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황성신문 창간 ← <황성신문>(1900, 6. 23) 국운이 다해가던 1898년 9월 5일,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됐다. 사장은 남궁억이 맡았고 편집진은 박은식·장지연·신채호 등 면면이 민족주의적 사관을 지닌 인사들로 구성했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었지만 한글은 한자에 토를 다는 정도로만 쓰여 독립신문 이후 불기 시작한 순한글 신문제작 전통을 깨뜨렸고, 이 때문에 한학 독자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당시 독자들은 한글 전용의 민족지 ‘뎨국신문’을 ‘암(雌)신문’, 한문을 섞어 쓰는 ‘황성신문’을 ‘수(雄)신문’이라고 불렀다. 남궁억이 사장으로 있던 4년간 두 번이나 구속될 만큼 황성신문은 배일(排日)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다. 법적인 판결을 받아 최초의 필화사건을 일으킨 사람도 남궁억이었다. 1905년에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문제가 돼 장지연은 70일간 구류를 살고 황성신문도 80여일간 정지당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조선
[1997년] 테레사 수녀 사망 ← 1997년 9월 13일 테레사 수녀의 장례식이 행해졌다.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가 1997년 9월 5일 밤 인도 캘커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87세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테레사 수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프다"고 애도했으며 인도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테레사 수녀 추모방송을 계속했다. 1910년 구 유고 연방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테레사는 18세 때 가톨릭에 귀의해 주로 인도 캘커타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1950년 그녀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캘커타에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1백26개국에서 4천4백여명의 수녀와 수사, 수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일하는 전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장례식은 9월 13일 캘커타에서 인도국장으로 엄숙히 거행됐으며 1백50만명의 추모객들이 길에 꽃을 뿌리며 그녀와 작별을 고했다. 장례미사에는 구즈랄 인도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부인을 비롯 20개국 조문 사절 등 모두 1만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유해는 그녀가 평생을 몸바친 ‘사랑의 선교회’ 1층 방 한 귀퉁이에 안장됐다./조선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 발생 1972년 9월 5일 아랍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소속 '검은 9월단'이 뮌헨 올림픽 대회 선수촌을 습격해 인질극을 벌였다. 뮌헨 올림픽에는 124개국 8,0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해 거의 200개 종목의 경기를 치렀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기회를 노린 테러범들은 이스라엘에 있는 아랍 포로 200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2명을 사살하고 9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잡았다. 경찰이 인질들의 구출작전을 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그 결과 9명 인질 전원과 인질범 가운데 5명, 서독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당시 이스라엘과 팔레인스타인 간 정치적·종교적 대립이 급기야 올림픽 대회까지 피로 물들인 대표적인 테러 사건이었다. 이후로도 동서간 냉전으로 인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에 이르기까지 한쪽 진영의 무더기 불참 선언이나 법정소송 사건 등이 잇따라 올림픽 대회의 정신이 크게 훼손되었다./브리태니커
