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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간고하고 가열찬 무기준비 투쟁
우리는 지난 2개의 장에 걸쳐서 1932년 4월 25일 김일성 주석의 주도하에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이 선포를 한 것은 여러 자료들을 비교분석하여 얻은 결론과 필자가 직접 현지를 답사하여 확인한 내용을 종합한 결과 역사적 사실임을 확증하였다.
우리가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1932년 4월 25일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상세를 하는 이유는 앞서도 간략히 언급을 했지만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기점으로 하여 이후 반일·항일무장유격투쟁이 두드러지게 강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이전에도 소규모의 무장투쟁이 있었지만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투쟁을 벌이던 여러 무장투쟁단들이 조직적으로 단일한 대오를 갖추고 투쟁지휘부의 조직지휘를 받고 일사분란하게 투쟁을 벌이지 못했었다. 하지만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고 나서는 투쟁의 전술전략수립과 이에 따른 동북만 각지의 유격대원들이 김일성주석의 조직지휘 아래 조직적이고 가열차게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럼 어찌하여 동북만과 남만과 같은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에서 한 나라의 정규무력이 전투를 벌이듯이 일사분란하게 유격무장투쟁을 벌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분석을 해보는 것은 필수이다. 이미 13회 차에서 살펴보았듯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서 아래와 같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에 향후 무려 15년 여 이상을 강대하고 포악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한 순간도 멈춤이 없이 가열차게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준비과정은 아래와 같다.
“➀ 무장장비의 준비
➁ 유격대와 동북만주 및 조선의 주민들과의 연계
③ 유격근거지의 건설
➃ 반일민족통일전성의 형성
➄ 중국공산당조직 및 반일구국군과의 연계
➅ 각 유격대와의 연계투쟁
➆ 유격전 후방물자의 조달
➇ 유격대원들의 수급
➈ 국제공산당조직과의 연계”(항일연재 13회차) 등이다.
이제 이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무장장비의 준비 과정부터 보기로 하자.
1) 적의 무장장비는 나의 무장장비이다.
사실 유격대의 무장투쟁을 함에 있어서 소제목과 같은 기치를 내걸고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무장장비의 준비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세계사의 무자투쟁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젊은이들은 남들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발한 전술전략을 수립하여 치밀하게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무장장비 준비를 하였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물설고 낮 설은 이역 땅에까지 가서 무장투쟁을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남의 나라 땅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처지에서는 유격대를 후원하고 원호물자를 넉넉히 보장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이다. 더구나 남의 나라 땅에 이주를 한 백성들 대부분은 자작농이거나 스스로 산업이나 상업시설을 갖추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동북만과 남만 일대에 살고 있던 백성들 대부분은 소작농이거나, 벌목노동, 광산노동, 상점의 점원, … 등과 같은 노예노동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남의 나라 땅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의 처지가 이와 같은데 어찌 유격대가 충분한 무장을 준비할 수 있도록 후방원호를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거의 모든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제의 가혹한 감시가 뒤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상황이니 남의 나라 땅에 이주를 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조선인이라 할지라도 무엇인들 마음 놓고 유격대를 후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일반적인 이민족(異民族)들의 기본상식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을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해 무장장비를 준비하는 계획을 수립을 하였던 것이다. 이 계획이 바로 “적의 무장장비는 나의 무장장비이다.”이다. 비록 적수공권의 투쟁가들이지만 기회가 주어진다거나 아니면 적절한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적들을 기습하여 적의 무장장비를 빼앗아 나의 무장장비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장장비의 준비과정은 사실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하지만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은 과감하고 용감하게 자기 희생성을 발휘하여 이 계획을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투사들이 희생이 되었겠는가.
이렇게 목숨을 내건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도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 반일·항일투쟁가들은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이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투쟁은 강력한 무장력을 가진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싸우고, 또 비록 우세한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지만 그들과 싸워 기어이 승리를 하고 조국을 해방하겠다는 강력한 신념의 일환인 것이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걸고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하였다. 이게 바로 “적의 무기는 나의 무기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계획이자 젊은 조선인 반일·항일무장투쟁가들의 강력한 신념이었다.
지금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논문자료, 남쪽의 자료, 그리고 북의 자료에 기술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위의 사실을 확인해보기로 하자.
