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명(李鍾明·51) 육군대학 교관(대령)은 10년 전 자신의 두 다리를 앗아간 끔찍한 지뢰사고에 대해 술회하면서도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아픈 과거를 캐묻기 주저하는 기자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도 했다.
이 대령을 전쟁 60주년인 25일 대전 육군대학에서 만났다. 비극이 닥친 날짜의 이틀 전이었다. 대령은 들뜬 표정으로 "내일(26일) 사고가 났던 파주로 아내와 나들이를 간다"고 말했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같이 있었던 '진짜 전우(戰友)'인 부하 셋과 그 가족들이 매년 사고 난 날을 전후해 그곳에서 모인다는 것이다.
때는 2000년 6월 27일 오전 10시 47분이었다. 파주지역 수색대대장이었던 이종명 중령(이하 당시 계급)은 후임 대대장 설동섭 중령에게 인수인계를 위해 비무장지대(DMZ) 수색 정찰에 나섰다. 이 중령과 설 중령, 박영훈 중대장(대위)은 군사분계선(MDL) 앞까지 접근했고, 다른 장병들은 후방 30m 거리를 두고 엄호하고 있었다.
설 중령이 돌아 나오려다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었고, 박 대위는 파편을 맞아 쓰러졌다. 이 중령은 둘의 소총·철모를 챙겨 빠져나와 무전병에게 상황 보고를 지시했고, 두 후배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현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후임 대대장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도 역시 지뢰를 밟았다.
―사고 상황을 돌이켜도 될까요?
"그럼요, 어차피 지난 일인데.(웃음) 이·취임식 딱 열흘 전이었습니다. 제가 그곳 미확인 지뢰지대에 40개월 근무해서 길을 훤히 알았어요. 전날 억수비가 내렸는데, 그날 완전히 갰어요."
―그 비가 비극을 불렀군요.
"적어도 대여섯 번 가본 곳이니까, 비 때문에 지뢰가 떠내려가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죠."
―혼자 구출하려 뛰어든 것은 옳은 판단이었습니까?
"부하들을 빨리 구해내야겠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이 안 들었어요. 과다 출혈로 목숨이 위태로웠으니까요. 거긴 녹음(綠陰)이 우거져 엄호 병력은 MDL 쪽 우리들이 전혀 안 보입니다. 첫 번째 지뢰폭발이 났을 때 엄호 병력이 동요할까 봐 상황을 알리려 나왔고, '내가 들어갔던 지역이니까 내가 가겠다'고 한 거죠. 잘한 판단인지는 몰라도, 길 모르는 병사들이 갔다면 피해가 더 컸을 테니까요. 만약 지금 제 다리가 멀쩡하다면 자괴감 때문에 폐인이 돼 있었을 거예요. 제가 직접 안 갔다면 지금의 저보다 훨씬 못한 제가 돼 있을 겁니다. 부하들이 응급처치를 잘 해줘서 이렇게 살아 있으니 감사하죠."
―지뢰를 밟았을 때 어떤 느낌이던가요?
"영화에 나오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웃음) 발로 밟았다 뗐을 때 터지는 지뢰는 전 세계에 없습니다. 밟는 순간 '꽝' 터졌고 두 다리가 날아갔습니다. 몸이 붕 떴다 떨어졌는데 손가락 관절을 다쳐 굽힐 수 없었죠. '내가 (지뢰를) 밟은 것인가, (1차 폭발 때 들었던) 환청인가' 혼돈스러운데 다리 아래에 뜨거운 느낌이 왔습니다."
―그 순간 부하들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외쳤지요?
"엄호 병력이 소리를 듣고 뛰어들어오려는 움직임이 보였어요. 손을 다쳐 소총을 팔뚝에 올린 채 팔꿈치로 기어 나왔죠. 15m쯤 포복해 안전이 확인된 그 길을 통로로 삼아 설 중령, 박 대위를 구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 대처는 훈련한 것입니까, 임기응변입니까?
"교본에는 원칙만 있고 전장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판단·지휘합니다."
―함께 지뢰피해를 겪은 두 사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설 중령은 후유증으로 혈류(血流) 이상이 왔어요. 기억력·지능이 떨어져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데다 대인기피 때문에 주로 집에서 지냅니다. 육사 한 기수 후배라 잘 알고 군에서 큰 역할을 할 장교였는데, 정말 참…. 박 대위는 전방근무를 자원해 지금도 고성 지역에서 소령으로 근무 중입니다."