[1638년] 루이 14세 Louis XIV 출생 ← 루이 14세, Hyacinthe Rigaud가 1701년에 그린 초상화(부분), Musée du Louvre 소장 1638년 9월 5일 태어남 / 1715년 9월 1일 죽음 루이 14세는 1643~1715년 재위한 프랑스의 왕이다. 루이 대왕(Louis le Grand Monarque), 또는 태양왕(Le Roi Soleil)이라고도 한다. 그가 통치한 시기는 프랑스 역사상 최전성기 중 하나였다. 5세가 채 안 되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1648년 시작된 프롱드의 난으로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1661년 루이는 절대왕정을 선언한 이후 스스로 신이 내린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자신에 대한 모든 불충과 반란을 죄악시했다. 그는 모든 일을 직접 주관하고자 했으며, 내란의 주인공인 귀족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몰입했다. 또한 루이는 새로운 궁전을 짓는 일에 열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베르사유 궁전은 건설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완성 후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유명해졌다. 그는 종교개혁을 이해하지 못했고 개신교도들을 적으로 여겨, 1685년 낭트 칙령을 철회하고 개신교도에 대해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다. 루이는 치세 동안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다. 1667~97년 일련의 전쟁에서 합스부르크를 희생시켜 프랑스의 동쪽 경계를 늘렸고,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루이의 손자에게 왕국을 물려주자 유럽 동맹에 맞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벌였다. 죽기 전에 왕위계승자를 결정한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왕정의 몰락을 재촉했다./브리태니커
[1917년] 법학자 이한기(李漢基) 출생 1917. 9. 5 전남 담양∼1995. 2. 2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兒島]. 1943년 도쿄대학[東京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1956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69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1952∼80년 동 법대 교수, 법대 학장, 사법대학원장으로 있었고 1970년 국제법학회장, 1972년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1974년 도쿄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1977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80년 감사원장, 1983년부터 서울대학교 대학원 강사, 한일문화 교류기금 이사장, 경기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 1987년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국민훈장 동백장, 청조근정훈장, 일훈일등욱일대수장(日勳一等旭日大綬章)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국제법학〉·〈아세아 정세변동과 우리나라〉·〈우리나라의 영토〉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12년] 한국 농민운동가 김용기(金容基) 출생 1912. 9. 5 경기 양주~1989. 8. 1 강원 원성. 1909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광동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정치철학을 가지고 봉안교회 및 이상촌을 건설하였고 독립운동과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메마른 황무지를 개척하고 민중의 의식을 계몽하는 일을 해오던 김용기 선생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개척자적 정신을 심어주고 또한 함께 하기 위해 체계적인 교육훈련의 중요성을 깨닫고 1962년 경기도 광주에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이후 더욱 많은 교육의 확대를 위해 강원도 원주에 지금의 제2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 하게 되었다. 이후, 가나안농군학교는 김용기 선생의 사상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생활개혁 및 농업지도교육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조국의 경제발전과 국가적 정신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새마을운동"이 태동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가나안농군학교와 김용기 선생이 정신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김용기 선생이 남긴 복민사상을 통해 오늘날 발달된 과학문명속에 감추어진 역기능인 정신문화의 빈곤에 대한 답을 주고자 모두가 함께 잘살기 위한 복민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78년 필리핀 쎄이비어종합대학교에서 45주년 개교 기념 특별행사의 하나로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1월 15일 발행된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 수록 중 일제36년 동안 독립 투쟁사에 한 분으로 수록되었다. 1988년 80세의 일기로 소천했으며 8월에 국민훈장무궁화장 수상하였다./한국컴퓨터선교회 저서로는 〈참 살길 여기 있다〉·〈가나안으로 가는 길〉·〈이렇게 살 것인가?〉 등 여러 편이 있다.
