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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54년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말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는
"1950년 54년 사이에 일어난,
공산주의 혐의자들에 반대하는 떠들석한 반대 캠페인으로,
대부분의 경우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직업을 잃었다" 고 정의하고 있다.
이 낱말은 특히 미합중국에서 대략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말까지
'제2차 적색 공포(Red Scare) 시대'의 정치적 행위에 쓰인다.
미국내 기관에 대한 공산주의의 영향을 크게 두려워하던 시기였다.
원래 매카시즘이라는 말은
미국 공화당 당원집회에서
"미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년 11월 15일 ~ 1957년 5월 2일)는
미국의 정치가이다.
위스콘신 주의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단적인 반공 활동과
공산주의 성격을 가진 미국 유명 인사에 대한 청문, 고소 및 추방으로 알려져 있다.
조지프 매카시는 위스콘신 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20세가 되어서야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속성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고학으로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통 마켓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마켓 대학교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후
지방 판사 재직 시절 위스콘신 주의 낙농업을 하는 농부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어
낙농업이 발달한 위스콘신 주에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위스콘신 주에서 판사로 재직하였다.
전쟁 참전 전에 낙농업 관련 판결로 인기를 모았던 판사였으므로
정계 입문 권유를 받게 되어,
1946년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아일랜드계 정치집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소속정당은 달랐지만,
케네디 가의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에게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상원의원 재직 초기
매카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초선 의원이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월 7일 자신의 정치적 조언자들로부터
귀가 번쩍 뜨일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반공'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원자 폭탄 실험과 중앙유럽·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영향력 증대,
그리고 당시 미국을 휩쓸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등은
반공의 가치를 크게 돋보이게 만들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부녀자 당원 집회에서 행한
반공주의 연설에서 이른바 매카시즘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의 연설로 미국 전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많은 미국 군인들이 전쟁에서 희생되면서
국민들은 두려움과 괴로움에 사로잡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발 열풍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매카시는 상원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청문회도 열게되었지만 ,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매카시 시대"로 불릴 정도로 반공주의의 바람이 몰아쳤다.
또한 매카시의 반공주의 발언에서 유래한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는
극단적인 반공사상을 지칭하는 일반용어로 자리잡았다.
1952년 재선된 그는 계속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도하였다.
그의 공격적 발언은 갈수록 심해져서
마침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육군 장군들까지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으나,
1954년 국회 청문회에서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발언으로 판명되었다.
청문회 당시 육군측 변호사들은 집요하게 추궁했는데,
이에 대해 매카시는 흥분하며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고
당시 이 모습을 36일간의 텔레비전 생중계로 본 미국 국민들은
더 이상 매카시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상원은 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의제로 올려,
67대 22로 그에 대한 비난을 의결하였다.
미국 민주당에서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를 제외한 의원 전원이 찬성하였다.
케네디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유로 불참하였는데,
실제로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참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한편 매카시 의원의 소속 정당이었던 미국 공화당에서도
상당수 의원들이 찬성하여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상원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매카시는 미치광이 혹은 간신모리배 등에 비유되었다.
이에 크게 상심한 그는 이전부터 앓아오던 두통과 조증을 해소하고자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알코올 중독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다.
상원의원의 직위는 유지했으나,
거의 활동은 할 수 없었고,
공화당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건강을 잃어
1957년 만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양당의 여러 의원들이 참석하였다.
매카시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측에서는
이를 정적의 성격이나 애국심에 대해
비난을 선동하거나 무분별하고 근거없는 고발을 비판하는 말로 쓰인다.
1946년에 위스콘신 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1909-1957)는
경력위조, 상대방에 대한 명예훼손, 로비스트로부터의 금품 수수, 음주추태 등으로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상태였으며,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난 것으로 여겨졌다.
충격적인 이슈 없이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매카시는 1950년
공화당 당원대회에서
"미국에선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나는 297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라고
주장하여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관심을 이끌어 냈다.