―2년 2개월을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재활에는 엄청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순 행동을 반복 훈련하고, 딱딱한 의족이 주는 고통과 압박감을 참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해내겠다, 현역으로서 부족함 없이 역할을 다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염력을 넣었습니다. 저는 비관하거나 절망한 적이 없습니다. 건강도 이제 웬만한 사람보다 낫다고 자부합니다. 어머니가 큰 힘이 됐어요. 제 병실 수발을 하면서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지요. 참 대단한 분입니다."
―불편함은 얼마만큼 극복했습니까?
"군의관이 보행연습을 시키면서 '팔자걸음으로 걸어야 안정감이 있다'고 조언했는데 '나는 현역 복귀할 사람이니까 똑바로 걷는 연습을 하겠다'고 했어요. 처음엔 잘 넘어졌고 아직도 계단 올라갈 때 불편하지만 속도가 좀 처질 뿐 괜찮습니다. 의족 만드는 분이 '이 대령처럼 잘 걷는 사람 본 적이 없다'고 해요. 손으로만 조작할 수 있도록 개조된 차량을 손수 운전하고요."
―육사 지원 동기는 무엇인가요?
"집이 몹시 가난해 국비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해양대에도 합격했는데, 어머니가 육사를 권하셨어요. 저는 느낄 수 있어요. 무학(無學)에 빈농이었던 아버지(1991년 별세)가 (공부를 제대로 못 시킨 것을) 늘 미안해하신 것, 그래서 어머니 결정을 묵묵히 따랐던 것을요."
―육사 생활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나요?
"상상보다 훨씬 좋았어요. 제복 입고 서울 시내 나가면 주목받았고 절도 있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장애인으로서 현역 복무를 계속한 최초 사례지요?
"저를 계기로 나라와 군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된 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원망이나 후회를 해본 적이 없습니까?
"당연히 할 일을 했는데 누구를 원망해요. 나라를 위해 한 일이고, 제가 잘 이겨 나가고 있는데요."
―그런 긍정의 힘은 천성인가요, 후천적 노력인가요? 아니면 신앙인가요?
"글쎄, 저도 모르겠습니다. 비장애인이라면 못했을 경험을 하고 있으니 되레 감사하지요. 주말엔 교회 봉사활동을 열심히 합니다. 목포·여수·인제로 다니면서 '아버지 학교'에서 봉사를 합니다."
―사고 당시 가족 반응은 어땠나요?
"아들 둘이 그때 중 2, 초등 5년생이었어요. 철이 든 큰놈이 뉴스를 우연히 접해서 동생이 상처받을까 봐 신문 치우고 TV 끄고 그랬다더군요. 지금은 둘 다 제 장애를 자랑스러워해요. 여자친구도 스스럼없이 데리고 와서 소개시켜 주고요."
―아내는 책망하지 않았나요?
"사고 덕에 가정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사고가 없었다면 부대(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을 거라면서요. 제가 맡은 작전임무가 매일 야근이어서 가정을 별로 돌보지 못했어요."
―내면적으로는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그전엔 바늘로 찔러야 피 한 방울 안 날 사람이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냉정했지요. 성격도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주변 사람들이 그래요."
―이 대령을 주인공으로 육군본부가 건군 60주년 기념 군(軍) 최초 뮤지컬 '마인(Mine)'을 제작했죠?('마인'은 직업군인 아버지와 신세대 아들의 갈등을 담은 내용으로 2008~2009년 공연했다. 실제 이 대령의 지뢰사고는 모티브가 됐을 뿐 상당 부분 각색됐다.)
"제겐 부자 갈등이 없는데 관객들이 그런 줄로 오해하더군요.(웃음) 상관없습니다. 군 전체를 홍보하기 위한 거니까 저는 기꺼이 '교보재'(교육훈련 보조재료)가 될 의향이 있어요."
―울컥한 부분이 있던가요?
"대대장이 '위험하니 내가 (지뢰지대로)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대사가 나와요. 그 장면이 뭉클하더군요."
―눈물이 났습니까?
"…."(그는 물만 들이켰고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뮤지컬 제작자이자 육사 동기인 이영노 중령 얘기로, 동기들이 사고 소식을 접하고선 '우직한 촌놈이 능히 그랬을 일이다'라고 했다더군요.
"하하,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군인이라면 분명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했을 겁니다."
―6·25 60주년에 천안함 폭침 등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안보강연 때 '대한민국은 전쟁이 끝난 게 아니다. 전방에서 한번 실수는 바로 죽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진실을 말하는데 믿지 않고, 그래서 진실을 말하기를 회피하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정확한 실상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교관으로서 현역 임기를 마치고, 그 이후엔 저처럼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해 어떤 역할이건 맡고 싶습니다."
