시 친일운동에 앞장 선 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파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출판사인 보성사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에도 관심을 보여 보성(普成)·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하였다. 1908년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를 인계하고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운동방향을 비폭력주의로 국한시켰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0년 형 집행정지로 출감하였으나 6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주어졌다.
포덕 35년 동학혁명 당시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반도에서 청국세력을 몰아내고 동학군마저 철저히 소탕하면서 이미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한 야욕을 드러냈다. 그 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덕 46(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우리나라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전국 각처에서 저항하는 의병들을 철저히 소탕하는 등 계획된 수순에 따라 합방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한편 시천교를 별립한 이용구는 일본군부의 비호 아래 일진회를 내세워 포덕 50년 12월 4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한일합병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서슴지 않고 노골적인 매국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의암성사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용구의 성명서를 반박하면서 일진회와 시천교를 성토하였다. (1909년 12월 9일 [大韓每日新聞] 게재)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일진회를 매도하는 여론이 비등했고 시천교의 교세는 급속도로 위축되어 갔다. 결국 일제는 포덕 51(1910)년 경술년 6월에 먼저 우리나라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드디어 8월에 강압적인 한일 합방을 단행하여 우리나라를 강점하였던 것이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의암성사는 이 소식을 듣고 얼굴에 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흥비가에 있는 말씀은 바로 오늘을 예언한 것이라. 몰각한 자가 바로 이용구가 아니고 무언인가. 사대아부(事大阿附)는 비자주성(非自主性)이요, 파벌독재(派閥獨裁)는 비민주성(非民主性)이요, 훼예모욕(毁譽侮辱)은 비민족성(非民族性)이니 이상은 3대 망국근성이니라. 앞으로 국권회복(國權回復)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고 하였다.
일제는 강압적으로 한일합병을 성공시킨 직후 교육기관과 종교단체를 제외한 한반도의 모든 사회단체를 전격적으로 해산시키면서 효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마저 가차없이 해산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일제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이용구는 이를 분통하게 여긴 나머지 한일합병 2년 후에 그 업보로 죽고 말았다. 한편 천도교의 기관지를 발행하는 월보사의 주간 이교홍 등 간부진은 강제합병 소식을 접하고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강제합병을 성토하는 성명서를 비밀리에 보냈다. 그러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천도교회월보]는 창간되자마자 간부진이 전면 교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와 같이 천도교가 한일합병에 강력히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을 통해서 천도교의 배일사상을 잘 알고 있는 일제는 항상 천도교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는 합병 다음해인 포덕 52년 4월에 제2헌병분대 村田多忠 분대장이 의암성사를 출두케 하여 협박을 했다. 첫째로 의암성사가 출입할 때 쌍두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오만하고 사치한 행동이며, 종령을 발하고 따로 포덕 연호를 쓰는 것은 마치 왕과 같이 행세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둘째는 교도로부터 강제성을 띠고 성미를 바치게 하는 것은 마치 정부가 조세를 징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불법이 아니냐는 것이다. 셋째는 우매한 사람들을 허위로 날조하여 천도교에 입교시켜 그 수가 3백만이라고 하니 이것은 장차 조선의 성인인구 1천 4백 만 명 중에 3분의 2를 입교시켜 조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 포덕에 힘쓰는 것이 아니냐고 협박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의암성사는 일제의 탄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기부행위를 금지한 그들의 법령에 따라, 한때 부득이 성미제를 폐지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도록 하다가, 포덕 55년부터는 성미를 무기명제로 바꾸어 시행했다. 그러나 쌍두마차는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의암성사는 공식방문이나 나들이 할 때 검은 칠흑의 윤기 나는 화려한 쌍두마차를 이용했다. 쌍두마차는 정장차림에 모자를 쓴 중국인 마부가 앞쪽에서 말을 몰고 뒤쪽에는 같은 차림의 수행원이 서서 의암성사를 호위했다. 화려한 쌍두마차가 달릴 때는 임금의 위엄도 무색할 만큼 당당했다. 뿐만 아니라 의암성사는 우리나라 민간 승용차 제1호인 포드 승용차를 몰고 서울 시내를 질주했다. 이 승용차는 일본에서 공진회(共進會, 세계박람회)가 열렸을 때 출품된 것을 의암성사가 입교시킨 의친왕(義親王)이강(李堈)공이 주선하여 구입한 것으로 역시 운전수는 중국인이었다.
▲ 보문사(普門寺)-보문동3가 168
보문사는 세계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으로 예부터 '탑골승방'으로 알려져 있는 고찰이다. 약 만여 평의 대지 위에 전각과 요사채, 그리고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루며 대가람을 형성하고, 150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보문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입증할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나, 권상로 선생의 기록에 따라 고려 16대 예종왕 10년(1115년)에 담진국사(曇眞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보문사일신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당시까지 전승되던 창건담을 기록하고 있는데, 보문사의 창건배경과 담진국사와의 연관성을 피력하며, 옛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며 국태민안과 성수만세를 기원하는 니사(尼寺)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1692년(숙종 18)에 묘첨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1826년(순조 26)에 수봉법총(秀峰法聰)스님이 만세루를 신축하였으며, 1827년(헌종 3)에 비구니 정운(正雲)스님이 좌우 승당을 세워 여법한 가람을 이루었다. 1842년(헌종 8)에는 비구니 영전(永典)스님이 대웅전과 만세루를 개조하고, 1867년에 묘승당의 지장탱을 조성하였고, 1872년에 비구니 금훈(錦勳)스님이 좌우승당을 신축하였다. 근대인 1928년에는 비구니 긍탄스님이 주석하며 보문사에 대규모 불사를 이루었는데, 긍탄(亘坦)스님은 대웅전 삼존의 개금을 시작으로 관음전, 대웅전, 만세루, 좌우승당을 증축하고, 이후 칠성각과 삼성각을 지어 현재 가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해방 이후에는 비구니 송은영(宋恩榮)스님이 주석하며 이후 30여 년 동안 대규모 불사를 주도하였는데, 현재의 사찰규모가 당시 은영스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스님은 주지로 부임한 1945년에 현재 사찰의 대지를 확보하고, 1946년부터 1980년대까지 선불장을 비롯하여 범종각, 극락전, 보광전, 호지문, 시왕전, 시자원 등 전각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1971년에 대한불교 보문원을 설립하여 보문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1972년에는 지금의 석굴암 전신인 석불암을 신축하고 법보전과 사리탑을 세워 근대기 대규모 중창 불사의 큰 획을 이루었다. 1986년에는 황법준 스님이 대웅전과 좌승당을 개조하였으며, 1987년에는 석불암을 석굴암을 개조하였다. 또 1988년에는 은영유치원을 설립하여 대규모 포교사업을 실시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복지사업과 교육사업을 이어 은영어린이집, 학생회, 청년회, 신도회 등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불교 포교활동을 계승하였다. 또 1998년에는 동원정사를 신축하고, 1999년에는 만불전을 지어 도심사찰의 기능을 다하였으며, 근래에는 대인스님이 주지로 상주하며 가람정비 및 포교활동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보문사는 보문종이라는 독립된 종단의 가풍을 기본으로 비구니스님들만의 고유한 수행풍토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사회복지 차원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동대문 밖 비구니 수행도량 보문사(普門寺)에는 조선후기부터 불리워온 별칭이 있다. 그 별칭은 '탑골승방'으로 서울의 낙산 아래 동망봉을 경계로 청룡사, 미타사 등 비구니 도량이 군집해 있어 생긴 이름이다. 특히 보문사는 조선시대에 탑골 승방이라 불리는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 숭인동의 새절 승방(청룡사)과 함께 여승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네 니사(尼寺) 중 하나로, 단종의 왕비 송씨와 연관된 동망봉과 청룡사ㆍ미타사가 이웃해 있어 이 곳이 왕비와 후궁들의 기도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동문 밖, 비구니 도량으로 왕을 여의거나, 나이가 찬 후궁들이 갈 곳 없이 방황할 때 이곳 탑골승방의 문은 활짝 열려 그녀들의 지친 마음을 감싸 주었다.
▲ 고려대학교박물관-안암동5가1번지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고려대학교의 박물관으로,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다. 1934년에 건립되어 대학박물관의 효시다. 역사·고고·민속·미술 분야의 유물을 수집·발굴·전시하며, 학생과 일반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1962년 5월 박물관 건물을 준공하여 2005년 5월 백주년기념삼성관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전시실과 수장고로 사용하였다. 소장품으로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 국보 제249호 동궐도, 국보 제117호 분청사기인화문태호를 비롯한 역사적인 유물과, 심사정, 정선, 김홍도의 그림 등 각 시대의 고미술품, 이응로, 박수근의 그림 등 현대미술품 기타 여러 유물들이 보관·전시되고 있다.
▲ 로봇박물관-동숭동 1-44번지
본 박물관은 세계 최초 최다국의 초기 앤티크 로봇과 스페이스 앤티크 오브제 3,500점을 체계적으로 전시한 로봇 전문 상설 박물관이다. 로봇의 태동(뿌리)부터 지능 로봇까지 로봇의 변천(진보)사를 통해 우주를 향한 인류의 꿈과 모험, 창조 등 문명 발달사의 전 과정을 보여 주는 세계적인 로봇 컨텐츠 박물관이다. 특히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40개국의 초기 앤티크 로봇과 스페이스 오브제들은 우리나라만의 자랑이다. 전시 스토리는 로봇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현재 게임 속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여성 전사와 여성 로봇의 기원(모티브)을 비롯하여, 디자인, 미디어, 교육, 광고 등의 테마로 구분, 전개하여 시대와 더불어 발전한 과학 기술과 다양한 디자인을 통해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고 꿈을 키울 수 있는 선도적인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 백동우물(柏洞―)-동숭동 6-5.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우물로서, 이곳의 옛 지명인 백동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우물이 크고 깊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줄지 않으므로 큰우물이라 하였고, 우물 옆에 연당(蓮堂)이 있어 연당우물이라고도 하였다. 우물가에 늙은 회화나무가 있다.