사건이 크게 여론에 부각되자
상원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매카시가 폭로를 계속할 때마다 그 숫자도 늘어났다.
신문들은 매카시의 폭로를 사실여부에 관계 없이
헤드라인으로 삼았으며
매카시의 폭로를 다룬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덕에 매카시는 대중적인 인지도와 지지를 확고하게 늘려나갔다.
공화당 측이 포문을 열었고,
민주당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매카시에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대 매카시즘이라고 불리는 시대가 열렸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일부 무관한 사람들이 조사를 받기도 했다.
가장 먼저 의심받은 사람들은 공무원, 연예 사업의 인물, 교육자, 노동조합 활동가였다.
무고한 경우도 있었고,
그러한 혐의는 종종 확정되지 않거나 의심스러운 증거로도 확실하다고 여겨졌으며,
그 사람이 실제로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거나 관련되어 있어서 위협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크게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경력을 망쳤으며, 투옥되기도 했다.
처벌자 대부분의 평결은 나중에 번복되었으며,
위헌적으로 공포된 법과 면직 조치도 나중에 불법으로 결정되거나
소송을 청구할 수 있게 되고 혹은 적법하지 않은 절차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에 의해서 기소된 인사들 중 아무도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매카시가 이끄는 비미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의
공개 청문회에
첫 1년간 소환된 증인은
214명이었던 데 반해
비공개 청문회에는 395명이 소환됐다.
또 공개 청문회 녹취 기록은 5671페이지지만
비공개 청문회 녹취는 8969페이지에 달한다.
매카시가 지목한 단체나 인사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매카시는 4년간 미국 정가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였다.
그러나 1952년
드디어 공화당이 오랜 민주당 정권을 뒤집고
집권에 성공하였으며,
선거에 승리하여 다수당이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공화 민주 양당은 오랜 매카시즘의 광풍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공화당은 집권에 성공하면서
매카시즘에 대한 매력을 잃었고,
매카시가 점점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지는 것을 우려했다.
일부 공화당의원들은
양심선언을 통해 "독재자의 방법으로 자유를 지켜서는 안된다."고 개탄했으며
미국 연방대법원도 미헌법의 제정정신에 따라
국가안보보다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몰락의 결정적 계기는
1954년 3월 9일
CBS에서 방영한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 기자 의
<See It Now>라는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머로 기자는
매카시의 주장을 조목조목 밝혀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주장했으며,
매카시즘에 피로를 느끼던 미국인들은
사상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방송 이후 하룻동안 CBS에 접수된 12,000건의 전보와 전화 중
머로우를 지지하는 비율이 15대 1이었다.
매카시는 드디어 미국 육군 내에 친공세력과 간첩들이 득세하고 있다며
육군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환된 육군장군에게
"군복을 입을 자격이 없다,
다섯 살 난 아이의 지능만도 못하다"는
인신공격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하였다.
당시 공화당 출신으로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전술 전략으로 미국을 승전국으로 이끈 전쟁 영웅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육군을 공산주의자라느니, 간첩이라느니 헐뜯었다는 사실을 듣기 싫어했다.
더구나 미군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군사대결인 한국 전쟁을 치른 군대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매카시의 모욕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고
상원은 매카시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에서 지식인들인 변호사들의 집요한 비평과 질문에 대해
매카시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미국 육군에 대한 비난이 신뢰를 잃었다.
매카시는 이 과정에서 이성을 잃는 행동을 하기도 하였고
이는 약 한 달간의 텔레비전 생방송를 통해
미국 시청자들에게 중계되었다.
미국 공화당에서도
그의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더 이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매카시 시대에 적극 동조한 유명인으로는
유명한 반공주의자들인
월트 디즈니를 꼽을 수 있으며,
반대로 피해자로는
영화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시인 및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을 들 수 있다.
매카시즘의 피해자의 수를 정확하게 집계하기는 힘들다.
수백 명이 수감되었으며
1만 명에서 1만 2천 명이 직업을 잃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경우
비밀 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되거나
다른 위원회에서 혐의가 제기되었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었다.