―최근 가장 기뻤던 일은 뭔가요?
"육사를 지원해 실패했지만 해안(海岸)부대 트럭 운전병으로 복무했던 큰아이가 전역해 복학한 것이 자랑스럽고, 학생군사교육단(ROTC) 1년차인 둘째가 직업군인을 할까 고민 중인데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반갑고 대견합니다." 이 대령은 아들에게 진로를 강요한 적이 결코 없다고 말했다.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해라. 어떤 결정이건 적극 지지하겠다"고만 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종명 대령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대구 달성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39기로 임관했다. 화천·연천·파주에서 각각 소대장·중대장·대대장을 지냈다. 1994년부터 파주에서 근무했고 2000년 6월 판문점 북동쪽 5㎞ 지점 비무장지대(DMZ)에서 인수인계 도중 지뢰를 밟은 후임 대대장을 홀로 구출하려다 지뢰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었다. 그로부터 26개월간 병원에서 치료·재활훈련을 받았고, 사고를 계기로 군 인사법 시행령이 개정돼 신체장애 군인으로서 처음으로 현역 복무의 길이 열려 2002년 퇴원 직후부터 육군대학 교관으로 근무 중이다. 영관 장교를 대상으로 작전술과 지상군 기본교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각급 부대와 중·고교에서 안보특강을 하고 있다. 사고 당시의 살신성인(殺身成人)으로 보국훈장, 2002년 육사 총동창회가 처음 제정한 올해의 육사인상을 받았다. 파주 통일공원에 그의 공적을 기린 살신성인탑이 세워져 있다.
지난 2월 13일 동고동락에서는 과천시민회관에서 열리는 뮤지컬 '마인'을 찾아갔다. 군에서 하는 첫 창작뮤지컬이라 그런지 의미가 더욱 컸고 가슴이 설레였다. 육군 창군 이래 최초의 창작 뮤지컬 '마인(MINE)'은 작년 10월 18일부터 대전 충남대 정심화홀에서 초연 후 서울,광주,대구,부산,춘천 ,과천 공연 후 2월 20일부터 하는 고양공연을 마지막 준비중에 있었다.
우리가 간 날은 앙코르 공연 과천에서의 마지막 공연날이었다. 군뮤지컬이라 왜인지 딱딱한 느낌과 텅빈객석을 생각했지만 표는 진작에 매진이었고 공연시작 2시간 전부터 공연장은 사람들로 북쩍거렸다. 게다가 유독 군인들이 눈에 띄었다. 군복을 입지 않아도 군인티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군뮤지컬이었기 때문에 그런걸까? 말에 따르면 육군은 휴가 장병이 군 창작뮤지컬인 ‘마인’을 관람하면 뮤지컬 관람이 장병들의 국가관과 가치관 확립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해 휴가를 하루 더 연장해 주기로 했다고 한다. 뮤지컬도 보고 특박까지 받는 1석2조의 기회까지 주어진다니!!
'마인'에 관한 보도자료는 진작부터 보아왔다. 지금은 군인이지만 안칠현,양동근의 출연으로 이미 화제가 되어있었고 앵콜공연부터는 재희도 합류했던 터라 더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던거 같다. 또한 '마인'은 건군60주년 기념 공연이기도 하고 군 최초의 뮤지컬이란 점에서 의미도 깊지만 2008 한국 PR대상 에서 대상까지 수여한 작품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로인해 뮤지컬 마인은 육군 이미지 제고와 군인들의 사기진작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표를 끊고 공연장에 들어갔다. 객석은 이미 꽉 메워져 있었고 공연장은 공연을 앞두고 북적였다. 뮤지컬 마인은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폭발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이종명 대령(49.육사39기.당시 중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군인 아버지와 신세대 아들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뮤지컬 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 수색대대 대대장으로 있었던 2000년 6월 27일, 후임 대대장 설동섭 예비역 중령(47.육사40기.당시 중령)을 비롯한 장병과 DMZ 정찰 중 설 중령이 먼저 지뢰를 밟아 부대원들의 접근을 막고 구조에 나섰다 사고를 당해 '부하 사랑'의 귀감이 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공연 시작전 안내방송이 나왔다. 군뮤지컬이라 그런지 군인말투로 안내방송이 나왔고 공연중 사진을 찍을 시 헌병조치 된다는 말에 웃음 반 그리고 두려움 반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비무장지대를 배경으로 공연은 시작되었다. 총성 소리에 너무 놀라지 말라는 안내방송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을 울리는 총성소리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인'에서 주인공 이종명대령이자 극중 은호의 아버지는 평생을 국가에 충성하며 살았고 군대가 삶의 전부이다. 오죽했으면 아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도 다 군대에 가지 않아서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군대를 증오하고 탈출구로 춤을 선택한다. 현대무용 전공으로 콩쿨에서 우승하면 군대를 면제받기에 이를 목표로 콩쿨에만 매달린다. 하지만 이들 부자는 군 입대 문제를 사이에 두고 점점 멀어지기만 한다.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아들과 입대가 당연한 아버지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만 지고 풀릴길은 없어보였다.
