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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초기 의병(1895~1896) 봉기 상황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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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드러진 항전을 전개한 유생 의병장이 거느리는 의병부대로는 충청도 제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유인석 의병부대와 춘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이소응 의병부대를 들 수 있고, 다음으로는 전라도의 기우만 의병 부대, 그리고 경상도 금산의 허위 의병부대와 기타 민용호·조상학 의병부대의 활약을 들 수 있다.
유인석 의병부대의 활약의 시초는 경기도 지평의 유생 이춘영·안승우의 기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들은 1895년 말 강원도 원주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모두 성재 유중교의 문하생이었으므로 같은 문하생인 유생 서상렬·주용규·신지수 또한 여기에 호응하여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주에서 충주를 거쳐 제천으로 진출한 이들 의병부대는 안승우의 제의에 따라 유생 가운데 이름이 높은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의병부대 상호간의 결속과 이를 토대로 한 항전의 새로운 발전을 기도하였다. 당시 유인석의 문하생은 59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때 평민 출신의 용장인 김백선(金伯先)이 400여 명의 산포수들을 거느리고 유인석 의병부대로 합류하게 되어, 유인석 의병부대의 전투력은 강화되게 되었다. 김백선 의병부대가 합류해 올 때 이춘영·안승우가 “장군(김백선)이 이르렀으니 일은 이제 염려할 것 없다”고 기뻐한 것을 보면, 김백선이 거느리고 온 산포수 의병부대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경북 문경에서 기병한 이강년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유인석 부대에 합류하여 유격장(遊擊將)이 되고, 또한 안동의 유생 의병장 권세연도 이들과 손을 잡고 경상도 북부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유인석 의병부대의 활약 무대는 충청도 제천을 중심으로, 충청북도·경상북도·강원도 3도의 경계가 되는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 여러 군, 즉 충주·단양·원주·영월·안동·문경을 연결하는 일대였다. 이 곳에서 친일 관찰사·친일 군수를 처단하고 조세를 거두어 군량으로 하는 등 이 곳 일대를 완전히 지배하는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문경의 조령(鳥嶺)은 천험의 요지로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내륙 교통의 최요지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유인석 의병부대의 중군 이춘영과 유격장 이강년 부대는 이 곳 조령을 제압하여 문경의 일본군 주둔소를 공격하여 위력을 떨쳤으나, 영북(嶺北) 안보(安保) 싸움에서 이춘영이 전사함에 따라 안승우가 대신 중군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전개된 충주성 싸움에서는 유생 의병장이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내부적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어 의병부대는 패주하고 만다.
즉, 충주성에 웅거한 일본군 수비대 공격을 담당한 사람은 용장으로 알려지고 있는 평민 의병장 김백선이었다. 그는 300명의 산포수를 거느리고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김백선은 성문을 뛰어 넘어 문을 열고 부하 산포수 의병들을 성내로 끌어들여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청관찰사를 처단하였다. 이어서 북문으로 패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용전하였으나 의병 수가 부족하였기에, 김백선은 중군장 안승우에게 원병을 요청하였지만 안승우는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김백선은 수일간의 작전끝에 중과부적으로 부득이 제천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격분을 이기지 못한 김백선이 안승우를 목베려 하자 의병 대장 유인석은 군법으로 김백선을 처단하였다. 평민이 양반을 범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는 당시의 유생 의병장들의 사상적 한계성을 알려주는 사실이며, 동시에 유생을 의병장으로 하는 의병부대의 내부적 모순과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실이라 하겠다. 『기려수필(騎驢隨筆)』의 저자는
대의를 가지고 복수하고자 하는 자가 적을 치지않고 먼저 장수를 죽여 그 간성을 버리니 제천의 패전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유인석이 백선을 죽인 것은 나라 사람이 모두 원망하는 것이 되고 있으니 그 허물이 어디 있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유생 의병장들의 항전 목표는 반외세인 토왜(討倭)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반외세에 반봉건을 결부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김백선 처단 후 유인석 의병부대는 장기렴이 거느리는 관군과의 제천 싸움에서 중군장인 안승우와 종사(從事)인 홍사구를 잃고, 부득이 새로운 의병의 근원지인 평안도·황해도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후 다시 중국 동북부의 요동지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화서 계열인 김평묵의 문인 이소응 의병부대의 활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896년 1월 춘천 유생 이소응은 수천에 달하는 애국 인사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 대장에 올라 춘천에 의병소를 설치하고, 먼저 머리를 깎고 부임하는 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처단하여 기세를 올리고, 1월 31일에는 각처로 격문을 발하여 “왜로(倭虜)와 적신이 국모를 역살하고 군부(君父)를 늑체(勒剃)했으니 이를 토벌하기 위해 권기하자!”고 호소하니,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궐기하였다. 그 결과 춘천 의병에 호응한 자가 만명에 달하였다고 하니, 민중들의 항일의 기세가 어떠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이들이 가평·양평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위협하게 되자 정부에서는 이겸제(李謙濟)로 하여금 친위대 3개 중대를 이 곳으로 파견하였다. 친위대는 청평·가평 등지에서 고전하다가 춘천으로 들어가 의병을 해산시키고 귀경하였다.