▲ 신대우물-동숭동 129번지.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우물이로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이 살던 곳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영조 때 표암 강세황이 바위에 ’紅泉翠壁‘을 새겼다.
▲ 동숭동약수-동숭동 130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약수이다. 낙산장을 건축하였다.
▲ 협간정터-쌍계동에 있던 정자터.
쌍계(雙溪) 이재(李梓)는 현재 이화동에 합쳐진 쌍계동내에 풍치가 수려한 곳을 찾아 협간정을 짓고 완상(玩賞)하였는데, 이 협간정 앞은 냇물이 벼랑으로 떨어져 폭포를 이루고 주위에는 기암괴석과 수림이 둘러싸여 동촌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 어수물-낙산 아래에 있는 우물로 물맛이 달고 시원하며 서울 안에서 제일이라 하여 성종이 길어다 먹었으며, 벽돌로 우물을 쌓고 ’어정(御井)‘이라 하였다. 성종이 넷째딸 경순옹주의 부군 의성위 남치원에게 하사하였으므로 의성위우물, 의성위정으로 지칭하고 우물돌에 ’賜井‘이라 새겼다.
▲ 홍덕이 밭(弘德田)-낙산아래에 있던 밭.
낙산 아래에는 '홍덕전(弘德田)'이라는 밭이 있었다. 즉 병자호란 때 효종(1619∼1659)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내인 홍덕(弘德)이가 포로가 되어 함께 심양에 있으면서 김치를 담가서 날마다 효종에게 드렸다. 귀국한 뒤 홍덕이 또다시 김치를 담가서 내인을 시켜 효종에게 드리니 효종은 크게 감탄하여 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홍덕이 끝내 사양하자 효종은 특명으로 낙산 아래에 있는 밭을 홍덕에게 주었다. 그 뒤부터 이 밭을 홍덕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 구서울대학교 본관-동숭동 1-130(한국문화예술위원회). 史跡 278호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준공된 옛 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1945년 이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서울대학교가 1972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문화예술진흥원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이상재 선생을 대표로 한 조선민립대학 기성회가 결성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예과(豫科)를 모집하여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본관은 벽돌로 쌓은 3층 건물로써 우리나라 건축계의 선구자인 박길룡씨가 설계했고, 공사는 일본인 회사 미야까와구미가 맡았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지붕의 모습은 세련되고 우아하다.
▲ 쇳대박물관-동숭동 187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편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한국에서 유일한 자물쇠전문 박물관이다.한국의 옛 자물쇠 및 세계 각국의 독특한 자물쇠를 테마로 한 곳으로 4000여 점의 소장 자물쇠 중 고려시대 금동자물쇠, 조선시대 열쇠패, 대형자물쇠, 외국자물쇠 등 350 여 점을 주제별로 상설전시하고 있다. 또한 자물쇠와 장석을 제작하는 장인인 두석장(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으로 4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김극천 일가의 작업실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자물쇠 외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민속품, 공예품 등은 박물관 내의 3층에 위치하고 있는 갤러리에서 다양한 기획전을 통하여 만나볼 수 있다.
▲ 구공업전습소 본관-동숭동 199-1(방송대역사관). 史跡 279호
순종 융희 2년(1908)에 건립된 이 건물은 본래 기계시험소가 있던 터에다, 1906년 공업전습소가 생김에 따라 그 본관으로 지은 것이다. 광복 후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이 되었고,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 본부로 쓰이고 있다. 2층의 목조건물로 벽은 독일식 비늘판을 붙였으며 외형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했다. 구한말 탁지부가 설계한 몇 안 되는 현존건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학림다방-명륜동 94-2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기 1956년에 개업해 47년째를 맞고 있는 추억의 명소 학림다방은 대학로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대학로 하면 마로니에 공원과 학림다방을 꼽을 정도로 중년층들에게는 낭만과 추억이 깃든 곳으로 젊은 사람들보다는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찾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학림다방은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 불리기도 하고, 대학생들의 토론 장소이자, 음악, 미술, 연극, 문학 등 예술계 인사들의 아지트로 사랑받았고, 문리대의 축제가 ‘학림제’로 불리웠을 정도로 영향을 끼쳤으며, 4.19학생혁명, 5.16군사혁명 그리고 수많은 학생운동 등 고난과 희열을 함께해온 역사의 현장으로, 예술계 인사들의 아지트였다. 김지하 황지우 김승옥 전혜린 등 문인들과 김민기 임진택 등 예술인들이 즐겨 찾았다. 또한 이곳은 수많은 영화의 촬영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대학로 큰길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은 영화에서 곧잘 볼 수 있는 명소이다. ‘번지 점프를 하다’,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 등에도 등장한 곳이다. 덕수궁옆 ‘세실’, 신촌의 ‘독다방’, 샘터사에 위치해 있던 ‘난다랑(밀다원)’, 대학로의 명소 ‘오감도’ 등도 음악다방으로 유명하였다.
▲ 마리안느
대학로 골목 모퉁이 붉은색 간판이 돋보이는 소설가 겸 시인인 이제하 씨가 운영하는 카페 이다. 시인 황인숙과 김혜순, 고종석, 샘터사 편집진들, 소설가 김형경과 신경숙이 즐겨 찾는 이곳은 1960년대 영화 <내 청춘 마리안느>라는 영화에 매혹되어 이제하 씨가 이름 붙인 카페이다. 마리안느는 문학인, 음악인, 영화인 등 예술가들이 이런저런 소소한 담소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으로 명소가 된 지 오래. 이제하 씨가 직접 가마에서 구운 다기들이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늦은 저녁 연주되는 라이브 무대가 카페의 중앙에 자리해 있다.
▲ 서울대유지비-
▲ 김상옥동상-
▲ 윤선도생가터-마로니에공원내 서울대유지비 좌측, 혜화역
고산 윤선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동숭동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얘기하면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태어났다. 마로니에 공원 한켠에는 윤선도의 생가터를 알려주는 비가 있다. 그리고 그 비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오우가’가 새겨져 있다.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윤선도는 서울에서보다 유배지와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에서 더 오랜 생활했다. 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고산 윤선도는 기여이 당시 실세인 이이첨을 비롯한 그 일파들의 횡포를 밝히는 상소를 올린다. ‘간신 이이첨의 권력 농단이 극에 이르고 왕비의 오빠 유희분, 척신 박승종 등의 권력 남용이 도를 벗어났으니 이이첨을 죽여야 하고 나머지도 합당한 죄를 물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1612년 진사시험에 합격해 성균관 들어간 지 4년만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0세. 그것이 시작이었다. 일생 그는 유배와 해제의 생활을 반복했다. 언제나 그는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서는 참지 못했다. 훗날 역사는 진리와 정의 앞에서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절의 정신을 보여준 선비로 평하고 있다. 잘못된 정치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소를 올리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한시도 정치를 한순간도 외면하지는 않았지만-어쩌면 정치를 그렇게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 그는 결코 정치인으로서 주류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오랜 유배생활과 낙향생활에서 그는 많은 시가를 남겨 조선시대 정철과 더불어 시가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에게 더 기억되고 있다. 외로운 산, 고산(孤山). 고산은 그의 호처럼 평생 외로웠다. 임금을 향한 마음을 한시도 놓지 않았지만 임금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고산은 자연과 함께하며 그 마음을 시로 달래며 살았다. 요즘으로 보면 시국을 외면하지 않는 깨어있는 비주류 시인이었다는 말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고산 윤선도(1587 ∼1671)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조선조 시조문학을 마지막 장식한 대가로 알려진 분이다. 그의 문학 세계는 대단히 풍성했는데, 특히 한글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한글 가사와 더불어 극찬을 받고 있다. 그의 문학에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 담겨 있다. 특히 오우가는 고산 윤선도가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금쇄동에서 지은 6수로 된 연시조이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진 물아일체의 경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로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 뉘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곶은 무슨 일로 피며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아닐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곶 피고 추우면 닢 지거늘, 솔아, 너는 어이 눈서리를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글로 하여 아노라.