주인공 은호역으로 가수출신이자 현 군 복무중인 안칠현 일병(예명 강타)이 맡았는데 그의 가창력과 더불어 현대무용을 소화하며 반항심의 끝을 보여준다. ‘인상 쓰는 강타’, ‘소리 지르는 강타’, ‘눈물 머금은 강타’ 로 반항 3종셋트까지 나왔으니^^ 또 은호의 절친한 친구역의 봉태(양동근 일병)은 특유의 랩과 함께 고아로 살아가며 가난한 생활을 탈피하고자 군을 택하는 역할로 나온다. 양동근의 재치있는 연기와 춤은 극중 다소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단연 밝게 끌어올려주고 있었다. 뮤지컬 전에 잠깐 했던 인터뷰와는 정말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공연 중간에 등장하는 황금마차와 족구에 관한 장면은 인상깊으며 재밋었다. 공연을 보기 전 '마인'의 시놉시스를 보며 지뢰로 다리를 잃은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이에 반항하는 아들에 무거운 분위길 예상했지만 춤을 통한 갈등표현과 군대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가미해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공연을 조금은 가볍게 즐겁게 이끌어내었다. 비보잉과 현대무용, 그리고 군인들의 군무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져 즐거운 공연이었다. DMZ의 철책으로 했던 안무도 독특했다. 결말이 앞전의 내용에 비해 공연 막바지에 급하게 났었던 것이 조금 아쉽지만.. 뮤지컬 '마인'은 훌륭했다.
총 40명이 출연하는 '마인'은 일반인 5~6명을 제외하고 모두 현역 군인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군인이라면 나라를 지키며 다소 무겁거나 혹은 무뚝뚝한 인상을 생각하는데.. 정말이지 보면서 다 군인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군인도 사람이고 태어날 때부터 군인은 없지만 군인이 되면서.. 사회에서 했던 것들과는 상관 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공연 전 400여명의 지원자 중 안칠현,양동근도 함께 다 오디션을 보고 10:1의 경쟁률을 뚫고 무대에 서게 되었다고 하는데.. 경쟁률이 10:1이지만.. 군대에와서 자기가 했던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에있어서 그 경쟁률은 그 이상일 것이다.
건군이래 군의 최초 뮤지컬이자 꿈의 뮤지컬이며 꿈을 넘어서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이에 더해 기존의 군생활에 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었다고본다. 또한 뮤지컬 '마인'을 통해 군은 국민들에게 조금더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갔을 것이며 국군의 사기진작에도 기여했다.어느누가 군대에서 뮤지컬을 할 거라고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아무래도 군대와 뮤지컬의 거리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너무나 잘해왔지만 자칫 군생활에 활력소를 불어준 것이 아닌 허황된 바람만 넣어주는 상황이 될까 조금은 걱정도 되는 바이다.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에 배우들이 인사할 때 모두 군복을 입은채 관객들을 향해 충성! 하면서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은 대한민국군인의 늠름함과 더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찡한 감동마저 불러일으켰다. 뮤지컬에 임했던 현역군인들은 고양공연을 끝내고 모두 다시 부대로 복귀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열심히 했던 것 만큼 그들이 공연 후에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히 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대한민국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뮤지컬 '마인' 고양공연 일정
2009년 2월 20일~3월 1일
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3시/7시 (월요일은 쉼)
written by. 강치구
4일 오전 11시, 파주 통일공원에서 추모식 거행... 김 양 처장, 재향군인회 이재관 부회장 등 3,500여명 참석
▲ 4일 오전 11시, 파주 통일공원에서는 육탄10용사 61주기 추도식이 거행됐다.ⓒkonas.net
5월 4일 오전 11시, 파주 통일공원에서는 61년 전 이날 북의 기습으로 빼앗긴 송악산(개성 부근)을 탈환하려고 적 토치카(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영구적 화기진지)에 특제폭탄을 들고서 돌진한 ‘육탄 10용사’를 기념하는 추도식이 거행됐다.