(1)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논문자료
이미 이전 장들에서도 여러 번 강조를 했듯이 연변조선족학술논문의 자료를 대함에 있어서는 항상 중공당우선주의의 입장에서 분석을 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대하기 바란다. 될 수 있으면 전문을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 무기탈취투쟁
추수춘황투쟁을 거친 연변인민들은 강대한 일본침략자와 싸우자면 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또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무장해결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독립운동시기에는 돈만 있으면 로씨야로부터 얼마든지 무장을 살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로씨야가 이미 사회안정이 실현되여 한창 사회주의건설의 열이 오르고있는 때여서 무기를 아무데서나 구할수 있는 사회환경이 아니였다. 또 중국정부의 공산당반대의 리념차이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하여 무기를 얻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리고 연변인민들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빈주먹밖에 없어 군자금을 헌납할 힘도 없었다. 때문에 오직 두 손으로 적들의 손에서 빼앗은 무기와 야장간같은 “병기공장”에서 만들어진 칼, 날창, 자작폭탄 같은 것이 유격대를 창건하는 최초의 무기가 되었다.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대책을 강구했는데 생사를 불문하고 지혜롭게 적의 무장을 탈취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어떤 고장에서는 녀성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빨래방치로 군경을 까부시고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끓는 물을 퍼부어놓고 무기를 빼앗기도 했으며 고춧가루를 놈의 눈에 쳐놓고 총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김충진이라는 젊은 형제가 총을 빼앗은 이야기도 참 지혜롭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부 박창욱교수는 무기탈취를 위해 싸운 심금을 울려주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1931년 여름 어느날 연집강부근의 밭에서 김을 매던 충진의 형제는 순경 한놈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흔들먹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놈의 총을 빼앗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충진의 형제는 순경놈이 들으라고 우정 호미로 돌을 탕탕 치면서 인기척을 냈다. 강을 건너려고 주춤거리던 순경놈이 아니나다를가 충진의 형제를 불렀다. 충진의 형제는 내키지 않은척 하면서 느릿느릿 순경놈한테로 다가갔다. 그놈은 충진이더러 자기를 업어서 강을 건너라고 호령했다.
강심에 이르니 물이 넓적다리를 넘어섰다. 순경놈은 구두가 젖을가봐 몸을 솟구치며 두다리를 곤두세웠다. 순간 충진이는 순경놈을 물속에 거꾸로 처박은후 한손으로 대가리를 눌러놓고 다른 한손으로 제꺽 권총을 빼냈다. 그리고는 강에서 나와 산으로 올리달았다. 물참봉이 되어 강에서 벌벌 기여나온 순경놈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충진의 형제는 그 길로 유격대에 찾아가 총을 바치고 유격대원이 되었다.
녀성들도 지략으로 무장을 탈취하였다.
1932년 가을에 있은 일이였다. 적 보안단 졸개들은 늘 왕우구 토성촌에 와 행패를 부리군 하였다. 그날도 보안단 졸개 일곱놈이 마을북쪽의 한 초막에 기여들었다. “삼동서”로 분장한 부녀회 회원들은 더운물을 부어준다, 담배를 권한다 하며 그놈들을 “열정”적으로 맞았다. 점심에 술까지 “대접”받고 거나해진 놈들은 저마끔 나자빠져 코를 골았다. 땅거미질 무렵 잠에서 깨여난 놈들은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삼동서”는 다시 주안상을 차려놓으면서 저녁을 먹고가라고 극구 말렸다. “삼동서”의 “뜨거운 열정”에 입이 헤벌쭉해난 일곱놈은 다시금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는 쓰러져 잤다. 이때 짬을 엿보던 적위대원들이 욱 달려들어 놈들의 총을 빼앗은 다음 “연길폭탄”으로 일곱놈을 몽땅 죽여버렸다.
“베감투”이야기도 동만인민들속에서 오래동안 류전된 전설적인 이야기의 하나이다.
개산툰지구에서 활동하던 지하공산당원 리동일은 총을 탈취해가지고 유격대로 급히 오라는 상급당조직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동지들과 토의 끝에 선구촌에 자리잡고있는 공안분주소를 들이치려고 작전했다.
1932년 음력 5월 20일, 난데없는 상두를 멘 장례행렬이 선구공안분주소에 들어섰다. 상복을 입고 베감투를 쓴 청장년속에는 소년들도 섞여있었다. 상제, 복인, 조객들로 이루어진 이 장례행렬은 20여명 잘 되었는데 상주인듯한 중년사나이가 맨앞에 섰다. 사나이는 분주소에 들어서자 두손을 맞잡고 소장에게 인사하였다.
소장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고 앉아 점도록 베감투를 눈빗질해보았다. 이놈은 출출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육상에 파묻혀 썰썰이병을 떼고야 돌아서는 놈이라 장례행렬을 그저 순순히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베감투는 소장놈이 지금 엉뚱한 궁리를 하고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척하면서 “도살세”를 바치러왔다고 굽석거렸다. 그때에는 관혼상제에 소나 돼지를 잡으려면 공안분주소의 비준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 떠 소를 잡았습지요.”