수감된 많은 사람들은 직업을 잃거나
청문회에서 과거 혹은 미래에 공산당과 관련된 그 어떤 종류의 접촉을 했거나
할 것인지 질문받았다.
하지만 대부분 반국가 내지 공산주의와 관련있다는 혐의 자체가
굉장히 미약한 것들이었다.
동성애 혐의도
매카시즘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취업이 거부되었다.
특히 영화 산업에서는
300여 명이 넘는 배우 및 작가, 감독들이
비공식적인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해고당하였다.
매카시 블랙리스트들은
학교와 대학교 및 다른 문화 산업 분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 전쟁 이후 해안 경비대의 새 항구 보안 정책에 따라
미국의 배에 승선하거나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은
화물과 목적지에 관계없이 필수로 심리를 받아야 했다.
혐의에 대한 고소인이나 혐의 제기자에 대한 신분은 철저히 비밀로 보장되었다.
해당 정책에 따라 3,000명에 가까운 승무원과 부두노동자가 그들의 일자리를 잃어야만 했다.
그 외에도 매카시즘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존 에드거 후버가 이끈 미국 연방수사국의 여러 반공 활동 등이 있다.
매카시즘은 사회 전반을 뒤흔든
광범위한 문화적ㆍ사회적 현상으로,
미국에서 수많은 논란과 갈등을 일으켰다.
존 알 헤인스는
매카시 리스트를 베노너 프로젝트와 대조해서
보안상 위험인물, 친소비에트, 공산주의 진영 동조자를 제외하고 확인된
소련의 간첩으로 확인된 인물은 9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 리스트의 대부분을 직접적인 간첩은 아니었어도
보안상 위험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언론인 윌리엄 노먼 그리그,
저널리스트 메드퍼드 스탠턴 에번스,
역사학자 아서 허먼,
학자 대니얼 J 플린,
돈 카프론,
클리프 킨케이드,
제임스 제이 드루메이와 같은
보수주의 학자 및 언론인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또한 헤인스와 클레르가 2003년에 쓴 책
《부인》(否認)은 물론
아서 허먼의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2000),
테드 모건의 《빨갱이》(Reds, 2004)같은 책이
이런 주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 외 제프리 R 스톤,
테드 모건,
조나 골드버그 같은 학자와 언론인들이
매카시에 대한 재평가에 동조하는 칼럼을 썼다.
보수주의적 정치 평론가인 앤 콜터 역시
2003년 이 기밀 해제된 문서를 바탕으로
조지프 매카시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출판했다.
1953~54년 당시 매카시 비공개청문회 자료도 공개되었는데,
미국의 시사주간지 월드지(誌)는 소련과 연계된
미국내 공산주의자에 대한 매카시 의원의 기소 내용이 상당부분 사실이며
매카시의 공개기소 방법도 선동적이라기보다는 인권보호를 염두에 둔 법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기사는 공개된 자료가 기존의 평가와는 반대로 매카시 의원이
증인이나 용의자로 지목된 자들의 인권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였음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조지 메이슨 대학의 허먼 교수는
2000년 발간된 그의 저서 ‘가장 혐오 받는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의 삶과 업적에 대한 재조명
(Joseph McCarthy: Re-examining the Life and Work of America’s Most Hated Senator)’에서
“최악의 매카시 시대에서도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기소되거나 억류된 시민이 한 명도 없었으며 공산당 입당도 불법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면서
매카시 의원에 대한 비판에 반론하였다.
매카시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공산당을 불법화해 일반 개인의 자유권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국가를 수호할 책임을 지고 있는 행정부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재평가 등은 아직 미국사회 내에서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주장은 아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오신스키(David M. Oshinsky)는
이러한 재평가 움직임을 역사적 수정주의라고 주장했다.
또한, 매카시즘에 대한 반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오히려 반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전파,
소련의 간첩에 대한 저항감이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되려 약화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매카시즘이 한창 뜨거울 때인 1950년대의 미국 상류 사회를 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