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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저희가 젊은 시절에 한창 유행하던 팝송이 있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란 노래에요. 기억나시죠?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한국에로 “험한세상 다리가 되어”로 번역이 되었었어요. 가사가 너무 좋아요. “당신의 심신이 피곤하여 너무 작게만 느껴질때에, 당신의 눈믈 내가 닦아 드릴께요. 힘든 시기가 닥치고 주위에 친구하나 없을때에 험한 물위의 다리처럼 그렇게 내가 당신의 다리가 되어 드릴게요”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칼한것은요, 이 앨범이 나온후에 그 노래 부른,
싸이먼과 가펑클입니까? 둘이 불화가 생겨서 헤어졌답니다. 노래는 싫컨 했는데 서로 진짜 다리가 되어주질 못한거에요. 입으로만 그랫던것 뿐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건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래도 화해를 하고 다시 같이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화평케 하는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Peace Maker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입으로만 그러는 사람이 아니고 실제 행동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화평케 하는자란 성경 원어적인 의미도 그것이에요. “에이레노 포이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두 단어가 합성이 된거에요. “화평”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을 가진 “포이에오”, 화평을 만드는자를 말하는 것이에요. 화평하지 못할 상황 속에서 화평을 창조해 나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시작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다 같이 한번
외어 보실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곱번째 천국의 계단은 “화평케 하는자가 되라”하는 것입니다. Peace maker가 되라는 것이죠. 우리의 말이 떨어지는 자리에, 우리의 발걸음이 가는곳에, 우리가 관계된 모든 사람속에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한 주간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불화를
만드는 사람이었나요? 나는 화평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 사람때문에…괜찮습니다.
오늘 말
씀속에서 답을 찾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당시 쓰던 이 “화평”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로마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평이 있고 히브리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평이 있었어요.
전자는 팍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P…A…X”죠. 라틴어인데 영어에서도 지금 그대로 쓰고 있어요. 이것은 로마인들이 추구하던 평화이었습니다.
Pax romana라고 하는데….. 힘이나 물질이나 조직이나 법에 의한 평화에요.
오늘날 사람들이 행복을 주고 평화를 준다고 믿고 좆아가는 것이 그런것들이죠. 물질,
권력, 성공, 번영 이런것들이 주는 평화에요.
로마가 이것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어요. 얼마전에 중국이 미국을 향하여서도
이 말을 썼어요. 디폴트직전까지 간 미국을 비판하면서 미국이 추구하던 Pax
Americana는 실패했다. 이제 중국 중심으로 세계가 개편될것이다 라고 큰 소리를
쳤어요. 그런데 뭐가 되건 다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욕심이나 죄성이
그것을 허용치를 않습니다.
또 다른 의미의 평화는 성경적인 평화입니다. 히브리어로 “솰롬”이라고 하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평화에요.
강압적이고 물리적인 평화가 아니라 자율적이고 조화적인 평화입니다. 외적이고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에요. 이 세상의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참 평화인거에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는 화평이 바로 그거에요. 이 솰롬의 화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서 이 말은 “평강, 평안,
화평, 평화”등 여러가지로 번역이 되었있어요.
문맥에 따라서 우리말에 합당한 단어로 번역한것이지요. 그러나 모두다 이 솰롬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솰롬의 화평을 이루는 자가 복이 있다는거에요.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화평케 하는자가 되기 위하여 먼저 우리가 기억 할것이 있어요. 그것은 이 솰롬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8복을 공부하면서 살펴본 모든 크리스찬의 덕목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이 되지를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을 이해하고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리고 우리가 다시 이웃에게 나누는거였어요. 이 솰룜의 화평역시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먼저 그것을 깊이 인식하고 경험을 해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나눌 수가 있는것입니다.
이 “여호와 솰롬”이란 말은 성경의 사사기 6장에 처음 나옵니다. 사사는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전에 이스라엘을 이끌던 선지자를 지칭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중에 기드온이라고 하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그를 부를 당시 이스라엘은 너무나 힘 든 때이었어요. 끊임없이 외세의 침공에 시달린 때였습니다. 산으로 도망을 가서 구멍을 파고 굴을 파고 산성을 만들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프고 목이 갈하여 모두 죽겠다 하고 허덕거릴 그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너를 보내노니 이제 네가 가서 적들을 물리치라”
기드온은 믿지를 못 했어요. 지금 형편이 정말 무인지경이엇거든요. 모두가 도망쳐서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싸우리니요. 더군다나 자신은 누가 보든지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제물을 드리면서 진짜 이게 여호와의 뜻인지, 아니면 자신이 헛것을 본건지 표징을 요구했어요.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그 제물을 불 살랐어요.
