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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와 초의선사 이야기.
조선시대 이름 있는 세거지(世居地)의 고택들을 찿아 다니다 보면 공통적인 점 중 하나가 경제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넓은 경작지가 가까이에 반드시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과 다르게 모든 경제적인 바탕은 토지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찰도 마찬가지이다.
규모가 큰 사찰은 그에 걸맞는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고, 뛰어난 스님들의 불력(佛力)이 뒤따랐음을 알 수 있다.
해남 옥천평야와 삼산벌을 곁에 두고 있는 대흥사는 두륜산 깊은 곳에 오랜 세월 동안 전란(戰亂)도 피해 온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두륜산의 여덟 봉우리가 감싸고 있는 모습은그 산세가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으로 보이고 있어 경이롭기도 하다.
사찰을 찿아 가는 길은 걸어 가야 한다.
큰 절일수록 주차장이 여러 곳에 있는데 가급적이면 첫번째 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고 오래동안 천천히 걸어 절로 들어 가야 기쁨을 두 배로 느낄 수 있다.
살아가며 무심코 지나쳤던 수 많은 것들에게서
생각을 머물게 하는 마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나뭇잎을 뚫고 비치는 햇살이,
길 가 잡초들 속에 고개 숙이고 있는 가냘픈 들꽃,
어린 나뭇가지 비벼대는 바람 소리와 함께
발치에 떨어지는 나뭇잎 서너 장, 그리고
투명한 계곡물에 잠겨 있는 오래된 낙옆의 모습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맑은 계곡물을 따라 이어지는 해묵은 나무들, 벚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동백나무, 측백나무, 삼나무의 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어 마을 이름인 구림리(九林里)에 잘 어울리고 있다.
묘향산 보현사에 주석(駐錫)하고 있었던 청허당(淸虛堂:1520~1604)
휴정(休靜)대사는 입적을 앞두고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하였다.
"그곳이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종통(宗統)을 이어갈 곳이다"라고 했다.
불가(佛家)에서 가사와 발우를 받는다는 것은 법맥(法脈)을 물려받는 적자(嫡子)가 된다는 뜻이다.
그 이후 한적한 바닷가의 조그만 사찰에 불과하던 대흥사는 휴정의 법맥을 이어가면서
13대 대종사와 13대 대강사를 배출한 선종의 대표적인 승보(僧寶) 사찰로 발전해 왔다.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아울렀다는 뜻이다.
이전에 계속 언급해 왔던
아함(兒菴) 혜장(惠藏)스님은 12대 대강사이고 초의(草衣)선사는 13대 대강사 이다.
대흥사 입구에 들어 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기와담에 둘러 쌓여 있는 승탑밭이다.
이곳에는 청허당 휴정과 역대 종사를 비롯한 고승들의 승탑 50여기와 14기의 탑비가 지나 온 역사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을 통한 해탈을 얻기 위해 자신과 무던히도 싸워 왔을 수 많은 수행승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경외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장소이다.
입구가 잠겨 있어 가까이 가 보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이지만 연담스님의 비석과 초의선사의 승탑을 알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사진으로만 보아 온 휴정 대사의 승탑에서 상륜부 양식이 특이하여 보고 싶었는데 맨 뒷쪽에 있어서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산간 분지에 자리 잡은 대흥사의 가람 배치는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을 두고 북원과 남원으로 나누어 당우가 배치되어 있다. 해탈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해탈문이 남원에 있기 때문에 전각 배치에 혼란이 올 수 있어, 금당천을 따라 들어가 왼쪽의 대웅보전 구역을 보고 남원구역과 표충사 순으로 살펴 보아야 한다.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 글씨이며 왼편 백설당에 달려 있는 "무량수각" 글씨는 추사 김정희 글씨인데,
전에 쓴 "조선 서예가 이야기"에서 소개한 얽힌 일화가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있다.
남원의 가허루의 현판 글씨가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니, 대흥사는 조선 후기 3대 서예가의 글씨가 모두 있는 곳이 된다.
특히 동갑네기인 초의와 추사는 오랬동안 교유하였고, 초의차를 좋아했던 추사는 많은 작품을 초의에게 답례로 주었었다.
200년의 세월에다가 일제시대를 거쳤으니 외부로 어찌 많이 유출되지 않았겠는가.
