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서평을 쓰기 위해서 얼마 전에 읽었던 브란트 골드스타인의 『치열한 법정』 서평을 다시 읽어야 했다. 관타나모 아이티 난민 소송을 담당했던 예일대 법과대학장인 고홍주. 그가 이끈 예일대 팀이 아이티 난민을 위해 정부를 상대로 한 법정 싸움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쓴 책에 블랙먼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고홍주가 존경한 블랙먼. 그는 과거에 블랙먼의 재판연구원 생활을 했고, 현재 블랙먼 기념사업에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장래의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도 한다. 이런 연결고리로 인해 『치열한 법정』을 읽고난 뒤, 『블랙먼, 판사가 되다』라는 책을 사지 않고는 베길 수 없었다.
블랙먼은 1970년부터 1994년까지 연방대법원 판사로 재직했다. 1999년 그가 임종 직전, 그 동안 모아둔 서류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도록 유서를 남겼는데, 그로부터 5년 후인 2004년 3월4일 유언에 따라 의회도서관은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판사로 재직했던 24년 동안 소송 자료와 일기, 판사들과 서로 주고받은 쪽지, 심지어 영수증과 영화티켓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Conference였던 블랙먼. 그의 소장품은 한 개인의 역사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Conference.
컨퍼런스(conference)라는 용어는 대법원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소문자로 사용되었을 때는 회의를 의미하지만,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썼을 경우(Conference)에는 9명으로 구성된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의미한다.
미국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아홉 명의 늙은이들’ 이라는 별명이 붙은 Conference.
이들의 삶은 개인적이면서도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할 수 있는 현재, 그들의 삶은 국가적인 차원을 벗어나 세계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블랙먼의 소장품은 한 개인의 기록이 아니다.
블랙먼의 전기와 같은 이 책을 쓴 린다 그린하우스는 뛰어난 미국 연방대법원 출입기자다. 그녀의 객관적이고 지적인 해석으로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블랙먼이 천착했던 판결들이 서술되어 있다.
약 600피트 높이의 서류들 중에서 그녀는 낙태, 사형제도, 성차별이라는 주요 테마(재직하는 동안 블랙먼은 3천874건에 달하는 연방대법원 판결에 참여했다.)를 주요 골자로 했으며,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미국 제15대 대법원장을 지냈던 워렌 E. 버거와의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관계까지 덧붙였다.
1973년 첫 판사직을 수행하면서 원장이었던 버거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수 의견서를 작성하라고 던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 즉 낙태 사건이 블랙먼의 무덤까지도 따라가게 만든 셈이다. 이 사건은 낙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에 판결을 내려야 했는데, 표면적인 것과 달리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얽혀있었다. 정치, 종교, 그리고 성 차별까지도.
블랙먼은 처음에는 낙태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다수의견서 작성자가 됐을 뿐이다. 낙태 문제를 파고들수록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낙태 찬성의 가장 큰 이유는 '의사의 자율권'에 맡긴다는 데에 있었다. 뜻하지 않게 이 판결은 여성을 우호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 당시의 낙태는 십대들의 불장난으로 탄생한 태아를 없애는, 단순한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임부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의사는 위법이냐, 법이냐를 고민해야 했다.
종합적으로 블랙먼은 여성의 프라이버시권 내지는 자기결정권으로서의 ’낙태의 자유‘라는 다수의견서를 작성한다.
블랙먼의 결단은 그 당시 정치 이념과 상당히 멀었다. 닉슨(공화당)이 추천한 블랙먼. 그는 보주 진영에서 당당히 진보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판사로 유명했다. 실은 블랙먼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소신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자신의 소신대로 움직일수록 버거와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연방대법원 판사가 되기 전까지 거의 50년지기 친구.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으며 서로가 힘들었을 때 조언을 해주었던 사이.