나모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둏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중에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 김광균시비-설야(雪夜)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 함석헌시비-혜화역 2번출구. 시제목은 '그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다하여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감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탑-혜화동로터리 동성중고 정문 좌측
▲ 혜화동성당-
등록 문화재 230호로 조각가 김세중 이 제작한 제대를 위시해 곳곳이 예술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 혜화동 성당은 혜화동 언덕에 있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1927년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함에 따라 남게 된 수도원 목공소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1960년에 완공된 혜화동성당은 반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 성당과 비교해 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근대미를 자랑하는 한국교회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정면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 부조는 김세중(1928∼86년)씨 작품이다. 성전에 있는 미술품 대부분이 대가들의 고뇌와 땀이 녹아있는 작품이어서 혜화동성당은 명실공히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라고 불린다. 조선대교구장 뮈텔 주교가 한국교회 교육사업을 맡아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한국에 진출한 독일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 회원들이 낙산 아래 백동(柏洞, 혜화동의 옛 지명)의 전망 좋은 땅 3만평을 구입해 수도원을 세운 것이 1909년. 새로 설정된 원산대목구를 맡게된 베네딕도회가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김으로써, 경성교구가 백동 수도원 땅을 매입하게 됐고, 이 수도원 터에 지금의 신학교와 혜화동성당, 동성고가 들어선 것이다. 당시 수도원 땅은 백동은 물론 지금의 대학로 자리인 동숭동 일대까지 뻗쳐 있었는데, 동숭동 터는 일반에 매각했다고 한다. 1927년 4월29일 설립된 혜화동본당은 수도원 목공소를 개조한 성당으로 출발했다. 초대 주임은 시잘레(파리외방전교회) 신부. 목공소 건물에 종각을 세워 만든 40평 규모 성당은 1950년대에 이르러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건물이 낡기도 낡았지만 신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 3000여명에 이르는 교우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아진 것이다. 이에 7대 주임 정원진 신부는 1954년 '신축 성당 건립 기성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장면(요한, 제2공화국 국무총리 지냄) 박사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성전 신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교우들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어 혜화동본당은 1960년 5월25일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역사적인 성전 봉헌식을 갖는다. 혜화동성당은 한국교회건축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기념비적 성당으로 평가된다. 교회건축 전문가 김정신(스테파노, 단국대) 교수는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에서 "건축 전문가에 의해 설계된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건물인 혜화동성당은 1960년대 이후 보이기 시작한 근대 지향 성당 건축의 선구자적 건물로, 종탑의 형태나 창의 모양 등 모든 의장적인 면이 탈양식적이며 근대 건축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건축사적 의의를 밝혔다. 성당 건물뿐만이 아니다. 혜화동성당은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나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가톨릭미술 대가들의 작품 아닌 것이 없다. 정웅모(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신부는 '교회미술 이야기'에서 "이 성당 건립에 내로라하는 가톨릭 예술가들의 정성이 하나로 집결되었기 때문에 이 성당을 건축하면서 한국교회 미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성당 건립은 장발(루도비코, 1901∼2001년, 장면 박사 동생) 당시 서울대미대 학장의 지휘로 이뤄졌다. 설계를 맡은 이는 이희태(요한, 1925∼81년)씨. 이후 절두산순교기념관도 설계하게 되는 이씨는 당시 대다수 건축가들이 모더니즘과 국제주의 건축을 수용하고 소화하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기존 성당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개성을 살려나간 독창적 건축가였다. 성당을 바라볼 때 정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 화강석 부조다. 1961년 김세중(프란치스코, 1928∼86년) 서울대 교수가 원도를 작성하고 장기은 교수와 함께 조각한 이 부조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요한 14,6),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루가 21,33)는 성서 구절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명의 복음사가가 좌우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됐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손가락 세 개를 펴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의미하며, 품에 안고 있는 지구의는 인간 세상을, 그 위 십자가는 세상 죄에 대한 구세주의 승리를 나타낸다. 아울러 부조 왼쪽부터 사자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사자 함성에 비유하면서 복음서를 시작한 마르꼬를, 독수리는 솟구치는 영감을 글로 담은 사도 요한, 날개달린 남자는 복음서 첫머리에 예수 족보를 추적하고 있는 마태오, 그리고 황소는 주의 제단에 놓은 즈가리야의 희생물을 연상시키는 루가를 상징하고 있다. 혜화동본당은 성당 정면 '최후의 심판도' 바로 왼쪽에 성 베네딕도상을 새겨 기리고 있다. 1961년 김세중(프란치스코) 교수가 제작한 이 작품은 서방 수도생활의 스승으로 불리는 성 베네딕도(480?∼550?)를 단순하고도 기하학적 터치로 표현한 화강석 부조로, 성인이 들고 있는 지팡이와 책은 각각 착한 목자와 하느님 말씀을 상징한다. 성전에 있는 미술품 치고 대가들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기에 명실공히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라고 불리는 혜화동성당. 예술작품에 관한 전문적 식견이 없더라도 경건한 마음가짐과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작품 하나하나를 음미한다면 작가의 손을 빌려 드러난 하느님의 숨결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 200년 역사를 통틀어 대표적 성화 하나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바로 '103위 순교 성인화'(1977년, 285×330㎝)다. 1984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을 계기로 한국교회 공식 성인화가 되다시피한 이 그림이 걸려있는 곳은 혜화동성당 제대 앞 오른쪽 벽면이다.
1976년 박희봉 혜화동본당 주임신부로부터 '103위 순교복자성화'를 의뢰받은 문학진(토마스, 1924년∼) 화백은 10개월 동안 전례·역사·복식 전문가들에게서 자문을 얻고 한국적 주체성을 살려 103위 한분 한분 표정을 특색 있게 그려냈다. 시대와 신분이 각기 다른 순교자들이 기쁨에 가득찬 모습으로 천국 개선을 기다리는 이 그림은 보는 이에게 푸근한 감동과 평화를 안겨준다. 서울 도봉산의 아름다운 산세가 배경이 됐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이 처음 구상될 때는 명동대성당에 있는 '79위 복자(福者) 성화'와 같이 앵베르 주교를 중심으로 순교복자들이 좌우 대칭으로 호위하고 있는 구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문 화백은 "외국인이 중앙에 있으면 주체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박갑성 교수(문 화백 대부) 지적을 받아들여, 원래 외국인 자리였던 가운데에 김대건 신부를 모시고 김대건 신부 자리에 외국인을 옮겨놓았다. 당시 '쿠데타'라고까지 표현된 이 사건은 한국교회 성미술이 토착화 단계에 접어든 것을 상징하는 큰 결실이었다. 혜화동성당 유리그림(스테인드글라스) 29점은 모두 이남규(루가, 1931∼1993년) 교수 작품이다. 1980년 1차로 오른쪽 창에 제작된 유리그림 4점은 각각'나는 길, 진리, 생명이다(332×518cm)''성부''성자''성령'(각 270×230cm)을 주제로 하며, 3cm 두께의 두꺼운 유리를 사용한 달 드 베르(Dalle de verre) 방법으로 제작돼 굴절이나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빛의 효과를 한층 잘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1980년 5월4일자 혜화동본당 주보에서 이 작품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로부터 성부는 둥근 원으로 상징되었는데, 원 속에 파랑·노랑·빨강 삼원색을 배치했다. 이 삼색이 늘 움직이는 생동감을 갖게 함으로써 우주창조의 신비를 나타내려고 했다. 성자는 십자가와 가시관의 고통, 그리고 승리의 월계수로 되어 있다. 성령은 비둘기와 주변의 빛으로 구성했다. 성부·성자·성령은 특별히 성당 내 밝기와 순교자 성화에 주는 영향을 고려해 엷고 단순한 색으로 작업했으며, 가능한 한 강한 색의 효과를 피하였다…." 왼쪽 창과 좌우측 상단 조그만 창 유리그림 작업은 1989년부터 91년까지 진행됐다. 이 유리그림들은 성 베네딕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성녀 소화 데레사, 천지창조 등 매우 다양한 주제로 이뤄져 있다. 혜화동성당 유리그림은 천지창조에서 성령강림에 이르는 구세사를 일정한 선의 흐름과 색조의 조화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성당 전체에 해맑은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평가다. "예술가의 최종 목적은 신이 부여한 자신의 내면적 생명을 드러내는 일이다'라는 작가의 예술관을 온전히 맛볼 수 있는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제대 정면을 바라보면 십자고상과 함께 좀처럼 그 뜻을 짐작하기 힘든 울긋불긋한 그림이 제대 벽면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냥 그림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조각(25×25㎝)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큰 그림을 이룬 도자 벽화임을 알 수 있는데, 작가는 국내 최정상급 도예가인 권순형(프란치스코, 1929년∼) 교수다. 권 교수는 1979년 도자 벽화를 제작하면서 가식적 손질이나 덧붙임 없이 아주 단순하게 처음에 구상한 그대로를 도판에 표현했다고 한다. 5개월에 걸친 각고의 작업 끝에 탄생한 벽화의 주제는 '성사'(또는 신비)로, 우주의 신비에서 시작해 성사생활을 통한 신앙의 성장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벽화에서 황갈색은 풍요로운 밀밭을, 청록색은 심오한 우주 자체와 함께 주님 포도밭을 상징하고 있다. 또 빛의 원천인 야훼 하느님을 상징하는 둥근 태양(원)은 작품의 생명이자 정점이다. 이 벽화는 보는 이가 묵상하는 가운데 그 뜻을 깨닫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으며, 기도하는 성전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을 뒀다. 아울러 이 작품은 성전 오른편에서만 자연 채광이 된다는 점을 고려해 벽면 전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간 돌려놓고, 색깔을 내는 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등 단순한 평면작업이 아니라 포괄적 공간예술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와 누이를 꼭 닮은 성모상(최종태씨 작품)은 절로 편안한 느낌을 준다. 혜화동성당 현관 문을 열고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부활성수대다. 이종상(요셉, 66, 서울대 명예교수) 화백이 1994년 제작한 성수대 위에 예수 부활상(임영선 교수 제작)을 얹은 합작품으로, 그리스도 성혈을 상징하는 암적색 화강석 성수대 위에 황동으로 주조된 상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쓴 채 못자국이 선명한 두 손을 포개 얹고 있는 모습이다. 못자국이 있는 두 손을 크게 강조한 것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함이요, 몸 전체를 상하로 가늘게 과장한 것은 승천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자세히 보면 못자국이 많이 닳아 손등이 반들반들하다. 예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어 그리스도의 고통과 부활에 동참하고픈 수많은 신자들의 손길 때문이다. 5000원권 지폐에 나오는 율곡 이이 영정을 그린 화가로도 유명한 이종상 화백 작품은 또 있다. 교육관 지하 소화성당(소성당) 입구에 있는 성녀 소화데레사상(1993년)이다. 작가가 처음 이 상을 제작할 때는 아주 독창적 작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도중에 강한 계시를 받고 겸손되이 모든 것을 성령의 뜻에 맡긴 채 손만 도구로 삼아 제작에 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 이름도 '성녀 소화데레사 성령상'으로 정했다. 1958년 김세중 교수가 청녹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제대는 당시 본당 사목회장이었던 장면 박사가 본당에 기증한 것이다. 제대의 청녹색과 조화를 이루며 경건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제대 십자가 역시 1958년 김세중씨성전 입구에 있는 부활성수대. 이종상 화백이 제작한 성수대 위에 예수 부활상(임영선 교수 제작)을 얹은 합작품이다. 작품. 제대 왼편 감실은 1993년 최봉자(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가 디자인한 것으로, 중앙의 빨간색은 성체등 즉 성심(聖心)을 나타낸다.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은 혜화동성당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작가 작품이다. 주한 미국대사관에 부임한 남편을 따라온 조각가 핸더슨 부인이 1960년께 장발 교수 자문을 받아 황동부조로 제작한 이 작품은 변형되고 과장된 인체 표현을 통해 극적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과감한 남성적 터치로 예술성을 한껏 살렸다는 평을 듣는다. 성전 바깥으로 나와 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서 있는 성모상은 참으로 푸근한 인상이다. 대다수 성모상이 얼굴 갸름한 서구 미인형이라면 혜화동성당 성모상은 둥글둥글한 아줌마형이라고나 할까. 평소 한국교회 성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라면 이 성모상을 제작한 이가 누구인지를 알아 맞추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바로 최종태(요셉, 72, 서울대 명예교수)씨다. 성미술 토착화의 선구자인 최씨가 1996년 화강석으로 제작한 이 성모상은 철저히 한국 국적을 가진 성모상이다. 성모 마리아가 서양 사람이 아닐 뿐 아니라 작가 자신이나 신자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엄마와 누이 같이 친근한 성모 마리아를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그래서 여느 성모상들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아늑한 느낌이 절로 드는 교육관 지하 소화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감실은 권순형(프란치스코) 교수가 1968년 제작한 것으로, 원래 대성전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성체 안전을 위해 기능적 면을 최대한 살려 견고하게 제작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물고기 세 마리를 새겨 넣음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전달하고 있다. 혜화동성당은 최봉자 수녀의 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의 작품이 많다. 성당 외부 및 소화성당 십자가의 길(1992년)과 소화성당 십자고상과 성체등, 성당 마당 로사리오 기도(1994년) 등이 최 수녀의 손을 빌어 세상에 선보인 작품들이다.
