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통 난 고양이의 체통
임병식
고양이는 체통을 아는 동물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믿음은 관찰이라기보다 오래된 해석에 가까웠다.
고양이는 사람 앞에서 욕망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먹이가 있어도 곧장 달려들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 주변을 살핀다. 그 거리와 망설임이 내게는 품위처럼 보였다. 나는 그 조심스러운 태도에 ‘체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득 오래전 장터의 풍경이 떠오른다.
가난한 양반 하나가 짚신을 내다 팔고 있었다. 생계는 다급했지만 목소리는 높이지 못했다.
“짚신 사려.”
외침은 끝내 크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내 것도…”
하는 낮은 중얼거림처럼 흩어졌다.
허기를 견디면서도 체면을 놓지 않으려는 어색한 몸짓이었다.
나는 고양이를 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인간과는 다른 결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이 먹이를 구하는 모습은 늘 내 시야 바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믿음에 금이 간 것은 아주 사소한 장면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 쓰레기장 옆을 지나고 있었다.
비닐 더미를 뒤지던 고양이 몇 마리가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몸이 먼저 튀어나갔고 비닐이 뒤집혔다. 찢어진 봉투 사이로 음식물 찌꺼기가 질척하게 쏟아졌다.
잠시 전까지 내가 떠올리던 품위와 거리감은 그곳에 없었다.
남은 것은 체통이 아니라 배고픔이었다. 체면이 아니라 본능에 반응하는 몸의 속도였다.
이상하게도 허탈했다.
하지만 잠시 뒤 생각이 달라졌다.
무너진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고양이를 바라보던 내 생각이 무너진 것이었다.
나는 고양이에게서 체통을 본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체통’이라는 관념을 고양이에게 입혀놓고 있었던 셈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그냥 두기보다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낯선 것은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것은 이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름은 때때로 대상을 가린다.
고양이는 배가 고팠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배고픔 위에 체통이라는 옷을 입혀놓았다.
쓰레기장으로 달려들던 고양이들의 모습에서 문득 장터의 그 양반이 다시 떠올랐다.
“내 것도…”
그 말은 체면을 지키려는 마지막 몸짓이었을까. 아니면 체면 때문에 허기마저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 망설임이었을까.
고양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내 안에서는 오래 붙들고 있던 하나의 이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체통.
나는 그제야 알았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우리가 붙여놓은 이름을 통해 바라볼 때가 많다는 것을.
고양이에게서 벗겨진 것은 체통이 아니었다.
내가 고양이에게 입혀놓았던 이름이었다.
2026)
첫댓글 괭이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군요
10년이 넘도록 고양이와 지내다 보니 말귀가 조금 틔인 것도 같네요
고양이는 어딘지 신령스러운 면이 있지 싶어요 아무튼 고양이도 동물이라 사람을 경계하는 건 본능이라 생각됩니다
평소 좋게만 보았던 지인도 뜻밖일 때가 있는데 짐승이야 더 말할 나위 없겠지만 어쩌면 본능에 충실하여 사실은 처음부터 아예 속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음식봉투를 뒤지다가 허겁지겁 달아나는 꼬락서니가 참 가관이더군요. 그 젊잖은 체면은 어디에다 두었는지
당황한 모습이 영력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체면을 잃고 도망가듯, 사람도 매한 가지 라 여깁니다.
양복 입은 으젓한 사람도 예비군 복장 걸치면 아무데도 오줌 싸고 뒹굴고 하는 것을 보면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아침 일찍 산책을 하다 급한 일이 벌어지면 자연스럽게 아무데나 해결합니다.
훤한 낮에는 의원이나 공중 변소가 개방되지만 캄캄하면 닫아 버리니 어쩔 수가 없더군요.
아침 일찍 고양이를 보고 좋은 着想을 하셨습니다.^^
순간포착을 했습니다. 달아나는 것을 보니 은밀하게 행동하다 들킨 모양이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