그러나 춘천 의병들은 재집결하였다. 이소응은 이들을 거느리고 다시 서울 공략을 시도하여 양근을 거쳐 2월 17일에는 광주로 나아가 그곳 부윤(府尹)을 처단하고, 포수들로 구성된 안성 의병 수백명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으로 입성하여 웅거하였다. 그러나 이겸제가 거느리는 관군과의 수일간에 걸친 격렬한 격전 끝에 아깝게도 패하고 말았다. 춘천 의병부대의 기세는 대단하여 그들의 격문은 함경남도 일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 곳 일대의 의병 봉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서상렬은 유중교·김평묵에 사사한 이항로계열의 유생으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단양·장회(長淮) 등지에서 봉기하여 많은 일본군을 죽이고 경북 예천에서 영남 각읍(안동·예안·풍기·영주·봉화·문경)의 의병장들과 굳은 맹약을 맺고 연합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3월 29일에 상주 태봉(胎峯)에서 9시간에 걸쳐 일본군을 공격하고 풍기로 후퇴하였다. 그후 유인석 의병부대의 중장군으로 활약하다가 6월에 낭천(狼川)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노응규는 이항로 계열인 최익현의 문도이며 경남 안의(安義)의 유생으로 진주의 유생인 정한용(鄭漢鎔)과 손을 잡고, 1896년 1월 8일 진주 군기고의 무기를 거두어 진주에서 봉기하였다. 봉기와 동시에 인접 각 고을에 격문과 통문을 돌려 궐기를 호소하고, 또 별도로 정부에 상소를 올렸다. 2월 25일에는 의병 진압을 위해 파견된 관군을 격파하여 개가를 올리니, 응모자가 운집하여 의병은 약 만명으로 불어났다. 이어 일본 침략의 교두보인 부산항을 공략하기 위해 김해로 진출하여 4월 11, 12일에는 김해평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유생 김도화·권세연 등은 수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1896년 1월 20일 안동에서 봉기하였고, 유생 이만응(李晚鷹)·금봉렬(琴鳳烈)·이만윤(李晚胤)·이만효(李晚孝)·이중두(李中斗)·이중봉(李中鳳) 등을 중심으로 하는220여 명은 1월 29일 예안에서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부대는 원주·충주 등지의 유인석 의병부대와 손을 잡고 일어났다.
1896년 봄 여름 사이 영남의 수재(守宰)가 된 자는 40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이 부임하고 또 재직하기 위해서는 의병들과 상통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이상은 대체로 화서 이항로의 계보에 속하거나 또는 그들과 관련이 깊은 유생 의병장들의 항전을 들었으나, 이와는 별개인 유생 의병장들의 항전으로는 허위·기우만·민용호 등의 항전을 들 수 있다.