“제길, 소는 무슨 놈의 소란 말이야. 돼지를 잡아도 될걸.”
한창 점심때라 소장놈은 긴 하품을 늘이며 심술배인 소리를 줴치다가 서랍을 들춰 도살세수고지를 끄집어냈다. 느적느적 필을 찾아쥐더니 수고를 떼느라고 머리를 테불상에 파묻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베감투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소장놈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댔다.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어 궁둥이에 찬 권총을 잡으려 했으나 총갑을 열기도전에 잡힌 몸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점심밥을 짓던 화식원놈이 인기척 소리를 듣고 식칼을 든채로 나타났다. 베감투는 집싸게 몸을 훡 돌리면서 그놈의 가슴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지러진 총소리와 함께 화식원놈이 나동그라졌다.
항두를 지키고있던 장례군들은 불이 펄나게 향두를 헤친후 관덮개를 열어제치고 그속에 숨겨놓았던 몽둥이며 괭이며를 들고 쏜살같이 분주소로 쳐들어왔다. 한창 낮잠을 자던 순경들이 총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앉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웬 영문인지 정신차리지 못하고있었다. 방안에 뛰여든 장례군들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벽에 걸려있는 총을 벗겨들었다.
시퍼런 대낮에 장례행차로 가장하여 선구공안분주소를 쳐들어간 사람들은 다름아닌 개산툰학성적위대원과 소선대원들이였고 베감투를 눌러쓰고 상주로 변장한 사나이는 학성적위대 대장 리동일이였다. 그날 그들은 선구공안분주소를 습격하여 보총 8자루, 권총 1자루를 로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김철호《연변항일사적지연구》)
사진.2. 항일무장투쟁가들이 소지한 무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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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문에서는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했던 세 가지 사례를 들었다. 하지만 위에서 든 세 가지 사례는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반일·항일투쟁을 벌이던 젊은 조선인들이 벌인 “적의 무기는 나의 무기이다”라는 신념으로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한 사례의 비하면 백사장의 모레 한 알정도의 예(例)일 뿐이다. 그 모든 사례들은 일일이 셀 수조차 없다.
사실 인용문에 나온 사례를 보면서 일반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적을 물리치고 무기를 획득 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저 자료를 읽으면서 마치나 소설 속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착각하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 자신이 직접 그러한 상황을 맞는다면 과연 실행할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필자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당시 우리 조상들은 과감하고 용감성 있게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을 했다. 참으로 경이롭다고밖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굳이 인용문에 대한 분석이나 해석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저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독자들이 인용문을 접하고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반일·항일무장투쟁 방향을 설정하고 가열차게 투쟁을 벌인 젊은 조선인들의 기개와 용감성, 과감성, 현명성, 단순한 듯하면서 치밀한 계획성, 희생성 등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 무기탈취투쟁에 대한 남측 자료
참고로 이전 장들까지 인용을 하여 비교분석했던 이종석이나 신용한 교수의 자료와 학술논문자료에는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다. 따라서 남쪽의 자료는 서적에서 기술한 한 건만 인용하기로 한다.
❝ 유격대오를 성장시키는 사업과 함께 무장을 갖추는 투쟁도 힘차게 벌였다. 애국심 하나만으로는 현대적 정예무장을 갖춘 강도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이리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장한 적과 싸워 이기자면 자체가 무장하여야 했다. 어디서 무기를 가져올 데도 없으며, 무기를 줄 사람도 없는 어려운 형편에서 오직 자체의 힘으로 무장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장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항일유격대 스스로의 손으로 원수들의 무기를 빼앗아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민중들은 높은 혁명적 각오를 가지고 용감성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주동적으로 적을 공역하는 한편 능란한 방법으로 적들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약점을 조성하여 불의에 놈들을 습격하여 적의 무기를 빼앗아 스스로 무장했다. ‘무장은 우리의 생명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 조선민중들은 위의 구호를 높이 들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발휘하여 일제침략군, 일제에 투항한 동북군, 일본 및 동북 경찰, 악질적인 반동지주와 관료배들의 무기를 빼앗아 장차 조직될 반일유격대의 무장을 준비하였다. 조선민중들은 지혜와 용기를 내여 생명을 건 곤란한 투쟁에서 하나씩 무기를 획득하였다. 적의 경찰기관과 지주의 집을 비롯하여 적의 무장대가 집결해 있는 곳, 또는 이동중인 적 무장대에 대해서 대담하고 민활한 총격을 가해 무기를 탈취하였다. 무기획득 투쟁에서는 혁명조직에서 단련된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로 조직된 민중의 자위적 반(半)군사단체인 적위대와 소년선봉대의 역할이 지대하였으며 많은 노인과 아동단원조차 무기공작소를 조직하고 때와 장소를 가려서 적으로부터 무기를 대담하게 탈취하였다. 이리하여 하나의 무기를 위해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바친 사람이 많았다. ❞(항일무장투쟁사. 남혀우. 대동신서. 1988년 8월 29일. 133~134쪽)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남측 자료 중에는 위에서 인용한 자료가 유일하다. 물론 남측에 위와 관련된 자료가 더 이상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필자가 소유한 자료들 중에는 위 저서가 유일하게 “적의 무기는 나의 무기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신념으로 새 사조를 받아들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반일·항일투쟁의 방향을 설정한 젊은 조선인들의 적무기탈취투쟁에 대해서 기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남쪽의 인식은 학술논문들 뿐 아니라 여타의 서적자료들에서도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과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사실 위 무기탈취투쟁은 위에서도 이미 설명했듯이 세계 유격투쟁사에 전무후무한 신출귀몰한 전술이었다.
