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와 산문의 구별
나호열
<예문 1>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 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의 新婦
<예문 2> 나는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붉은 닭들이 몰려온다. 그렇게 고이는 시간의 연기 꿈의 힘 때문에 나는 다시 내려온다. 내려오면 난파하는 귀 하나가 맴돌고 맴돌다 죽는다. 그래서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의 안개, 하얀 식물의 등불, 나는 무서워 곧장 또 뛰어 내려온다. 내 정신의 폐가 바람 속에 맴돌고 맴돌다 죽으면 또 죽은 기억이 맨발로 계단을 오른다. 아아 더럽다 오르지 못하고 곧장 올라간 것처럼 생각하면서 굴러 떨어지는 내 두개골은 아마 내일 아침엔 다시 맨발로 계단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 이승훈, 권태
이승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 합니다.
1. 사고의 단위가 산문은 문장이고 시의 경우에는 행 line이다. (시에는 리듬감이 있다) 2. 산문은 객관적 정보 전달과 실용적 가치에 우선을 두지만 시는 심리적 반응을 요구한다. 3. 산문은 사고의 단위가 연대기적이며 시는 연상적 기법을 따른다. 4. 산문에는 리듬이 없지만 시는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5. 산문은 의미의 확산을 시는 압축을 생명으로 한다.
시에서 요구되는 형식에 대한 개념이 아직도 부족하다면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예문 3> ① 지난 여름 폭우가 쓸고 지나간 산골짜기 계곡에 ② 허옇게 뿌리를 드러낸 몇 그루 나무들이 ③ 바람 속에서 실뿌리들이 필사적으로 흙을 찾아 ④ 몸을 기대고 있다. ⑤ 검은 흙이 실뿌리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고 있다. ⑥ 위태롭지만 아, 따스한 저 손길! -김성춘, 노래.1
<예문 4> ① 그 여자가 걸어오고 있다. ② 머리에는 커다란 짐을 이고 ③ 이쪽으로 이쪽으로 ④ 천천히 천천히 아다지오로 천천히 ⑤ 구월의 햇볕이 ⑥ 그 여자를 짓누른다. ⑦ 그러나 그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⑧ 이윽고 나를 지나친다. ⑨ 나는 뒤를 돌아본다. ⑩ 그 여자는 아직도 느린 걸음처럼 걷고 있다. ⑪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본다. ⑫ 길게 나 있는 그 여자의 발자국 ⑬ 다시 뒤를 돌아보는 짧은 순간 ⑭ 그 여자의 머리에서 커다란 짐이 내려온다. ⑮ 그 여자가 사라진다. ⑮-1 그의 이름은 슬픔이다. 홍영철,그의 이름은 슬픔
<예문 5> ①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 끝에 어두워진다 ② 김 서린 거울을 닦듯 나는 손으로 ③ 나뭇가지를 걷으며 나아간다 ④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등을 내보이며 ⑤ 멀어지기만 한다 저 너머에 ⑥ 내가 길을 잃고서야 닿을 수 있는 ⑦ 집이라도 한 채 숨어 있다는 말인가 ⑧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⑨ 집을 저 숲은 품에 안고 성큼 ⑩ 성큼 앞서 가는 것인가 마른 잎이 ⑪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⑫ 내려놓는다 길 잃은 마음이 ⑬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강윤후, 깊은 숲
<강의의 요점>
1. 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재구성함으로서 새로운 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 시의 형식은 시인에 의해서 자유롭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정형화된 법칙은 없다 3. 시에서 압축이 의미하는 것은 연상과 상상력의 확대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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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산문시인가? / 강인한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이 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쳐 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길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道)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聖賢)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리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 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 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 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의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하고 싶은 일을 하되,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 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닫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 가, 가을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 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 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부인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 꽃을 사서 그에게 안겨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그의 신사다움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壽衣)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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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자칭 타칭 2만이 넘는다는 시인이 오늘도 쉬지 않고 시를 쓰는 일은 그 시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수백 종의 문학잡지를 먹여 살리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문학잡지는 종이공장을 먹여 살리고 종이공장은 인쇄공장을 먹여 살리고 인쇄공장은 잉크공장을 먹여 살리고,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시집이 출판되는 일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간 수천 권의 시집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일이다. 출판사는 대형 인터넷서점을 먹여 살리고 대형서점은 택배회사를 먹여 살리고 택배회사는 자동차공장을 먹여 살리고 자동차공장은 제철공장을 먹여 살리고,
시인이 시를 쓰기에 문학, 출판기사를 쓰는 신문사 문학기자를 먹여 살리고 시인이 시집을 내기에 시집을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를 먹여 살린다. 아직도 원고지에 시를 쓰는 시인이 있기에 사라지지 않은 원고지를 찍어내는 가난한 인쇄공을 먹여 살리고 시인이 시집을 내기에 신간시집을 정리하는 도서관 임시직원을 먹여 살린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서 시를 쓰는 일은 시인의 수십 수백 개 하청업체를 가동하게 하는 문화산업의 원동력, 하청업체의 수천 수만 직원과 수만 수십만 그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경제활동, 시인은 시가 쓰여지지 않는 날에는 날마다 취하여 주류업체를 먹여 살리고 시인은 시가 쓰여지지 않는 시간에는 밤새 담배를 피워대며 KT&G를 먹여 살린다.
