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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이 꽃이 되어 원문보기 글쓴이: 검은호수
작약에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옛날 파에온이라는 공주가 사랑하는 왕자를 먼 나라의 싸움터에 보내고 혼자서 살고 있었습니다. 공주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왕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렸지요.그러나 왕자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눈 먼 악사 한 사람이 대문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공주는 그 노랫소리가 하도 구슬퍼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듣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노래는 왕자가 공주를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죽었다는 사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자는 죽어 모란꽃이 되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주의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습니다. 공주는 굳게 마음먹고 악사의 노래 속에서 가리키는 대로 머나먼 이국 땅을 찾아가 모란꽃으로 변해 버린 왕자 곁에서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왕자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공주의 정성은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공주는 함박꽃(작약꽃)으로 변하여 왕자의 화신인 모란꽃과 나란히 같이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란이 피고 나면 으레 작약이 따라 피는데 전설을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듯도 합니다. 또 일설에 의하면 모란꽃과 작약꽃의 학명 중 속명이 같은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네요. 어쨌거나 모란과 작약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참 다릅니다. 모란이 남성적이라면 작약은 여성적이라고나 할까요. 꽃도 모란은 단순한데 반해 작약은 풍성하지요. 그래서 함박꽃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합니다. 고려 충렬왕 25년 봄, 노국 공주는 수령궁 향각 뜰을 거닐다가 작약이 만발한 것을 보고 시녀에게 그 한 송이를 꺾어오라고 했습니다. 꽃을 받은 공주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결국 흐느껴 울고야 말았습니다. 멀리 떠나 온 고국에도 한창 피어 있을 작약과 부모 형제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 뒤로 공주는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지요.
이토정(李土亭)은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 난 분이며 음양오행 풍수지리에 능통하여 앞날을 훤히 점치는 도사였습니다. 하루는 이토정 선생이 8도 강산을 두루 돌아 다니던 중, 어느날 옥천땅에 들어섰습니다. 갈증이 심해서 먹을 물을 찾던 중, 그는 작은 계곡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랬더니 이상스럽게도 그 물에서 작약(芍藥 ; 함박꽃)의 향취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다. 그는 이게 어찌 된 까닭인지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물줄기를 따라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작약미발형'(芍藥未發形 ; 함박꽃 봉오리 모양)의 천하대지(天下大地)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 토정선생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즉시 그 땅을 죽은 뒤에 자신의 무덤으로 삼기로 하고는 땅에 표식을 해둔 뒤 자기 집이 있는 한산(韓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후 토정선생은 이 일을 극비로 하여 일체 발설치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토정선생같이 앞일을 훤히 점치고 사는 도사도 자기 죽는 날은 모르고 지내다가 급기야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혀가 굳어서 그는 자기가 지난 날 무덤으로 정해 놓은 땅을 자손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토정선생이 생전에 항상 데리고 다니던 심복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신개(愼凱)였다. 그런데 그는 작약미발형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은 신개의 인도로 한산에서 상여를 메고 머나먼 옥천땅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금산을 지날 때였습니다. 하인 신개가 갑자기 심장마지를 일으키더니 죽고 만 것입니다. 상주는 당황하여 표식을 해둔 곳을 급히 물었지만, 신개는 벌써 혀가 굳어서 발음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개골……개……골, 삼밭……골……뒤……"하고는 죽어버렸습니다.
토정같이 천문에 능하고 지리에 통달했던 분도 하마 이리될 줄은 몰랐던 모양입니다. 일행은 할 수 없어 "개구리가 우는 삼밭뒤……"라는 뜻으로 알고 삼밭(麻田) 뒷산으로 갔지만 아무리 찾아 보아도 그럴 만한 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상여를 돌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산천초목도 다 물각유주(物各有主)라더니 작약미발형진의 명당은 아직도 공지(空地)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풍수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토정이 서거한 뒤에도 여러 백년간, 답산하여 찾아 보았지만 아직까지 그곳을 찾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후 신개가 죽은 곳을 "신개들"이라 하고, "삼밭골"은 지금 마전을 이름이니, 한산에서 옥천을 향해 오던 도중에 이러한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위치는 서대산 줄기 군서면 어느 산록이라고 하지요.
일제시대의 화가 나혜석이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과 실천을 글로써 표현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녀에게도 작약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가 봅니다. 최린과 이별한 뒤, 설상가상으로 아이마저 죽고난 뒤 그녀는 심신이 많이 피폐해지고생계문제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당시 그녀는 자궁의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인병에 효과가 있는 작약을 특히 가까이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의 그림에는 작약이 많이 등장하고, 그림 아래나 앞부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진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사람과 헤어질 때는 작약을 선물하고, 여자가 남성에게 구애할 때는 향기가 짙은 말리화를 선물했으며 사람의 근심을 잊게 하려고 원추리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길 떠나는 임에게는 버드나무 가지를, 급제를 바라며 살구꽃을, 사랑과 우정의 증표로 매화를 주기도 했으며, 아름답지만 도도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여인에게는 장미를 바쳤다구요.
환호하던 봄이 가기도 전에 환하게 마당을 수놓는 작약. 그래서 옛 사람들은 기쁜 일을 가리켜 환호작약한다고 했던가요... 하지만 청마는 작약을 보면 슬프다고 읊었더랬지요. 이곳 거제 둔덕의 창마 생가에는 지금도 작약이 피어있습니다.옛 주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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