적의 무기를 빼앗아 나를 무장하는 “적의 무기는 나의 무기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남측자료이다. 구체적 사례를 들어 그 당위성을 논증하려 한 것이 아니고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말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어디서 무기를 가져올 데도 없으며, 무기를 줄 사람도 없는 어려운 형편에서 오직 자체의 힘으로 무장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적의 무기는 나의 무기이다”라는 구호에 따라 적 무기를 탈취하는 과정에 대해 인용문은 비교적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왜 적의 무기를 빼앗을 수밖에 없었는지, 무기를 빼앗을 대상과 무기를 빼앗은 주체에 대해서도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논증하였다. 또 무기를 빼앗는 주체들의 사상성과 신념 희생성 등에 대해서도 역시 잘 설명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가 몇 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라면 남측 자료는 그 원인과 성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위험성, 그 위험성을 무서워하지 않고 과감하고 용감하게 그러면서도 치밀한 계획을 세워 목적을 달성해나가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와 남측의 자료를 동시에 연결하여 당시 상황을 서술한다면 완벽한 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3)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무장장비 준비에 대한 북측 자료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하나 준비사업가운데에서 핵심적 과정중 하나인 유격대원들이 어떻게 무장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북측의 자료를 살펴보기로 하자.
❝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처음부터 여러가지 난관에 부닥치였다. 사람문제, 무기문제, 교련문제, 식량문제, 군중적토대문제, 구국군과의 관계문제를 비롯하여 군사정치적으로 많은 난문제들이 제기되여 해결을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는 무장대오를 꾸리는데서 사람과 무기를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필수적요소로 보았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이 두가지가 다 부족하였다.
……
유격대소조를 내오는 과정은 무장을 해결하기 위한 피어린 투쟁을 동반하였다. 곤난하다 곤난하다 하여도 무기를 해결하는 일처럼 그렇게 큰 난관은 없었다.
일제침략군은 본토의 군수산업이 계렬식으로 생산해내는 현대적인 무기와 장비들로 륙해공군의 전력을 끊임없이 강화하고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무기를 대줄 국가적후방도 없었고 총 한자루 사올 돈도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대포도 아니였고 땅크도 아니였다. 당장은 보총이나 권총, 수류탄과 같은 경무기만 있으면 되였다. 국내에 무기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으면 로동계급의 힘을 빌어서라도 해결할수 있겠지만 우리 나라에는 그런 공장이 없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자신을 무장하는데서 자기 나라 공업의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자!》는 비장한 구호가 나올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도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맡겼던 두자루의 권총을 땅속에서 파냈다. 그 두자루를 쳐들고 동무들에게 말했다.
《자,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아버지는 의병도 아니고 독립군도 아니였지만 세상을 떠나시는날까지 이 총을 가지고있었다. 왜? 무장투쟁이야말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있는 최고의 투쟁형태라고 인정하였기때문이다. 아버지의 총적인 지향은 무장투쟁을 하자는것이였다. 나는 이 두자루의 권총을 물려받을 때 아버지가 지향했던것을 내가 대신하여 실현시키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 이제는 때가 되였다. 이 두자루를 밑천으로 삼아 독립행군을 시작해보자. 지금은 이 두자루가 전부이지만 이것이 새끼를 치고 또 쳐서 200자루, 2,000자루, 2만자루로 될 날을 생각해보라. 총 2,000자루만 있으면 능히 나라를 해방할수 있다. 밑천이 있으니 이것을 자꾸 굴려 2,000자루, 2만자루가 되게 하자!》
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너무나도 일찌기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생각에 목이 메여 더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무기를 얻는 문제가 일정에 오르자 박훈은 나에게 소문을 들으니 무송에서 어떤 부자집자식이 당신네한테 총 수십자루를 희사한 일이 있다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였는가고 물었다. 그가 말하는 무송의 부자집자식이란 장울화를 말한다. 우리가 오가자에서 활동할 때 그는 자기 집 가병들의 총 40자루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온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그 총을 조선혁명군 대원들에게 모조리 나누어주었다.