하여 시인이여, 문학잡지가 신작시 한 편 청탁을 하지 않아도 출판사가 당신이 출판을 의뢰한 시집원고를 되돌려 보낸다 해도, 대형서점이 신간시집 코너에 새 시집을 꽂아주지 않아도 신문사 기자가 기사 한 줄 써주지 않는다 해도,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룩한 일.
하청업체가 괄시한다고 해서 원청회사가 시를 쓰지 않는다면 그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를 기다리는 시인의 하청업체를 어렵게 하는 일, 시인의 단물만 빨아먹는 하청업체에 시인의 등골이 빠져도 주머니가 텅텅 비어도 가족부터 시인을 무시하여도 시인이여 시의 공장은 돌아가야 한다. 창세기 이후 만년적자라 해도 시의 공장은 돌아가야 한다.
시인은 무릇 베푸는 자, 펜에 잉크가 있고 종이만 있다면 돌아가는 굴뚝 없는 무공해 공장의 나홀로 대표이사. 대한민국 시인이 모두 절필이라는 이름의 직장폐쇄신고서 제출한다면! 이 나라 경제의 허리가 한 순간에 휘청하며 휘어질 것이니,
가난한 시인의 더욱 가난한 원고료가 시 한 편에 20년째 3만원이라고 해도, 그 3만원도 주지 않고 정기구독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출판사가 인세 대신 시집을 준다 해도, 자비로 제 시집을 찍는다 해도, 그 시 독자들이 읽어주지도 사주지도 않는다고 해도,
시인이여, 당신의 시에 숟가락 들고 함께 밥 퍼먹는 하청업체 재하청업체 직원과 직원을 하늘처럼 믿고 사는 그 식구들의 밥상을 생각하며 시를 쓰자. 낮이나 밤이나 쉬지 말고 시의 공장을 돌리자. 여기 대한민국, 우리들만의 시인공화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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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유안진 시인의 수필입니다. 수필이니까 산문인 것이지요. 인터넷에서 이 글을 만나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이들이 이 글의 앞부분만을 떼어서 그것을 적당히 연 구분도 하고 행갈이도 해놓고 나서는 '시'라고들 알고, 그렇게 읽는 모양입니다. 분명히 이 글은 산문이지요. 산문을 시의 형태처럼 꾸민다고 해서 졸지에 산문이 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시에는 '시정신'이라는 게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산문에는 '산문정신'이라는 게 들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시정신은 무엇이고, 산문정신이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면 산문에는 〈비판정신〉이 있어야 하며, 시에는 〈창조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산문에서는 인간과 사회, 사회와 역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갈등 관계 등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서 미추판단, 진위판단, 당위판단 등을 통하여 마침내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는 비판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잠깐 문학평론가 김재홍 교수의 말을 들어보기로 합니다.
"이즈음의 많은 시들은 이름만 가려놓고 보면 어떤 것이 누구의 시인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몇몇 우상화 된 시인들의 시 경향이 그대로 범람하여 창조적인 시, 개성적인 시들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 않는 실정이란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시의 흐름은 크게 보아 리리시즘이나 리얼리즘, 그리고 모더니즘이라는 세 가지의 경향성으로 묶어볼 수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향이든지 중요한 것은 기성의 시관이나 시형, 또는 관습화된 표현양식이나 기법을 깨뜨리고 새로운 인식이나 개성적인 표현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시정신은 창조정신이며, 그러기에 반역의 정신이고, 또한 자유의 정신이고 주체의 정신인 것이다." ―김재홍, '시를 왜 쓰고 읽고 가르치나'에서
그렇습니다. 시에는 창조정신이 필수적입니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시는 시적 긴장 관계를 생성하기 위한 시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운율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며 비유적 이미지나 상징 등 독창적인 시의 개성이 발휘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적 긴장이 없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아예 산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시적 긴장이 팽팽한 다음과 같은 시를 산문 형태로 바꾸어 써놓는다 해도 시가 산문이 되지는 않습니다.