블랙먼이 판사로 임명되자 그의 어머니가 예언했다. 버거와의 사이가 멀어질 거라고. 당신의 아들이 정치적 야망이 높은 버거의 ‘이념적인 광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블랙먼은 판사생활 24년이 지난 후 이렇게 자기평가를 한다.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추진되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마치 수증기에 밀려나가는 코르크 마개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즉 파도에 수동적으로 이리저리 밀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코 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파도가 데려갔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자 마른 땅을 딛고 내려서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도 예측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삶을 형성했던 요소는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그가 보인 반응이었다.
그가 보인 반응은 어떤 정치적 외압에도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애’를 특히 강조했는데 그는 다수의견에서뿐만 아니라 반대의견에서도 목소리를 냈다. 수백 건의 의견서 가운데 “불쌍한 조수아”는 가장 유명한 동시에 사법적인 스타일의 문제에 있어서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냉철한 중립성을 가장해야하는 판사(판사들의 외양은 얼마나 기계적인가!)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감정적으로 말하는 판사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적인 판사. 늘 유머를 잃지 않았던 판사.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부지런했던 판사.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런 것들을 알 수 없었다.
대법원의 판사직이 종신직이라는 것. 사표를 낸 뒤에도 재직 당시와 같은 월급을 받는다는 것.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 중에도 9명의 판사가 쪽지로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들은 결백증에 가까울 정도로어휘 선택에 철저하다는 것.
그래서 법률가 출신 작가들이 많은 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도 제드 러벤펠드의 『살인의 해석』,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폴 크리스토퍼의『렘브란트의 유령』과 현재 읽고 있는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도.
무엇보다도 블랙먼같은 위인들을 있게 한 것은 미국이라는 토양이 아닐까.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거침없이 판사의 유언에 따라 그들 나라의 치부를 들여다볼 수도 있는 서류를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것. 이런 선택은 대단한 베짱과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지 않은한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숨 가쁘게 서평을 써내려갔지만 서평보다는 직접 읽어보는 게 더 매력적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지적인 독자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다.
(총 366p)
저자 : 린다 그린하우스
1978년 이후로 의 연방대법원 출입 기자로 활동하면서 1988년 대법원 취재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PBS 방송 프로그램인 ‘워싱턴 위크(Washington Week)'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대학과 법과대학원생을 상대로 연방대법원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다. 래드킬리프 대학(Radcliffe College)을 졸업했고, 예일 법과대학에서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워싱턴 D.C. 외곽에 거주하고 있다.
첫댓글 오호호~~요거 요거 구미가 댕기는데요! 나쁜녀석님은 하루종일 내내 책만 읽으신가요..열심히 읽으셔서 서평을 올려놓으시면 차려논 밥상에 젓가락만 가지고 구미댕기는 반찬만 집어먹는 기분처럼, 호불호를 따져가며 위시리스트에 넣을것인가, 배제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ㅎㅎ 이 책 당장 사러 나갑니다..
싱클레어님 댓글을 읽으니 왠지 모르게 신이 납니다. 저는 잡독을 하는데 유독 '경제'부분이 약한 거 같아요. 작년 키다리님의 '화폐전쟁'이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싱클레어님께서 읽은 책 중 좋은 경제서적있으면해주세요
경제서적보다는 실용서적이라...ㅋㅋㅋ 부동산이나 펀드에 관심있으시다면 몇몇개 추천을 해 드리지요..근데 재미없을까봐...^^;;
돈 버는 데에는 재주가 없어서~쩝. 아쉬운대로 몇 권 적어주세요. 머릿속으로 돈 좀 벌어보게요~~^.^
좋은글 고맙습니다,^^*
바람님의 짧지만 긴 관심늘 고맙습니다. 참, '눈과의 전쟁'은 끝나셨나요
한편의 영화같은 서평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듯합니다. 나쁜녀석님의 애독자로써 꼭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잔잔한 영화로 만들만 하던데요즘 영화를 보다 보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 영화가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더라구요. 실히, 픽션보다는 논픽션이 미진진하나봐요. 지금 우리도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화우님 댓글 읽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