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토요만필/ 신앙고백/김용원
사실 따지고 보면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종교가 필요없는 세상 만들기>이다. 종교가 필요 없다는 것은 곧 <천국/극락>을 이름하는 것이고,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도 극성스럽게 종교가 세를 부린다는 것은 그만큼 살아내기가 힘들고 세상이 어수선하고 민심이 흉흉한 난세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장 흉악하고 악질적인 전쟁은 바로 이 <종교>를 바탕에 깔고 <사랑, 인본주의>를 앞세워 쳐들어가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겠다. 그런데 바로 그 전쟁이 지금 지구상 여기저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 문명에서 우위의 결과를 점하고 있는 기독교 국가가, 종교가 일상과 일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슬람교를 유린했고, 그에 대한 반사 행위로 지금은 테러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이러저러한 점에서 종교란 과연 우리 인간에게, 살아 움직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600백만 명의 무고한 유태인을 똥통에 벅실거리는 구더기를 제거하기 위해 독약을 뿌리듯 가스로 죽여버릴 때 유일신인 여호와는 왜 한 번도 시비를 걸지 않았던가? 기독교국가들이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어 수천만 명이 죽어자빠졌는데도 얼마나 원대하고 신비로운 신의 의지가 있길래 하나님은 한 번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가?
내세는 아무도 모른다. 갔다온 사람은 오로지 예수뿐이기 때문이다(그마저 확실치 않지만). 유일하게 천국에 갔다가 잠깐 들렀던 예수는 당대에 심판의 날이 올 테니까 준비들 하라는 말만 남기고 도로 가 버렸다(성경에 의하면). 그러고는 2000년이 지나도록 소식도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믿어라. 믿다 보면 착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면서 지켜볼 뿐 현시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나를 믿고 따르라. 그러다 재수없이 불행해지거나 죽는 것은 어디까지나 네 책임이고 네 운명이다. 새벽기도 갔다오다 교통사고로 죽어도 그건 너희들이 위해 바치는 하나님인 나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내가 할 일은, 불행을 당하여 기도로서 불행 극복을 갈구하면 그럴 수 있다는 신념을 주고, 행복할 때는 내 도움으로 행복해졌습니다라고 내게 영광을 돌림으로써 겸손을 알게 하는 것 외에는 나로서도 별 수 없지 않는가; 이게 신의 뜻이라면 좀 무책임하고 나아가 잔인하지 않을까?
그래서 신에 대해 회의감을 갖는 자는 물론이고, 배반자가 늘어가고 있다. 사실 이른바 가톨릭 신자인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 건 근본주의에 대입하면 대죄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에 가서 한두 시간씩 쭈그리고 앉아 졸아가며 어거지로 기도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조깅을 하거나 등산을 하는 게 삶에 활력소를 더 불어넣게 되고 또한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서구의 대중인식을 신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활성화되다 못해 국교화는 물론 중세 암흑기를 재생하기도 했고, 십자군전쟁까지 벌였던 기독교의 원류 서구는 막상 주일에는 교회나 성당에 신자가 없어 썰렁하다는 것을 어떻게 변증해야 할 것인가? 영국 같은 경우는 많은 교회에 신자가 없어 교회건물을 무도회장이나 이슬람교회에 세를 주고 있다는 소식도 접한다.
나는 지금 무리에서 이탈하여 언덕배기로 걸어가고 있다. 상당한 부분은 고의적이며, 또한 무리를 놔두고 어느 목자가 쫓아와 나를 안고 가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방황하는 한 마리의 양으로 나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거느리는 목동에 대해, 더하여 한 번도 실체를 현시적으로는 보지 못했고, 말만 들었고,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우리 무리의 원주인이라는 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털어놓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앞으로도 해답을 얻기 위해 가능한 한 끊임없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지켜볼 것이다.
/어슬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