▲ 정부는 나라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김양(국가보훈처) 처장ⓒkonas.net
81mm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치한 특제폭탄을 가슴에 안고 적 토치카로 돌진하는 이른바 ‘육탄공격’을 자원한 ‘육탄 10용사’는 국군 1사단 11연대 2대대의 서부덕 이등상사와 박창근 하사, 김종해, 이희복, 윤승원,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상등병 이상 10인이다.
이날 거행된 제 61주기 ‘육탄 10용사’ 추도식에서, 김양 국가보훈처장은 천안함 침몰 사건, 북의 금강산에 있는 우리의 부동산 동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국가안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61년 전 살신구국의 정신으로 자유대한의 진정한 수호신인 육탄 10용사”를 바라보면서 지금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해쳐나가자고 말했다.
또한, 김양 처장은 “정부는 나라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어 박희모(6∙25참전유공자회) 회장은 북은 끊임없는 군사적 도발로, 또 6∙25전쟁이 남침이라는 왜곡을 하며 북의 선전선동에 놀아나는 친북좌경세력들로 통탄을 금할 수 없다”면서 “단호한 대처로 친북좌경세력들을 분쇄하자”고 주문했다.
▲ 국가 안보를 굳건히 하기위해서는 ‘전작권 환수’와 ‘한미연합사 해체’가 연기 및 유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윤종언윤종언(육탄10용사기념사업회) 회장ⓒkonas.net
추도사를 한 윤종언(육탄10용사기념사업회) 회장은 “작년 육탄 10용사 60주기 행사에 이명박 대통령은 추도사를 보냈고, 영웅들의 거룩한 정신은 지금도 국민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고 조국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60주기 대통령 추도사를 요약했다.
또, 윤 회장은 ‘육탄 10용사’에 이어 최근 천안함 46용사’들은 영원히 기억될 ‘우리의 영웅’이라면서, 이들 호국영웅들의 순국에 보답하는 길은 굳건한 국가안보태세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국가 안보를 굳건히 하기위해서는 ‘전작권 환수’와 ‘한미연합사 해체’가 연기 및 유보되어야 한다고 윤 회장은 강조했다.
▲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육탄10용사의 노래'를 참석자들과 함께 제창하는 여학생들ⓒkonas.net
이어 육군 1사단에서는 신현돈 사단장이 진혼사를 낭독하고, 1사단 여군대표 조아라 하사가 헌시를 전했다. 행사로는 군악대가 ‘육탄 10용사의 노래’를 제창한 가운데, 육군 14개 군단에서 선발된 모범장병에게 ‘육탄10용사상’이 신세훈 중사 등 14명에게 수여됐다.
▲ 육탄10용사 제단에 헌화하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이재관 부회장ⓒkonas.net
이날 거행된 추도식에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이재관 부회장, 상이군경회(회장 류지철) 등 보훈단체장을 비롯해, 파주시장, 참전유공자, 학생·시민 등 3,500여명이 참석했다.
한편, 다음은 파주 통일공원에 세워져 있는 한국전순직종군기자추념비, 6·25전쟁 당시 순직한 이유중 대령과 김만술 소위의 기념비, 육탄용사충용탑, 개마고원 반공유격대 위령탑 등을 화보로 정리했다.(konas)
▲ 통일공원 육탄10용사충혼탑우편에 세워진 육탄10용사상ⓒkonas.net
▲ 개마고원반공유격대 위령탑ⓒkonas.net
▲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konas.net
▲ 김만술 소위상. 김만술 소위는 1953년 7월15일 중서부전선 베티고지에서 불과 1개소대 병력으로 중공군 2개 대대를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격퇴시켜 사살 365명이라는 혁혁한 전과를 세워 금성태극무공훈장과 한국인으로서 최초 미국 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전쟁영웅이다.ⓒkonas.net
▲ 살신성인탑. 2000년 6월 27일 비무장지대(DMZ) 수색정찰중 지뢰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부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한 이종명 중령과 설동섭 중령의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konas.net
▲ 이유중 대령 기념비. 1980년 비무장지대(DMZ) 수색정찰작전 중 중상을 입었으나 끝까지 부대를 지휘하다 순직한 이유중 대령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konas.net
▲ 임광빈 중령 기념비. 임광빈 중령은 1989년 8월 22일 훈련 중, 임진강에서 부하들을 안전하게 도하시킨 후 자신은 급류에 휘말려 순직했다.ⓒkonas.net
▲ 충현탑. "6.25당시 문산전투에서 산화한 육군 제 3270부대 장병 2,385명에 대한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1972년 12월 1일 육군 제 1보병 사단에서 이 탑을 건립하다"라고 적혀있다..ⓒkona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