즉, 선산의 명유 허위(許蔿)는 유생 이은찬(李殷瓚)·양재안(梁在安)·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손을 잡고 1896년 3월 금산에서 봉기하여 항전하다가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 중 충북 진천에서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의 조칙을 받고, 왕명에 순종하여 의병을 일단 해산하고 만다. 여기서도 우리는 또한 유생 의병장들의 사상적인 한계성을 엿볼 수가 있다. 전라도 장성의 유생 기우만은 1896년 1월에 장성에서 봉기하였으나 위세는 떨치지 못하였다. 유생 민용호는 강릉에서 봉기하여 3월 19일을 기하여 원산 일본 거류지를 공략할 계획이었으나, 일본 수비대의 선제 공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외 평안도 의주에서는 유생 조상학이 거느리는 의병부대가 봉기하였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서 “이조 말년에 척사위정을 부르짖으며 창의 호국의 운동을 제창한 이들은, 거의 화서 연원(淵源)을 받은 유자(儒者)로 독점의 감이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한 그대로 초기 의병인 을미의병은 화서 이항로 계열의 학통에 속하는 유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초기 의병항전의 2대 진원지는 충청도의 제천과 강원도의 춘천으로, 충청도·경상도는 유인석의 제천 기병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고, 강원도·경기도·함경도는 이소응의 춘천 기병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전라도는 독자성을 띤 것이었으나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들이 처단한 친일 관료의 수는 1895년 겨울부터 1896년 1월에 걸쳐 관보에 발표된 자만을 들어도 관찰사 6명, 군수 10명, 부윤 1명, 경무관 3명, 주사 2명, 충순 2명, 참서관 2명, 세무시찰 1명에 이르고, 1896년 5월까지 국내를 여행하다가 피살된 일본인도 43명에 달하였다.
다음으로는 초기 의병항전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화서 이항로 계열 유생들의 항전 의식, 즉 그들의 항전 철학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항로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의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주리이원론(主理二元論)’으로 그는 우주론에 있어서 이와 기는 별개의 두 개인 것이라 하여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반대하였다. 즉 ‘이’는 선의 속성만을 가지고 있고, ‘기’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양면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기’가 결합할 때에는, 상융(相融)할 경우(‘이’와 ‘기’의 선한 속성이 결합)와 상충할 경우(‘이’와 ‘기’의 불선한 속성이 결합)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천하가 안정되게 되고, 후자의 경우는 혼란하여 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리론(主理論)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천하의 안정을 위하여 활용될 것을 주장하려는 합리적인 차원에서 강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주리론은 19세기 외세의 침략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상되고 전개된 이론으로, 이러한 점에 한말의 주리론의 시대적 기능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이론의 틀을 당시 조선과 서양이라는 국제관계 상황에서 연결시켜 본다면 조선의 문화적 우위=이(理)·주체성 보존의 저항=선(善)이 되고, 서양은 물질적 우위=기(氣)·불법적 강요와 침략=불선(不善)이라는 상융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진 관계로 가장 기능적으로 이론을 설명하여 그 이론의 틀을 만들어 놓고 있다. 이 주리론은 결국 선험적인 관념론으로 19세기 전반 이 항로를 중심으로 하는 어양(禦洋) 척화파 주장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던 사상이었다.
또한 이항로의 주리론의 특징은 조선과 서양을 단순히 ‘이’〔善〕와 ‘기’〔不義〕의 상충 관계로만 설명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기(氣)’는 절대로 ‘이(理)’에 복종해야만 천하가 안정될 수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주리론으로 발전시켜, 외세에 저항하는 조선의 입장을 더욱 선명하게 긍정적으로 설명해 놓고 있다.
그는 “굶어 죽는 일은 극히 작은 일이요, 절조를 잃는 일은 극히 큰 일”이라는 생각 아래, 외세의 거대한 물리적 도전 앞에 조선인이 취해야 할 가치 정향(定向)은 “몸을 죽여 의를 취하는 일”이라는 실천 윤리를 강조하여 그것을 실천토록 하는 것이 그의 주리론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였다. 이상의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주리이원론(主理二元論)’은 화서문도들이 또한 한말 항일 의병항전을 일으키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항로의 사후, 개항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은 가속화되어 갔다. 이항로의 문도인 최익현은 민족 구제의 급선무는 “천하의 대세를 살피는데 있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연고를 아는데 있을 뿐”이라고 강조하고, “혹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연고”를 끝까지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을 알면 사는 길은 그 가운데 있다”는 진리를 알게 되고, 또 여기에 투철함으로써 자각적인 단결을 가져올 수 있고, 따라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척사위정파 유생들의 근본적인 윤리의 전환을 엿볼 수 있고, 아울러 그들의 철저 항전으로 굳은 저항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유생들의 이러한 자각적인 저항 의식을 밑바탕으로 하는 항전이 계속되어 가는 가운데 서울에서는 친러파(소위 정동파)인 이범진·이윤용·이완용 등에 의해 새로운 음모가 계획되어 갔다. 이들은 친위대가 의병 토벌에 동원된 공백기를 이용하여, 인천에 정박중인 러시아군함으로부터 대포 1문과 완전 무장한 사관 7명·수병 107명을 서울로 끌어들여, 1899년 2월 7일에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아관파천에 의해 친러파 내각이 성립되자 김홍집 친일내각은 붕괴되고, 김홍집(총리 대신)·정병하(농상공부 대신)·어윤중(탁지부 대신) 등은 피살되었다. 그것은 민비 시해사건 처리의 불철저함과 은폐 및 단발령 강행에 따른 민중들의 반발로 친일의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었다.