박훈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몹시 아쉬워하면서 출로는 돈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꾸려놓은 혁명촌들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에게 호소하여 돈을 모아보자고 제기하였다.
우리는 그의 제의를 따르지 않았다. 부자들에게 호소하여 자금을 뽑아낸다면 몰라도 가난한 로동자, 농민의 주머니를 털어 무기를 산다는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수 없었다. 목숨을 내대고 총을 탈취하는것보다는 돈을 모으는 일이 훨씬 쉬울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택하였다. 나는 돈을 주고 총을 사는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그것을 그닥 장려하지는 않았다. 인민들에게 돈을 내라고 손을 내미는것은 독립군의 식이였지 우리 식이 아니였다.
설사 돈을 모았대야 그것은 큰 밑천으로 될수도 없었다.
언제인가 최현동무는 산림대에 가서 기관총 한자루를 1,500원에 사온 일이 있다. 소 한짝에 한 50원씩 하던 당시의 시장가격으로 셈하면 소 30마리정도 팔아야 기관총 한자루를 살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우리는 이 수자를 중시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토론을 거듭하던 끝에 내도산쪽에 가서 독립군들이 묻어놓은 총을 몇자루 파왔다.
다른 현들에서도 독립군들이 사용하던 무기를 경쟁적으로 회수하였다.
홍범도휘하의 독립군은 청산리전투후 많은 량의 총과 탄알을 대감자일대에 묻어버리고 쏘만국경으로 퇴각하였다.
밀정을 통하여 이 사실을 내탐한 일본수비대가 자동차 수십대를 가지고 와서 그 총과 탄알들을 무데기로 실어갔다. 명월구회의가 있은 다음 왕청동무들은 대감자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일본수비대원들이 파헤치고 갔던 자리에서 근 5만발의 탄알을 회수하였다.
수중에 몇자루의 총이 생기자 우리는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적의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직접적인 전투행동에로 넘어갔다.
첫 공격목표로 쌍병준이라는 지주의 집이 선정되였다. 그의 수하에는 40명가량 되는 보위단이 있었다. 단장이 후날 《신선대》대장으로 악명을 떨치다가 최현동무네 부대에 녹아난 리도선이라는자였다.
보위단병실은 지주집 토성안에도 있고 토성밖에도 있었다.
우리는 사전정찰을 진행한데 기초하여 유격대소조성원들과 적위대원들로 습격조를 편성하고 소사하본부락에 있는 쌍병준이네 집을 불의에 기습하여 10여자루의 총을 탈취하였다.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투쟁은 두만강연안의 모든곳에서 군중적운동으로 힘차게 벌어졌다. 혁명군중들은 《무기는 우리의 생명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구호를 들고 유격대소조성원들과 적위대원들, 소년선봉대원들, 지방돌격대원들을 선두로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떨쳐일어나 일제침략군대와 일만경찰들, 친일지주들과 반동관료배들의 무기를 빼앗는 투쟁을 결사적으로 벌리였다.
《요창부요밍!》이란 그때에 나온 말이다.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총만 필요하고 목숨은 필요없다는 뜻이 된다. 세관이나 보위단이나 공안국이나 지주집 같은데 가서 총을 내들고 《요창부요밍!》하고 소리치면 겁많은 관리나부랭이들과 반동지주들, 경찰관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있는 무기를 다 내놓았다.
《요창부요밍!》란 말은 동만의 모든 혁명조직구들에서 하나의 류행어로 널리 사용되고 전파되였다.
오중화의 아버지(오태희)와 삼촌도 밥상다리로 만든 가짜 권총을 들고 《요창부요밍!》으로 경찰과 자위단원들을 위협한 다음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 적위대에 보내주었다. 그 소문이 안도에까지 퍼져왔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로인들의 기지와 대담성에 탄복하였다.