▲ 이화장(梨花莊)-이화동 2번지 일대
신대(申垈)의 우물이라 전하는 곳에서 남쪽으로 낙산을 끼고 내려가다가 몇 길이나 되는 거암이 우뚝 서 있고 이 바위 밑에는 한 줄기 청천(淸泉)이 솟아나는데 이곳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종 이전에 건립되었다는 이화정 주위에는 배나무가 숲을 이루어 봄 한철에는 배꽃이 만개하여 이 곳의 마을 이름이 이화동으로 불리어진 듯하다. 중종 때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이라 칭하던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의 시에 「여기와 놀던 때가 삼십대 청춘, 우연히 옛자취 찾아보고 눈물지었오. 뜰 앞에 배꽃은 피어 있건만, 그 때 함께 놀던 이들 어디로 갔나.」하였다. 이 시는 신잠(申潛)이 기묘년 현량과(賢良科)로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몰리는 바람에 파방(罷榜)이 되어 관직을 빼앗기고 수 십 년 유배생활을 한 후 풀려 돌아와 옛날 놀던 이화정에서 회고한 시이다. 이로 보면 중종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배꽃에 싸여 있어 이화정이라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 정자 이름에 따라 갑오개혁 당시에는 이화정동이라 불렀다. 이 정자는 일제 때 흔적조차 없어졌고, 광복 후 이곳에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이화장이 있어 유명하였다.
※ 신잠[申潛,1491~1554]
본관은 고령(高靈). 호 영천자(靈川子)·아차산인(峨嵯山人). 자 원량(元亮). 신숙주의 증손자이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 검열로 있었으나, 기묘사화로 파직,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장흥(長興)에 17년 동안 유배되었다. 1543년(중종 38) 등용, 사옹원주부·태인현감·간성군수 등을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상주목사를 지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아차산 아래 은거하며 20여 년간 서화에만 몰두하였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저서에 <영천집(靈川集)>, 그의 작품으로 확실한 것은 없지만 <탐매도>와 <화조도>,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 등이 있다.
▲ 우남이승만박사기념관-이화동1-2
이화장은 한국방송대학 뒤쪽 낙산 기슭에 있다. 동쪽으로 창신동, 남쪽으로 충신동, 서쪽으로 연건동, 북쪽으로는 동숭동에 둘러싸인 마름모꼴의 지형을 이룬 언덕진 곳에 위치하였다. 이 가옥은 본채, 별채인 조각당(組閣堂), 그리고 여러 부속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 내외가 살던 곳이고, 조각당은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이 이곳에 조각 본부를 두고 초대 내각을 구상한 곳이다. 이 건물이 자리 잡은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文臣)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 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駱山)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승만이 이곳에서 조각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기거할 집이 없어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당시의 실업가 권영일(權寧一) 등을 비롯한 30여명의 도움으로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돈암장에서 이곳 이화장으로 옮겨서 1947년 11월부터 기거하게 되었다.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8년 7월 경무대로 이사하였다.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끔 이곳에 들러 정원과 뒷산을 산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이곳 이화장으로 이사했고, 5월 29일에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7월 23일에 이화장으로 안치되었다가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화장은 대지 약 5,500㎡, 건평 230㎡인데, 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왼편 앞으로 '우남리승만박사상' 동상이 서있다. 그 뒤 작은 계곡 넘어 'ㄷ'자형의 본채가 있으며, 오른편 언덕 위로 'ㄱ'자형의 조각당이 서있다. 한양 도성의 좌청룡인 낙산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어 서향[卯坐酉向]을 한 본채는 192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본채는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응접실(접견실)과 서재가 있다. 대청마루 왼쪽에는 침실과 부엌이 있다. 본채는 그 자체로는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건물로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통 한옥이 그 시대상을 수용하며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벌대 장대석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7칸, 측면 6칸, 굴도리,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1988년 '대한민국건국대통령우남 이승만박사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역사자료 및 평소에 사용한 기구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본채 서쪽 언덕 아래에는 생활관이 있다. 이화장 본채에서 조금 떨어져 동남쪽 언덕에 막돌 화강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위치한 조각당은 역(逆)'ㄱ'자형의 평면을 한 아주 작은 건물인데, 약간 북쪽으로 튼 서향〔乙坐申向〕을 하였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위치한 1칸 반 온돌방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장마루를 깐 작은 대청 한 칸이 서향하여 있고, 서쪽으로 부엌 한 칸이 딸렸다. 굴뚝은 온돌방 동쪽 밖에 독립하여 서 있으며, 온돌방 앞에는 아주 작은 쪽마루가 놓였다. 기단 없이 네모 화강석 초석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납도리,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내각을 조직하던 당시에 쓰던 돗자리와 나무의자가 있고, 대청마루 처마 아래에는 '組閣堂' 현판이 걸려 있다. 본채와 조각당 주변에는 지형을 따라 가꾼 정원과 산책로가 있다.
▲ 인평대군집터-이화동사무소옆 사거리. 낙산 아래 이화동에 있던 인조의 셋째 인평대군의 집터로 저녁볕을 잘 받으므로 석양루(夕陽樓)라 하였는데, 맞은편에 그 형님 효종이 태어난 조양루(朝陽樓)와 마주 서서 그 집이 몹시 화려하여 장안에서 제일이라 하였으며, 그 후 長生殿이 되었다.
▲ 효제(孝悌)골-이화동 25번지 부근에 있는 마을
선조 때 부제학 柳潚, 승지 柳혁, 교리 柳活 삼형제가 처마를 마주 보고 살면서 그 부모를 봉양하는데, 각기 정성을 다하여 춘하추동 때에 따라 수연을 베풀어 즐겁게 하여 드리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여 그 집을 효젯집, 그 마을을 효제골로 지칭하였다.
▲ 감로암(甘露庵.중광거처)-충신동 15 번지
동대문에서 율곡로를 따라 대학로 방향으로 500m 정도 가다보면, 오른편에 감로암 이정표와 감로암으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길이 있다. 이 골목길을 따라 60m 정도 올라가면, 주택가 사이로 절이 보인다. 감로암은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며, 법당 상량문에 의하면 1927년에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스님이 절을 지은 다음 비구니 혜련스님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건봉사(乾鳳寺)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조계사의 말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이하게도 법당 지하에 우물이 있는데, 아주 맑고 좋아서 절 이름처럼 감로와 같은 맑은 물이 샘솟았었다고 한다. 현재 절에는 법당과 요사가 붙어있는 원통전(圓通殿)이 있다. 이 원통전 안에는 정면에 관음상이 있고, 좌우에 지장보살상과 반가좌한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 관음상은 지불(紙佛)이라고 한다. 불화는 신중탱(1939년)·지장시왕탱·칠성탱 등이 있다. 그리고 입구 측벽에는 「漢陽城內東部駝酪山甘露會創建法堂上梁文」 현판(1927년, 불기 2954년)이 걸려있고, 오른쪽 벽면에는 1924년(불기 2951년)에 조성한 산신탱과 독성탱이 있다.