서귀포(西歸浦)의 남쪽, 바람은 가고 오지 않는다. 구름도 그렇다. 낮에 본 네 가지 빛깔을 다 죽이고 바다는 밤에 혼자서 운다. 게 한 마리 눈이 멀어 달은 늦게 뜬다. 아내는 모발(毛髮)을 바다에 담그고 눈물은 아내의 가장 더운 곳을 적신다.
이것은 김춘수 시인의 「이중섭(李仲燮)」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원래는 다음과 같은 형태의 시였는데 산문처럼 붙여써 본 것이지요. 아무리 산문 형태로 붙여쓸지라도 시가 산문으로 떨어지지 않고 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귀포(西歸浦)의 남쪽, 바람은 가고 오지 않는다. 구름도 그렇다. 낮에 본 네 가지 빛깔을 다 죽이고 바다는 밤에 혼자서 운다. 게 한 마리 눈이 멀어 달은 늦게 뜬다. 아내는 모발(毛髮)을 바다에 담그고 눈물은 아내의 가장 더운 곳을 적신다.
이제 위에 제시한 「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이라는 글을 읽어봅시다. '먹여 살리고, 먹여 살리고, 먹여 살린다' 등 약간의 운율을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 유안진 시인의 수필에서도 이만한 정도의 운율을 찾기는 어렵지 않겠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시적 긴장을 찾아보기 어렵고, 또한 시가 지녀야 할 함축이나 상징 또는 개성적인 창조의 정신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단순한 재담으로 쓴 익살스런 산문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글을 시라고 잡지에 발표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합니다. 이런 글을 산문이 아닌 시라고 강변한다면, 그것은 어느 뻔뻔한 자가 청문회에서 부동산 투기를 위해 땅을 사 둔 것에 대하여 자기는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고 말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문학도는 아니지만 평소에 시도 많이 읽고 소설이나 수필도 많이 읽어본 우리 집의 딸애(36세, 대졸)에게 이 글을 읽혀보고 이게 어떤 종류 글이나고 물으니 주저하지 않고 재미있는 수필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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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세계 / 이승훈
문학의 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시의 특성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암시 했지만, 시의 초보자들이 제일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시와 시 아닌 것 을 구별하는 일이다. 같은 문학의 범주에 들지만 시와 소설 혹은 시와 희곡은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장르의 이론을 취급할 여 유도 없고, 또한 그러한 이론은 여러가지 까다로운 문제점들을 제기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시의 특성만을 요약해보기로 한다. 다른 문학적 쟝르와 구별되는, 시만이 보여주는 특성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 들이 있다.*⑧ 첫째로 사고의 단위가 산문의 경우에는 문장임에 비하여 시의 경우 에는 시행 line이 된다. 대체로 모든 시는, 정형시든 자유시든, 행각이 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시인들이 행을 가르는 이유는 소리와 의미의 효과 는 사고와 관계된다. 소설가나 수필가들의 글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강 하게 나타지 않는다. 그들의 경우 하나의 사고는 하나의 문장이 끝 날때 완성된다. 이를테면 쓴다는 것은 자신의 강박관념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일이다. 시의 경우가 그러했다.
처럼 사고의 단위는 문장으로 나타난다. 이 글은 쟝 그르니에가 쓴 「알베르 까뮈」(이재형 옮김)의 일부이다. 여기서 그는 두 개의 생각을 진술한다. 하나의 사고는 첫째 문장, 다른 하나의 사고는 둘째 문장으로 로 진술된다. 그렇지만 시인들은 이렇게 문장을 연결하면서 자신의 사 고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김소월의 「가는 길」에서 읽을 수 있듯이 시인들은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처럼 시행들을 연결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거나 완성한다. 그러니까 형태상으로 모든 시는 원칙적으로 행갈이를 하고 있다. 행갈이 의 유형에는 한 행이 한 문장 이상으로 되어 있는 유형이다. 둘째로 행갈이를 한다고 해서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필요 이상으로 산이 많이 나오는 이른바 위산과다증은 세 가지 증세로 나타납니다.