가허루를 지나 천불전에 가면 중앙에 목불로 조성된 삼존불 뒤로 천개의 불상이 있다.
1813년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 윤우선사가
천불전을 중건하고 화순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楓溪)대사의 주도 아래 대흥사 스님 10명이 6년 동안 경주에서 불석산 옥석으로 직접 조성하였다. 운송 과정에서 뱃길을 이용했는데 옥불을 실은 2척 중 한척은 풍랑을 만나 일본에까지 갔다 오는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에는 옥불에 가사를 입히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후세에 들어 가사불사가 이루어졌다.
천불전 현판 역시 원교의 글씨이다.
남원(南院)의 넓은 공간에는 초의선사가 조성했다는 무염지(無染池)가 있다.
연못은 선(禪)과 관계가 있다.
연못에 핀 연꽃을 보며 향 피우며 차를 끓이는 분향전차(焚香煎茶)의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추구하였던 초의선사이고 보면 그가 남긴 흔적이 당연한 것 같다.
무염지를 지나면 초의선사 동상이 있다.
다산의 제자 황상이 1849년에 일지암으로 초의선사를 찿아 간 적이 있었다. 눈처럼 흰 머리털과 주름진 살갗이었다는 기록이 생각난다.
검은 모습의 동상을 쳐다 보면서 그의 행적이 떠올라 참 열심히 인생을 살은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보관 앞뜰에 있는 넓은 잔디밭 위에 화강암 지붕돌에 검은 몸돌로 된 "동다송 기념비"가 웅장하게 세워져 있다. 10년이 되어 가지만 언제나 그 위용의 모습이 사라질지....
대흥사에는 특이하게도 사당(司堂)이 있다.
우리 민속 신앙의 하나인 삼신각(三神閣)이 있는 것처럼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고 조사각(祖師閣)으로 생각해도 되겠다.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 그리고 괴묵당 처영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禪風)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에 건립되었다.
1789년에 정조대왕이 친필로 내린 "表忠司"와 "御書閣" 이란 사액현판이 있는데 글씨체가 힘이 있으면서도 단정하고 단아하여 정조의 성품이 담겨있는듯 하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선조의 부름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을 모아 전공(戰功)을 세웠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시작된 숭유억불 정책은 이로 인해 많이 누그러졌으나 승려의 수(數)를 제한하고 과도한 재물을 바쳐야 되는 도첩제(度牒制)는 여전했으며, 승군(僧軍)을 상비군으로 삼아 산성을 지키게하고 각종 성이나 궁궐을 축조하는데 동원되어 대부분의 승려는 고달픈 삶을 살았다.
휴정은 불법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말씀이라."하고
(禪是佛心 敎是佛語)
사람에게는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기 때문에
노력하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선(禪)과 교(敎)의 관계에 있어서
선은 보고 느끼는 것으로 가섭존자의 길이고,
교는 배우는 것으로 아난존자의 길이라 하여 선을 우선으로 한 후 교를 따르라고 했다.
이번 대흥사 방문은 초의선사의 자취를 살펴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표층사에서
가파른 길을 30~40분 올라가야 하는
일지암(一枝菴)을 찿았다.
일지암은 나뭇가지 하나에 깃들어 살다는 뜻이니 일속산방(一粟山房)과 마찬가지로 작고 좁은 곳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초의 선사는 지금은 폐찰이 된 나주의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15살 때 벽봉 민성(碧峯 敏性)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깍고 의순(意恂)이란 법명을 받았다. 그리고 대흥사에서 연담스님의 법제자인 완호(玩虎)에게서 수계(修戒)와 초의(草衣)란 법호를 받았다.
초의의 자(字)는 중부(中孚)인데 "안에서 믿음이 나오는 것"이란 의미로서 다산 정약용이 주역(周易)에서 인용하여 지어 주었다.
우리 차 문화의 성지(聖地)가 된 일지암은
초의(1786~1866)가 예전에 버려진 암자 터에 1829년 도암(道菴)이란 암자를 지었다가, 이듬해 1830년에 다시 좀 더 규모를 갖춰 지어 일지암이란 현판을 달고 준공하였다.
초의 선사가 일지암으로 은둔하게 된 경위를 쓴 글이 신헌(申櫶 :1811~1884)의 금당기주(琴堂記珠)에 실려 있다.