※ 중광(重光)
중광 화백은 '미치광이 중'을 자처했던 예인이다. 파계와 기행으로 승적을 박탈당한 뒤 유랑하면서 구상, 이외수, 천상병 등과 교유했으며, 선화(禪畵)에서 독보적 세계를 구축했다. 26세에 양산 통도사에서 출가, 득도했고 조계종 종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나 자신의 제사를 지내는 등의 기행으로 79년 10월 파문됐다. 그러나 선화의 영역에서 파격적 필치로 명성을 얻었고, 국내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높게 평가받았다.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에 참석해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한 후 '걸레스님'으로 불렸다. 79년 미국 버클리대 랭커스터 교수가 펴낸 책 <광승>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그로부터 '한국의 피카소'로 상찬받았다. 뉴욕의 록펠러재단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대영박물관 등에 스님의 그림이 소장돼 있다. 스님은 막걸리통에 소주를 담아 벌컥벌컥 마시는 과도한 음주와 줄담배로 건강을 잃었다. 김수용 감독의 '허튼 소리', 이두용 감독의 '청송으로 가는길' 등의 영화에도 주연급으로 출연했다. 건강이 쇠하자 98년 강원도 백담사로 들어가 선수행하며 달마그림에 몰두했다. 백담사의 오현(五鉉) 스님으로부터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라'는 뜻의 '농암'(聾庵)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허튼 소리 하지 마라'는 뜻에서다. 스님은 2000년 곤지암에 너와지붕을 얹은 토막집 '벙어리 절간'을 짓고 들어앉았다. 그리고 5년 만에 처음으로 '괜히 왔다 간다.'는 주제로, 마지막 전시회가 된 달마그림 전시회를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었다.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는 말을 되뇌던 스님은 불구자와 창녀들 틈에서 지내다,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해골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바람'을 화두로 정진했다.
▲ 김수영집터-종로6가 116-1 성마을길
서울 출생. 선린상고를 거쳐 도일, 1941년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했으나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만주로 이주, 8 ·15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다. 김경린(金璟麟) ·박인환(朴寅煥)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6·25전쟁 때 미처 피난을 못해 의용군으로 끌려 나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 후 교편생활, 잡지사·신문사 등을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1959년에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하여 제1회 시협상(詩協賞)을 받았고, 에머슨의 논문집 <20세기 문학평론>을 비롯하여 <카뮈의 사상과 문학>, <현대문학의 영역> 등을 번역하였다. <거대한 뿌리>,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등 2권의 시집과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퓨리턴의 초상> 등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에 간행된 것들이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쓴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이 시인이 가진 작품의 시사적(詩史的) 맥락에 대해 평론가 김현은 “1930년대 이후 서정주 ·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말하였다. 사망 1주기를 맞아 도봉산에 시비(詩碑)가 건립되었고(1969), 미완성의 장편소설 <의용군>이 <월간문학>(1970)에 발표되었다. 민음사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김수영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상하고 있다.
▲ 김상협(金相浹)가-혜화동15-139 혜성교회밑
김상협(1920~1995)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문교부 장관, 제5공화국 국무총리, 국정자문회의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삼양그룹을 창업한 김연수의 둘째 아들이며 인촌 김성수의 조카이다. 본관은 울산으로 전라북도 부안 출신. 삼양그룹을 창업한 김연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를 거쳐 1942년 도쿄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46년 고려대학교 정경대 조교수가 된 후 부교수·교수를 지냈으며, 1960년 학술원회원이 되었다. 1962년 문교부장관이 되었다가 1963년에 고려대학교 정경대 교수로 복직하여 1970년까지 재직하였다. 1967년 동아일보사 이사, 1970년부터 1975년까지와 1977년부터 1982년까지 고려대학교 총장을 두 차례 역임하였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이었고, 1982년부터 1983년까지 제16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1984년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다.
4) 서울대병원
▲ 함춘원지-연건동 28-21. 서울에 함춘원이 셋 있는데,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서쪽,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남쪽 언덕으로, 탑을 둘러쌓고 나무를 길렀는데, 곧 서울중고 정문 맞은편, 나머지 하나는 창경궁 홍화문 동쪽 기슭 곧 서울대 의과대학 뒷산인데, 그 너머에 경모궁이 있고, 원 동쪽은 곧 경모궁의 일첨문(日瞻門), 서쪽은 유첨문(遊瞻門), 북쪽은 유액문(遊掖門), 동북쪽은 좌액문(左掖門), 동남쪽에는 우액문(右掖門)이 있었다. 해마다 봄, 가을에 병조, 공조, 한성부의 낭관들이 본궁 제조와 함께 두루 살펴 보호하였다.
▲ 경모궁터(景慕宮址)-연건동 서울외과대 뒤 밀림 가운데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터로 영조 40년(1764)에 사도세자의 사당을 세우고 ‘사도세자묘(思悼世子廟)’로 하다가, 얼마 안가서 수은묘(垂恩廟)로 고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묘를 올려 경모궁이라 한다. 정조는 자주 이 궁에 참배하기 위해서 창경원 홍화문(弘化門) 북쪽에 월근문(月覲門)을 세우고 정조9년(1787) 8월에 이 궁과 영우원(永祐園:사도세자 즉 장조의 능)의 의식절차를 기록한 궁원의(宮園儀)를 친히 이 궁에 바침. 헌종5년(1839) 12월에 궁내의 봉안각(奉安閣)이 소실되었으나 곧 중건하고 광무3년(1899)에 본 궁 태묘에 이안(移安)하였으며, 궁 주위에 있는 노거수는 대대 정조 때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 명인촌(明人村)-연지동 1번지 부근에 명나라 사람들이 살던 마을. 명이 청에 멸망한 후 명의 지사 黃太守 功, 산동 馮庠生 三仕, 玉庠生 文祥, 王庠生 美承, 서촉 陽庠生 福吉, 大同 裵庠生, 三生, 柳庠生 溪山, 鄭進士 先甲 등이 효종을 찾아 우리나라에 와서 명의 원수를 갚기로 맹세하므로 효종은 잠저인 朝陽樓 북쪽에 살 땅을 주어서, 그 자손들이 계속하여 살았으므로 명인촌이라 한다.
▲ 어애송(御愛松)터-연건동 66번지 부근에 있던 32주의 반송. 영조 43년(1767)에 강릉부사 조진세(趙鎭世)가 심었는데, 정조가 경모궁 참배한 후, 문희묘(文禧廟)터를 구경하기 위하여 우연히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그 아름다움을 표창하여 어애송(御愛松)이라 명명. 현재는 없어지고 터이름만 전해온다.
▲ 구대한의원본관 -연건동 28
1907년에 대한제국 내부 소관의 서양식 병원인 광제원, 학부 소관인 경성의학교 부속병원, 그리고 궁내부 소관인 적십자병원을 통합,설립되었으며, 의정부 직속으로 운영된 국내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다. 대한의원의 편제는 치료부, 의육부, 위생시험부로 구성되어, 지금의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대한의원은 기존 광제원에서 개원했다가 1908년 준공된 본 건물로 이전하였다. 이 건물이 위치한 곳은 마두봉 언덕이다. 이곳은 일찍이 경모궁과 창경궁의 외원이었던 함춘원이 있던 장소이며, 창경궁을 조망할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 함춘원지에 1764년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를 북부 순화방으로부터 옮겨왔으며,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개칭하였다. 대한의원 본관은 1907년 3월 착공되어 1908년 11월 준공되었으며, 이후 부속 건물이 세워졌다. 대한의원은 1910년 일제강점 후 총독부의원으로 되었다가, 1926년 그 부속기관이던 의학강습소가 경성제대에 편입되면서 대학병원으로 개편되었으며,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 되었다. 1979년 서울대병원 신관이 개원함에 따라 본관 주변의 건물들은 1978년에 모두 철거되었다. 본관 건물은 용도 변경되어 병원연구소로 사용되었으며, 1981년 보수공사를 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한의원 본관은 지상 2층, 연면적 1,636.37㎡(495평)으로 세워졌고, 이후 연면적 1,500평 규모의 병동 7동·해부실·의학교 등이 건립되었다. 탁지부(度支部) 건축소에서 설계와 감독을 담당하였으며, 건축소 기사(技師)인 야바시 겐끼찌(失矯賢吉)가 설계를 주관하였다. 본관 건물은 정면과 후면이 각각 완전 대칭으로 건축되었다. 적벽돌과 화강암을 주요 자재로 썼고, 지붕은 동판을 덮었다. 형태는 기념성이 강조되는 고전주의적인 특성을 가진다. 건물 중앙에는 시계탑과 현관 포치가 있다. 현관 포치는 석조 아치형 개구부로 되어 있으며, 자동차가 직접 진입 진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시계탑은 상부와 하부로 구성되었는데, 하부는 적벽돌 벽면과 코너의 장식기둥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으며, 상부는 둥근 지붕(bulbous dome)을 중심으로 화려한 장식으로 처리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은행 본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과 함께 1900년대 초 서울의 3대 명물로 손꼽혔다. 또한, 1900년대 초기 한국에서 건립된 양식 건물 중에서 고전주의양식에 충실하며, 정교한 벽돌조 구조와 섬세한 장식수법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남이장군집터-연건동126.
남이장군이 태어날 때 낙산(駱山)에 풀이 3년이나 나지 않았다 하며, 그 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사당을 짓고 남이장군을 모셨음. 남이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으로 피살된 후 그 사사(嗣祀)가 끊어지고, 이 집에 다른 사람들이 감히 살지 못하여 마침내 채소밭이 되었는데, 하루는 옆집사람이 꿈에 남이장군의 계시를 받고 비로소 남이장군의 사당을 짓고 남이탑을 모셨다고 한다.
▲ 장경교(長慶橋)-연건동 128번지
동쪽에 있는 다리. 이화동에 있는 長生殿의 앞이므로 장경교, 또는 줄여서 장교라 한다.
▲ 이석형생가터-연건동28-21(275?)
