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프레이 만드는 법 / 전새벽
들프레이 만드는 법을 알게 됐다.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을 테니 여기에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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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왠지 모르게 공항에만 가면 들뜨더라. 그래서 비행기 표도 없이 공항까지만 가서 놀다 온 적도 있어.”
나도 예전에는 그랬었다. 이야기를 꺼낸 아무개처럼. 다만 그와 달리 나는 공항에 가면 사람들이 들뜨는 이유를 잘 알았다. 공항에는 ‘들프레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스프레이가 자동 분사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어디를 가든 들뜨지 않게 된 것에 대해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들프레이를 만들던 회사가 도산하여 제품이 단종됐을 것이라는. 사실이라면 내 손으로라도 들프레이를 만들어야 했다. 비용과 시간을 들여 떠나는 해외여행이 조금도 설레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한 일이니까. 그러나 ‘들프레이 만드는 법’은 쉽게 검색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단 두 명만 알고 있다는 코카콜라의 제조비법처럼, 어쩌면 들프레이 만드는 법도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는 기밀인지도 몰랐다.
들프레이도 없는데 또 다시 인천공항에 왔다. 쿠알라룸푸르에 가는 길이었다. 말레이시아는 처음이었는데 여전히 조금도 설레지 않았다. 나는 안내데스크에 가서 ‘들프레이 분사는 왜 중단된건가요?’ 라고 물으려다 참았다. 물어도 모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발권을 했다. 요새는 항공사 직원의 도움없이 혼자서 티켓을 출력할 수 있었다. 환전은 하지 않았다. 세계 어디서나 카드가 긁히니까. 짐도 부치지 않았다. 짐을 찾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로밍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이미 자동으로 설정해 둔 바였다. 출국 심사도 자동이었다. 직원에게 도장 받을 필요 없이, 지문 스캔 한번에 카메라에 얼굴 한 번 들이밀고 나면 차단기가 열렸다. 모든 것이 빠르게, 사람의 도움 없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든 과정을 해결한 뒤 출국 심사대 뒤편으로 나갔다. 거기는 조금 다른 세계, 차원의 틈 같은 곳이었다.
출국심사를 마친 나는 법적으로는 이미 출국 처리가 된 사람이었다. 출국은 했으되 어디에 도착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한국도 외국도 아닌 제 3의 공간이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니 세금을 거둘 필요도 없어 판매는 면세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이곳을 화장품이나 양주 사기에 좋은 곳 정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국도 타국도 아닌 차원의 틈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자 그제서야 일상을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안도감이 밀려오자 뜨거운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것이었다.
“모든 계획이 다 세워 졌어? 그럼 떠나지 마. 여행은 틈을 만나러 가는 거야.”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출장이란 계획 없이는 떠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나가서 뭐든 닥치는 대로 만들어 오겠습니다’라는 계획에 회사가 비용을 댈리 없었다. 자고로 해외출장이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누구와 미팅, 몇 시까지 중식, 몇 시까지 이동…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계획해서 미리 보고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회사원들은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하게 될 가능성, 낯선 나라에서 혼자 헤매게 될 가능성을 전부 차단했다. 차단 막으로 사용된 것은 시간계획표라는 촘촘한 그물망이었다. 구멍이 얼마나 촘촘한 지, 설렘도 함께 차단되어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습관처럼 계획을 세우는 버릇은 휴가 때도 나타났다. 몽골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한 게스트 하우스와 연락할 때의 일이다. 나는 주인에게 엑셀로 정리한 시간계획표를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영어로 쓰긴 했지만 존댓말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
“도착한 날은 울란바타르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당신네 게스트 하우스로 이동하겠습니다. 차량을 하나 보내주십시오. 오전 9시 출발로 부탁합니다. 10시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테를지로 이동하여 게르 투어를 하고 싶습니다. 게르 투어는 2박으로, 돌아올 때는 말을 타고 돌아왔으면 합니다. 모두 예약해줄 수 있지요? 그리고 그때 같이 게르 투어를 할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지금 5월이긴 한데, 8월에 나처럼 게르 투어를 신청한 사람이 있으면, 한 그룹으로 묶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비용이 싸진다고 들었습니다. –친애하는, 죤.
그러자 이런 답장이 왔다. (영어인데 왜인지 반말로 읽혔다)
이봐 죤. 여기서는 아무도 그렇게 여행하지 않아. 사람들은 여기에 묵으면서 그날 그날 내키는 걸 해. 너와 함께 게르에 갈 사람들도 그날 아침에 구할 수 있을 거야. –바비.
바비의 메일은 잊고 있던 걸 깨닫게 했다. 여행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달력을 봤다. A4 반만 한 크기의 그 탁상용 달력은 온통 메모로 꽉 차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전에 없던 답답함이 느껴졌다. 나는 호흡곤란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지우개를 꺼내 일정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만 남기고 전부 지웠더니 메모의 절반 정도가 날아가 있었다. 지우개 똥을 털며 손 날로 달력을 쓰다듬고 있자니 달력이 말을 걸어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봐, 너 때문에 숨막혀 죽는 줄 알았잖아!’ 라고. 깨끗해진 달력을 보고 있자니 그 빈칸들이 어떻게 채워질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났다. 오랜만이라 참 반가운, 들프레이 냄새였다.
몽골 여행은 결국 가지 못했다. 급한 일이 생겨 취소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빈틈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빈틈없이 계획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여행했다면 재충전은커녕 오히려 방전만 됐을 것이다.
언젠가는 몽골에 가 볼 생각이다. 언제인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마음 내킬 때 훌쩍 떠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러, 틈을 만나러. 그렇게 하여 지나치게 촘촘했던 차단 막이 널찍한 구멍을 되찾게, 그곳으로 설렘이 다시 흘러 들어오게. 그때는 공항 가득 들프레이가 뿌려지고 있겠지. 좋아하는 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미소가 피어 오르고, 밤 하늘 아래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옛 기억이 피어 오르듯, 일정표를 비워두면 자연스럽게 피어 오르는, 들프레이의 비밀을 알았으니 말이다.
2017. 3. 28 중앙일보 J Plus
http://news.joins.com/article/21414716
첫댓글 그야말로 들뜬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사라진지 오래네.
옛날 완행열차를 타고(입석으로) 천리길을 오가던 그때 이후로는...
모든 게 쉽기 때문에 들뜬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