국조 중엽 이래로 교강(敎講)이 성해지고 선강(禪講)이 시들해졌다. 똑똑한 자는 오로지 교학(敎學)에만 힘을 쏟아, 글 뜻이나 지리하게 풀이하고 훈고나 하려 들며,
학구(學究)가 되어 경전으로 살아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멍청하고 답답한 무리들이 만년에는 모두 수좌로 일컬어진다. 의순은 이를 병통으로 여겨, 배움이 이루어지자 이를 버리며 말했다.
"무당할멈이 우리 부모를 그르쳐서 머리를 깍아 중이 되었으니,
이미 한 차례 죽은 셈이다.
또 누가 능히 목을 꺾고 고개 숙여 책 속으로 나아가 좀벌레로 죽고 반딧불로 마르게 하겠는가?"
이에 책 상자를 뒤져 여러 소(疏)를 초한 것과, 풀이를 베껴 쓴 것을 죄다 불살라버렸다. 다만 '선문염송집'과 '전등록' 2부와 한산과 습득의 시 각 1권, 고려 진정국사 천책의 시 등 모두 몇 권만을 취하여 동학들과 더불어 작별하고, 해남현 두륜산 속으로가서, 넝쿨과 바위가 쌓인 가운데 집 한 채를 얽고서 일지암이란 편액을 달았다.
당시의 풍광과 공간 배치에 대해 1835년에 기록한 진도 남종화의 시조(始祖)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3)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839년에 초의와 동갑인 진도 사람 속우당(俗愚堂)이란 사람도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菴序)"란 글에서 일지암을 자세히 묘사했다.
"뜰 가운데 아래위로 못을 파고,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절구통을 놓아두었다.
대통을 이어 구름 샘을 끌어 왔다.
무성한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뒷쪽에 과원(果園)을 가꾸고 앞에는 채마밭을 만들었다.
맑은 물 한 줄기가 바위 사이로 솟아 올라 채마밭 앞으로 남실 남실 흘러나온다. 또 연못 위에는 나무 시렁을 설치해서 몇 그루 포도 넝쿨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양옆의 흙 계단에는
기화이초를 심어 봄빛을 아껴 희롱하니, 마치 속세 사람을 비웃는 듯하다."
초의는 이후 만년까지 일지암에서 지냈다.
신헌이 '초의대종사탑비명'에서 일지암 가운데서 세상을 떴다'.라고 하였으나,
초의의 법제자 범해(梵海) 각안(覺岸)은 '초의선백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을축년(1865년) 7월 초이튿날 쾌년각(快年閣)에서 입적하였다. 처음에 일지암에서 은거하였고, 나중에 겨우 몸 하나 들일 만한 굴을 얽은 것은 용마암(龍馬菴)이며, 몸을 마칠 움막으로 세운 것이 쾌년각이었다."
당대에 대선승으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암자에서 토굴로, 토굴에서 움막으로 거처를 줄이고 줄여 세상을 마친 것은
선(禪)의 정신을 보여 준 것이다.
초의는 다산의 제자였다. 시문에 능했으며, 유가 경전에도 해박했다. 불경과 선(禪)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고, 그림마저 능했다.
다산은 초의의 이런 재능을 아꼈고 널리 알렸다.
1830년 9월, 초의는 스승인 완호 스님의 삼여탑을 세운 후, 명(銘)과 서문을 받기 위해 서울 걸음을 했다.
조선시대 비문(碑文)은 당대 이름난 문장가와 서예가에게 의뢰해 새기는 것이 관행이었다.
답례품으로 보림사 죽로차를 가지고 갔는데 적은 양이 아니었을 것이다.
말을 타고 노새에는 떡차(茶)를 가득 싣고 서울 길을 가는 47살의 초의 모습이 상상된다.
초의는 다음해인 1831년 8월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명사들과 교유를 이어갔다.
특히 박영보(朴永輔 : 1808~?)는 우연히 다른사람을 통해 초의의 수제차를 맛본 후 그 맛에 반해 '남차병서'란 시를 지어 초의에게 인사를 청하고, 그의 스승이며 시, 서, 화 삼절(三絶)로 불리우는 자하(紫霞) 신위(申緯)도 소개시켰다.
1831년 1월에 초의는 북선원(北禪院)의 다반향초실(茶半香初室)로 신위를 찿아가 서문을 부탁했고, 해거도위 홍현주에게는 명시(銘詩)를 부탁하면서 보림백모(寶林白茅)란 떡차를 선물하였다.