아관파천 후 친러파 내각은 국왕의 조칙으로 의병장들의 죄를 불문에 붙이고, 단발령을 중지한다고 포고하고, 정부군을 소환하였다. 그리고 각지로 선유사를 파견하여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왜적토벌(倭賊討伐)’·‘국모보수(國母報讐)’·‘단발불복(斷髮不服)’이라는 존왕양이(尊王壤夷)의 대의기치를 들고 일어난 유생 의병장들에게는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내각이 붕괴하여 일본세력이 후퇴하고 단발령이 중지됨에 따라, 창의의 명분이 달성된 것으로 생각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가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는 의병이 봉기한 지 8개월 전후가 되는 때의 일이었다.
그 결과 갑오 농민전쟁을 경험하고 유생 의병장들에게 합류했던 의병대중은 항전의 형태를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항전형태의 전환이 1905년 을사의병이 재기될 때까지 전개된 ‘화적(火賊)’·‘활빈당(活貧黨)’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진 항전이었다.
결국 유생을 지도층으로 한 을미의병은 척사·복고주의·반개화의 부정 논리가 우세한 구국 항전이었다 할 것이다. 비록 의병 대중의 의식 속에서 나타나지는 못하였으나, 1860년대 이래 개화사상의 영향과 갑오 농민전쟁의 경험을 통하여 반봉건 의식이 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상술한 초기 의병항전은 당시 민중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망을 얻고 있던 재야 유생들이 주도하여 반외세의 애국심을 드높였고, 또 항전 경험을 통하여 유생 의병장들의 성격과 한계성도 드러나 의병 대중들의 반봉건적 의식을 높이게 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새로운 항전에 교훈을 주는 출발점이 되는데에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을사·병오·정미 의병항전과 유생 의병장
아관파천 1년만에 고종은 환궁하였으나, 한국의 많은 이권이 열강에 넘어 갔다. 이후 한국을 둘러싼 러·일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갔다.
대 러시아 전쟁 준비를 서둘러 온 일본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후 대 러시아 전쟁의 자신을 얻어, 1904년 2월 8일 인천·여순의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도발하였다. 한국정부는 곧 대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2월 23일에는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맺게 하고,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소위 外國人傭聘協定)을 강제로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고 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11월 9일 이등박문을 특파대사로 한국에 파견하여 소위 ‘보호권’ 설정 공작을 서둘렀다.
이리하여 11월 15일에는 이등박문이 소위 ‘보호조약’의 초안을 고종에게 제출하고 17일에는 이등박문이 조선주차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하세가와 요세미찌)·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하야시 곤스께)와 더불어 많은 헌병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들어가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참정대신 한규설은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의 포위 아래 열린 각료회의에서 이등박문은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씩 개별 심문을 통해 조인을 강요하여 박제순(朴齊純;외부대신)·이완용(李完用;학부대신)·이지용(李址鎔;내무대신)·이근택(李根澤;군부대신)·권중현(權重顯;농상공부대신) 등 소위 ‘을사오적’이 조인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소위 ‘보호조약’의 조인에 따라 일본은 실질적으로 한국의 외교·내정·군사를 장악하는 광범한 권한을 손에 넣어, 한국은 사실상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고 한국의 주권은 해골화하게 되었다.
일본의 강압 아래 소위 ‘보호조약’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민족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동월 20일자 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5백년 종사를 타인에게 봉헌하고 2천만 생령을 타인의 노예로 만든 그들 개 돼지”라고 을사오적을 비판하고, 조인의 경위와 내용을 폭로하는 비분강개의 글을 실어 민족의 분기를 촉구하였다.