후날 왕청에서 오태희로인을 만나 《어떻게 되여 그런 멋있는 궁리를 하시였습니까?》하고 물으니 로인은 웃으면서 《밤에 보니 밥상 다리도 권총 같습디다. 우리한테야 총이 있습니까, 작탄이 있습니까. 그래서 밥상다리를 꺼내들었지요. 급하니까 그런 궁리도 납디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로인의 말이 과연 옳았다. 정말 우리는 그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무기를 탈취하는 싸움에 과감하게 몸을 내던지였다. 그것은 최대한의 창발성과 지혜를 요구하는 힘겨운 싸움이였다.
동만의 혁명가들과 혁명적인민들은 때로는 헌병으로, 때로는 구국군부대 군인으로, 때로는 일본령사관 관리나 대부호, 무역상 같은것으로 변화무쌍하게 자기를 위장하고 정황에 맞게 림기응변하면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어떤 고장에서는 녀성들이 빨래방치나 곤봉으로 군경들을 까눕히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무장을 얻기 위한 투쟁은 전민항쟁의 개시를 위한 서막이였고 예비적인 싸움이였다. 이 싸움에는 모든 혁명조직들이 다 발동되였고 전민이 다 동원되였다. 혁명이 무기를 요구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군중은 서슴지 않고 이 싸움에 떨쳐나섰다. 그 과정에 그들은 각성되였다. 자기자신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자각한것이다.
자기 무기는 자기가 해결하라고 한 우리의 구호는 도처에서 큰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물론 이러한 투쟁행정에서 우리는 많은 혁명동지들을 잃었다. 그때 우리가 마련한 한자루한자루의 총에는 혁명동지들의 뜨거운 피가 스며있었고 그들의 불타는 애국심이 깃들어있었다.
❞(세기와 더불어 중에서 혈전의 준비)
사진.3. 1932년 공산당원 조선여성 김정길의 혁명의 맹세침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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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는데 중요한 요소인 무장의 해결방법에 대한 준비과정과 사례 등에 대해 우리가 앞서 살펴본 연변조선족자치주나 남측의 자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잘 서술되어 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인 무장의 해결에 대해 북측자료인 세기와 더불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투쟁과정을 거쳤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먼저 이전 항일독립투사들이 항일독립투쟁이 좌절을 하고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무기들을 은폐시켜놓았는데 이를 찾아서 무장을 하는 것이다. 또 이것만 가지고는 필요한 무장을 할 수 없기에 내온 것이 바로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한다.”는 방법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당시 반일·항일혁명투쟁가들이 어떻게 투쟁을 했는지에 대해 북측의 자료 세기와 더불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는데 중요한 요소인 무장의 해결방법으로 왜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한다.”는 구호를 내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원인과 배경이 상세히 나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세기와 더불어에는
“일제침략군은 본토의 군수산업이 계렬식으로 생산해내는 현대적인 무기와 장비들로 륙해공군의 전력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무기를 대줄 국가적후방도 없었고 총 한자루 사올 돈도 없었다.’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대포도 아니였고 땅크도 아니였다. 당장은 보총이나 권총, 수류탄과 같은 경무기만 있으면 되였다. ‘국내에 무기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으면 로동계급의 힘을 빌어서라도 해결할수 있겠지만 우리 나라에는 그런 공장이 없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자신을 무장하는데서 자기 나라 공업의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자!》는 비장한 구호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라고
그 이유가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반일·항일투쟁방법을 택한 젊은 조선인 투쟁가들을 이끌던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계획을 한 전략이니 북측자료가 정확하게 기록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본토의 군수산업이 계렬식으로 생산해내는 현대적인 무기와 장비들로 륙해공군의 전력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있는”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당시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투쟁가들에게는 탱크나 대포도 아니고 그저 소총이나 권총, 수류탄 같은 경무기만으로 무장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순탄하게 무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항일무장세력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그저 소총이나 권총, 수류탄 같은 경무기만으로 무장을 하려고 해도 그 경무기들을 생산해내는 무기 공장이 있어야 했으며, 무기 생산에 필수적인 자본이 당시 반일·항일투쟁가들에게는 전혀 없었다.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온 비장한 구호가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자!》이다.
세기와 더불어는 자본의 문제가 얼마나 곤란한 것이었고, 또 당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무장투쟁을 벌이고자 계획을 하고 있던 항일무장투쟁세력들의 인민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에 대해 세기와 더불어는
“박훈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몹시 아쉬워하면서 출로는 돈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꾸려놓은 혁명촌들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에게 호소하여 돈을 모아보자고 제기하였다.