백모(白茅)는 갓 나온 여린 찻잎이 보송보송하여 흰빛이 도는 것으로 고급의 첫물 떡차다.
애초에 초의가 명시를 부탁했던 홍현주는 끝내 시를 짓지 못했고, 뒤늦게 권돈인의 명시와 신위의 글씨를 받아 초의는 1841년에야 삼여탑의 비문을 새길 수 있었다.
초의의 나이 56살이 되었을 때다.
초의선사가 이렇게 지금의 장관 직책인 판서(判書) 출신의 명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초의차만 때문이 아니다.
차(茶)를 잘 만들어 전다박사(煎茶博士)란 칭호와 시승(詩僧)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시를 잘 지었다. 한때 스승이었던 다산의 아들들 정학연(1783~1859)과 정학유(1786~1855) 의 소개도 한 몫 했었다.
평생을 가까운 지기로 함께 했던 추사도 정학연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정조대왕의 외동딸 사위인 홍현주도 첫 만남이 정학연과 함께였다. 1830년 겨울 해거재 홍현주는 동대문 밖 청량사(淸凉寺)의 산방에서 당대 쟁쟁한 문인 5명과 함께 초의를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열었다. 당시 초의가 승려의 신분으로는 도성 안에 들어 갈 수 없어서 해거는 청량사에서 모임을 가지도록 했고,
밤을 새워가며 시를 수창(酬唱)하며 보냈다.
당시의 풍조가 문사로서 시를 잘 짓는 일을 하나의 덕목으로 여겼으며, 만나면 시를 수창하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시에는 으레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학문의 깊이를 자랑하였다.
신헌(申櫶 : 1811~1884)은 자신의 문집 중에 초의에게 준 여러 명사들의 시문을 옮겨 적은 '금당기주(琴堂記珠)'를 남겨, 초의 연구에 주요한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다.
그는 1843년 11월에 전라우수사로 해남에 내려왔는데, 그전부터 초의에 대한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시를 지어 초의에게 보내기도 하고 대둔사로 초의를 찿아가기도 하면서 서로 교유하며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신헌은 병이 든 헌종(憲宗 :1827~1849)을 위해 의원을 추천했는데, 갑자기 헌종이 병사하게 되었다. 이에 신헌도
책임을 물어 녹도(鹿島)로 귀양을 간다.
이후 1854년까지 머물게 되는데, 당시 초의는 녹도로 두번씩이나 신헌을 직접 찿아가 위로하였다.
이런 연유로 초의가 세상을 뜬 후 제자들의 요청으로 '초의선사화상찬"병서를 짓는다.
끝에 남긴 찬(贊)을 소개한다.
스님 오심 공 이요
師來旣空
떠나심도 공일세.
其去亦空
가고 옴이 다 공이나
來空去空
또한 장차 같지 않네.
將亦無同
한 폭의 그림에다
一幅丹青
풍신(風神) 굳이 남긴대도,
强留神豊
천축국 엄연하니
儼然天竺
그 자취 본시 없다.
本無其蹤
붙잡고 움키어도
撈之掬之
물 위 달빛 솔바람일세.
水月松風
스님이 있건 없건
師在不在
처음과 끝 뉘 말하랴.
孰謂始終
꽤 깊은 느낌을 주는 글이다.
옛 문사의 글을 보면 유가(儒家)의 사서오경 뿐만아니라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경전도 두루 섭렵한 것을 알 수 있다.
초의를 초청해 시회를 열어주고, 자신의 집에 묵게하는 등 초의에게 각별한 정서을 쏟은 해거재 홍현주도 자신이 전생에 불제자였다고 할 만큼 불심이 깊었다.
시문과 서화에 뛰어나고, 특히 차를 지독히도 좋아했던 홍현주(1793~1865)는 정조의 딸이며 순조(1790~1834)의 동생인 숙선옹주(1793~1836)와 결혼했는데, 옹주와 외아들 우철(佑喆)을 일찍 잃고 시를 짓고 차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시를 잘 짓고 차에 관해 전다박사라 불리우는 초의가 나타났으니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초의는 그런 그를 위해 '동다송'을 지어 주었다.