그제서야 기드온은 아차… 진짜 하나님의 사자구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었어요. 여호와의 불을 본것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죽음을 의미하는것이거든요. 여호와를 대면하는 인간은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적을 쳐 부수는것은 두번째 문제이고 당장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엎드렸어요. 두려워 떨며 이렇게 말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이제 죽게 되었다는 거죠.
죽음의 공포앞에서 벌벌떠는 모습이 된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이 때 “안심하라~~~~” 이 말씀이 바로 “솰롬”입니다. “나의 평안으로 평안할지어다” 하는 말이에요. 기드온이
너무 기뻤어요. 너무나 감사했어요. 두려움이 떠났어요.
평강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여호와 솰롬” “주는 평화”
하고 이름을 붙인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솰롬”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형편이 어떠신지 저는 다 몰라요.
여러분 각자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저는 다 알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다 아실 뿐만 아니라…….. 이 시간 “솰롬~~” 하고 말씀 하시는 거에요. “안심하라.
평안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요14:27 은 이 화평을 예수님의 평안이라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막무가내로
근심도 말고 두려워 말라고 말씀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평안을 주니”…..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에게 있으니 몰아치는 세상의 파도를 넘으라는거에요. 이기라는 것입니다.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 말고 승리하라는거에요.
야러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어요. 세상은 그를 죽임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줄 알았지만 진짜 시작은 죽으심으로서 이루어지게 된 것아닙니까?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는데 우리가 이 세상 때문에 근심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 분과 함께 영원한 영광 속에 있을 존재들이에요.
그런데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환경 때문에 두려워 하고 근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근심하고 두려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환경을 포용하세요. 가슴에 안으세요. 그리고 오히려 그 속에서 주님의 평안을 누릴수 있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들의 참 평안이에요. 그 평안이 하늘로부터 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 샬롬의 참 평안인거에요.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알 수 없는, 세상이 줄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여러분 모두에게 이 평안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화평케 하는자가 되기위하여 또 중요한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화평을 만들기 이전에 화평을 깨트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한번 깨진 화평은 다시 회복하기가 정말 쉽지가 않거든요. 제가 유고슬라비아 다닐때 전쟁의 폐허를 실감을 했어요. 가는곳 마다 대포자국 총알 자국 핏자국이었어요.
도시뿐 아니라 평온해 보이는 시골마을들도 그랬어요. 한번은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는데
불이 타고 폐허가 된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 있었어요. 타나남은 큰 창고 같은데를 들어가 보았는데 그 안이
온통 마른 핏자국이었어요. 미처 치우지를 못한채로 사람의 해골이 쌓여 있었어요.분명히 같이 살던 마을이었는데 분쟁이 나고 화평이 깨지니까 민족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난거에요. 해골이 끔찍한게 아니라 증오와 미움이란게 정말 끔찍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도 그렇습니다. 가정이나 공동체나 사람사이에서도 다 마찬가지에요. 화평하기까지는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깨지는것은 금방입니다. 한 마디 말에, 순간의 행동으로 순식간에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수도 없이 이런 일을 보잖아요.
이렇게 되지않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것은 조화라는 말이에요.
Harmony에요. 왜냐면 서로가 다 다르기 때문이에요. 성격이나 행동이 다 달라요. 정서도 다르고 습관도 다 다릅니다. 유전적인것으로 인하여, 또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익숙한것을 따라주기를 원하거든요. 내가 맞추기 보다는 내 감정을,
내 습관을, 내 행동이나 말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때로는 강요를 하는거에요.
그러니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 갈등이 증폭 되다보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결국 관계에 금이가고 깨지게 되거든요.