우리는 그의 제의를 따르지 않았다. 부자들에게 호소하여 자금을 뽑아낸다면 몰라도 가난한 로동자, 농민의 주머니를 털어 무기를 산다는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수 없었다. 목숨을 내대고 총을 탈취하는것보다는 돈을 모으는 일이 훨씬 쉬울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택하였다. 나는 돈을 주고 총을 사는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그것을 그닥 장려하지는 않았다. 인민들에게 돈을 내라고 손을 내미는것은 독립군의 식이였지 우리 식이 아니였다.
설사 돈을 모았대야 그것은 큰 밑천으로 될수도 없었다.
언제인가 최현동무는 산림대에 가서 기관총 한자루를 1,500원에 사온 일이 있다. 소 한짝에 한 50원씩 하던 당시의 시장가격으로 셈하면 소 30마리정도 팔아야 기관총 한자루를 살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우리는 이 수자를 중시하지 않을수 없었다.”
라고
그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에 거주하고 있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헤아리는 김일성 주석의 고민과 백성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가뜩이나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무기를 구입할 자금을 할당하여 부담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위 인용문에도 나오지만 당시까지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에서는 동북만주와 남만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여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였다.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에 군자금을 내주던 백성들의 삶이 결코 유족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은 당시를 기록한 수많은 자료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반일·항일투사들은 바로 이러한 점을 절대로 허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을 극복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고 지향이었던 것이다. 즉 나라를 빼앗기고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또 다시 독립자금이나 군자금을 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삶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들에게는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자금해결 방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무장을 할 수 있는 무기획득방법을 내들었던 것이다.
기관총 한 자루 값이 당시 화폐가격으로 1,500원이고 소 한 마리가 50원이었으니 기관총 한 자루를 사는데 드는 비용이 무려 소 30마리 값이나 되었던 것이다. 과연 기관총 한 자루 사겠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자금을 모금 할 수 있겠는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겠다고 투쟁의 길에 나서는 것 자체가 백성들을 위한 것인데 어찌 어렵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자금을 모금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당시 젊은 항일투사들은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들 몸을 바쳐 일본제국주의 침략 군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관총을 빼앗아 무장을 하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는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인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무장투쟁을 이끌던 김일성 주석은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자!》는 비장한 구호를 내오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와 그 주구들을 대상으로 목숨을 건 투쟁을 했던 것이다.
둘째. 당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무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이전의 민족주의계열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무장투쟁에 실패를 하고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무장장비를 숨겨놓은 것을 찾아서 무장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에 대해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우리는 토론을 거듭하던 끝에 내도산쪽에 가서 독립군들이 묻어놓은 총을 몇자루 파왔다.
다른 현들에서도 독립군들이 사용하던 무기를 경쟁적으로 회수하였다.
홍범도휘하의 독립군은 청산리전투후 많은 량의 총과 탄알을 대감자일대에 묻어버리고 쏘만국경으로 퇴각하였다.
밀정을 통하여 이 사실을 내탐한 일본수비대가 자동차 수십대를 가지고 와서 그 총과 탄알들을 무데기로 실어갔다. 명월구회의가 있은 다음 왕청동무들은 대감자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일본수비대원들이 파헤치고 갔던 자리에서 근 5만발의 탄알을 회수하였다.”
라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내도산쪽에 묻어놓은 독립군들의 총 몇 자루를 파내어 가지고 와 무장을 하였고,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들이 청산리 전투후 소만국경으로 퇴각하면서 대감자 일대에 묻어놓은 총과 탄알중 밀정의 밀고를 통해 알아낸 일본수비대원들이 실어가는 과정에 미처 다 가져가지 못한 찬알 5만발이나 회수하여 무장을 하는데 사용을 하였다.
셋째.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자!》는 비장한 구호에 따라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와 그 주구들과의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에 대한 구체적 사례이다. 이에 대해서도 북측 자료인 세기와 더불어에는 자세히 서술되어있다.
본 투쟁에 있어서는 무장대오에 참여를 한 투쟁가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로 함께 호응해 나섰다는 것을 북측 자료인 세기와 더불어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수중에 몇자루의 총이 생기자 우리는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적의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직접적인 전투행동에로 넘어갔다.
첫 공격목표로 쌍병준이라는 지주의 집이 선정되였다. 그의 수하에는 40명가량 되는 보위단이 있었다. 단장이 후날 《신선대》대장으로 악명을 떨치다가 최현동무네 부대에 녹아난 리도선이라는자였다.
보위단병실은 지주집 토성안에도 있고 토성밖에도 있었다.