[1900년] 독립운동가 이화익(李化翼) 출생 일명 승춘(承春). 1920년 12월 최창한(崔昌翰)·이기춘(李起春)·김경선(金敬善) 등과 같이 황해도 장연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1921년 1월 11일 김경선·최창한 등과 더불어 권총을 휴대하고 장연군 목감면 곽수(郭琇)의 집에 가서 독립단의 취지와 독립자금 모집원임을 말하고 120원을 모금했다. 3월 1일 김경선과 같이 손승훈(孫承勳)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청했으나 이에 불응하자 집에 방화했으며, 3월 20일 밤에도 이기춘과 같이 군자금 요청에 불응하는 이응엽(李應燁)의 집을 방화했다. 그해 4월초 군자금 요청을 위해 학현리 김병순(金炳淳)의 집에 갔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1922년 중국 산둥 성[山東省] 옌타이[煙臺]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나석주(羅錫疇)와 만나 베이징[北京] 등지를 돌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24년 3월 나석주와 함께 상하이[上海]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했다. 같은 해 12월 20일 나석주와 더불어 톈진[天津]의 프랑스조계에 있는 공원에서 회합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의 폭파를 계획했다. 이에 나석주는 12월 28일 서울에 잠입해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 순국했으나, 그는 1927년 5월 베이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나석주의거의 공모자로 1928년 6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15년형을 언도받고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14년간 복역했다. 8·15해방 후 감찰위원회 감찰국장, 대한해운공사 상무감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99년] 방송-통신위성 ‘무궁화3호’ 기아나 쿠루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 우리나라 세 번째 통신-방송용 종합위성인 '무궁화3호'가 1999년 9월 5일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발사기지에서 유럽연합 아리안스페이스사의 '아리안 IV'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무게 2,800kg, 길이 19.2m인 무궁화3호 위성은 위성방송시대에 대비, 통신용 중계기의 출력을 기존 14W에서 45KW로 대폭 높여 방송용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점과 통신용 중계기의 절반을 방송용으로 돌릴 경우 168개의 위성방송 채널 공급이 가능토록 한 대용량 위성이다. 통신용 중계기 24개, 초고속 통신용 중계기 3개, 방송중계기 6개 등 33개 중계기를 탑재하고 있다. 위성체는 미국 록히드 마틴사가, 발사체(로켓)는 프랑스 아리안스페이스사가 각각 제작을 맡았다. 총 투자비는 1호위성의 2.6배인 2,600억원이 소요됐으며 현대전자, 한라중공업, 대우중공업, 대한항공, 두원중공업 등 국내 5개사가 제작에 공동참여, 국내 우주항공기술을 한단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무궁화위성은 9월 9일 적도 상공 3만6천km 궤도에 진입한 후 9월 11일에는 태양전지판을 성공적으로 전개, 35일간의 성능시험을 마친 끝에 목표궤도인 지구정지궤도 동경 116도에 안착했다. 2000년 1월 1일에는 한반도에 머물던 위성 중계지역을 호주, 몽고, 중동 지역 등 아시아 지역으로 확대했으며, 국내 방송3사가 해외에서 주관하는 밀레니엄 해돋이 장면을 생중계하는 데 처음으로 이용됐다. /조선
[1973년] 평양지하철 개통 한반도에서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된 도시는 어디일까.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것은 1974년 8월 15일. 북한의 평양 지하철은 약 1년 앞선 1973년 9월 5일에 첫 운행을 시작했다. 평양 지하철(총연장 34km)은 남북으로 놓인 천리마선(12km)과 동서로 놓인 혁신선(20km), 천리마선의 연장인 만경대선(2km)으로 이뤄져 있다. 모두 17개 역의 이름은 지리적인 위치와는 관계없다. ‘붉은별역’ ‘건국역’ ‘전승역’ 등 북한의 정치 구호를 주제로 한 이름이 많다. 외국인들의 관광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북한의 지하철 역사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샹들리에와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고, 벽면에는 혁명을 상징하는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돼 ‘지하 궁전’이나 ‘지하 평양’이라고 불릴 정도다. 방문객은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부흥역과 영광역 사이의 구간을 타도록 안내받는다. 물론 잘 차려 입은 북한 시민들이 지하철에 동승한다. 그러나 이 구간 외에 평양 지하철이 실제로 운행되느냐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많다. 대부분의 노선이 베일에 싸여 있어서다. 평양 지하철은 100∼120m의 지하로만 달린다. 이 때문에 지하의 역까지 가려면 수백 m에 이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평양 지하철이 도심 지하의 군사용 시설과 연계돼 ‘초대형 벙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승강장 입구는 60∼80t의 두꺼운 아연 재질의 문이 설치돼 핵폭탄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전력난을 겪는 북한의 실정에 엄청난 길이의 에스컬레이터를 가동하기란 쉽지 않다. 