일본측이 장지연을 체포하고 신문을 폐간시키자 『대한매일신보』(양기탁·배설이 창간)의 주필 박은식이 다시 항일 구국의 필봉을 들었다. 이러한 항일 구국 언론과 아울러 재야의 애국 유생과 전직 관인들이 파상적으로 상경하여 조약의 파기와 오적 처단의 상소를 연달아 올려, 서울은 온통 항일의 기운으로 들끓었다. 이러한 서울의 항일의 기운이 지방으로 파급되어 드디어 지방에서는 항일 의병항전이 불붙어 가게 되었다.
일본의 군사적인 폭력 앞에 유생들의 항일 양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상소(上疏)·수절(守節)·자정(自靖)이라는 소극적 저항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저항으로의 의병항전이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의 조약 인준을 거부하라는 상소, 13도 유약소(儒約所) 대표의 상소, 법부 주사 안병찬(安秉瓚)의 조약 파기와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 원임의정 조병세(趙秉世)의 상소와 순절,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永煥)의 상소와 순절, 전참판 홍만식(洪萬植)·전참판 송병선(宋秉璿)·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이설(李偰)·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 등의 자결로 주로 전직 현직의 유생 관료들이 많았다. 이와 함께 적극적인 의병항전으로의 반응은 재야의 애국 유생들로부터 시작되었고, 또 이들의 주도 아래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을사의병을 을사늑약을 계기로 돌발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러일전쟁 전후로부터의 동향을 살펴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러일전쟁 전후 적극화 된 일본의 침략 아래 지방에서 분산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의병항전과 화적·활빈당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던 대중 항전이 11월의 을사늑약을 계기로 재야 유생들의 주도 아래 본격화 되어 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을사늑약 이전인 4월에 강원도 원주에서 유중교의 문인인 원용팔(元容八)과 정운경(鄭雲慶)이, 6월에는 지평에서 이문호(李文鎬)가, 광주에서는 구만서(具萬書)가 기병하였고, 또 을사늑약 직전인 11월 초순에 보은에서 김동주(金東周)가 의병을 일으켜 그것이 충북·경북·경기도로 파급되어 간 것을 통하여 잘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항전이 전개된 곳은 종래 화적·활빈당 등의 활약지로, 이들이 재야 애국 유생들의 주도 아래 궐기 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1905년4월 이래) 경기·강원·충청도 및 경북 일대에 의병이 일어났는데 모두 토왜를 이유로 하였다” 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러한 산발적인 항전이 을사늑약을 계기로 대중적인 지반 위에서 광범한 지역으로 확대 발전되어 갔던 것이니, 이러한 사실을 같은 『매천야록』에서는 “경기·강원·충청·경상 등 여러 도에 의병이 크게 일어 났는데 보호조약을 강제한 이래 나라가 온통 물끓듯하였다. 장대를 만들어 기를 달고, 모두 살왜(殺倭)를 그 이유로 하였다. 먼저 관동(강원도)으로부터 부르짖어 곳곳에서 향응하니 인심이 차차 스스로 발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비가 없고 군율이 없어 비록 천·백의 무리를 이루어도 일본군 십 수인을 만나면 문득 패하여 흩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을사의병에 이어 일어나는 병오년(1906)에서 정미년(1907) 8월 1일 군대해산에 이르기까지, 유생 의병장들의 항전과 항전의 성격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을사의병에 이어 일어나는 병오의병은 종래의 항전의 목표였던 국모복수·단발불복의 항전을 국권회복이라는 새로운 성격의 항전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병오의병인 민종식·최익현의 기병은 이러한 성격으로의 발전에 커다란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즉 민종식이 체포된 후 평리원 검사의 심리보고에 의하면 “일본을 토멸하고 오적을 섬멸하여 우리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 생령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은 국권회복의 항전의 성격을 그대로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전참판인 민종식은 병오년 봄부터 동지들을 규합하여 홍산(鴻山)에서 행동을 개시하여 내포(內浦)지방을 거쳐 5월 19일에 홍주성에 웅거하였다. 입성 도중에 군기·군자금을 거두어 600여 정의 총포와 200여 자루의 창으로 무장하고 의병의 인원은 1,100여 명에 달하였다. 또한 의병부대 간부는 대부분이 지방의 애국 유생들이었다. 홍주성에 입성한 민종식 의병부대는 5월 20일에서 5월 28일에 걸쳐 내습한 수많은 일본 군경과 진위대를 모두 격퇴시켜 의병부대의 새로운 위력을 떨쳤다.