연건기숙사입구에 있다. 서울대 의대캠퍼스의 남쪽 끝 부분인 연건동 275번지에는 세조때 좌리공신이요, 정승이며 진사, 초시, 중시, 삼장의 과거에 거듭 장원급제를 한 학자 이석형(1415∼1477)이 살던 집터이다.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으로 집현전 직제학, 춘추관, 기주관 등을 역임하였고,『고려사(高麗使)』편찬에 참여 하였다. 그 후 한성부윤,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좌리공신 4등에 올랐는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그의 집은 시내와 숲이 유수한데 동산 한가운데 이엉을 덮은 정자 몇 칸을 짓고 계일정(戒溢亭)이라 하였는데 연못을 보는 장소가 계일정이었다. 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계일정은 선비사상의 기본정신으로 그는 후손들에게 이름과 권력, 재물과 복을 얻는데, 항상 넘치지 않도록 살라는 뜻에서 수신도구로 연못을 만들었다. 현재 남은 것은 그때 당시에 심었던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 의학박물관-연건동 28번지 서울대학교병원
사적248호로 지정된 <서울대의학박물관>은 1900년대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한국 최초의 국립병원인 '대한의원'이 '서울대학병원'으로 바뀐 곳이다. 고풍스런 분위기를 주는 의학박물관의 벽돌건물과 시계탑이 인상적이며, 삐거덕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면 '4개의 전시실'이 있다. 각 전시실에는 구한말 서양의학 도입을 시작으로 대한의원의 탄생과 병원 역사, 근·현대 의료기구가 있으며, 안과·신경외과·정형외과·이비인후과·일반외과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의료기기이다. "제1,2전시실"에는 동의보감과 의학자료, 의료기기, 왕진가방, 서울대학교병원사, 구한말 조선정부의 서양의학도입, 지석영선생과 의학교, 대한의원의 탄생, 일제시대의 의학, 해방과 현대의학의 여명, 역경 속의 도약, 현대의학풍속도가 있었다. "제3전시실"에는 근·현대의료기구를 전시한 곳으로 심전도기, 검사용 안경테, 칼, 집게, 신경자극기, 헤모글로빈측정기, 소음측정기, 청진기, 현미경, 편도절제올가미, 겸자와 가위류, 산부인과기구, 현미경, 안과기구가 눈길을 끌었다. 특별전시실인 "제4전시실"에는 진기한 옛날 안경들을 한자리에 모은 '안과 의사가 모은 우리 옛 안경' 특별전이다. 하버드 의대 교수를 지냈던 고 김철박사가 생전에 수집한 것들로 150∼200년 전의 어피안경집, 옷칠한 종이 안경집, 무테안경, 피나무안경집, 십장생안경집과 보안경 안경과 안과진료기구를 모은 전시실이다.
▲ 지석영동상-서울대 의학박물관앞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조선 말기의 의사이며 문신, 한글 학자이다. 종두법의 하나인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태원(太原)이다. 흔히 한국 최초의 우두법 시술자로 알려져 있다. 185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많이 읽었고, 제너의 우두법(우두 접종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6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선(朴永善)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 보고 감명을 받았고, 1879년 10월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두 달 간 우두법을 배웠다. 그해 겨울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를 시술하였다. 서울에는 종두장을 설치하였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의 제조법을 배우고 두묘 50병을 얻어서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에는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85년에는 <우두신설>을 저술하였다.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1894년에는 김홍집에 의해 토포사(討捕使)로 동학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1896년에 동래 관찰사가 되어서도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1899년 경성 의학교가 세워진 이후로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07년 통감부에서 의학교를 폐지하고 1908년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할 때 학감이 되었으나 한일합방 후(1910년)에 사직하였다. 이후에는 소아과에서 진료를 하였고, 1915년에는 전선의사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한글과 나라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05년에는 <신정국문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고,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게 하였으며, 1908년에는 국문 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 <자전석요>를 간행하여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로, 종두에 대한 알기 쉬운 서적을 저술하여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고,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 종법을 실시하여 병에 걸린 이들을 구제하였다. 또한, 한글 보급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에는 고종으로부터 팔괘장과 태극장을 받았다.
5) 원남동. 원서동
▲ 고희동집터-원서동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춘곡 고희동(1886~1965)이 41년간 머무르며 작품 활동을 하던 종로구 원서동 자택(등록문화재 84호)도 흉가로 변했다.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옆으로 난 큰길을 따라가면 언덕으로 접어드는 갈림길에 높다란 철문이 나온다. 1918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화가가 대지 529㎡(160평)에 ㄱ자형 한옥을 직접 설계해 지었던 곳이다. 고택은 담장 대신 녹슨 철제 가림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철문 너머로는 낡은 기와지붕이 보였다. 안채도 일부만 남아있고 사랑채도 절반 이상 형태를 잃었다. 현 소유주는 ㈜한샘. 2002년 6월 고택을 매입한 한샘은 3~4층짜리 건물을 신축할 계획이었지만 "근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고택의 멸실을 막아야 한다"는 문화연대와 한옥사랑시민모임의 반대에 부닥쳤다. 서울시가 뒤늦게 매입에 나섰으나 한샘 측과 가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한샘은 2002년 이 집을 살 때 평당 550만~600만원을 지불했다. 한샘 측에서는 "매입 이후 문화재로 지정돼 재산권 행사를 못 하고 있다"며 "서울시에서 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 임규집터-원서동 54
임규(林圭,1867~1948)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익산 출생이다. 일본의 게이오의숙을 졸업하고 경성부에서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그는 같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사전 편찬 모임인 조선광문회를 함께 했으며, 최남선의 권유로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일본어 실력이 능통하므로 도쿄로 이동하여 기미독립선언서와 통고문을 일본 정부와 의회 등 공식 기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2월 27일 최남선에게 선언서와 통고문을 받아들고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일 도쿄에 도착했고, 3월 3일 우송을 마쳤다. 귀국하던 중인 3월 9일에 체포되었으나, 이듬해 10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송진우(宋鎭禹)집터-원서동74
송진우(1889.5.8-1945.12.30)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에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1920년에는 학교설립 모금운동을 하다가 감시하던 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그 뒤 동아일보사장, 고문 등을 역임하며 언론활동에 종사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며 참여를 거부하다가 9월 16일 한국민주당 창당에 가담했고, 한민당 초대 수석총무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론의 입장을 펼쳤다가 한현우 등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하였다. 아호는 고하(古下)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 출신. 아명은 옥윤, 애칭 금가지.
▲ 노수현집터-원서동75
노수현(盧壽鉉,1899~1978)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화가이다. 아호는 심산(心汕)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천도교 계열 독립 운동가 노헌용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조부 손에서 자랐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의 동양화과에 입학하여 안중식, 조석진에게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화가가 되었다. 이상범, 최우석과는 서화미술회 강습소 동기생이다. 이용우, 변관식 등 소장 동양화가들과 함께 동연사를 조직해 활동했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 입상하며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노수현의 화풍은 전통 관념산수화의 이상주의적 맥을 계승하기에 보수성이 강한 편이다. 소재는 심산유곡, 특히 바위산을 즐겨 다루었다. 1923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뒤 동아일보에서도 삽화가로 근무했다. 조선일보에서 연재한 최초의 신문연재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많은 인기를 모았고 영화화되기도 했다. 1934년 5월부터 17월까지는〈머저리와 문여리〉시리즈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명랑 시리즈물은 미국의 매기와 지그스(maggie and jiggs) 시리즈와 그림체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것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을 설립하고 교수를 지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하고 은관 문화훈장도 수상했다. 서울대에서 제자를 많이 양성하여 대한민국의 동양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몰골준법이나 우점기법을 말년에 고안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잡지 <신시대>에 만화 <멍텅구리>를 통해 전쟁 지원을 역설하는 등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5년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반면 노수현의 한국화가 조선 산수화의 민족적 전통을 잇고 있으며 주제 의식이 자주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 관상감터-원서동 206번지.
관상감(觀象監)은 조선시대에 존재하였던 기구로, 천문학, 지리학(地理學)·역수(曆數 : 책력)·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1425년(세종 7년)까지 존재해오던 서운관(書雲觀)을 개칭하고, 관원 20명을 선발하여 천문을 익히도록 하였다. 연산군 때 시력서(司曆署)로 개칭하였다가 중종 때 다시 관상감으로 복구하였다. 한말까지 이어진 후 1894년(고종 31년) 관상소(觀象所)로 개칭하였다. 경복궁 재건 후 통의동 7번지로 이건하였다.