평양 지하철은 현재 통근용으로 평일 아침과 저녁 ‘첨두시간’(러시아워)에만 운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절전을 위해 역내에 조명을 희미하게 켜놓거나 아예 꺼놓은 곳도 있으며, 정전으로 터널 속 열차 멈춤 사고도 빈번하다는 보고도 많다. 지하철 개통으로만 따져 보면 1970년대 초반까지 서울과 평양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30년이 흐른 오늘날, 평양 지하철에 비해 서울 지하철(265개 역·총연장 286.9km·수송 인원 연간 22억 명)의 발전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에 가깝다. 전승훈 기자 /동아일보 [책갈피 속의 오늘] 2006.09.05
[1774년] 최초의 대륙회의,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비밀리에 소집 대륙회의(Continental Conference)는 미국 독립혁명 시기에 아메리카 13식민지(독립 이후 각주)의 통일적 행동을 군사 ·외교 ·재정에 걸쳐 지도한 기관으로, 대륙이라는 말은 각 지방 의회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한 말이다. 1774년 영국의회가 제정한 ‘참을 수 없는 법’에 대항하기 위해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요청에 따라 9월 5일 제1차 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열고, 대표 55명은 영본국(英本國:영국)의 압제로부터 식민지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할 것과 영본국과의 통상단절을 결의한 뒤 10월 26일에 해산하였는데, 제1차 회의에서는 독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제2차 회의는 1775년 5월 10일부터 개최되었는데, 이미 시작된 영본국과의 무력충돌에 대처하는 지도기관으로서 군대조직 ·통화발행 등을 결의하고 G.워싱턴(1732∼99)을 식민지 총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 ‘평화의 청원’을 영본국에 보냈다. 그러나 본국의 태도가 강경하였으므로, 급진파 사이에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76년 7월 2일 독립선언을 채택, 7월 4일 공포하였다. 1777년 11월 미합중국 초기헌법이라 할 수 있는 연합규약(聯合規約)을 기초하였으며, 81년 이후 연합의회(聯合議會)로 개칭, 독립전쟁을 지도하여 영본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1787년 서북(西北) 토지법 등을 제정하였고, 89년 연방헌법 제정으로 신정부가 수립되자 해체되었다.
[1568년] 이탈리아의 시인, 저술가, 철학자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 출생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주 출생. 14세 때 도미니크수도회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B.텔레시오의 자연철학을 가까이 하였다. 1599년 이단과 음모의 혐의로 스페인 정부에 체포되어 나폴리 감옥에서 심한 육체적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저항하였다. 1602년 무기형을 선고받고 27년간의 옥중생활 끝에 학계의 청원과 교황(우르바누스 8세)의 호의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도 교황청의 재판을 받았으나 결국에는 프랑스로 피하여 파리 수도원에서 조용히 생애를 마쳤다. 옥중에서 《태양의 나라 La Citta del Sole》(1602), 《형이상학 Metafisica》(1638) 등을 저술하였다. R.데카르트에 앞서 방법적 회의(懷疑)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당시 높아가던 자연에 대한 관심과 전통적인 스콜라의 사상을 독자적인 체계 속에 융합시키고자 하였다. 주요저서 《태양의 나라》는 플라톤의 《국가론》, T.모어의 《유토피아》의 전통을 잇는 정치적 대화편이다.
[1704년] 프랑스의 초상화가 라 투르(Maurice-Quentin de La Tour, 1704~1788) 출생 얼굴의 특징을 날카롭게 포착한 생생한 초상화들로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초상화가이자 가장 많이 모방되는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일찍이 젊은 시절에 파리로 간 라 투르는 플랑드르의 화가 자크 스푀드의 화실에 들어갔다. 그뒤 랭스·캄브레(1724)·잉글랜드(1725경) 등지를 다니다가 1727년경 파리로 되돌아와 그림 수업을 다시 했다. 1737년 150점의 훌륭한 초상화들을 처음으로 전시했다. 이 초상화들은 그후 37년 동안 살롱전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는 초상화의 모델들에게 매력과 지성을 갖춘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했으며 미묘한 얼굴 표정을 포착하는 데 뛰어났다. 그가 그린 인물들 중에는 작가인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 그리고 루이 15세와 그의 연인인 퐁파두르 부인 등이 있으며 특히 그 부인의 초상(1756)은 실물 크기로 그렸다. 1746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1751년에는 미술원의 평의원이 되었다. 1750년 왕의 초상화가가 되었고 1773년 신경쇠약에 걸려 그 직에서 물러났다. 라 투르는 나이 80세에 은퇴하여 생캉탱으로 갔다.