일본 군경과 진위대가 패배하게 되자 서울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전중(田中:다나까) 소좌로 하여금 보병 2개중대, 기병 1개소대, 기관포대, 폭파대에 지방의 일본 헌병, 경찰대를 총 동원한 대병력을 이 곳으로 투입시켰다. 이에 따라 5월 31일에서 6월 1일 새벽에 걸쳐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6월 1일 새벽 2시가 지나 일본군이 동문과 북문을 폭파하고 성내로 돌입하게 되었다. 의병들은 이들을 맞이하여 두 시간에 걸쳐 백병전을 전개하여 일본 군병 10여 명을 사살하고, 4명을 잡아 처단하였다. 의병들의 굳센 저항으로 의병측의 손해도 컸다. 의병 83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체포당하였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굳센 저항이었다.
성이 함락되자 민종식은 부하를 거느리고 해상을 거쳐 부안(扶安)·절포(茁浦)로 진출하여 일본인 상가(商家)를 소각하고 흥덕(興德)·고창(高敝) 등지의 일본군 주둔소를 습격하는 등 항전을 계속하다가, 11월 20일 공주 탑산리(塔山里)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7월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게 되었다.
민종식 의병부대가 홍주성에 웅거하여 항전하게 되자 노유 최익현이 이어 기병하였다. 그의 당초 계획은 “우리 사졸은 단련이 없고 병기가 불리하니 반드시 각도, 각군이 세력을 아울러 같이 일어나야 한다” 라고 말한 바와 같이, 각지의 의병이 함께 봉기하여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최익현은 이러한 목적 아래 남규진(南奎振)·곽한일(郭漢一) 등으로 하여금 영호(嶺湖)가 상응하는 공작을 추진하다가 일본군의 선제 공격으로 실패하고, 남규진·곽한일은 민종식 의병부대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익현은 유인석이 파견한 이정규를 통하여 “남북이 상응하여 힘을 아울러 적을 칠 뜻”을 유인석에게 전하고, 한편으로는 영남에서 찾아 온 문도 조재학(曺在學)·이양호(李養浩) 등에게 “사민을 격려하여 서로가 응원토록 하라”고 지시 당부하였다.
최익현은 이러한 작전목표 아래 1906년 5월 23일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문도 80명과 더불어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의 기병 동기는 ‘기병소(起兵疏)’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이등박문(伊藤博文)·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및 각국의 공사와 담판하여 소위 보호조약을 파기하고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여 민중을 역종(易種)의 화(禍)로부터 구하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니 그의 목표 역시 민종식과 같이 국권 회복에 있었던 것이다.
최익현 의방부대는 전주로 진출하려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정읍·태인·곡성을 우회하면서 무기와 군자금을 거두어 순창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의병수는 천여 명에 달하게 되었으며, 최익현은 의병부대를 재정비 강화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종은 이도재(李道宰;전남관찰사)를 시켜 의병부대를 해산하라는 조칙을 내렸으나, 최익현은 이를 거부하였다.
6월 11일 마침내 전주·남원의 진위대가 내습하여 순창의 의병부대를 포위하게 되자 최익현은 “이들은 왜와 같으니 마땅히 한바탕 죽도록 싸워야할 것이나 진위대 군대와 싸운다면 이는 곧 우리가 우리를 치는 것이니 차마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문도인 임병찬(林炳瓚;전 낙안군수)에게 항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6월 13일이 되어 드디어 전주 진위대의 선제 공격으로 서기인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게 되었다. 이에 최익현은 의병들에게 퇴각을 명령하고 스스로 체포당하였으며, 임병찬 외 13명도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최익현은 일본 헌병대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되어, 그 곳 경비대에 구류 당한 후 단식 끝에 그해 12월 30일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끝마쳤다.44)
이밖에 호서·호남의 의병으로는 장성을 중심으로 유생 기우만의 기병 모의가 있었으나, 광주 경찰 고문부의 사전 탐지와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유생 백낙구(白樂九)는 전남 광양에서 기병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1906년 12월에 일단 석방되었다. 그후 다시 전북 의병에 들어가 활약하다가 태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유생 강재천(姜在天;최익현의 문도 전 평해군수)은 임실군 운암강(雲岩江)변에서 기병한 후 12월 21일에 남원으로 진출하여 3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동복·담양·순창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본군에 많은 피해를 주고, 1907년 1월 5일에는 장성군을 기습 공격하여 위력을 떨쳤으나, 선봉장인 이상윤(李尙允)이 민재(民財)를 탈취한데 개탄하여 드디어 의병을 해산하고 산중으로 은신하였다. 한편 같은 때 남원의 유생 양한규(梁漢奎)는 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남원 진위대를 기습공격하다가 전사하고 의병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상술한 병오년(1906) 양 호(湖西 湖南)에서 재기한 유생 의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최익현(崔益鉉)이 패한 후로부터 서호(西湖) 사대부는 기운을 잃어감이 다시 거의를 말하지 못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양 호의 의병항전은 1906년 5, 6월의 민종식·최익현의 기병을 정점으로 하여 일시적으로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된다.