첫째가 속쓰림 둘째가 소화불량 세째가 더부룩함
같은 글은 행갈이를 하고 있지만 시라고 할 수 없다. 이 글은 약을 팔기 위해 위산과다의 증세를 설명한 신문광고의 일부이다. 표제는 「위산과다의 증세」로 되어 있다. 이 글이 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형태 상으로는 행갈이를 하고 있지만, 글의 목적이 위산과다증에 대한 객관 적 정보를 전달하고, 또한 그런 증상이 있는 사람들에게 약을 판매하기 위한 실용적 가치만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행갈이를 하지 않는 글로서 이를테면
저물어가는 가을녘은 어쩌면 이처럼 폐부를 찌르듯 감동적인가! 아!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슴을 파고든다! 왜냐하면 그 파문이 농도 를 거부하지 않는 어떤 감미로운 감각들이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무한보다 더 예리한 송곳은 없는 법. 같은 글은, 형태상으로는 산문처럼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에 의해 사고가 연결되고 있지만, 엄연히 시라고 불리운다. 이 글은 보드레르 의 산문시 「예술가의 고해의 기도」(윤영애 옮김)의 일부이다. 이 글 을 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글이 가을 저녁에 대한 객관적인 정 보를 전달하거나,우리들의 삶에 실제적인 효율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가을 저녁에 대한 심리적 반응 내지는 시적 명상을 드러내기 때문이 다. 결국 시는 형태상으로는 행갈이의 원칙, 곧 사고의 단위가 행으로 되어 있지만, 형태상의 행갈이만으로는 시의 특성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행갈이의 원칙에 대해서는 이 책의 "시의 리듬"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세째로 산문작가들은 사고의 단위를 연대기적으로 연결하고, 시인들 은 그것을 연상에 의해 연결한다. 산문작가들이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경우 사고의 단위, 곧 문장들이 계기성에 의해 연결됨을 뜻한다. 다음 글을 살펴 보자.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기다려 탔다. 택시는 불을 켜고 빈 영동 거리를 달렸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제 3한강교를 건널 때 나는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시원한 공 기가 몽롱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난간을 짚고 이제 희뿌연 빛을 반사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운전기사가 따라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 자세로 담배를 피우며 나를 보았다.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누워 난 한겨울 동안 어머니는 취로장에 나가 일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마다 맞았던 그 새벽의 빛깔을 이제 알았다.
이글은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일부이다. 문장이 연결되는 방식은 시간적 질서, 곧 연대기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또 한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인과적 질서, 곧 계기성이 드러난다. 그렇지 만 시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를테면
불이 켜진다 밤이면 집집마다 불이 켜진다
멀리 가까이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진다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하는 이들의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진다
같은 시에 드러나는 사고의 연결방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시는 김 춘수의 「밤이면」의 전반부이다. 밤이 되어 불이 켜지는 현상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고의 연결은 시간적 질서나 인과적 질서를 따르기보다는 연상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 밤이 되어 불이 켜지는 현상에서 시인은 울음과 속삭임을 연상하고, 다시 거기서 사랑하는 이들의 울음과 속삭 임을 연상한다. 야콥슨은 산문작가란 접촉성을 토대로 문장들을 연결 하고, 시인은 유사성을 토대로 시행들을 연결한다고 말한 바 있다.*⑨ 네째로 산문에는 리듬이 없지만, 시에는 리듬이 있다. 물론 산문의 경우에도 리듬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산문의 경우 그것은 대체로 단편적이거나, 시행의 길이가 아니라 문장구조에 의해 창조된 다. 이와는 다르게 시의 경우 리듬은 한 편의 시를 지배하며 전통적으로는 문장구조보다는 시행의 길이에 의해 창조된다. 시에 있어서의 리 듬문제는 이 책의 "시의 리듬"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끝으로 시는 산문에 비해 압축된 진술의 형식을 취한다. 산문작가들 이 확장적인 방식으로 글을 쓴다면, 시인들은 수렴 혹은 압축적인 방식으로 글을 쓴다. 시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은, 실증주의자들에 의하면, 우리들의 정신적 에너지를 경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스펜서는 정신적 에너지의 경제를 모든 문체의 보편적 법칙으로 규정하고, 베잴로프스키는 시적 문체와 산문적 문체를 구별하면서, 전자는 모음생략, 모음제거, 구두점 같은 몇가지 수단으로 산문에서는 불가능한 목적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시적 문체에서는 리듬, 각운 등이 산문이 저지르는 에너지의 낭비를 방지한다고 본다.*⑩ 물론 스펜서나 베젤로프스키의 이런한 견해는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비판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형태상으로는 언어의 경제적 사용은 모든 시의 원리가 되고 있다.*⑪ 시에서 언어가 압축적으로 사용된다는 말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짧아야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시행들을 암시적으로 처리하며 개인적 경험에 더욱 많은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뜻한다. 시인들이 자 신의 사고나 느낌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으로는 앞에서 말한 리 듬 외에 비유, 상징, 이미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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