[1944년] 안네 프랑크 가족 강제수용소로 이송 ← 안네 프랑크의 가족(Margot, Otto, Anne and Edith Frank on Merwedeplein in Amsterdam, 1941.) 안네 프랑크(Anne Frank)의 본명은 Annelies Marie Frank이다. 1929년 6월 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유대인 가정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고, 나치스가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1933년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다. 1939년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1941년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유대인을 더욱 심하게 탄압하자, 1942년 프랑크 가족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식료품 공장 창고와 뒷방 사무실에서 다른 유대인가족 4명과 은신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밀고함으로써 1944년 8월 4일 발각되어 독일의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1945년 3월 하노버 근처에 있는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가 언니 마고트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 프랑크가 아버지로부터 13세의 생일 축하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2년 동안 숨어지내면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1942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 2년여에 걸쳐 씌어진 이 작품은 사춘기 소녀의 성장과정과 곤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용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 이 기간 동안 동화, 단편소설, 수필 등을 썼다.
그 밖에 2004년 김연아, 국내 피겨 스케이팅사상 100년 만에 국제대회 첫 우승 2002년 미국-영국 군용기 100여대, 4년 만에 최대규모로 이라크 공습 2002년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암살 미수 1998년 서울대, 법학계열을 제외한 의학계열만으로 `2+4전문대학원`을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학제개혁안을 확정 1997년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 사망 1997년 테레사 수녀 사망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1994년 태권도, 2000년 올림픽 정식경기 채택 1990년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서울서 개최 1989년 조훈현, 제1회 응창기배 세계프로바둑대회 우승 1989년 동화은행 첫 개점 1987년 방송심의위원회, 방송금지가요 500곡 해제 1982년 이스라엘정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8개 정착촌 건설 승인 1982년 중공당(中共黨), 주석제를 총서기제로 개편 1980년 문교부, 대학교육개혁 시안 발표 - 대학졸업정원제 발표 1980년 국방부, 북한 `대남비방` 방송 재개 발표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캠프데이비드회담 시작 1978년 합동통신 한창섭 주(駐)뉴욕특파원 한국기자론 첫 소련입국, 세계보건기구(WHO)회의 취재 1977년 보이저1호 발사 1977년 국군정신전력학교 신설 1967년 경원선 철도 폭파사건 1966년 백마先陣, 월남 상륙 1963년 한국-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교 수립 1956년 서울특별시의회 첫 개회 1955년 관(官) 요금 인하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 공포 1955년 한국사진회 발족 1954년 자유당, 초대대통령 재선(再選) 제한 철폐 등 개헌안 제의 1948년 국방경비대와 해양경비대를 육-해군으로 개편 1945년 경전(京電), 일본인 간부 퇴진 요구하며 총파업 1944년 베네룩스 관세동맹조약 조인 1936년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사진의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조선중앙일보’ 자진휴간 1920년 조선일보 제2차 정간(~12.24) 1915년 정치가 이민우(李敏雨) 출생 1913년 월간소년잡지 ‘아이들보이’ 창간 1912년 미국의 작곡가 존케이지 출생 1905년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 조인 1888년 인도의 대통령(1962-67) 라다크리슈난 출생 1774년 19세기 초 독일의 낭만주의를 개척한 화가 프리드리히 출생 1187년 카페 왕조 출신 프랑스의 왕 루이8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