이처럼 의병항전이 침체되어 간 내부적 요인으로는, 첫째 유생 의병장들의 항일정신은 대단하였으나 이러한 반침략적인 정신을 의병 대중들이 바라고 있는 반봉건적 성격과 결부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병기가 전근대적이었고, 전술이 서툴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호서·호남지역의 의병항전이 이후의 의병항전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보다 높은 단계로의 항전을 가능케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호서·호남의 의병항전이 일시 퇴조를 면치 못하고 있을 때,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 일대의 접경 지대에서는 대중적 성격이 강한 의병항전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가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 지역은 종래 ‘화적(火賊)’이라고 불리운 농민군 집단이 지속적으로 활약을 해 오던 곳으로 이러한 의병 대중들이 유생 의병장들과 손을 잡고 항전하였기 때문에 저항력이 강하였던 것이다.
『고종실록』 1906년 5월 29일 자에, “교남 안동 등지에는 천민이 모여 빙자하여 의거를 일컫고 군물을 휴대하여 세력이 심히 창궐함으로 청송군수 안종덕(安鐘悳)을 경상북도 선유사로 차하하였다”고 했듯이, 안동 등지에는 이제 대중성을 띤 의병항전이 크게 일어나 새로운 기세로 발전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1906년 5월 전후한 시기의 이 지역 일대 유생 의병장들의 활약을 보면 진보에서는 이하현(李夏鉉)이, 안동에서는 권세연(權世淵)·유시연(柳時淵)이, 영양에서는 김도현(金道鉉)이, 동대산(東大山) 부근에서는 정용기(鄭鏞基)가, 울진에서는 김현규(金顯奎)가 각각 기병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당시 이 지역 유생 의병장들이 크게 전과를 올리게 되는 것은 천민 의병장 신돌석(申更石)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반침략·반봉건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천민·평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의병부대로, 의병장 신돌석은 “효용(驍勇)이 나는 것과 같아 필마 단창(匹馬單槍)으로 적을 무수히 죽이니 일본인은 백가지의 계책으로 이를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고 했듯이,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전투적인 성격을 띤 의병부대의 등장은 이제 의병 항전이 새로운 성격을 띤 항전단계로 전환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유생 정환직(鄭煥直)의 아들 정용기(鄭鏞基)는 1906년 1월 이한구(李韓久)·우재룡(禹在龍) 등과 같이, 경상북도 동대산을 근거로 의병 6백명을 규합하여 일어나 흥덕·청하 등지에서 위세를 떨치다가 체포되었으나 그후 석방되었다. 1907년 4월 그는 다시 4백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동대산에서 재기하여 청하·청송·영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항전하다가 동년 9월 입암리(立岩里)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정용기가 전사하자 정환직은 아들을 대신하여 의병장에 올라 잔류 의병들을 거느리고 흥해·청하·청송·영덕 일대에서 항전하다가 동년 12월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 접경 지대인 일월산(日月山)과 경북 동대산(東大山)을 중심으로 한 의병항전은 그 지속성과 저항력에 있어서 호서·호남의 의병항전과는 달리 1907년 8월 군대해산 후 새로운 의병항전의 고조기에 이르기까지 끈기있게 지속되어 갔다.
따라서 학계 일부에서 “1907년 5월 경에 이르면서 의병활동은 거의 종식되었다” 고 보는 견해는 의병항전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는 견해로서 잘못된 파악이라 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병오의병은 1907년 8월 군대해산에 이르기까지 끈기있게 지속되어 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