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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주 李弼柱 (1869∼1942)】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1869년 11월 9일 서울 정동에서 몰락 양반인 아버지 이윤영(李允永)과 어머니 조(趙)씨 사이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고양군 한지면 하남촌(현 서울 용산구 및 성동구 일대)으로 이주하여 8세 때인 1876년부터 5년간 동리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으나 가세가 빈한하여 공부를 그만 두었다. 18세가 되던 해인 1886년 6월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22세 때인 1890년 봄 친구의 권유로 군대에 들어가 있으면서 군대생활을 충실히 하였다. 1894년 5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전투에 초토사(招討史)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경군(京軍)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 후 일본군 교관 밑에서 훈련을 받고 1894년 10월에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전투에 참가하여 분대장에 해당하는 참교(參校)로 진급하였다. 그 후 신설된 훈련대로 전입되었다가 1895년 9월 훈련대가 폐지되고 시위대가 신설되자 시위대로 전입하여 부교(副校)로 승진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후 새로 청빙된 러시아 군사교관 밑에서 신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후일에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에서 체육 교사로서 군사교련을 담당했던 밑받침이 되었다.
1899년 김인숙(金仁淑)과 결혼 후 남매를 낳아 안정된 생활을 하였으나, 1902년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모두 잃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3년 4월 스크랜턴(W. B. Scranton)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었다. 같은 해 가을 군대에서 사임하고 상동교회의 예배당 청소일을 맡았다. 그 후 성경공부와 찬송가를 열심으로 배우고 사경회마다 출석하여 1904년 1월에 속장으로, 그해 여름에는 권사로 피임되었다.
상동교회 부설로 상동청년학원이 설립되어 1904년 10월 15일 문을 열 때 체육교사에 임명되어 같은 무렵 설립된 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에도 노익형(盧益亨)과 함께 교사로 임명되어 한문 · 성경 · 체조 등 과목을 담당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구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07년 2월 일제가 침탈해간 철도 이권을 회수하기 위한 조직된 광무사(光武社)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08년 6월 대한협회 교육부 간사원(幹事員)을 맡았다.
1907년 4월 북감리회 전도사 직분을 받아 연화봉교회(蓮花峰敎會), 이촌동교회, 북장동교회를 개척 · 목회하였고, 1910년대 초 남 · 북감리교회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2학년 과정을 수료했다. 1913년 3월 경성지방회 파송을 받아 왕십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15년 4월 25일 해리스(M. C. Harris) 감독이 주재하는 제8회 북감리회 연회에서 집사목사(Deacon) 안수를 받았다. 1918년 6월 웰치(H. Welch) 감독이 주재하는 제11회 북감리회 연회에서 휴직 · 사임하고 민족운동에 뛰어든 손정도(孫貞道) 목사 후임으로 정동교회를 담임하였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신민회가 결성되었다. 이동휘, 이갑 등의 과격파와 전덕기와 안창호를 중심한 온건파가 노선을 놓고 갈등했으나 교육을 통한 국력배양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러한 지도노선에 따라 안창호가 평양에 대성학교, 이승훈이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상동교회는 공옥소학교와 청년학원을 통해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신민회의 산하단체로 탄생한 학우회는 학생들의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의 훈련에 힘썼다.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이나 전문 학술을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 자격을 갖추도록 지도하고, 매일 지덕체(智德體)의 자기 수련에 힘쓰도록 가르쳤다.
1910년 일제의 강탈로 조선이 사라졌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이필주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1911년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과정을 수료했다. 이필주가 목회에 전념하려고 준비하던 1914년 3월, 전덕기 목사가 39세의 한창 나이로 별세했다. 전덕기는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으나 이필주가 존경하며 따르던 동지이자 스승이었다.
이필주는 1918년 6월 민족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한 손정도 목사 후임으로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다. 정동교회에는 배재학당장 신흥우, 기독신보사 서기 박동완 등이 직분을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이필주는 이들과 함께 활발한 목회 활동을 전개했다. 그해 말, 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약소국들이 독립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조선독립의 방안을 찾고 있었다. 1919년 2월 25일, 해주에서 최성모 목사가 배재학당을 졸업하는 아들의 졸업식을 보고 상급학교 진학을 상의하기 위해 서울에 와 이필주의 집에 지내게 되었다. 이날 최성모는 박희도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돌아와 이필주에게 만세운동을 준비 소식을 전하며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망설임 없이 찬성한 이필주는 다음 날인 26일에 최성모와 함께 박희도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2월 27일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대표들이 그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지역책임자를 선정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 16명을 확정했다. 2월 28일 밤 이필주는 손병희의 집에서 가진 전체 회합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와 가족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3?1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가 물었다.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이필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일제는 취조서에 이필주의 본적을 고양군 한탄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와 경성감옥에서 2년 8개월 동안 독방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로 서울 경성감옥에서 최성모, 박동완 등 동지 15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정동교회에서 목회하던 중인 1919년 2월 25일 해주의 최성모(崔聖模) 목사가 자기 아들의 배재학교 졸업식을 보고 상급학교 진학을 상의하려고 찾아와 그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최성모는 이날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즉시 찬성하고, 거처에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였다. 그 역시 즉시 찬성하고, 다음 날인 2월 26일 최성모와 함께 박희도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박희도는 2월 27일 오후 2시 한강 인도교 부근에서 열릴 예정인 기독교계의 준비 모임에 두 사람도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그가 최성모와 함께 뒤늦게 이 운동에 참여하였지만, 이들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찬성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평소 이러한 운동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2월 27일 정오 박희도 · 김창준(金昌俊) · 함태영咸台永) · 이갑성(李甲成) · 이승훈(李昇薰) · 신석구(申錫九) · 오화영(吳華英) · 최성모 · 박동완(朴東完) 등이 모인 기독교계 예비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지역 책임자를 선정하고, 16명의 기독교계 민족대표 명단을 확정하였다. 오후 2시경 한강 인도교 부근 모임에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이갑성, 최성모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2월 28일 밤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모인 마지막 전체 회합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와 가족 예배를 드리면서 가족들에게 자신이 3·1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곧 바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가 심문하면서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묻자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단호히 대답하였다. 4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심문을 받을 때도 “무엇 때문에 독립을 희망하는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독립하는 것은 한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인에 대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독립을 희망하였다”고 대답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형만기로 서울 경성감옥에서 독립선언 동지들 중 2년형 판결을 받고 복역하던 박희도, 최성모, 신석구, 신홍식(申洪植), 이명룡(李明龍), 양전백(梁甸佰), 박동완 등 15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는 곧바로 미아리구역 3개 교회를 맡아 목회하다가 이듬해인 1922년 9월 27일부터 10월 3일까지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제15회 북감리회 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연화봉구역(蓮花峰區域)으로 파송되어 연화봉, 만리재, 이촌동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그 무렵 의열단원으로서 일제 총독 및 고관을 암살하고 주요 관공서를 폭파할 목적으로 1922년 12월 국내에 잠입한 김상옥(金相玉) 의사를 거사 전 1주일 동안 자신의 집에 숙식하게 하면서 거사를 준비하게 하였다. 1926년에는 서강 염창구역으로 파송을 받았고, 1929년에는 서강구역으로, 1931년에는 창천구역으로, 1933년에는 왕십리구역으로 파송을 받아 목회하다가 1934년 3월 연회에서 65세로 정년 은퇴를 하였다. 정년 은퇴 후에도 곧 바로, 은퇴하여 귀국을 앞두고 있던 노블(W. A. Noble) 선교사의 권고로, 수원지방에 소속된 남양구역 교회들을 맡아 목회하다가 1942년 4월 21일 73세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