▲ 사도시터(司導寺址)-원서동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던 어름(御廩)의 미곡 및 내공(內供)의 개장(芥醬)들의 일을 맡은 곳으로 궁안 창고의 쌀과 궐안의 장(醬)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1392년(태조 1) 7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요물고(料物庫)를 그대로 두었다가, 1401년(태종 1) 7월 관제개혁 때 공정고(供正庫)로 고쳤으며 다시 사도시로 이름을 바꾸었다. 〈성종실록〉의 1478년(성종 9) 8월 기록에 사도서(司署)가 나타나고, 세조가〈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할 무렵 본래 5품아문이었던 사도시를 3품아문으로 올린 것으로 보아 1478년 8월 이전에 공정고가 사도서로 바뀌었고, 그 뒤 다시 사도시로 고쳐진 것 같다. 관원으로 제조(提調) 1명, 정3품 정(正) 1명, 종3품 부정(副正) 1명, 종4품 첨정(僉正) 1명, 종6품 주부(主簿) 1명, 종7품 직장(直長) 1명을 두었다. 이속으로 서원 8명, 고직(庫直) 3명, 군사 1명을 두었다. 조선 후기에 정·부정·직장 등이 없어졌으며,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 관천대-원서동 206-2(와룡동 2-1)
관상감관천대(觀象監觀天臺)는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광화방(廣化坊) 소재 관상감(觀象監)이 있던 자리에 설치된 관천대이다. 즉, 천문현상을 관측하기 위해 관상감에 설치하여 관측기구를 올려놓던 대(臺)이다. 관측기구로서 소간의(小簡儀)를 올려 놓았다고 하여 소간의대(小簡儀臺)라고도 하고, 별을 관측하는 대라는 의미로 첨성대(瞻星臺)라고도 한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왕립 중앙천문기상대로서 서운관(書雲觀)을 두었고, 그 관측시설로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하였다. 조선 초기에 서운관은 경복궁과 북부 광화방 두 곳에 있었다. 서운관은 천문·지리·측후·물시계와 관련된 일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조선 세조 12년(1466년)에 관상감, 고종 31년(1894년)에 관상소, 1907년에 측후소로 바뀌어 현대식 시설을 갖추기 시작할 때까지 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 전기, 세종은 천체관측기구인 간의(簡儀), 그것의 축소형인 소간의·규표(圭表)·해시계·물시계 등 천문기기를 개량하고 발명하는 일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경복궁의 서북쪽에 거대한 관천대인 대간의대를 설치하는 한편, 아울러 소규모의 관천대인 소간의대를 광화방 서운관과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설치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경복궁의 대간의대는 창설이후 여러 번 개수되면서 왕립 중앙천문대로서 동양 최대 규모와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추었고 그것은 외국 사신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간의대는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파괴되었고, 소간의대 역시 현재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관천대로는 관상감관천대가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관천대가 있던 곳은 한성 북부 광화방의 관상감자리로,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전 휘문고 교정이 되었으며, 1980년대부터는 현대건설의 사옥이 들어섰다.
관상감관천대는 제작연대 등에 대한 명문이 없지만, 세종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관천대가 위치한 곳이 창덕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그 옛 이름이 운현이었고, 그 언저리에 대원군의 저택인 운현궁(雲峴宮)이 있다. 이렇듯 운현(雲峴)은 서운관(書雲觀)의 명칭에서 연유된 것으로 옛 서운관의 자리가 현재의 위치일 개연성이 있다. 이로부터 관상감관천대는 세종 16년(1434년)에 서운관(관상감)에 설치된 소간의대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관상감관천대는 다듬은 돌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돌로 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관천대는 현대사옥의 건립과 더불어 조사와 정비가 거듭되어 1982년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고, 1984년에는 원위치에서 완전 해체 복원되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의 기록보고에 따르면, 관천대 위 중앙에 십자선이 그어져 있는 관측용 대석의 방위는 353°로서 진북(眞北) 방향에서 7°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자북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또한 관천대 구조물의 방위는 6°로서 진북 방향에서 6°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따라서 대석의 남북선에서 13°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한국불교미술박물관-원서동 108-4번지
한국불교미술박물관은 1993년 7월 21일 문화체육부(현 문화관광부) 등록 제55호 제1종 박물관으로 안동권씨감은사종중(安東權氏感恩祠宗中)에서 설립, 개관하였다. 안동권씨감은사의 대표 권대성(權大城)이사장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불교미술품이 열악한 보존 상태로 시중에 유통되고, 심지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전통불교미술품을 수집, 보존, 연구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1970년부터 불교미술품을 포함한 문화재를 수집해 온 바, 그 중 불교미술품 약 500여 점을 본 박물관에 기증하여, 한국불교미술박물관을 설립하고 관장에 취임하였으며, 불교미술품을 전시하는 전문박물관(專門博物館)을 지향하고자 한국불교미술박물관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한국불교미술박물관은 현재 불상, 불화, 공예, 조각, 도자 등 총 6,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바, 그 중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 1204호 의겸등필수월관음도(義謙等 筆水月觀音圖)와 보물 제1210호 청량산괘불탱(淸凉山掛佛幀)이 있고, 서울시 지정문화재로는 제123호 아미타삼존괘불탱(阿彌陀三尊掛佛幀)이 소장되어 있다. 소장유물 중 특히 의 겸등필수월관음도(義謙等筆水月觀音圖)는 1998년 6월 7일부터 익년 1월 24일까지, 미국 뉴욕 소재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한국실 개관기념으로 출품, 전시되어 우리불교미술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세계에 심어주었다. 2002년 5월에는 2002한일월드컵 개최를 맞아 ‘제1회 조선불화특별전’을 개최하여 본 박물관 소장유물 중 엄선한 23점의 조선불화를 소개함으로써 내외국관람객이 도심 속에서 단 아한 조선불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 배오개(梨峴)-인의동 112
지금의 해운항만청 동쪽에 있던 고개를 배오개, 한자로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인의동·종로 4가·예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을 이 배오개가 있으므로 해서 그 이름을 역시 배오개 혹은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이 고개의 명칭 유래는 예전 이 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나무고개, 배고개라 하다가 세월이 가면서 음이 변하여 배오개가 되었으며, 한자로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한다.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예전 이 고개는 숲이 매우 울창하여 대낮에도 고개를 넘기가 무서워 길손 백 명이 모여야 넘는다고 해서 백고개 혹은 백재라 하였는데, 백고개가 음이 변하여 배고개가 되었으며, 다시 배오개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고개에 숲이 무성하여 짐승과 도깨비가 많다 하여 도깨비고개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배오개는 지금의 배오개길이 지나는 곳으로, 길을 넓히면서 평탄해져 고개의 흔적이 없어졌다. 배오개길은 종로 4가에서 중구청을 거쳐 동국대학교 입구까지의 폭 25m, 길이 950m의 도로로서, 이곳에 배오개가 있으므로 해서 배오개길이라 이름 지어졌다. 인의동 112번지와 48번지 일대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이현궁(梨峴宮)이 있었다. 이현궁의 명칭은 말할 것도 없이 부근에 배오개, 즉 이현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현본궁(梨峴本宮)이라고도 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 2년(1610) 세자빈의 간택이 있은 후 새로 수리하고, 가례(嘉禮) 전에 옮겨 머물게 하는 별궁으로 삼았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인조 원년(1623)에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비(妃)인 연주부부인 구씨(連珠府夫人 具氏)의 거소로 하면서 궁의 명칭을 계운궁(啓運宮)으로 고쳤다 한다. 후에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집이 없어진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을 이 궁에 거처하게 하였으며,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가례(嘉禮)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숙종 때에는 숙빈방(淑嬪房)이 되었고, 숙종 37년(1711)에는 연잉군(延仍君: 후의 영조)의 잠저(潛邸)를 이 궁 안에 두기도 하였다. 정조 때에 궁이 폐지되고 그 건물을 중심으로 장용영(壯勇營)이 설치되었다가 장용영의 폐지와 함께 훈국(訓局), 동별궁(東別宮), 선혜청(宣惠廳), 동창(東倉) 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현재 인의동 112번지는 해운항만청이 들어서 있고, 전매지국이 있던 48번지 일대는 1987년 4월부터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에서 사용하고 있다. 배오개하면 배오개시장을 떠올릴 만큼 예지동·인의동에서 종로 5, 6가에 이르는 지역에는 배오개시장이 서서 종루 앞 시전상가,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이름나 있었다. 배오개시장은 말할 것도 없이 인근에 배오개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배오개시장은 갖가지 상품이 갖추어진 큰 저자였다. 이곳의 상인들은 동대문을 통하여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곡물·과실·채소·포목 등을 위탁받아 판매하기도 하고, 그것을 중개하는 객주노릇을 겸하거나 지방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정부가 주도하는 시전(市廛)을 설립하게 되는데, 정종 원년(1399)∼태종 14년(1414)까지 4차례에 걸쳐 행랑(行廊) 1,369간(間)이 세워졌다. 이들 시전은 독점판매권을 갖고 있었으며, 서울시민의 생필품 및 관수품의 조달과 함께 중국에 보내는 진공품 등을 공급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상거래를 엄격히 단속하여 한 시전에서 한 가지 물품만을 취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규칙이 엄격하여 등록된 상품만 거래하였으며, 다른 상품을 거래할 때는 난전(亂廛)이라 하여 엄격히 처벌하였다. 대신 시전을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6가지 주요 생필품을 취급하는 시전들이 각각 조합을 만들어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으며, 이들 육의전은 세금과 국역을 맡는 대가로 독점판매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관청의 허가를 받은 이러한 시전 외에도 주로 도성의 외곽지역에서 행상과 노점상들이 모여 비정규적인 소규모 시장을 꾸려 나갔다. 이러한 민간상인들은 특히 남대문 밖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 배오개, 마포 등지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꾸준히 펼쳐 16세기에는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임진왜란후 한성에는 ‘동부채칠패어(東部菜七牌魚)’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것은 동대문 근처 배오개에는 채소와 과일이 많고, 칠패에는 생선이 많다는 뜻이다. 이처럼 시전상인 외에 민간상인들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 사상도고(私商都賈)로 성장하였다. 사상도고는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도매상인데, 생산과정을 장악하여 독점적인 매점행위를 하는 것으로 배오개와 칠패시장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와 금속화폐의 유통이 일반화되면서는 쌀과 무명 등을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삼던 종전의 상업질서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같이 활발해진 상거래를 밑거름으로 하여 객주(客主)·여각(旅閣) 등으로 불리던 민간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여 제도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던 시전의 금난전권에 도전하여 격렬한 상권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조 15년(1791)에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시행됨에 따라 배오개와 칠패의 상인들은 활동범위가 넓어졌으며, 일반상가로 공식 인정받아 번성기를 맞게 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歌)」가운데, 이현(梨峴)과 종루(鐘樓) 그리고 칠패(七牌)는 온갖 공장(工匠)과 상인들이 모이는데, 도성에서도 유명한 3대 시장이라 많고 많은 물화를 따라 수레가 줄을 이었네라고 하는 글을 보면 이현시장(배오개시장)은 종루 앞,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개항이 되고 외국 문물이 밀려들자 기존의 재래시장들이 변혁을 맞게 되었으며, 특히 일본상인들의 진출로 조선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1905년에 박승직·김종한·장두현·최익성 등이 자본금 78,000환으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개항 후 격변기에 가까스로 파산을 면한 배오개시장과 종로상가의 상인들이었다. 광장주식회사는 188개의 점포로 구성되었다. 상인들은 종로 5가 쪽과 청계천 쪽 양편에 행랑을 짓고, 두 건물 사이에 또 한줄의 상가를 세웠다. 사람들은 이를 배오개시장 혹은 광장시장이라고 불렀는데, 이 시장은 당국으로부터 허가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장이었다. 광장시장이 특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량리에서 서대문까지 운행되던 전차의 정거장이 광장시장 입구인 지금의 종로 5가 지하철역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에도 광장시장은 서울의 대표적 시장이었으며,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광장시장은 그 명성을 자랑하였다. 1959년에는 김긍환 등이 중심이 되어 광장시장에서 동쪽으로 훈련원로 건너편 부지에 연건평 5,700평의 새 건물을 신축하였다. 새 시장을 기존의 광장시장과 구별하여 동대문시장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는 동대문시장의 전성기였다. 이 시장에서는 포목·의류·생선·정육·야채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1만여 점포에 하루 평균 20여 만 명의 고객이 몰렸다 하며 밤에도 장사를 하여 야시장으로도 이름났다. 동대문시장은 전국 어느 곳과도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물건이 매우 풍부하여 “돈만 주면 고양이뿔도 판다”는 우스개소리도 생겨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는 그 형세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평화시장·중부시장·경동시장·노량진시장 등이 곳곳에 생겨나 점차 시장이 전문화되어 갔고, 또 대형 백화점들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70년 정시봉 등은 동대문 서남쪽에 있던 전차차고 부지 6,300평에 현대식 6층 건물로 새로이 시장을 세우고 이를 동대문종합시장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넓은 의미로 광장시장·동대문시장·동대문종합시장을 포괄하고 있는 동대문시장은 그 뿌리를 배오개시장에 두고 있다. 오늘날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동대문시장은 포목 등의 거래에서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꼽힌다.