우리는 사전정찰을 진행한데 기초하여 유격대소조성원들과 적위대원들로 습격조를 편성하고 소사하본부락에 있는 쌍병준이네 집을 불의에 기습하여 10여자루의 총을 탈취하였다”
라고
무장대원들이 벌인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일반백성들이 호응을 해 나선 데 대해서는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투쟁은 두만강연안의 모든곳에서 군중적운동으로 힘차게 벌어졌다. 혁명군중들은 《무기는 우리의 생명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구호를 들고 유격대소조성원들과 적위대원들, 소년선봉대원들, 지방돌격대원들을 선두로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떨쳐일어나 일제침략군대와 일만경찰들, 친일지주들과 반동관료배들의 무기를 빼앗는 투쟁을 결사적으로 벌리였다.
《요창부요밍!》이란 그때에 나온 말이다.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총만 필요하고 목숨은 필요없다는 뜻이 된다. 세관이나 보위단이나 공안국이나 지주집 같은데 가서 총을 내들고 《요창부요밍!》하고 소리치면 겁많은 관리나부랭이들과 반동지주들, 경찰관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있는 무기를 다 내놓았다.
《요창부요밍!》란 말은 동만의 모든 혁명조직구들에서 하나의 류행어로 널리 사용되고 전파되였다.
오중화의 아버지(오태희)와 삼촌도 밥상다리로 만든 가짜 권총을 들고 《요창부요밍!》으로 경찰과 자위단원들을 위협한 다음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 적위대에 보내주었다. 그 소문이 안도에까지 퍼져왔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로인들의 기지와 대담성에 탄복하였다.
후날 왕청에서 오태희로인을 만나 《어떻게 되여 그런 멋있는 궁리를 하시였습니까?》하고 물으니 로인은 웃으면서 《밤에 보니 밥상 다리도 권총 같습디다. 우리한테야 총이 있습니까, 작탄이 있습니까. 그래서 밥상다리를 꺼내들었지요. 급하니까 그런 궁리도 납디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
동만의 혁명가들과 혁명적인민들은 때로는 헌병으로, 때로는 구국군부대 군인으로, 때로는 일본령사관 관리나 대부호, 무역상 같은것으로 변화무쌍하게 자기를 위장하고 정황에 맞게 림기응변하면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어떤 고장에서는 녀성들이 빨래방치나 곤봉으로 군경들을 까눕히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무장을 얻기 위한 투쟁은 전민항쟁의 개시를 위한 서막이였고 예비적인 싸움이였다. 이 싸움에는 모든 혁명조직들이 다 발동되였고 전민이 다 동원되였다. 혁명이 무기를 요구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군중은 서슴지 않고 이 싸움에 떨쳐나섰다. 그 과정에 그들은 각성되였다. 자기자신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자각한것이다.
자기 무기는 자기가 해결하라고 한 우리의 구호는 도처에서 큰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라고 하여
당시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자!》는 비장한 구호에 따라 떨쳐 일어선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에 거주를 하고 있던 조선의 백성들이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와 그 주구들과의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을 벌였는지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민족이라고 밖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우리겨레는 강제로 이끌어간다고 하여 합세하고, 강제성이 없이 그들과 하나가 되어 자율성을 부여한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하고 방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는 인용문이다.
넷째. 물론 적들에게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을 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항일투쟁가들과 일반 백성들이 희생이 되었겠는가 하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물론 이러한 투쟁행정에서 우리는 많은 혁명동지들을 잃었다. 그때 우리가 마련한 한자루한자루의 총에는 혁명동지들의 뜨거운 피가 스며있었고 그들의 불타는 애국심이 깃들어있었다.”라고 기술을 하였다.
또 이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는지에 대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있었던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선포식 연설하기 전 “대원들의 생신하고 름름한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는 내 눈앞에는 가지가지의 회억들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이 무장대오의 결성을 위하여 우리의 동지들이 길은 얼마나 걸었고 모임은 얼마나 가졌고 연설은 얼마나 하였고 준령은 얼마나 넘었으며 그 과정에 가슴아픈 희생은 얼마나 당하였던가. 반일인민유격대는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겨운 로고와 피어린 투쟁과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 우리 혁명의 고귀한 산아였다.
나는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동지들과 고인들을 토기점골등판에 모두 불러오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가슴에 차넘치는 격정을 터뜨려 연설을 시작하였다.”라고 눈물겨운 회억을 하고 있다.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를 무장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당시 항일혁명투쟁가들과 백성들이 얼마나 목숨을 건 간고한 투쟁의 길을 걸어왔는지 위 인용문이 그 모든 걸 함축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그와 같은 항일혁명투쟁가들과 백성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천지를 진감하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선포식이 있었던 것이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