중요한것은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상대방도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거에요. 내가 잘하는 부분이 잇다면 상대도 또한 잘 하는 부분이 반드시 잇게 마련인것입니다. 서로 다를 뿐이에요. 이것을 인정해 주는거에요. 존중해 주는것입니다. 그렇게 조화있게 어울려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다른것을 가지고 저 사람은 왜 저래? 저건 틀렸어. 그러면 조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틀린것을 가지고 다르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다른것을 가지고 틀리다고 하면 더욱 안되는거에요. 부부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친구도 동료도 다 마찬가지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에배소서를 보면 교회된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지체라고 설명을 합니다. 모양도 다르고 기능도 다르고 역할도 다른 지체들이에요. 그런데 에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든 지체가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된다 말씀을 하십니다. Unity in Diversity 다양성속에서 통일성을 이루어 내는거에요. 그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인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정말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의견이 다를 수도 있어요. 방법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십자가와 복음의 본질의 일이 아니라면 절대 다투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일이 있으면요, 그럴때는 저를 믿고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씀에 비추어서 틀렸다면 그때는 틀렸다고 말씀해 주세요. 물론 짓 밟지는 말고요. 그런데 다르다고 느끼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권위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분들 하나님께서 더욱 축복하실거에요.
절대 다투면 안되요. 모든 부서가 다 마찬가지에요. 모든 구역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럴때 손잡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서로 다름속에서 서로 같음”을 창출해 나가는거에요. 화평속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화평케 하는자가 되기위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요구에요.
화평을 만드는 자가 되라는것입니다. 화평을 깨트리지 않고 지켜나가기를 힘쓰는데 그치지
말고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거에요. 더 한발 앞으로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Peace-maker가 되는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화평을 이끌어 내는 사람입니다. 분쟁과 싸움이 있는곳에서 화평을 회복시키는 주인공이 되는 사람이에요.
그것 뿐이 아니에요. 나의 화평을 넘어서 다른 사람의 화평을 생각하는 자리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얻어진 화평뒤에 혹시 빼앗긴자의 눈물이 있나 볼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얻은 화평으로 감사할 때에 다른 사람이 가슴을 치고 있지는 않은가 살필수 있는 성숙함이 있는 사람이에요. 때로는 나 자신의 화평을 포기하고서라도 화평케 하는 사람을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 하시는거에요.
그럴려니 당연히 이 화평케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어요. 겸손과 온유가
요구됩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관용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희생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해요. 어쩌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모든 주님의
모습이 다 필요 한지도 모르겠어요. 8복중에서 7번째 계단에 위치한것도
그 만큼 높은 수준의 행복을 말하기 때문 아닐가요?
우리 잘 아는 찬양 있어요.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만 있네” 찬양이 참 좋은데 저는 마음에 안드는게 있어요. 그냥 그렇게 머뭇거리고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머물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 화평케 해야 하는거에요. 손을 먼저 내미는거에요. 먼저 용서하고 먼저 웃음을 주는거에요. 주님 앞에서 몸둘바를 모르고 이렇게 흐느겼다면, 그냥 그렇게 흐느끼고만 잇지말고 결단해야 하는거에요. 일어나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는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의 삶이 그거에요. 영원한 천국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마태와 시몬을 보세요. 제자가 되기전에 그들은 원수같은 관계였어요. 마태는 당시 유대사람들이 제일 미워하던 세리였습니다. 로마에 붙어서 세금뜯고 백성들 못살게 굴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시몬은 독립투사이었습니다. 열심당이라는 결사단체에 가입해서 로마에 행쟁햇던 사람이었어요. 개인적으로 둘이 서로 모르는 사이라 해도 서로 정체를 아는순간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는 그런 관계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자 그들은 화평의 관계가 되었어요. 평생 한 길을 가는 동지가 되엇고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주고 아껴주고 기도해 주는 참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거든요.
그러기에 본문은 말씀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 모습 쏙 빼 닮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복있는 사람이에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저는 우리 가주장로교회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들 되기를 소원합니다. 천국의 진정한 행복이 그런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에요. 우리 모두가 이런 행복의 수준에 도달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가장 큰 열매는 화평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이에요. 사람과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그 가운데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는 것이에요. 죽음심으로 이룬 화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희생 섬김 그 모든 것이 화평의 열매로 나타난것입니다.
그 화평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고 그러기에 우리는 그 화평을 전하고 만들고 이루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것입니다. 이 화평으로 행복한 심령,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꿈꾸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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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하나님)의 화평케 하심을 닮아야겠다.
사람들의 사악한 언행을 듣고 보고도 끝까지 인내하시며
모두가 성화되어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화평케 하심이
없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이 목사의 설교 말씀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