▲ 이현궁터(梨峴宮址)-인의동 112번지 광해군의 구궁(舊宮)터. 인조원년(1923)에 그 생모 연주부인 사판을 이안하고 궁호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다가 숙종 때에는 숙빈방(淑嬪房)이 되고, 숙종37년(1711)에는 연잉군(延礽君)의 저택도 이 안에 두었다. 지금은 서울 전매지청이 되었다.
▲ 국립서울과학관-와룡동 2번지
6) 용두동, 청량리지역
▲ 선농단(先農壇)-제기2동 274-1
▲ 보제원터-제기2동 148-5
▲ 영풍정터-동대문밖
▲ 한의학박물관-용두동 787번지 동의보감타워 B2
▲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전농동 90번지
▲ 세종대왕신도비-청량리동 산 1-157
▲ 영휘원 숭인원
무덤에는 ‘원(園)’이라는 것이 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여 묻히면, ‘능(陵)’이라 하고 왕자나 후궁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였다. 그러나 왕이나 왕비에서 폐위 되었을 경우는 아예 일반 국민과 같이 ‘묘(墓)’라 불렀다. 동대문구 지역에는 영휘원이니 숭인원, 휘경원 같은 것이 있었다. 영휘원(永徽園)은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嚴氏:1854~1911)의 무덤으로 옛 홍릉(청량리동) 바리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순헌귀비 엄씨는 조선조 철종5년 엄진삼(嚴鎭三)의 맏딸로 태어나 8세에 입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명성황후는 그 당시 철저히 배일(排日)하며 친러정책을 썼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은 몰래 자객을 경복궁에 잠입시켜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오늘날 덕수궁 근처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니 이를 ‘아관파천’ 이라 한다. 지금도 러시아 공사관터와 덕수궁의 정관헌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당시의 급박했던 나라 안팎의 정세를 대변해주고 있다.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셨던 분이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던 엄씨. 엄씨는 결국 순헌귀비로 명성황후 뒤를 이으니, 영왕(英王:李垠)를 낳게 된다. 엄귀비는 고종을 모시면서 신교육, 신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양정의숙(1905년:양정고등학교)과 진명여고(1906년)를 잇따라 설립하고 신명여학교(현 숙명여고) 설립에도 거액을 기부하는 등 근대교육의 도입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11년 7월 20일, 덕수궁에서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 8월2일 청량리에 묻히니 영휘원(永徽園: 사적 제361호)이다. 또 엄귀비가 잠들고 있는 영휘원 경내에는 엄씨의 손자 이진(李晉:1921~22년)의 무덤인 숭인원(崇仁園)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조선조 말, 대한제국의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헤이그 밀사 사건이 있자 일제는 재발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황태자(李垠)를 일본으로 볼모로 데려간다.(당시 고종황제의 뒤를 이은 순종황제는 후손이 없어 이은을 황태자로 삼으니, 의민황태자(영왕)였다. 영왕은 결국 일본에서 일황실의 마사꼬(方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영왕은 그때 이미 결혼을 하기로 한 민가방 여사가 조국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의 절손을 목적으로 일황실 안에서 애기를 못 낳는 불임 여자를 골라 결혼시킨 것이 바로 마사꼬 여사. 그러나 그사이에서 황손이 태어났으니 바로 진(晉)이었다.(마사꼬를 불임의 여자로 추천했던 일황실 전의는 활복 자살하고 만다.) 1922년 4월, 영왕은 진의 백부인 순종황제에게 결혼보고 겸 모국 나들이로 진과 함께 일시 귀국, 같은 해 5월 8일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출국 하루 전인 5월 7일 새볔, 진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게 된다. 부모나 형보다 일찍 죽으면 효도가 아니어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것이 우리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순종황제는 억울하게 죽은 어린 진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특별히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고, 조모(엄귀비) 곁에 묻히도록 하니 숭인원이다. 살아 생전에 근대화교육에 열정을 쏟았던 엄귀비의 넋 탓일까…, 영휘원 주변에는 과학기술원을 비롯 대학교, 각종 연구원, 벤처벨리가 ‘영휘원(永徽園)’의 글 뜻처럼 길게 아름답게 에워싸 원을 그리고 있다.
▲ 회기동(回基洞)
연산군(燕山君). 조선조 제10대왕으로 재위는 1494~1506년으로 12년간이다. 성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왕후(貞懸王后)이다. 정현왕후는 당시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뒷날, 11대왕 위에 오른 중종이 있었으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에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그의 성격이 무도함을 알면서도 그냥 세자로 삼았다 한다. 1494년 12월, 성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는데, 그의 재위 12년은 초기의 서너해를 빼고는 피비린내로 얼룩진다. 연산은 500년 조선왕조의 가장 일탈적인 군주로 손꼽히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연산군일기(燕山日記)의 편찬자들이 폐주(廢主)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어서 그의 악행을 과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격의 포악함과 잔인함, 성애(性愛)에 대한 엽기적인 집착, 그런 탈규범을 때로는 다듬고 때로는 강화한 시심(詩心)등이 이간 연산의 이미지를 이룬다.
'연산군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황음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담근질 하기, 가슴 빠개기, 토막토막 자르기,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 형벌이 있어서.'운운하는 말로 쓰여 있을 만큼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연산은 무오년(1498년)과 갑자년(1504년)에 두차례 사화를 일으켜 서울을 인간 도살장으로 만들었다. 그 사화의 화살은 당시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류(士類)와 한때 그의 지지자였던 훈구파만 아니라, 그의 조모 인수대비를 포함한 자신의 친ㆍ인척들에게까지 겨누어졌다. 그의 화살은 또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겨누어졌으니, 연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폐비에 찬성, 동조했다 해서 부관참시를 당한 한치형 한명회 등이 그 보기다. 연산의 성격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불우했던 성장기에 뒤틀린 것인지는 인류 지성사를 관통해온 선천성 대 후천성 논쟁의 한 케이스가 될 법하다. 어찌되었던, 성종조에 그의 생모가 폐비가 되어 사약을 마시고 죽은 뒤, 성밖 양주고을 천장산 기슭에 능(陵)이 아닌 묘(墓)로 쓸쓸히 묻혀 있다는 사실을 연산군은 알게 된다. 그래서 1504년(연산군 10년)에 그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묘(懷墓)를 능으로 승격, '희릉(懷陵)'이라 하고 석물 등을 크게 수축했다. 그래서 이곳 땅이름도 회릉말(懷陵洞)이라 불렀다. 그러나 폭군인 연산군이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어 강화교동(喬洞)섬으로 유배, 그 해 11월에 죽임을 당하면서 이곳 회릉도 회묘로 격하되었다(회묘는 현재 서삼능 경내에 있음). 때문에 땅이름도 회릉동에서 회묘동 또는 회묘터-회터(懷基)로 불리게 되었다. 이 '회터마을(懷基洞)'을 일제가 우리 국토를 유린하면서 회기동(懷基洞)의 품을 '회(懷)'자가 어렵다는 이유로 돌아갈 '회(回)'자로 바꾼 것이 오늘의 회기동(回基洞)이다. '회기(懷基)'에서 '회기(回基)'로 창지개명한 것이다. 폐비 윤씨가 한(恨)을 품고(懷)고 돌아가(回) 회묘(懷墓)요, 회기(回基)일까! 그 한이 아들(연산군)에게까지 품어져(懷) 아들 역시 천수를 다 못하고 돌아가(回)., '회(懷)'가 '회(回)'로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