'동다송'의 창작 동기는1837년에 홍현주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근자에 북산도인의 말씀을 들으니,
다도(茶道)에 대해 물으셨다더군요. 마침내 옛사람에게서 전해오는 뜻에 따라 삼가 '동다행' 한 편을 지어 올립니다."
우리나라 차인(茶人)에게 있어서 초의선사를 다성으로 받드는 이유 중 하나가 '동다송'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다성인 당나라 육우가 '다경'을 지었기에 '동다송'을 지은 초의가 당연히 우리의 다성이 되었으리라.
'동다송'은 본문만 모두 68구 434자에 달하는 장시(長詩)다.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를 찬송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차 역사를 시로 정리하겠다는 의도였다.
본문에 딸린 협주(夾註)의 분량이 많다. 인용된 문헌 고사는 대부분 육우의 다경과 정찬의 속다경, 그리고 왕상진의 군방보를 참조하였다.
순수 우리차에 대한 부분은 단지 4구절 밖에 되지 않아 아쉽다고 한다. 말하자면 '동다'라기보다 그냥 다송(茶頌)이라 함이 더 적합하다는 뜻이다. 때문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다도 일반에 대한 요약적 소개에 충실함으로서 홍현주의 질문에 답이 되었고,
차에 대한 전문 저술이 거의 없는 우리 현실에서 대단히 보배로운 저술이 되었다.
1849년 초의가 64살 때 62살의 황상이 일지암으로 찿아 간다. 다산의 제자였던 황상이 22살 때 초의도 초당의 강학에 참석하였다.
때문에 둘의 재회는 40년 만이다
일지암을 찿기 전 서울에서 정학연 형제와 추사 형제를 만난 황상은 초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편지 전달의 부탁을 받았을 것이다.
초의에게 추사의 글씨가 많이 있음을 알고
보고자 했고 추사는 '죽로지실'과 '명선' 외에
여러 점을 보여주었다. 죽로지실은 추사가 일지암의 또 다른 이름으로, 명선은 초의의 호로 주었다. 황상은 죽로지실은 조비연에, 명선의 필획은 양귀비에 비겼다.
그리고 일지암에 대한 묘사도 남아있다.
죽로지실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사립 조차없는
초라한 띠집이다. 문앞에는 대숲이 향기롭고, 처마 밑에는 이런저런 나뭇가지들이 얽혀 있었다. 못가엔 화단이 있어 꽃그림자가 연못에 어리고, 못에는 물고기가 아무 걱정없이 헤엄쳤다. 황상은 그런 모습을 보며 여기가 바로 봉래산 신선의 거처가 아니겠느냐고 선망했다.
이후 이런저런 시문으로 자주 왕래하며 만년을 함께 했다.
함께 하는 즐거움을 보여 주는 황상의 시 일부를 보자.
아이 불러 좋은 차 내오게 하고
命兒進佳茗
파계하여 술동이를 열어 마셨지.
破戒開酒尊
얼마간 취한 듯 술이 깨서는
一分或醉醒
느낌 따라 작은 게송 지어주었네.
赴感放小偈
형상과 그림자를 그리어 내니
賦得形舆影
대도 좋고 사람도 너무 좋구나.
竹好人亦好
200여년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변하고 변했으나 산천은 그대로이고 초의선사의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선사의 뛰어난 능력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의 살아 온 자취가 이렇게 깊고 넓을 수 있을까 경외감이 든다.
한편 덧 없다는 생각도 든다.
신헌의 시구가 생각 난다.
"물위의 달빛이요 솔바람 일세."
水月松風
대웅전의 현판은 원교의 글씨다.
역시 골기가 느껴진다.
백설당의 추사글씨. "무량수각."
유홍준교수는 추사의 글씨는 탕수육이라 하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칼국수에 비유했는데,
정말 절묘한 비유인 것 같다.
침계루. 현판글씨는 원교의 글씨다.
유천(乳泉)
일지암의 자우홍련사를 재현해 놓았다.
초의선사 동상.
동다송의 본문을 새겨 놓은 기념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뒷산에는 누워있는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한다.
오른쪽이 머리이며, 가운데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이다.
무염지(無染池)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연못.
승탑밭의 많은 승탑과 비석은 사찰의 역사와 배출된 고승들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초의선사 승탑 왼편이 연담스님의 비석이며 그 오른쪽 옆에 조금 보이는 승탑이 서산대사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