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소서
2024년 2월 25일 사 6:1-8
1. 배경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즉위하여 52년간 재위하였습니다. 재위 기간 그는 이스라엘의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을 견고히 하는 등 나라를 발전시키고 번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으나, 나중에는 교만하여졌습니다.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인 성전에서 향 피우는 일을 자신이 직접 하고자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문둥병에 걸려 부정한 자로 낙인 찍혀 결국 왕실 묘에 안장되지 못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유다 왕국은 국가적으로는 번성했습니다만 신앙적으로는 타락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나오게 되었고, 당연히 이사야서는 펴자마자 1장 첫 구절부터 심판과 질책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사1:2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이와 같은 구절들은 매우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의 회개를 간절히 촉구하는 말씀도 나옵니다. 사1:18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2. 이사야서 6:1-8
(1) 거룩한 체험
비록 국가적으로는 잠시나마 번성하고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타락하는 상황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사야가 본 장면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시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이 때 성전 안에는 연기가 가득 찼고, 문지방의 터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이 때 날개를 여섯 가진 스랍들이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면서 노래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이사야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만나는 데서 출발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느끼는 데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것 없이 신앙은 출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도대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못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우리가 자주 하는 찬양이지요. 이 찬양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으로 볼 수 있는, 사랑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랑의 사건 속에서 접촉이 가능한 분이란 겁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예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사랑도 모두 모습이 없습니다만, 하나님은 몰라도 사랑은 알지요. 사랑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신앙의 초보들은 대체로 흰 수염과 도포자루의 산신령 같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상수들은 사랑의 사건으로 찾아 들어갑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가장 짧고도 명쾌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2) 참회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의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5절을 함께 봉독합니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이사야는 하나님을 뵌 후에 ‘난 이제 죽었다.’고 했습니다. ‘난 이제 죽었다’는 이 탄식은 절대자를 체험할 때 나타나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무슨 형법, 민법상의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근원적인 죄로부터 나오는 고백입니다. 누가 고발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회개의 눈물인 것입니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에 먼지가 뽀얗게 보이듯이 온전하신 절대자, 너무나도 크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나의 근본적인 잘못됨이 뼈저리게 느껴지고, 나라는 존재의 저 심연에 비틀어진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비틀어진 것에 붙들린 나의 모습에 놀라 몸서리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몸서리침이 깊을수록 구원이 가깝습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참회하는 순간이 신앙의 출발점이자 절정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다면, 그는 아직 한 참 먼 사람입니다.
(3) 용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선언됩니다.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의 숯불로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지져 죄를 사(赦)합니다.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상징입니다. 여기에 ‘자비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받아들임’이라는 기독교신앙의 교리가 담겨 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신앙이 뭐냐는 물음에 이같이 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은 우리 죄의 크기와 종류에 관계없이 우리를 받아들여주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길 촉구합니다. 요한일서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기독교신앙은 용서의 변주곡입니다.
(4) 소명
이 모든 일을 겪은 이사야에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8절입니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사야는 곧바로 응답하였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체험은 곧바로 우리네 삶의 과제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만나는 체험을 한 후 곧바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번영 속에 나타나는 타락을 질타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준엄한 예언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거룩한 체험은 곧바로 민족과 역사에 대한 소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변화산에서 천사처럼 변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자.”입니다.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자.” 거룩하고 신비한 체험은 우리 삶의 자리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로 연결되지 않는 신비한 체험은 곤란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신비와 세속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노동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가 결핍되면 신앙적으로는 불구가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체험은 우리 삶의 현장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3. 나를 보내소서!
(1) 정치 =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
정부는 의대 입학정원을 늘린다고 하고, 병원에서는 이런 정책에 반대하여 일부 의사들의 파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당연한 정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관련 자료들을 접하게 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대정원,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우리나라 의료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의대정원, 의사숫자 문제는 하나의 예를 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로세.’, ‘나야 모르지.’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줍니다. 그는 성녀 마르타의 집 소성당 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강론하였습니다.
“… 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공의 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뭔가 기여해야 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A Good catholic meddles in politics).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
(2)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자!
변화산의 놀라운 사건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바로 산 아래 마을로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모두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서 가정으로, 일터로, 사회 현장으로 들어가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주일예배를 통하여,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늘 신비한 체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마을로 내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연후에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 이후에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사야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느끼는 뜨끈한 마음으로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는 하늘샘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