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주인공으로 부자 한 사람과 거지 한 사람을 등장시키는데, 부자와 거지라는 대비되는 특징 외에도, 부자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고, 거지에게는 이름을 주셨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부자에게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거지에게만 나사로(“하나님이 도우셨다”)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주셨을까요?
보통 이 세상에서는 부자들의 이름은 유명하고, 거지들의 이름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가 큰 부자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도 잘 압니다. 빌 게이츠, 이건희, 정몽구 등등. 그러나 거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수많은 거지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기억하세요? 그런 사람은 죽어도 신문에 나오지도 않고, 이름도 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죽으면 매스미디어에서 크게 알리고, 장례식조차 호화롭습니다. 조문객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부자는 무명한 사람으로, 거지는 이름을 주어 유명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비유로 말하다」라는 책에 보면 어떤 여 기자가 장애인을 옹호하는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시험 삼아 휠체어와 목발을 빌리고 남편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하면서, 위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몇 시간 동안 다녔습니다. 마침 그 때, 그 박물관에서는 고대 이집트 왕 파라오 투탕카멘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왕이 쓰던 칼이나 장신구, 왕관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부유한 죽은 사람의 유물을 보려고 줄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몇 시간 동안 아무도 휠체어에 앉은 살아 있는 그녀에게 눈길을 돌리거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오직 죽은 부자의 유물만이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휠체어를 탄 나사로 같았습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처럼 나사로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무 관심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부자보다 천국에 갈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먼저 이야기 속의 부자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자색 옷은 겉옷으로써 부유함과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 줍니다. 고운 베옷은 속옷인데, 아주 부드러운 옷이었습니다. 이 옷들은 이스라엘에서 나지 않고, 이집트에서 수입한 외제 명품일 것입니다. 그 부자는 옷뿐만 아니라 좋은 집에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은 축복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부러워합니다. 자신이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자식들이라도 이런 출세를 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지는 그 부자와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합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인데, 가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헌데 투성이 몸으로 그 부자 집 대문 앞에서 누워서 구걸하였던 것입니다.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개들까지 짖으며 달려들어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참 처량한 신세입니다. 개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그가 개 취급 아니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둘의 운명은 역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역전되었습니까? 그들이 죽으면서 역전되었습니다.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 묻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거지는 차라리 잘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잘 죽은 것입니다. 천사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으니 얼마나 잘 죽었습니까?
거지와 부자의 죽음은 똑 같은 죽음인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거지의 죽음보다 부자의 죽음을 더 간단하게 묘사했습니다. 그 부자도 죽어 묻혔다고만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똑 같은 죽음이지만, 이 세상에서의 부유함, 영화와 출세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의 죽음이 더 허무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대비 없이 오직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 영화를 꿈꾸며 살고, 그 목표를 이룬 것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예외 없이 허무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는 부유함과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고 해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더 복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눅16:23-25절을 보세요.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이야기 속에서 죽은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의 핵심은, 인간의 운명이란 죽으면서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엄연한 진리를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이 믿거나 말거나 인생은 죽으면서 영원한 운명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자로 호사스럽게 살았던 사람도 내세에서는 영원한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고, 반대로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산 사람도 내세에서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천국에서 영원히 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겪어야 할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이미 죽은 나사로와 부자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요, 이 이야기 속에서 아직 죽지 않은 부자의 다섯 형제들이 진정한 주인공들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인가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자의 다섯 형제들이 어떻게 하면 부자와 같은 운명을 맞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미 죽은 부자의 생각은 “죽어 천국에 간 누가 다시 살아나서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전도하면 듣고 회개하고 새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눅16:27-30절을 보세요.>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자기 지난날의 모습과 비슷하게 사는 다섯 형제가 지옥에 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소원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나사로가 직접 가서 경고해 주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구약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있으니, 그들이 성경과 주의 종들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충격적인 사건을 보아야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눅16:31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누구의 견해에 동의합니까? 지옥에 간 부자의 견해에 동의합니까? 아니면, 성경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말씀에 동의합니까?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지옥의 부자의 말이 맞는 같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하면서 전도하면 다 믿고 회개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롬10:17)
어떤 사람들은 “보이면 믿고, 알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영의 세계는 믿어야 보이고, 믿어야 알 수 있습니다.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아는 것도 필요하고 믿는 것도 필요한데, 우선순위를 정하자면,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이야기 속의 다섯 형제는 누구입니까? ‘건강하고 잘 사는 우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 친지, 형제, 이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기에 아직 기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이야기 속의 부자처럼 살게 되면, 그 부자의 운명처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부자의 다섯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도를 받아들이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을까요? 아니면 그 부자처럼 살다가 지옥에 갔을까요? 무엇보다 누가 이들에게 전했을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문제입니까?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하지 않고 있는 우리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 기회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그들에게 전하지 않고 있다면 죽은 후에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 전해지는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새 생명 얻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입을 통해, 발을 통해 전해지고 알려져서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하고 기도해 매일 증인되리라 세상 모든 사람들 듣고 그 사랑 알도록>
7주간 전도의 남은 기간 동안 다같이 이 구원의 복음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